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기계
아돌프 2세가 조약국에 항복한 개천 454년, 1729년 후반기.
4국동맹은 3국동맹이 된 것도 모자라 이제 정말 프―러동맹이라 불릴 처지가 되었다.
이번에는 그들의 입에서 오스트리아를 무시하는 망발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항복은 그만큼 뼈아팠다.
아무리 그들이 현 러시아나 프랑스보다는 약간 약하다고 평가당했더라도,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상징적이었다.
지리적으로도 세 나라를 연결하는 교두보였기도 했다.
이제 그 교두보는 적의 손에 넘어갔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이제 연락조차 하지 못한 채, 서로 알아서 각자도생해야 했다.
교두보를 점유한 신생 헝가리 왕국은 러시아를 침공하지는 않았지만 고려와의 약속대로 러시아가 이전까지 동맹국과의 접경지라고 생각했던 카르파티아에 군대를 주둔함으로써 이를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제 사방에서 조약국의 병력들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오스트리아 전선에 있는 일부 군정군을 제외하곤 조약국의 군대는 이제 대프랑스 전선으로 몰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군정사령관 표창진의 북아프리카 방면군은 이미 오스트리아 함락 전부터 자신의 지휘하에 놓인 군대를 수습해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에 상륙시켰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10월이 되자 이들은 곧바로 브리앙송 산악지대에 공격을 감행하는 이탈리아군과 동시에 피에몬테 전선 방면으로 공세를 진행했다.
알프스의 지형은 유명한 산악지대긴 했지만, 이곳은 네덜란드나 도이치에 접한 동북부 전선보다는 부설된 참호선이 얄팍했다.
참호선을 유지하기엔 지형도 끔찍했고 서로 간에 제대로 된 전투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컸다.
하지만 이제 이 아름다운 알프스는 처절한 전장이 되었다.
산악지대를 공격하는 이탈리아와 다르게 고려는 되도록 해안포격을 등에 업고 니스 방면을 통해 마르세유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세유는 초창기 혁명기 동안 혁명정부에 가장 먼저 의용대를 보냈었을 만큼 저항 열의가 강했다.
고려의 군사 이동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던 외젠은 곧바로 마르세유에 군대를 증강했고, 고려는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도시를 개박살을 내놓아야 하겠군.”
불공급 전함들의 함포는 쉴 새 없이 포탄을 퍼부었고 아름다운 지중해의 프랑스 항구도시는 하루 종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두드리면 열리지 않는 문은 없었다.
고려는 개천 455년 1월이 되기 전에 마르세유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너무 속도가 느렸다.
고려는 프랑스에게 양면전선을 강요했지만 이걸로도 부족해 보였다.
이기기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개천 455년 성탄절에는 장병들을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보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루하루 전쟁이 길어질수록 시중이 입는 정치적 상처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제아무리 고려라도 이렇게 펑펑 전비를 쓰는 것을 절대 좋아하진 않았다.
표창진은 사라고사에 갔다.
그리고는 아라곤 정부와 짧은 회의 끝에 협의를 도출해냈다.
과거의 일들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아라곤 정부는 마침내 고려의 제안에 동의했다.
명분도 충분했다.
455년 2월, 고려는 바르셀로나에 사십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다.
고려의 본토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의 사 할이었다.
나머지 육 할은 다른 전선에 있는 병력의 손실을 메꾸고 재배치될 계획이었다.
삽시간에 피레네 전선까지도 맞닥뜨려야 할 처지가 된 프랑스는 비공식적으로 고려의 편을 든 아라곤에 항의했다.
“비겁한, 이제 와서 과거의 약속을 깨다니!”
중립을 지키려면 제대로 지키지, 왜 박쥐 짓을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아라곤인들은 이제 기세가 등등했다.
“통령이 늙으니 치매에 걸려 머리가 나빠졌소? 솜포트 고갯길의 일은 기억이 안 나시나 보오? 같은 맥락으로 이번 일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
한 번 아라곤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들의 땅을 이용해 나바르를 공격했던 프랑스는 같은 논리로 응수하는 그들의 말에 달리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피레네 전선을 형성한 뒤, 고려는 툭 튀어나온 나바르 공국을 드디어 재탈환했다.
그리고는 이제 프랑스의 본토까지 공격해 올라갔다.
