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해체
개천 454년, 서기 1729년 9월.
― 오스트리아의 모든 병사들에게 전파한다. 현 시간부로 강화조약이 진행 중이니 오스트리아의 장병들은 조약국 측과 어떠한 적대적 행위를 금지한다.
호프부르크 사건이 일어난 직후 8월 중순부터 오스트리아 전선은 사실상 정전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카이저는 전쟁 종료의 확인과 평화의 회복, 배상안과 추후 영토를 결정하는 평화조약 체결 문서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도 공을 세운 헝가리 독립 파벌 같은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에 베네치아처럼 무조건 항복은 아닌 셈이었다.
그러나 평화조약은 충분히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점유한 조약국의 모든 영토를 전부 돌려주어야 했다.
이탈리아와 도이치는 일단 전쟁 전의 국경선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 이후 이탈리아는 일리리아의 관문도시, 류블라나를 할양받았다.
전쟁의 끝자락에 조약국에 협력한 보헤미아도 대모라비아 왕국 이후부터 그들과 꽤나 동질적인 슬로바키아 민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명분을 주장할 권리가 생겼다.
헝가리와의 약속이 있어야 하지만,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체코인들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헝가리인들을 싫어하니 보헤미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꿈을 꾸었다.
도이치는 아직 영토에 대한 의견을 보이지 않았으나, 추후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사건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오스트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가장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헝가리가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지배하에 헝가리 왕국으로 따로 독립되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등의 나라들도 독립 움직임을 보였다.
고려는 이번 작전에 큰 도움을 준 헝가리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독립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황제 해청의 5개조 발언도 있다 보니 은근히 이를 지지하거나 묵인했다.
이와 같이 새로 생길 ‘독립국’들은 패전의 굴레가 자신들에게 씌워지지 않길 희망했다.
배상금과 영토 할양의 문제들이 대두되기 전에 이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출구전략을 짰다.
“우리는 억압자들에 의해 억지로 싸운 것뿐입니다. 우리가 독립국이었으면 당연히 중립을 지켰겠죠.”
“우리도 피해잡니다. 우리의 청년들은 민족의 이익이 아니라 카이저의 사리사욕을 위해 죽어 나가야만 했습니다.”
반합스부르크 봉기의 주축 중 하나였고, 이제는 보스니아 대공국의 군주가 될 스테판 헤르체고비치의 말대로, 이들의 입장을 헤아려 볼 필요는 있었다.
다만 고려는 일리리아에 있는 슬라브계 계통의 나라들이 행여 민족적 감정을 토대로 러시아에게 지원이나 동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혼쭐을 낼 생각도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 블라디미르 놈은 범슬라브를 주장하면서 우리를 도이치 민족의 지배하에 계속 내버려 두었으니까요.”
물론 이들은 러시아의 현 차르는 물론이고 예전 해방제에게도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류리크와 합스부르크가 동맹을 맺으며 했던 밀약들은 범슬라브 패권을 주장하는 류리크가 그들의 주장과는 모순되게 남슬라브계를 가차 없이 버리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버려진 남슬라브인들은 끝까지 환상을 가지고 러시아로 넘어가든가, 혹은 현실을 받아들인 채 이 자리에 남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아들이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남아있는 이들이 범슬라브고 나발이고 그저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 살아가길 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려는 일단 이 지역에 군정을 직접 실시했다.
옆 나라인 헝가리도, 그리스도, 심지어 불가리아도 믿을 수 없었다.
영토의 할양에 눈이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고려는 어쩌면 러시아가 두고두고 써먹을지도 모르는 이 땅에 다시금 골치 아픈 일들을 일어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정리를 제대로 해 놓아야 했다.
그나마 오스만이 이곳에서 행패를 부린 역사가 없거나 짧아 남아있는 무슬림 세력이 거의 없어 다행이었다.
기독교와 무슬림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은 21세기까지 이곳을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게 만들었으니.
적어도 지금은 발칸 내에서의 종교 갈등이라 해봤자 그렇게 큰 이질성을 가지지 못하는 정교회(세르비아, 알바니아, 보스니아)와 가톨릭(크로아티아, 헝가리)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니 조약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간에 도출된 결과물은 상당히 혹독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 세르비아 대공국, 보스니아 대공국, 알바니아 대공국으로 해체된다.]
유럽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는 마침내 그 명운을 다했다.
흔히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말로서 가장 유명한 시구가 있었다.
―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합스부르크가 그들의 전통을 어기고 결혼이 아닌 전쟁을 택한 이후 이들의 운명은 파멸로 치달아 있었다.
물론 4국 동맹의 일원으로 전쟁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당사자인 아돌프 2세는 몰라도 그의 선대들은 꽤나 억울할 것이다.
