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기계(2)
서로가 서로의 화력을 두려워해, 양측의 참호선 사이에는 거대한 무인지대가 형성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오직 쥐나 까마귀, 기타 쓰레기 청소부들만이 오가는 이 끔찍한 땅은 시신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가 고약했다.
이곳에 임무를 나가야 하는 저격수들은 아주 먼 옛날에 지옥의 풍경에 대해 서술했던 대문호 단테의 창의성을 비웃곤 했다.
대문호라는 그 작자가 묘사한 지옥들조차도 지금 이곳과 비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그런 무인지대를 헤치고 나타난 저 지옥의 괴물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가죽과 살점 대신 강철을 두르고 나타난 저것들은 이동할 때마다 끔찍한 쇳소리와 그 안에서 덜덜거리는 기관의 소리가 공존하여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기습공격은 불가능하다. 저 괴물이 오는 소리는 너무나 또렷하게 잘 들렸으니 이것은 전면적 공격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의미가 있던가.
고병은 열차를 본 적이 있었다.
폭은 마치 그 열차와 비슷했다. 사방에 강철판이 있는 것만 뺀다면.
그리고 전면부에 주포가 달린 것도 제외한다면 말이다.
문득 기다란 코같이 생긴 주포가 움직였다. 상하좌우, 일정한 각도는 움직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포신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프랑스군에게 겨누어졌고, 이내 불을 뿜었다.
― 쾅
비명 소리와 함께 참호 한 부분이 터져 나가자 그제서야 넋을 놓고 저 괴물을 관찰하고 있던 프랑스군들도 부랴부랴 대응하기 시작했다.
“쏴!”
그들의 소총이 불을 뿜었다.
다혈포가 맹렬히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피워올린 흑색 화약 연기가 바람에 사라졌을 때에도 저 괴물은 멀쩡했다.
오히려 이젠 저 강철 괴물의 양 옆면에 나 있는 기관총들이 움직였다.
― 타타타타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자우어 기관총, 그 빌어먹을 소리가 터져 나오고, 참호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이 괴물을 바라보고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픽픽 쓰러져 나갔다.
― 팅
프랑스군이 쏘아낸 총알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멍청한, 그걸 굳이 확인해 봐야 아는가?
기껏 저 괴물의 도색인지 먼지인지를 헤집는 것에 불과했다.
너희들이 쏴서 나를 제압하리라는 생각을 가진 것 자체가 재미없는 농담이라는 듯, 저 괴물은 이미 등장만으로 완벽히 사기를 박살 낸 뒤 느릿하지만 꾸준히 진격해오고 있었다.
한 대도 아니었다.
해가 뜬 뒤 서서히 안개가 흩어지고 있는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시야는 또렷해졌다.
엄청나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옆에도, 그 옆에도 이 괴물과 같게 생긴 것들이 있었다.
마침내 저들이 참호에 가까이 다가온다면, 저들은 양측의 기관총으로 참호의 위에서 내리꽂아 버리듯 사격을 가할 것이다.
― 접근하지 못하게 해!
이는 프랑스 지휘관도 한 번에 눈치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체 뭘로 접근을 저지하는가.
본래 연약한 인간의 육신 정도야 충분히 저지했던 낡고 녹슨 철조망들은 이제 그것들에 묻은 피가 허무할 만큼 저 괴물의 발에 무력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아예 여러 겹을 쌓아 빼곡하게 올리지 않는 이상, 저지는 불가능해 보였다.
“죽어라!”
용기 있는 척탄병 하나가 참호에서 수류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몸을 일으킨 다음 괴물에게 투척했다.
― 텅
하지만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온 수류탄은 괴물의 바로 앞에서 폭발했지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다소 그을린 자국이 선명할 뿐, 저들의 괴상한 바퀴와 전면부 장갑은 멀쩡했다.
다만 살짝 짜증이 난 것처럼은 보였다.
눈이 좋은 고병은 그 와중 괴물의 코 옆에 있는 두 개의 작은 틈을 보았다.
그 작은 틈 뒤에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고, 그 눈동자는 괴물에게 수류탄 투척을 한 병사가 어디 있는지 찾고 있었다.
