튈르리 조약
1730년 5월.
파리.
고려는 솜강 유역 전투로 프랑스군 십만 이상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이제는 십오만이 넘는 프랑스군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경기도라 불리는 일드프랑스 북부는 고려의 다음 공세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일드프랑스 북부엔 전차가 기동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광활한 평야, 산업혁명으로 줄어들고 있는 조금의 숲, 그리고 작은 하천과 도랑이 전부였다.
그들은 아미앵에서 일단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퍼지거나 무한궤도가 끊겨버린 전차를 수리하며 다시금 공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프랑스군들은 이제 이 비밀무기를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병합동을 이겨내고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 파리의 거리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죽은 자식과 남편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감정이, 적에게 패배하여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울분과 증오가, 그리고 그럼에도 이길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서 체념과 절망이 모두 혼재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밖에 잘 나다니지 않았다.
모두가 눈치를 보며 집 안에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다.
도적 떼들은 기승을 부렸고, 프랑스 병사들 또한 도적들과 하는 행동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외젠의 처음 명령은 우아즈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만들라 지시한 것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우아즈는 센강의 하류, 우아즈를 지나지 않더라도 센강을 직접 통해 파리를 공격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외젠의 심복들조차 그의 사명감과 위기의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외젠도 결국 자신의 신념을 꺾었다.
외젠은 바닥에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아예 박살이 난 사기를 억지로라도 끌어 올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전선과 병원에 방문했다.
전차와 싸우고 돌아와 넋이 완전히 나가 있는 프랑스 병사들은 공화국 최고 통령의 행차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 외젠은 병원에 누워 있는 병사들 중 일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의 충격 속에서 극도로 정신적 압박을 받았는지, 일부 병사들은 상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음에도 사지를 심할 정도로 떨어대었고 눈의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 모르겠습니다. 고려는 이 증상을 전투 후유증이라 부르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비겁한 겁쟁이가 되어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한때는 위대한 프랑스군.
허나 이제는 인간의 존엄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모습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외젠은 마침내 객관적인 정황을 깨달았고, 받아들였다.
그는 다음 날 측근을 불렀다.
“아미앵으로 가게. 가서 휴전 협상을 시작해보게. 우리의 요구사항을 전부 다 관철시키기 어렵다면, 적어도 첫 번째 요구사항만이라도 꼭 받아내게. 알겠는가?”
“예, 각하.”
하지만 측근을 보낸 뒤 전선 시찰을 마무리 짓고 파리로 귀환하려는 외젠의 앞을 일단의 무리가 막아섰다.
프랑스 장교와 장병들이 탄 마차.
언뜻 보면 별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매복한 것처럼 통령이 돌아오는 길을 장애물로 막아놓은 모양은 지극히 의심스럽고 위험해 보였다.
외젠은 본능적으로 저들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자신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으니까.
“쏴라!”
반응은 재빨랐다.
금방 외젠의 호위대는 정체불명의 반역자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반역자들은 준비성이 훨씬 좋았다.
그들은 권총과 소총으로는 항거할 수 없는 다혈포까지 마차 뒤에 부착해 놓고 있었다.
더군다나 외젠이 고려에 보낸 측근이 그동안 경호업무까지 총괄하고 있었고, 임시로 그 자리를 대신한 자는 충성심은 몰라도 실력은 검증되지 않았던 터였다.
― 타타타타
외젠의 경호부대는 격렬히 저항했지만 반역자들에게 전멸당했다.
예순이 넘는 세월 동안 일평생 나름대로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던 외젠도 그렇게 허망하게 다혈포의 총탄 일곱 발을 맞아 절명했다.
* * *
파리에는 외젠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재빨리 퍼져나갔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의 행방, 항복의 여부를 둘러싸고 기존의 군부와 정치권, 혁명 세력들과 잔존 귀족 세력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외젠이 암살당했다 하더라도, 그의 명망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추종자들은 아직 군부에 한가득이었다.