과거 나바르―프랑스 전쟁의 격전지였던 이 지역은 이제 프랑스가 다른 전선에서 크게 수세에 몰리자 병력을 이리저리 빼놓은 터라 남아있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
역시나 이곳 전선의 보급은 다른 전선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었고 사기도 끔찍했다.
있는 놈들도 어중이떠중이다. 심지어 다혈포도, 제사총도 뭐도 없었다.
참호에 짱박혀 있던 프랑스 군인들은 자랑스런 혁명기인 트리콜로(삼색기) 중 청색과 붉은색을 잘라낸 가운데 짧은 흰 부위로 항복 깃발을 만들어 흔들어대었다.
고려는 거의 걷는 속도만큼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 피레네산맥을 오르지는 않았지만, 대동양과 지중해에 접한 양측으로 진군한 고려는 3월이 되자 프랑스 남부의 최고 중요 도시들인 툴루즈, 몽펠리에, 마르세유를 모두 손에 넣었고 이제는 리옹과 보르도 등의 중부를 노리기 시작했다.
외젠은 암담해지는 전황에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지도를 보고 또 봐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외젠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죽은 틈을 타 대공세를 시행해 나름대로 영토를 점령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전선이 더 넓어지는 고충을 겪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가 항복하자, 넓어진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붕괴되었다.
외젠은 하마터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뻔한 순간에 빠르게 징조와 전황을 파악했고, 무너진 도이치 전선에서 무려 팔 할 이상의 병력을 온존하며 후퇴했다.
도이치와 고려는 도망치는 프랑스군들을 포위해 가둔 뒤 섬멸하려는 대전략을 세웠지만, 프랑스군들은 필사의 각오로 허리를 자르려 드는 조약국의 군대를 지연시킨 뒤 전쟁 전의 국경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아무리 예술적인 퇴각이라도 패배가 승리로 바뀌지는 못했다.
초창기 도이치가 그저 수세에 몰렸을 때만 해도, 프랑스는 기세등등하게 참호에 병력을 보내었다.
반면 고려는 지원을 온 주제에 동부전선에서 거의 공세를 진행하지 않았다.
공격하면 반격을 해오긴 했지만, 스스로 참호전쟁에서 적의 영토를 향해 진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방어에 치중하는 그들의 전선은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프랑스는 청년들의 피로 지키지도 못할 한 줌 영토를 얻었던 것에 불과했고, 고려는 그저 청년들을 아꼈을 뿐이었다.
프랑스는 그저 멍청하게 전선에 머리를 들이박고 있었을 뿐이고, 고려는 어떻게 하면 이 멍청한 멧돼지를 효과적으로 사냥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외젠은 후퇴한 병력들을 이용해 남부에 전선을 형성하도록 했다.
아무리 남부와 파리와의 거리가 멀다 하나, 지금 이렇게 밀리면 프랑스는 반드시 지게 된다.
그러나 외젠은 이미 프랑스 청년들의 피를 너무나 많이 흘리게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전쟁을 지속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마음속에서도 체념과 절망, 그리고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클로드가 맞았다.
자신은 공화국의 통령이 되면 안 되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이냐. 고려에 목줄을 잡혀 또다시 개처럼 살아야 하는가? 부르봉을 쫓아낸 뒤, 해씨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그러지 않기 위해 그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복벽은 아니 될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의 프랑스는 멍청하고 어리석으며 탐욕스러웠던 부르봉의 지배에 비해 나아질 것이 없을 게 분명했다.
공화국이 아닌 프랑스는 의미가 없었다.
혁명군의 신성에서 공화국의 수호자로, 그리고 공화국의 지도자로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가.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직은 항복할 때가 아니다.
하지만 항복은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마음먹는 것이 아니라, 항복을 강요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었다.
“각하, 각하!”
전령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그가 건넨 쪽지를 본 외젠이 그답지 않게 당황하며 일어났다.
“뭐… 뭐라고?”
* * *
지옥 같은 하루가 또 밝았다.
평화로웠어야 할 이 들판은 한참 전부터 안개가 짙게 깔리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나무와 풀, 낮은 가옥 위로 아침햇살이 내리쬐는 고즈넉한 전원의 풍경이 펼쳐지던 곳에는 그 대신 철조망과 썩어 가는 시신들의 산이 펼쳐져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
안개가 깔린 참호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프랑스군 하나가 문득 그렇게 말을 뱉었다.
장교가 들었다면 온갖 지랄을 하겠지만, 기분이 그런데 어찌하는가.