[저기다!]
그 고려인은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왼쪽을 겨누고 있던 주포가 끼익거리며 돌아가더니, 이윽고 오른쪽의 참호에 대고 발포했다.
― 쾅
척탄병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다만 그곳은 소년과 고병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었다.
저 괴물의 주포 화력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다.
고려의 야포가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근거리에 떨어진 폭탄은 다시금 그들에게 끔찍한 이명과 충격을 주었다.
소년은 그 충격에 실신했고 고병도 그 위에 엎어져 쓰러졌다.
온갖 끔찍한 전장 속에서 줄곧 생사를 넘나든 고병도 자신이 이때껏 경험한 그 모든 죽음의 위기보다도 가장 강렬하며 끔찍한 예감을 직시했다.
원래부터 전쟁터에선 자신의 목숨을 반쯤 체념하며 싸워야 했다. 어디서 눈먼 포탄이라도 떨어진다면, 그가 했던 어떤 노력에도 상관없이 연옥으로 가야 했으니까.
운이 좋다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죽었다.
그러나 저 괴물은 그러한 운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이 프랑스군들에게 확실한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 천천히 차근차근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무거운 짐을 누군가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의외로 후련했다.
너희들도 그래서 그런 거냐. 나만 빼놓고 그렇게 가버린 거냐.
― 쿨럭, 쿨럭
‘이제는 내 차례구나.’
고병은 자신이 깔아뭉개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고 헛웃음을 짓다 기침을 터트렸다.
― 물러서지 마라!
그 와중에 프랑스 지휘관은 자신의 품에 있는 권총을 꺼내 하늘로 발사하며 후퇴를 금지했다.
그의 딴에는 참호가 이런 식으로 와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지만 지금 당장 후퇴가 간절한 자들에겐 저 명령은 그저 공허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장교는 악에 받친 듯 고함을 질렀다.
― 후퇴하면 총살이다. 예외는 없다!
혹독한 전장에서 탈영하는 이나 혹은 자의로 후퇴하는 이들에게 엄격한 군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프랑스군은 다시 한번 떠나가려는 다리를 애써 고정했다. 용기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가혹한 법과 규율이 그들을 구속했다.
괴물은 마침내 다가왔다.
프랑스군이 손을 뻗으면 이제 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육중한 동체가 참호를 앞에 두고 살짝 머뭇거렸다.
프랑스군은 모두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했다.
빠져라, 제발 빠져라 이 괴물아.
형편없이 빠져버리고 발버둥 쳐라.
그리하여 너희들을 역으로 사냥하게끔.
‘주님 제발, 제발!’
하지만 가까이서 본 괴물은 참호에 빠지기엔 상당히 길었다.
괴상하게 생긴 바퀴―무한궤도―가 참호 위의 허공을 가로질러 갈 때에도, 괴물의 전면부는 땅에 처박지 않았다.
참호 너비의 중간 이후를 갈 때는 조금 갸우뚱했고 마침내 괴물의 전면이 반대편 참호 벽의 상단에 처박혔다.
하지만 괴물의 앞면까지 올라와 있는 궤도가 땅을 몇 차례 헤집자, 괴물은 땅을 밀어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눈 깜빡할 사이에 괴물은 이미 앞발과 뒷발을 모두 참호의 양 측면에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정지했다.
강철 괴물은 참호 위에서 오연히 서서 묻고 있었다.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왜 항복하지 않았느냐고.
애석하게도 질문을 한 자는 질문을 받은 자가 생각하거나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 타타타타
괴물의 양 측면에 있는 자우어 기관총이 참호 안에서 웅크려 멍하니 괴물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총알의 비를 선사했다.
그동안 참호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사격과 포격에도 끈질긴 삶을 이어 내려오던 병사들은 역겹지만 아늑했던 참호가 더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그 순간, 본래의 나약한 모습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가축을 도살하는 고기 가공 공장처럼, 참호 안의 병사들은 그렇게 무력하게 도살당했다.
* * *
축축했다.
눈꺼풀이 무겁지만, 소년은 억지로 눈을 떴다.