합스부르크는 처음부터 고려와 대립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본능대로 가장 먼저 해씨 황조와 결혼동맹을 맺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축에 속했다.
만약 고려의 황제가 암스테르담 무도회 당시 저 호엔촐레른의 루이제가 아니라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안나를 선택했다면 지금의 광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해원의 개인적인 성정이 저 프로이센의 여자와 너무 비슷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뿐.
아돌프 2세는 자신의 과오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마침내 합스부르크의 가주로서 본분을 다하기로 했다.
너무 늦었다.
그러나 더 늦는다면 집안은 아예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듯 초췌한 얼굴로,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대동하고 베를린에 직접 방문해 도이치의 국왕과 마주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원수를 마주하는 셈이지만, 프리드리히는 그를 성대히 환대했다.
“돌고 돌아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군요. 대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대의 프리드리히는 아직 젊긴 젊었는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얼굴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영광스러운 옛날의 카이저이자 지금의 초라한 대공은 신음과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의 과오를 인정하오. 나의 멍청함과 죄악도 모두 인정하오. 나는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할 거요. 주님께선 그날 밤 그 괴물, 그 악마를 보내셨지. 나는 죽은 뒤에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 분명하오.”
대체 그날 밤, 호프부르크 습격 때 대체 뭘 본 걸까,
프리드리히는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나름대로 오만함과 자신감에 차 있던 아돌프 2세는 이제 완전히 초라하고 꾀죄죄한 노인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이치의 군주여, 그대가 부디 우리를 도와주시오.”
무너진 제국의 잔해에서 귀중품을 찾는 것과 같이,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이제 심지어 옛 지배국 오스트리아의 국토와 신민을 노리고 있었다.
아돌프 2세는 적어도 도이치계 사람들은 아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신민들이 다른 민족들에 의해 지배자에서 피지배자로 고통받길 원하지 않았다.
고려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 문제를 신경 쓸 유일한 사람은 도이치 왕 프리드리히밖에 없었다.
젊은 청년왕도 자신의 감정을 접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내가 어쩌길 바라십니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아돌프 2세는 자신의 딸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선보였다.
아직도 눈가가 퉁퉁 부은 테레지아가 프리드리히를 바라보았다.
나이 차이는 불과 다섯 살.
그러나 젊고 어릴 적의 다섯 살 차이는 한 사람의 군주와 어린아이를 구별하기에는 충분한 나이였다.
“결혼합시다.”
프리드리히는 아직 여인으로서 어떠한 매력을 찾기 힘들어 보이는 꼬맹이와 약혼을 해야 한다는 것에 살짝 인상을 썼다.
게다가 그의 성적 취향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것도 자각하는 차였다.
그가 여인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진정한 감정과 이성의 교류는 남자와 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돌프 2세의 제안은 거부하기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유럽 왕족들에게 결혼이란 정략적인 면으로 계산하는 것이 당연했다. 개인의 감정은 사치였다.
게다가 호엔촐레른과 합스부르크의 결합은, 정말이지 세기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치세에 도이치는 마침내 분열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니 아돌프 2세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호엔촐레른―합스부르크가의 시작이었다.
소도이칠란트주의를 내세운 프로이센, 도이치 왕국이 마침내 동군연합으로 대도이칠란트를 완성하게 되었다.
* * *
해원은 안가에 있다가 무사히 복귀한 상민을 마주했다.
비유가 이상하지만, 마치 전쟁터에 보낸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심정이었다.
해원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었다.
딸아이가 전쟁에 참여해 그녀의 생사를 걱정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상민이 전쟁에 참여해 선조의 생사를 우려하는 것은 개인을 넘어 국가에게 비극적인 일이었다.
황제로서 해원은 그의 선제들이 의지한 태조대제, 개천제를 잃어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영영 태묘와 사직에서 영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세운 업적이 무엇이든, 그는 가장 못난 군주가 되어버릴 것이다.
입에 담기도 힘든 패륜이다.
가문적 말고도, 국가적으로도 그랬다.
이 광대하고 넓은 고려가 외적, 내적 갈등 속에서도 정방향으로 계속 상승한 이유는 단 하나였으니.
솔직히 말하면, 해원은 상민이 기행을 벌일 때마다 실로 아찔했다.
정작 상민은 반대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안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신경 쓰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해원은 감히 상민에게 뭘 어찌하라 말을 못 했다. 그저 처량한 눈망울로 선조를 바라볼 뿐.
보위에 오른 황제의 말도 잘 안 듣는데, 이제 황제가 아닌 상황의 말은 더 안 들을 것이 분명했다.