사실 장교가 있어도, 적어도 그 정도의 숙련병에겐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대가 거의 구 할이 죽어 나가 새롭게 징병된 신병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때에도 나바르―프랑스 전투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불굴의 용사였으니까.
물론 그에게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저 밖, 철조망에 걸려 썩어 들어가고 있는 이름 모를 시신의 눈구멍에서 눈알 대신 쥐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다 보면, 살아남은 자들의 눈에도 비슷한 절망의 광경이 담기는 것이다.
“여기서 허망하게 썩어가고 싶지 않아.”
그는 무덤덤하게 자신의 괴로움을 읊었다.
무의미하게 적 참호로 돌격해야 하는 예전의 지옥 같은 삶도 그랬고, 이제는 멍청하니 여기에 앉아 죽음을 하루하루 기다리는 처지도 그랬다.
도이치 전선에서의 후퇴 이후, 프랑스군은 이제 적 참호로 돌격해 들어가는 짓조차 하지 못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봉건주의의 악습을 우리의 아들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느냐고 욕을 하며 전의를 북돋던 그의 전우도 없다.
이미 아르덴 후퇴 때 죽어 나자빠져 그곳의 숲 어딘가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옛 동료들 대신 그의 곁에는 신병이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도 못하고, 총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이 소년을 바라보자니 고병은 그저 어처구니없는 실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전쟁이 뭐라고 이 꼬맹이까지 이곳에 끌려왔는가.
열다섯? 열넷?
나이를 질문해서 듣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무 화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다만 핀잔의 말을 날렸다.
“넌 임마, 그냥 끌려오지 말고 어디 숨어있지 그랬냐.”
“……평생 고향 땅에서 겁쟁이로 살아가란 말입니까?”
“겁쟁이? 하, 고작 겁쟁이가 될까 봐 이 생지옥에 왔다고? 장담하는데 고향 가봤자 너를 겁쟁이라 부를 놈들도 이제 없을 거다.”
다 뒤졌거나 곧 뒤질 거거든. 이 좆같은 땅에서 말이지.
그가 힘없이 키득거렸다.
“어른들도 있고, 여자애들도 있잖습니까.”
“겁쟁이라고 욕해봤자 어차피 너밖에 선택지가 없을 애들이랑 다 늙은 노인네들이 대체 뭐라고….”
고병은 한숨을 쉬었다.
푸아티에 출신의 그도 이미 가정을 꾸려 애들도 네 명이나 있었지만, 전후에 아내와 아들, 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보자면 정말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 이상, 그들은 정말 생지옥을 겪을 것이다.
“네놈과 같은 코찔찔이 애송이들까지 전부 징집해버린 이상 공화국엔 희망이 없지.”
고병의 말을 계속 듣던 소년은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전 공화국의…!”
하지만 소년이 다소 악에 받친 변명을 하기도 전, 갑자기 고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의 대답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슈우우우
포탄 소리.
한 발의 포탄 소리는 그렇게까지 잘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포탄의 속도가 소리보다 빠른 이상, 이미 적의 포병 사격은 아군의 참호에 도달해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후방의 참호에서 포탄이 폭발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쿵
“이런 젠장. 몸 숙여, 몸 숙이라고!”
그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소년의 머리를 숙이며 자신도 깊은 참호의 불쾌한 진흙에 머리를 파묻었다.
― 콰아앙
그들의 근처에서도 포탄이 터져나갔다.
고병과 신병은 군복이 다 젖도록 참호의 진흙에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고려의 속담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포탄이 참호 안에 직격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충격에 귀가 먹먹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소년도 포격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 정도로 퍼붓는 불의 세례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땅이 뒤집혔다.
전장의 신의 격노는 도무지 한낱 인간이 항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 끄허, 허.
숨쉬기도 힘들었다.
어디선가 돌과 흙이 날아왔다.
다른 것이 날아오기도 했다.
소년은 자신의 복부에 날아든 정체불명의 물체를 잡았다.
“헉!”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와중에도 남의 내장을 끌어안고 있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는지, 소년은 돼지 창자보다도 못할 정도로 흙과 오물이 묻어 더럽고 지저분해진 사람 창자를 참호 밑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소년은 설마 하며 서둘러 고개를 들어 고병을 보았다.
“내 건 아니야, 임마.”
고병은 아직도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렇게 킬킬거렸다.
아무리 화력에 미친 고려군이라 해도, 평생 포격할 순 없다.
시간이 지나자 사방이 잠잠해졌다.