천천히 감각이 돌아왔다.
사지는 지독하게 욱신거렸지만 의외로 멀쩡했다. 또 포탄의 충격에 기절한 모양이다.
총소리, 대포 소리, 함성 소리가 요란했다.
분명히 아직 전투 중이었다.
이것을 전투라 봐야 할지, 일방적 도살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어라. 괴물들은 지나갔다.”
고병은 소년의 옆에서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에 어딘가 힘이 없었다.
소년은 고병의 군복 앞섶이 완전히 붉은색으로 변한 것을 눈치챘다.
고병의 오른팔은 이미 짓이겨져 기능하지 못했다.
감히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폭탄이 터질 당시, 그는 자신의 바로 옆에 있었다.
자신은 멀쩡하고 고병만 다친 것을 보면 제아무리 어린 꼬맹이라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갑자기 고병이 물었다.
“꼬맹아 너 몇 살이냐.”
소년은 자신을 이 지옥까지 데려온 이름 모를 징병관을 떠올리며 씨도 안 먹히는 거짓말을 치려다, 이번에는 정직하게 말했다.
“이제 열두 살인데요.”
“빌어먹을….”
고병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듣기로는 어딘가에선 열 살짜리 꼬마애도 징집당했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이 녀석도 별반 다르지 않았구나.
고병은 아직 멀쩡한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꼬마야. 부탁이 있다.”
고병은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난… 푸아티에 근처의 미흐보에서 왔다. 거기 애들이랑 같이 입대했지. 하지만 그동안 친우들이 다 죽어 나가는 마당에 그놈들의 유서를 전달해줄 놈을 찾지 못했다.”
본래라면 내가 가서 전해주려고 했지만 이렇게 되어버렸지 뭐냐.
고병은 떨리는 손으로 피가 살짝 번져 있는 종이를 소년에게 건넸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어 보인 고병의 눈이 문득 하늘을 더듬었다.
그 상태로 그는 맥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고병의 눈 초점이 맺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소년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감겨준 뒤 입술을 삐죽이며 종이 뭉치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입술 사이에선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손 들어!”
괴물이 한바탕 지나간 자리엔 어느새 고려군이 다가왔다.
참호를 경계하며 쓰러진 적들을 바라보던 고려군이 흐느끼는 소리의 진원지를 두리번거리다 마침내 소년을 찾아 총을 겨눴다.
고려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무슨 의도인지는 알아들었다.
참혹한 전장에선 동맹국과 조약국 모두 확인 사살이 성행했다.
제아무리 포로를 잘 대우해 주더라도, 무력화하여 무기를 뺏기 전까지의 적군은 언제라도 죽은 척을 하다 등 뒤에 총탄을 날릴 수 있는 존재였다.
살기 위해서 적에게 잔혹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적의 자비심에 기대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력함과 항복 의사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참호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다른 프랑스 병사들은 총을 치우고 재빨리 양손을 위로 치켜들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소년은 두 손을 올리는 대신, 그저 무릎을 감싸 안으며 끅끅 울음을 삼켰다.
마치 너희들이 알아서 죽여달라는 듯.
― 철컥
장전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저 소리가 생애의 마지막 소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겁에 질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냥 너무 슬프고 무섭고 두려워서 차라리 죽음이라는 안식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희생해 그를 살린 고병이 봤으면 헛웃음을 지었겠지만 열두 살 꼬맹이한테 뭘 기대하겠는가.
하지만 다른 고려군이 다가오더니 총을 든 자의 총열을 지그시 눌렀다.
“그만둬, 새파랗게 어린 놈이다.”
― 철퍽
지저분한 참호에 떨어져 내린 그 고려군은 한바탕 주변의 광경에 인상을 쓰다 소년의 옆에 있는 총을 발로 차 치웠다.
그리고는 그 소년의 목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소년은 억센 손길에 일으켜져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참호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참호 바깥에 서서야, 비로소 소년은 이 상황을 명백하게 이해했다.
강철의 괴물은 마치 파도치듯 밀려오고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괴물도 있었고, 그보다는 조금 다른 괴물들도 있었다.
