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57화 (457/653)

공화국의 운명

한적한 파리 근교에 위치한 군병원.

그곳에 외젠의 시신이 있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프랑스를 주름잡았던 위대한 공화국 통령의 시신이지만, 이제는 이렇게 볼품없었다.

프랑스인들은 놀랍게도 통령의 시신엔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사실 가질 만한 자들은 전부 수감되어 있기도 했다.

남아 있는 자들 중 외젠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급습을 당한 이후 시신은 숨겨져 있었다 한다.

서둘러 통령을 찾아 나선 부하들이 탐색 끝에 결국 시신을 발견하고 방부처리하려고 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날씨는 온화했고 시신이 부패하기에 딱 좋았다.

그러니 지금 외젠의 얼굴은 보기에 썩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원래의 외모가 썩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의 시신을 물끄러미 보던 해원이 이윽고 군의관에게 손짓했다.

재빨리 상황의 곁으로 다가온 군의관이 서둘러 자신이 미리 파악해 놓고 있던 정보를 고했다.

전문 부검의는 아니지만, 이 군의관도 여러 시신을 많이 만져보았으니 믿을 만했다.

“사인은 총상입니다. 프랑스 다혈포에 일곱 발을 맞아 절명했습니다. 심장을 관통당한 것이 가장 주요한 사인인 것 같습니다.”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겠군.”

그렇다면 고통 없이 갔을 것이다.

해원은 아주 약간 아쉬웠다.

유럽에 전화를 일으킨 자치고는 너무 안락한 죽음이 아닌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신음하며 후회하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옥이 있다면, 그대는 그곳에 가겠지. 죗값은 알아서 치르시오.’

그래도 해원은 처참한 시신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망자 앞에서 굳이 더 모욕할 이유는 없다.

최후의 순간에 외젠이 보인 항복 의사도 한몫했다.

“흉수는 잡혔는가?”

“…아직입니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적국의 속사정은 아무리 정보총국이라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자들은 통령에 반하는 일을 꾸몄으면서도 고려와 접촉하지 않았다.

반기를 들기 위해 고려와 활발한 연락을 취한 헝가리의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이들은 뭔가 조금 이상했다.

화친을 목적으로 한 것일까, 그저 1공화국의 붕괴를 원한 것일까.

붕괴를 원했다면, 대체 뭘 기대한 것일까.

해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뭐가 되었든, 너희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 * *

프랑스는 외젠이 폐지한 국민의회를 다시금 열었다.

공화국의 상징인 국민의회는 지금껏 외젠의 명령으로 문을 닫아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고려의 명령으로 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묘한 일이냐, 지식인들은 그리 쑥덕거렸다.

그래도 국민의회가 금방 제구실을 하진 않았다.

못 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외젠 암살 이후, 프랑스 정국은 지극히 혼란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보다도 더 심했다. 그때엔 외젠과 클로드라는 두 걸출한 당수들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구심점도 뭐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강제적 질서가 필요했다.

프랑스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배상금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이에, 고려는 예전 평원파의 명분을 들어 샤를 루이 드 세콩다를 프랑스 2공화국의 통령으로 올렸다.

국민의회의 동의는 허울뿐이었다.

약속대로 부르봉 복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샤를 루이 통령정부는 시작부터 큰 난관에 봉착했다.

정당성과 명분은 있었다. 지금까지도 평원파를 그리워하는 자들은 많았으니.

하지만 외세에 의해 세워진 정부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그들이 고려에 의해 임명된 이상, 앞으로도 고려의 앞잡이로 보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더군다나 외젠을 암살한 세력이 어디인지 확실치 않다는 불안 요소도 있었다.

그러니 샤를 루이 통령정부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선 이번 2차 튈르리 조약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미 1차 조약에서 영토 할양 건은 확정되었다.

―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를 해방한다.

― 프랑스와 도이치는 고려의 감독하에 알자스 로렌 지방에서 합병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어떠한 투표 결과도 받아들인다.

― 프랑스는 니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피에몬테의 국경선을 확약한다.

― 프랑스는 신생 나바르 공국에 대한 어떠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프랑스로선 알자스 지역을 거의 뺏기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지만, 국민투표라는 심리적 가림막 뒤에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있었다.