최근에야 패배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통령은 도이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외젠이 암살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
이때를 틈타 기존의 철권통치에 반발하는 이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전쟁반대론자들의 세력도 상당했다.
파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을 지켜보던 해원은 외젠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에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일은 아니오. 그가 그의 손으로 끝냈어야 했는데.”
손규호가 반문했다.
“왜 그렇습니까?”
손규호는 명장으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테지만, 정치적 관점에서는 해원에 비해 모자랐다.
“외젠이 최후에 협상을 시도한 것은 그의 측근과 우리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 만약 그가 직접 협상을 완수했다면, 신민들은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반군들에게 살해당한 이상, 아직도 외젠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배후 중상설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게요.”
“배후 중상설이라니요.”
“그런 것이 있소.”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하나로 통합되기가 지극히 어려웠던 오스트리아나 베네치아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분할이 어렵다는 말이었다.
프랑스 국민의 정체성이 생긴 시점은 이미 수백 년 전의 일이다.
혹자는 이슬람과 대립하여 민족성을 일깨운 샤를마뉴 시절을 말하기도 했고, 위대한 카페 왕조가 설립된 시점을 말하기도 했고, 혹은 잉글랜드와 대립했던 백년전쟁을 꼽기도 했다.
고려도 그 사실을 체감했다.
지금은 완연한 동화가 완료되어 별 문젯거리가 아니지만 북려 개척 초창기의 누벨 오를레앙이 앙주로 바뀌기 위해서, 해원의 위대한 선조가 물심양면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누벨 오를레앙의 동화는 옆의 누에바 갈리시아, 즉 화주와 비교해 보아도 훨씬 더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프랑스를 심적으로 완전히 굴복시키라는 상민의 당부는 해원으로서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부전선의 형성과 솜강 전투로 인해 프랑스인들의 대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겠지.’
명백히 지고 있다는 현 상황은 프랑스인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럼,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군사를 이끌고 빠르게 파리를 확보하시오. 우리에게 망명한 샤를 루이 그자를 중심으로 임시내각을 세웁시다.”
“예, 폐하.”
6월이 되자, 프랑스는 마침내 완전히 항복했다.
외젠의 암살과는 별개로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가뜩이나 내분이 일어난 마당에 외적과의 혈전은 불가했다.
프랑스가 생각보다 너무 허망하게 항복하자, 고려도 나름대로 고충이 생겨났다.
포위한 자들을 다 포함하면 지금껏 도이치 전쟁에서부터 고려가 생포한 프랑스 포로들만 삼사십만에 육박했다.
이들에 더해 파리 항병들을 수용하고, 파리 치안을 유지하는 일은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이치군에게 이를 맡겨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개같은 프랑스 새끼들!”
그동안 방어할 때에는 아득히 높은, 공세를 취할 때에도 꽤나 높은 교환비를 유지하며 일방적으로 프랑스군을 몰아붙였던 고려와 달리, 도이치군은 전쟁 초반부에는 자존심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들이 포로와 주민들을 대우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물론 전쟁범죄는 고려군 내에서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만, 고려군은 군법회의가 제 기능을 했다.
자국의 병사들에게도 제대로 된 군형법을 적용시키는 나라였으니 도시는 불태우고 가라앉혀도, 적어도 사람만큼은 해하지 않았다.
도이치군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약국에 속한 뒤 테르샤로마 선언을 이행해야 하는 도이치 왕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전쟁범죄 엄벌에 대해 명령을 내렸지만, 아직 재위 기간이 턱없이 부족한 청년왕의 치세는 온전히 자리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도이치군은 언어적 동질성이 통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은 몰라도 프랑스인들에겐 쌓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약탈은 아주 흔했고, 강간과 살인, 방화도 빈번했다.
남부 도이치를 점령했던 프랑스도 비슷한 짓을 저질렀으니, 누가 더 추악한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다만 이 악폐습의 고리를 누군가는 끊어내야 했다.
자각한 나라는 고려뿐이었고.
테르샤로마 선언은 해청의 설계라 봐도 무방했지만 시기상으로는 당시 황제였던 해원의 업적과도 같았다.