그 괴물들의 뒤에서 비교적 원활하게 무인지대를 돌파해낸 고려군 병사들은 짜증과 피로가 역력해 보였지만, 적어도 사지는 멀쩡해 보였다.
소년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들이 행진하는 곳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조약국의 참호 방향으로, 원래라면 총을 겨누고 있어야 할 곳으로.
그 사실이, 도리어 소년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끝났다 꼬마야.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란다.”
이번에도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도 막상 적진으로 향하고 있는 소년은 아까보다는 감정이 잦아든 듯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문질러 지웠다.
― 위이이이
먼 하늘에는 저들이 운용하는 전투기라는 것이 짝을 이루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 * *
움직이는 전쟁 병기에 대한 개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따지고 보면 충차도 그러했고, 검차나 고대의 전차, 즉 전쟁 수레도 그러했다.
화력이 발전한 이후에는 그 상상력의 범위가 넓어져 사람들은 말이 끄는 수레 위에 기관총이나 다혈포를 올려놓고 운용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말과 같은 동물들은 현격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는 공포에 취약했고, 인간보다 다루기도 힘들었다.
이에 고려는 인간이나 말보다 훨씬 큰 힘을 낼 수 있는 기관을 이용했으니, 이제는 새로운 전쟁 기계의 가능성이 생겨난 것이다.
놀랍지 않게도 증기기관이 한창 퍼져 나갈 시기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한 자들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증기기관은 너무 컸고, 그렇게 덩치가 큰 것에 비해 출력은 썩 좋지가 않았다.
제대로 추진하려면 정말 기차급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옛날의 조악한 차륜형 바퀴가 그 무게를 질퍽한 땅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땅에서 버틸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내연기관과 무한궤도라는 두 가지 혁신이 어우러진 견인기의 등장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전쟁 기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차(戰車).
이름대로 전쟁을 위한 차였다.
견인기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개념이 세워져 전쟁이 터진 뒤 곧바로 생산하면 되었지만, 전차는 전쟁이 터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개발의 과정은 의외로 쉬웠다.
여의국마냥 존재가 극비라지만, 기술선도국은 병기개발단과 꽤 자주 협력한 관계였다.
병기개발단도 시대보다 한 박자 빠른 병기를 먼저 탐구하는 곳. 하지만 기술선도국보다는 그 간격이 좁았다.
그러니 이것은 의도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예전부터 개발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다만 전차를 연구할 생각이 있었던 상민은 그의 일만으로 충분히 바빴고, 애초에 전차에 대한 지식도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으니 전차의 개념을 확립하고 개발할 일선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군무부에 재직하고 있는 젊은 장교, 윤선형이 상민의 정보망에 들어왔다.
참신한 영감도 영감이지만, 애초에 그는 이전에도 견인포 등의 병기개발의 전문보직에 있었다.
더할나위 없는 인재였다.
단번에 그의 보직을 변경해 표면적으론 병기개발단에, 실제로는 기술선도국에 배정시킨 상민은 본격적으로 혁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참호전은 나온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대비책 또한 미리 강구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당시엔 아직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만들어낸 본격적인 참호전이 시작되진 않았다.
그래도 참호의 개념은 아부다비 전투와 그 후의 전투들을 통해 널리 퍼진 상태라 상민은 철조망과 기관총, 참호의 조합을 극복하라는 주문을 내렸다.
선형은 견인기의 구조를 토대로, 전쟁이 막 발발한 개천 452년에 처음으로 전차의 시제품을 만들어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범 전차는 정말 견인기에 장갑을 대갈못이음(리벳팅)으로 이어 그 위에 소구경의 대포를 얹은 것과 같았다.
“…그래, 계속해 보지.”
모습이 괴이했다.
상민은 굳이 따지자면 영국의 마크 전차를 떠올렸지만, 그거보다도 훨씬 더 조악했다.
그가 선형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외형적 단서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민의 주장으로 만들어낸 452식 전차의 개량형은 오히려 최초의 시제품보다도 좋지 않아 보였다.