식민지 문제는 지금 당장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다른 나라도 해청의 말로 술렁이고 있는 마당에.

다만,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논의였다.

지금 이 사달이 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즉 채무(아시냐)에 대한 승계 문제부터 전쟁이 시작한 뒤 마땅히 배상해야 할 배상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을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인 군비 제한까지.

정권을 탈환하고 2공화국의 통령이 된 샤를 루이마저도 암담한 조국의 미래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저들이 가혹하게 프랑스를 내몬다면, 프랑스는 기근과 기아에 허덕일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다시금 증오와 울분을 마음 깊숙이 축적하여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기보다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에도 고려에게 이기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만, 애초에 전쟁은 하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하지만 금전적인 면에서도 2차 튈르리 조약은 생각보다 그렇게 혹독하지 않았다.

역대 최대 규모의 전쟁이니만큼 전쟁 배상금은 적지 않았다.

징벌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약국들은 자신들이 입은 손해는 메꾸길 원했다.

당연히 모두가 이전에 외젠이 쓰던 망다나 2공화국에서 새롭게 쓰일 프랑이 아니라 금으로 받길 원했다.

그나마 다른 나라들이 군사적 장비 손실까지 계산하려는 것을 고려가 설득하여 말린 덕에,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와 민간의 배상으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다만 상환 주체와 기간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객관적으로 프랑스의 상환능력은 현재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들의 경제가 다시금 복구되어야 배상금을 뽑아낼 수 있었다.

“백 년에 걸쳐 천천히 갚으시오.”

또한 고려는 악감정이 남아있는 다른 나라들이 채무 지불이 늦어졌다고 직접적으로 프랑스에 쳐들어가 돈을 뜯어낼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배상금을 징수하는 것은 오로지 고려뿐이다.

이에 고려는 프랑스에게 전쟁 전에 권유했던 것을 다시금 제시했다.

이번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제금융기금이라… 알겠습니다.”

프랑스는 국제은행의 모태가 될 구제금융기금의 첫 번째 손님이 되어 구시대적 경제체제를 뜯어고치게 될 것이었다.

반면, 고려는 샤를 루이 통령이 2공화국에서 잘 자리 잡을 수 있게, 그리고 프랑스인들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 하나 해줄 필요가 있었다.

고려는 지금껏 모아놓았던 아시냐 전량을 프랑스에 반환했다.

기껏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프랑스가 이것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가.

심지어 이 일은 고려의 이름이 아니라 황실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황실이 직접 확보한 아시냐는 물론이고 남은 것들 또한 전부 사들인 다음 이렇게 폐기처분을 한 것이다.

국가 부채 단위의 금액이니만큼 제아무리 황실이라도 이 정도의 금액을 주긴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 샤를 루이의 시선이 허망하게 상자를 오갔다.

‘별로 대단한 금액은 아니었다고 하셨는데.’

표창진은 해원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가져가서 불태우려면 불태우시오. 그런 보여주기라도 해야 민중들이 수긍하지 않겠소.”

이 말에 다른 프랑스인들조차도 눈물을 머금었을 정도였다.

“…관대한 처사에 실로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렇게 혁명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프랑스 경제를 좀먹었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사라졌다.

이는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공화국의 부끄러운 과거가 해결된 셈이니까.

“그럼 군비 제한은…?”

“조약국은 프랑스에 대한 군비 제한을 딱히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소.”

군비 제한은 굉장히 치욕스러운 불평등 조약이다.

효과는 그 치욕에 비해 미미할 것이다.

어차피 군비를 제한해 봤자, 국가의 군사력은 경제력에 비례했다. 또한 보통의 규제가 그러하듯 빠져나갈 구멍은 언제라도 있었다.

또한 고려는 다른 목적, 즉 도이치의 무절제한 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의 군세를 어느 정도는 유지하길 원했다.

해원은 자신이 루이제와 결혼한 이후부터 도이치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도이치의 군국주의적 기풍을 경계해야 한다는 상민의 명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창진도 그러한 상황의 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떻소?”

최종 조약을 받아든 샤를 루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교적 성과로 포장할 것이 있어 다행입니다. 허나 패전의 응어리를 단번에 풀어내긴 힘들겠지요. 시간이 약이 되길 희망할 뿐입니다.”