상황이 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항상 그렇듯 도덕적 명분은 실리적 명분으로 귀결되었다.
국제법의 수호자 고려는 이런 명분을 통해 도이치는 물론이고 심지어 이탈리아, 알비온, 네덜란드 같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주변국들의 영향까지 완전히 배제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군주들은 상황 해원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불만을 가지려 해도,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존재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지원에 대한 계산서를 받아들 차례가 아닙니까?”
고려가 그동안 도이치와 알비온,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등의 조약국들에게 해준 지원은 무료가 아니었다.
당연한 소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이 지원의 규모는 객관적으로 육십여 년 전 고려가 조선에게 했던 어마어마한 경제적 원조를 뛰어넘었다.
기근과 전쟁을 비교해 보자면 전쟁이 훨씬 더 많은 물자를 다방면으로 필요로 했다.
이 정도였으니, 고려도 개천 455년이 되자 경제 사정이 썩 바람직하진 않았다.
물가와 기타 다른 경제 지수가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고 해도 전시에 부정적인 면을 어떻게 감출 수 있으랴.
다만 이런 원조에 대한 대가를 모두 다 받아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전부 다 받아내면, 각국은 전부 다 망한다.
구매력이 가장 높은 시장인 유럽이 망한다면 고려의 수출과 무역은 어떻게 되는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순 없다.
시대 상황과 각국의 희생, 또한 향후 고려와 해당국의 건전한 관계와 앞으로의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위해 고려는 이들에게 그들이 했던 지원의 총금액에서 최대 8할까지나 할인해준다는 안을 제시했다.
그마저도 일시불이 불가하니 꽤 저렴한 금리인 2푼의 이율로 50회 이상의 연간 지불로 규정했다.
모든 대금은 금으로 받겠지만, 그래도 관대한 처사였다.
대가는 미래였다.
고려는 프랑스의 정국, 그리고 더 나아가 유럽의 미래 정세를 사실상 자신들의 손으로 설계하길 원했다.
그리고는 다른 참여자들에게 조연의 운명을 받아들이라 반쯤 강요했다.
“알겠습니다.”
참전했지만 비교적 피를 덜 흘렸던 알비온과 네덜란드는 군비지원의 저렴한 할인율을 별 거부감없이 승낙했다.
네덜란드의 파푸아처럼 알비온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인 뉴펀들랜드―누아에린에 대한 뒷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피를 꽤 많이 흘렸던 이탈리아는 큰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미 해체된 오스트리아에게서 류블라나를 할양받은 건도 있었고, 전후 레기아 마리나 재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고려의 약속과 더불어 이제 프랑스에게서 이탈리아의 옛 리구리아 영토인 니스, 즉 이제 니짜(Nizza)로 불릴 곳의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에는 한 걸음 물러났다.
남은 도이치가 문제였다.
알자스 로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도이치의 설득은 어려웠다.
이 유서깊은 지방의 해묵은 감정이 아직 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땅이고, 지금 실제적으로는 프랑스의 땅이다. 과연 수차례 싸워올 만하구나.’
알자스와 로렌의 분쟁은 니짜를 포함한 피에몬테 지방의 영토 분쟁과 성질이 조금 달랐다.
피에몬테야, 아직까지도 예전엔 그곳의 지배가문이었던 사보이아의 사적 영토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사보이아 가문이 몰락한 뒤에도 다시 사보이아가의 외젠이 통령이 되었고 통령은 남동부 지방의 사유화를 은근히 조장했었다.
반면 로렌의 두 도시, 메스와 낭시는 프랑스 혁명에 주축이 될 정도로 대단한 공업 도시였다.
게다가 이 지역은 자원적으로 대단히 중요했다.
알자스―로렌 두 영토를 모두 빼앗긴다면, 프랑스는 사실상 그들의 산업화에 필요한 철광석이나 석탄을 제대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몹시 명백했다.
프랑스는 고려와 맞선 이들이고, 도이치는 같이 싸운 이들이다.