상민이 군함의 포탑을 예를 들며 지시한 최초의 선회 포탑은 부양각, 즉 주포를 위아래로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지의 정도가 너무 현격히 좋지 않아, 참호에 있는 적을 오히려 상대하기 힘들었다.
흔히 전차를 떠올리면 생각할 길다란 주포도 지금 단계에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술적 한계다. 멍청하게도 첫걸음부터 판터나 셔먼을 만들려 했던가.’
내연기관이 등장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무거운 차체를 이동시킬 동력을 원하는지.
기술선도국은 장갑 무게의 한계로 차라리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이 더 쉬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뺄 건 빼야 했다. 과도한 진보는 독이다.
시대는 시대의 기술에 맞추어 병기를 개발하는 것이 맞았다.
병기들도 수렴진화가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닐 터.
다만 상민은 선형에게 다시금 재량권을 주는 와중에도 여전히 몇 가지 확실한 원칙을 제시했다.
너무 과도한 승무원을 탑승시키지 말 것.
사방에 덕지덕지 화력을 붙이기보다는 전차의 본래 목적에 따라 장갑과 방호력에 중점을 둘 것.
험지극복능력과 기동성을 충족할 것.
운용 병력의 편의성과 안전성을 충족할 것.
현재 전투 환경-참호전-에 적합할 것.
선형은 시원찮은 동력에 맞추어, 차체의 무게와 무게중심을 낮추고 궤도와 대지가 닿는 표면적을 기존보다 더 넓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453식 전차는 상민의 기억 속에 있는 마크 전차와 A7V를 어중간하게 섞어놓은 것과 같았다.
일반적인 후기형 전차에 비해 굉장히 큰 궤도는 MK.V를 닮았다.
지금 이 정도의 궤도가 아니라면, 전차는 걸어가는 정도의 속도도 충족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강력한 병기라도 속도가 기어가는 정도면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차체보다 궤도가 짧다면, 만약 전차가 깊은 참호에 빠졌을 때 기관의 출력만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반면 이렇게 큰 궤도는 약점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궤도를 장갑으로 어느 정도는 보호하라는 주문에 궤도 주변에 장갑을 달아 궤도가 완전히 노출되는 것을 막은 모습은 A7V를 닮았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453식 전차의 주포는 전면부 고작 한 문에 불과했다.
양측에 적 보병을 견제할 수 있게 자우어 기관총을 달았지만, 그래도 화력은 덩칫값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민은 무장을 더 많이 넣는 것이 어떠냐는 주장을 기각하고, 대신 신뢰성과 안정성, 방호력에 집중했다.
고려 청년들의 피가 비싸다는 것은 항상 명심해야 했다,
물론 구조상 피탄될 때마다 불안에 떨어야 하는 대갈못이음 공법을 당장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전차병들이 기관부의 높은 온도에 쪄 죽거나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허무하게 죽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부족한 화력은 양으로 메우면 된다.
조종수, 전차장, 주포 담당과 양측 기관총 담당, 이렇게 총 다섯 명만이 탑승 가능한 것이 개발 목표였다.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여러 단점이 산적해 있는 453식 전차는 거의 일 년 동안 계속 개량을 거듭해야 했다.
세 명 이상이 달라붙어야 하는 기존과는 다르게 조종수 혼자 변속과 방향 전환을 해야 했고, 화력이 부족한 만큼 주포와 양측의 기관포의 사각도 늘려주어야 했다.
453전차에 개선된 변속기, 환풍시설, 구형 거치대(볼마운트)가 전부 충족되기까진 거의 4개월이 더 있어야 했고, 453식의 개량형은 그동안 연도가 하나 흐른 덕에 454식으로 명명되었다.
마침내 454년이 되고, 새롭게 연식에 맞추어 갱신된 454식 전차는 드디어 생산 허가가 난 뒤 삼백여 대가 생산되었다.
하지만 상민은 454식까지 개발된 1호 전차로 만족하진 않았다.
‘전쟁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어차피 선회포탑을 채택해야 한다.’
르노의 혁신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이상, 중전차와 경전차를 이원화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작가의 말]
1호 전차는 MK시리즈나 A7V, 아니면 랜드 레이더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2호 전차는 르노 F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