나머지 일들은 자신이 해야 할 몫임을 아는 샤를 루이는 더 이상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저는 프랑스 국민의 잠재력을 믿습니다.”

몹시 가혹하거나, 굉장히 관대하거나.

사실상 국가 자체를 와해시킨 베네치아와 다민족적 제국을 해체해버린 오스트리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프랑스에게 한 행동은 후자였다.

샤를 루이와 2공화국, 그리고 앞으로의 정부는 프랑스 정부영속성이 지속되는 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할 터였다.

* * *

거사 당일.

작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실행되었다.

― 타타타타

준비된 다혈포를 발사하자 그 강력하던 근위대가 썩은 밀짚처럼 쓰러졌다.

그 대단하신 통령도 말 한마디 못 하고 황천길을 간 상태였다.

표적들의 시신들을 훑어보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거사가 성공했다는 것을 드디어 자각하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프랑스 만세, 혁명 만세!”

장교가 재빨리 지시했다.

“전장을 정리하자. 시신을 은폐한 뒤 빨리 이곳을 떠야 한다.”

병사들은 서둘러 달아났다.

미리 계획한 안가가 있었다.

그곳에는 식량도 충분히 비축해 두었으니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안식이 아닌 죽음이었다.

포섭한 병사들은 술과 음식에 탄 독약에 목을 부여잡고 사망했다.

오직 장교만이 고통에 허우적대는 부하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넣어 주고는 안가에 불을 질러 인적, 물적 증거물을 모두 없앴다.

이후 장교는 홀로 파리 동남쪽 근교의 농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파리와 너무나 가까웠다. 장교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분명히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긴 했지만, 그 담력은 항상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달한 농장의 입구에는 늙수그레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구부정한 등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이웃들은 그가 전쟁터로 떠나간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여겨 딱하게 보곤 했다.

“뉘시오?”

평범한 생김새였다. 흔한 촌로, 지나치면 기억하지 못할 얼굴이었다.

장교가 그에게 다소 고압적으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룻밤 묵을 장소가 필요하오. 협조해 주시오.”

노인이 항변했다.

“전쟁은 끝났잖습니까?”

“오직 한 사람이 죽기 전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오.”

“…그렇다면 들어오시구려.”

하지만 노인의 집 안으로 들어간 장교는 아까와는 달리 모자를 벗고 금방 공손하게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계주를 뵙습니다.”

마치 스승을 대하는 태도.

그와 동시에 노인의 어조도 반대가 되었다.

“성공을 축하한다. 네가 정말로 큰일을 해냈구나.”

노인은 평범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출신은 지극히 평범했다.

오세르의 평범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성장해서는 메스의 한낱 노동자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그는 동지들의 죽음을 보며 각성한 자였다.

더 이상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길 거부한 자였다.

바이에른에 피고 지었던 위대한 선지자들을 따르길 원했던 자였다.

역사의 거대한 굴곡을 수없이 넘어온 노인의 눈빛은 시대의 거인과 같았다.

구부정한 등은 어느새 펴져 있었고, 눈에는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외젠은 암살당해야 했었다. 저들 모두가 서로를 의심할 수 있도록.”

장교가 스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조약국들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봐야 하겠지. 그들이 공화국을 쥐어짜 비틀수록 우리의 운신 폭은 더 커진다.”

노인이 그리 대답했다.

패전의 책임을 신정부에 떠넘기고 다음 순간을 위해 차근차근 여론을 확보해야 한다.

산악파는 패배자들이요, 평원파는 고려 앞잡이들이다.

오로지 옛 바이에른파만이 올바른 선택일지니.

“이번 일이 끝난다면, 우리는 다시 이 폐허 속에서 이상의 불꽃을 피울 것이다. 그리하면 무너진 오스트리아의 잔해 속에 있는 3계의 형제들도, 이제 막 눈을 뜬 러시아의 형제들도 우리의 불길을 보게 될 게야.”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벌써 몇 번.

허나 그러한 시도들이 있기에 마침내 꽃이 피는 것이라고 노인, 껑땅은 교수대에서 힘없이 매달린 옛 동지들의 의미를 찾아내었다.

장교도 차마 격동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스승의 말에 화답했다.

“모든 것은 파리 코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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