의외로 꽤 많은 프랑스군이 그들처럼 포격에도 살아남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번의 포격이 허를 찔렀던 탓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그래도 여전히 병력은 많았다.
그래, 이것이 참호전이다.
이곳에 있는 군인들에겐 끔찍할 정도의 포격에도 질긴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숙명이 있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사이, 고병은 재빨리 자신의 총을 집었다.
그러고는 소년에게도 채근했다.
“총 잡아, 빨리.”
“예?”
“고려군의 공격이다. 저놈들이 이렇게 다짜고짜 포격을 왜 했겠냐?”
방심한 사이 포탄이 떨어지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지만, 이렇게 맹렬한 포격은 보병을 진격시키기 전의 준비태세와 다름없었다.
― 삐이익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프랑스군의 장교도 그것을 아는지 호루라기를 불며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은 불안에 휩싸여 고병에게 물었다.
“고려군은 공세에 나선 적이 별로 없잖습니까.”
주야장천 공격과 공격을 주고받았던 프랑스―도이치군과 다르게 고려군은 그저 전선을 막아낼 뿐이었다.
제한적인 공세는 오직 그들의 참호가 돌파당했을 때 반격을 한 것뿐이었다.
그들이 애초에 프랑스 참호에 공세를 한 적은 별로 없단 소리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무너진 뒤부턴, 저들도 적극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내가 경험한 건 딱 세 번이었지.”
그리고 그 세 번, 프랑스는 모두 패배해 후퇴했다.
고려도 만만치 않은 병사들을 손실했다.
그러나 저들의 보급과 인력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우월했고, 더군다나 이제는 남부전선을 열면서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었으니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는 훨씬 많았다.
고병은 한번 점령해본 고려의 참호를 기억했다.
질퍽질퍽해야 할 그들의 참호 밑바닥은, 그 귀하다는 통조림 깡통들로 가득했었지.
만약 고병이 살아 돌아가 그의 무용담, 혹은 생존기를 가족들에게 털어놓는다면, 그리하여 살면서 본 것들 중 가장 공포스러운 광경을 꼽아달라고 한다면 그는 거의 무조건 그 광경을 뽑을 것이 분명했다.
‘…….’
고병은 갑자기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장교들과 군 지휘부는 새롭게 열린 남부전선이 적들의 주공이라 파악하고 있었다.
그곳은 이곳처럼 참호가 빼곡하지도 않아 한창 전선을 형성하기 전까지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의 병력을 물린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아니야, 아니다. 고려는 겁쟁이 같을 정도로 희생을 꺼리는 놈들이다. 이렇게 올 놈들이 아니야.’
세 번의 공세는 프랑스가 도이치의 땅을 빠져나갈 때의 혼전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참호에 다시금 몸을 박아넣고 있으면, 고려군은 예전처럼 적극적인 공세를 하지 않을 것이다.
주공은 분명히 남쪽이다.
‘하지만 방금 전의 포격은….’
― 삑 삐이익
“젠장, 젠장!”
적의 공세다. 적의 호루라기 소리다.
주공이고 나발이고, 적은 분명히 이곳에 공세를 가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셈이었다.
“음?”
이번엔 소년이 먼저 반응했다.
소년이 귀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까지 고병은 포격의 후유증에서 청각을 완전히 회복하고 있진 못했다.
“이건 무슨 소립니까.”
“뭐가 들리는데?”
소년은 불안한 눈길로 고병을 바라봤다.
다소 씩씩한 척을 하던 소년의 어조는 이제 완전히 겁에 질린 그 나이대의 본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쇳소리, 끼익거리는 쇳소리가 나요.”
“뭐라고?”
“한둘이 아니에요.”
― 허억 헉
소년은 가쁘게 숨을 쉬었다.
포격 이후에도 여전히 전장은 안개가 가득하다.
아직도 시계가 확보되지 않았으니 이 소리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소년은 미지의 공포에 완전히 잠식당한 것처럼 보였다.
고병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야 이 자식아….”
정신 차려, 분명히 그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먹먹한 이명이 끝난 이후, 그의 귓가에도 이제 그 소리가 들렸다.
혹은 아직 그의 귀엔 이명이 여전한데, 그럼에도 충분히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소리는 소년이 묘사한 것과 동일했다.
― 끼이이이익
하지만 이윽고 펼쳐진 광경은 고병과 신병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안개를 헤치고, 강철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