잘못을 저지른 놈에게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벌이 관대할지언정, 주지 않는다면 무리가 있었다.
그들에게 철광석 산지를 빼앗는 것은 그 벌로 충분했다.
이는 앞으로 프랑스가 행여나 지금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고려와 대적하는 길을 택하더라도 그 역량 자체를 제한할 것이다.
‘그렇다고 도이치에게 두 땅을 모두 다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마침내 해원은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주민투표로 해결하겠다.”
알자스가 도이치계 주민이 많고, 로렌이 프랑스계 주민이 많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고려는 이질감 넘치는 두 땅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대신 예전처럼 아우스트라시아와 슈바벤의 국경선 구분을 적용하려는 의도가 선명해 보였다.
각기 하나씩만 먹고 떨어지라는 의미였다.
둘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젊은 프리드리히의 기색에서 약간의 안도와 즐거움을 읽어낸 해원은, 이후론 프랑스를 주로 달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려는 계획한 행사들을 취소했다.
말이 행사지, 열병식이었다.
해원은 이 같은 행동이 상당히 치욕스러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른 시기였다면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알자스와 니스를 반쯤 강제로 할양한 터였다.
“위협의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위세를 자랑하길 원한다면, 우리가 잡은 수십만의 포로들을 풀어 주는 것이 나을 걸세. 그들이 증인이 될 테니까.”
게다가 이미 파리에는 2호 전차들과 보병들이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충분히 위협적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더군더나 열병식은 고려군 병사들의 입장에서도 아주 짜증나는 일이다.
고려는 예전에도 관함식으로 위세 자랑을 한번 했다.
허나 그 이후 이들이 전쟁을 선택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위협을 실제로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고려는 애초에 열병식이나 관함식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나라일지도 모른다.
전 통령이 암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진 파리에 해원이나 총사령관이 갈 수는 없는 노릇, 남부 전선의 수장이었던 표창진 대장이 협상대표를 맡아 외젠의 거처이자 프랑스 1공화국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튈르리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표창진 대장은 한창 혼란스럽게 모여있는 프랑스인들에게 해원의 제시안들을 내밀었다.
“우리에게 복벽을 강요치 않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세상 모든 제국과 왕국들의 수호자인 그대들이?”
언제부터 고려가 제국과 왕국의 수호자가 되었는가.
상민이나 해원이 들었다면 어이가 없을 말이었을 테다.
표창진도 인상을 찡그렸다.
“뭔 소리를 하는 거요. 예전 1차 추심 전쟁 때 부르봉을 훈계한 것이 우리였거늘. 우리는 위대한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름다운 제도를 따르지만, 그럼에도 신의가 없는 가문을 굳이 다시 왕위에 억지로 올릴 이유가 없지.”
고려가 대표적인 제국이라 공화국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대외적인 시선일 뿐 사실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금헌칙서도 중서성도, 민간시중의 치세도 모두 없었을 터였다.
탐욕스럽긴 했지만 보이는 것처럼 딱히 돈에만 집착하지도 않았다.
2차 추심은 프랑스를 훈계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그 규모가 너무 커져 버렸으니 더 이상 본래의 이름 대신 대전쟁으로 불릴 운명이겠지만.
고려는 그저 신의와 약속을 어기고 질서를 해치려는 나라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나바르를 지원한 겁니까?”
“우린 루이 필리프를 복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수 클로드의 정부가 반란으로 일어난 외젠의 정부보다 더 정통성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이오.”
허망한 얼굴을 한 프랑스인들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이 주저앉든 쓰러지든 상관없이 창진이 입을 계속 열었다.
“다만 그런 의미로, 우리는 프랑스가 1공화국의 성립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원하오.”
[작가의 말]
원역사에서 미국의 랜드리스는 영국 등의 연합국에게 1/10의 비율로 책정되었습니다.
영국은 2006년이 되어서야 그 채무를 전부 상환할 수 있었지요.
물론 이래도 미국한텐 이득이 아니라 손해라 봐도 무방합니다. 워낙 지원의 종류가 엄청났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