딴청을 피우는 상민의 앞에서, 한바탕 깊은 한숨을 내쉰 해원이 주제를 돌렸다.
“도이치의 성장을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폭력으로부터 프리드리히를 보호했던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해원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개인사는 접어두고 국제정치적으로 고려해봐야 했다.
하지만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도이치가 아무리 강해진다 하더라도, 그 한계는 존재할 것이다. 차라리 그냥 그들이 유럽의 주도권을 잡도록 하는 것이 낫지.”
어차피 도이치는 결국 어떻게든 유럽의 주도권을 쥘 나라였다.
비스마르크와 카이저의 시대에 한 번 실패했고, 그 이후 히틀러의 시대엔 완전히 맛이 간 상태로 도전해 또다시 좌절했지만, 결국 메르켈의 시대 이후 독일은 다시금 유럽의 맹주로 떠올랐다.
한 전범은 희대의 살인마였고 나머지 두 재상들도 공과 과가 공존했지만, 결국 도이치의 잠재력은 낭중지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이치는 현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부정할 수 없었다.
고려의 물적 지원이 엄청난 역할을 했지만, 싸우다 죽어 나간 사람의 목숨이 물적 지원보다 가치가 적다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그들의 왕마저 죽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장 많은 희생을 한 도이치를 견제해 불만이 생겨날 여지를 남겨둘 바엔, 지금부터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편이 나았다.
또 고려도 자신의 동맹국들에게 친려의 행보를 걸으면 어떤 이득이 되는지 확실히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는 해원도 공감할 것이다.
“유럽 전체가 고려에게 매달려 방위비 같은 것을 독박하게 되느니, 도이치가 분담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이미 그리스로 학을 뗀 고려는 자신들의 패권도 패권이지만 그 패권에 그저 무임승차할 수 있는 잠재적 대상자들을 경계했다.
지원을 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지원을 은혜가 아니라 권리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상민의 말을 들은 해원이 갑자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렇습니다.”
한바탕 웃은 상민이 그의 불안감을 달랬다.
“그리고 원아, 제아무리 도이치라고 해도 나와 너 그리고 청이가 만든 고려가 위태로우랴.”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한 도이치의 역량은 앞으로 유럽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이는 상민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궤도에 오른 고려에 대적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누가 긍정하겠는가.
도이치 스스로도 그러지 못한다 말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이번 전쟁에서 고려의 역량을 가장 잘 체감한 자들이었으니까.
“그래도 마냥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하려면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필요하겠지.”
도이치를 제대로 견제할 나라는 오직 한 나라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상민의 말은 프랑스에게도 출구전략을 제시하라는 의미라는 소리였다.
설마 선조께선 이번에 파리 강하를 하신다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든 생각에 해원이 한 박자 늦게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겨우 놀란 가슴을 쓰다듬었다.
“난 이라크로 갈 생각이다. 대프랑스 전선은 너희들이 알아서 다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것’이 마침내 도착했다. 승리는 이미 확실했지만, 이젠 아주 가까워졌다.
“샤를 루이 드 세콩다는 괜찮은 인물이다. 외젠의 길을 걷진 않을 거야.”
“그렇습니까?”
그저 클로드의 정부에서 가장 촉망받은 정치인이고 지금은 프랑스 정통정부의 대표자가 되었다는 것 외엔 특별히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해원이다.
하지만 선조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그럴 것이 분명했다.
반면 상민은 샤를 루이 드 세콩다, 혁명이 늦게 일어났다면 본명보다 훨씬 더 유명한 작위명으로 불렸어야 할 인물인 몽테스키외(Montesquieu) 남작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건 네가 청이에게 주거라.”
상민은 문득 품에서 화려한 목함을 꺼냈다.
그 안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하고 무거운 제관이 있었다.
고려에게 큰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의미란 때로 다른 사람이 부여해주기도 하는 것들이다.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상민은 자신도 신기한 듯 제관의 십자가를 살짝 만져보고는 닫아서 해원에게 주었다.
해원은 의외로 무거운 제관과 목함의 무게에 놀라면서도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참칭자의 제관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아, 염려할까 봐 말하자면 뺏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받아낸 것이지. 이 성의를 봐서라도 합스부르크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은 내리지 말거라.”
상민은 아돌프 2세에게서 받은 라이히스크로네(Reichskrone, 신성로마제국관)를 해원에게 건네고는 등을 돌렸다.
마침내 나뉘었던 제관들이 합쳐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왕관과 팔레올로고스의 펜딜리아를 가지고 있었던 해씨는 그들의 탐욕스러운 창고에 이 순간 라이히스크로네까지 소유하게 됨으로써 소소하게 분열된 역사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