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51화 (451/653)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5)

“흐아앙!”

서럽게 우는 테레지아의 울음소리에 상민은 그제서야 자신이 꼬마 아이에게 너무 심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그는 방금 전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다소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근위대를 한바탕 물리친 뒤의 광경을 살펴보자 상민은 사방의 복도가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제서야 소녀의 눈을 슬그머니 가렸다.

권총이 안면부에 박힌 채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의 얼굴을 발끝으로 몰래 돌려놓았다.

― 퍽

아뿔싸, 힘을 잘못 주었다.

안 그래도 총열이 박혀 균열이 간 머리가 그의 힘 앞에 퍽 하고 터졌다.

어린애가 보기엔 영 좋지 않을 끔찍한 결과를 낳았지만 보지 않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끅, 끄윽, 끅.”

테레지아는 피가 잔뜩 말라붙어 굳은 손바닥에 눈을 가려진 상황에서 꺽꺽 울음을 삼켰다.

이러다 실신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차라리 무서워하거라. 내가 너의 악몽이 되어 너의 기억에 계속 자리하게. 그리하여 너가 고려에 대적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너희 신민들은 고통받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상민은 꼬마 여자애가 이 끔찍한 악몽 속에서 완전히 실신하게 내버려 두는 싸이코패스는 아니었다.

상민은 그녀를 이끌고 피와 뇌수들이 어지럽게 흘러나온 참혹한 복도에서 다시금 카이저의 방으로 들어갔다.

테레지아의 울음소리는 한 가지 긍정적인 면을 낳았다.

황제와 공주, 황제의 정부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오스트리아 근위대는 진입을 망설이기 시작했다.

“폐하도, 마담도, 공주 전하도 모두 안에 계신다!”

“경거망동하지 마!”

전례 없는 치욕스러운 순간에, 근위대는 하필이면 인원도 부족해 발을 동동 구르며 그저 아말리엔부르크를 포위하고만 있었다.

“너희들이 한 발짝이라도 삼 층의 복도에 발을 디민다면, 그 대가는 카이저의 가족이 치를 것이다.”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상민의 웅혼한 목소리도 그 기세를 타고 더욱 위협적으로 들렸다.

전의를 상실한 근위대와의 대치 상황에서, 상민은 카이저 방의 창문으로 다가가 자신의 베레타 5에서 소음기를 뺀 뒤 예광탄 세 발을 하늘로 발사했다.

― 탕 탕 탕

어두운 하늘을 세 줄기의 빛이 가로질렀다.

이윽고 다른 쪽에서 두 발의 신호용 예광탄이 하늘로 쏘아졌다.

아까 침투조와 헤어진 지원조는 이제 사전에 계획한 대로 탈출로를 찾거나, 혹은 반란군들에게 접촉할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를 좀 해 보자고.”

코피가 흥건하게 난 아돌프 2세가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렸다.

착한 경찰 나쁜 경찰의 목적에서 여의국 요원들은 이미 한바탕 나쁜 경찰의 역할을 해 놓은 상태였다.

상민은 착한 경찰의 입장에서 아돌프 2세에게 권유 아닌 권유를 하기 시작했다.

“근위대를 물려라.”

“…다… 당신이 뭘 어찌할 줄 알고?”

“그대들의 목숨만은 살려드리지. 그대가 협조를 잘할수록 전후 재판에서도 감형을 해줄지도 몰라.”

“뭐? 전후 재판? 나는 합스부르크다, 합스부르크의 가주이자 오스트리아의 황제이고 로….”

― 쾅

상민은 아돌프 2세를 앉혀놓은 벽에 주먹을 내질렀다.

아무리 착한 경찰이라도, 끝까지 착한 경찰로 남을 필요는 없다.

미친 경찰을 보고 싶지 않다면, 카이저는 순순히 협조하는 것이 좋았다.

― 푸스스

주먹을 뽑는 것과 동시에 파인 벽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 와중에 아돌프 2세는 멍하니 상민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전 자신이 발사한 탄환. 분명히 저곳에 맞은 것이 분명했는데.

그 팔은 멀쩡하게 작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불가해한 파괴력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종교적으로 충실한 아돌프 2세의 사고 흐름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종착지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허억… 악마, 사탄, 루시퍼, 적그리스도!”

아돌프 2세도, 그리고 아직도 옷을 갈아입지 못해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정부도, 그리고 어린 테레지아도 모두가 카이저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허, 참.’

평생토록 자신을 숭배해온 앙주의 첫 번째 성녀왕이 이 말을 들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검으로 이 비루한 자칭 황제의 목을 거리낌 없이 날렸을 터였다.

물론 상민의 등 뒤에 있는 여의국 요원들도 거센 분노로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했지만, 선지자이자 쿠쿨칸의 행보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인내심으로 치환하고 있었다.

잠잠해진 꼬마 여자애가 다시금 놀라 울음을 터트릴까, 상민은 아돌프 2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카이저.

오스트리아는 곧 패할 것이다.”

목전에 죽음을 둔 순간엔 대부분의 사람이 솔직해지긴 했다.

반문도 하지 못하는 이 아돌프 2세는 치욕스러움에 입술을 부들거리다 억지로 깨물었다.

상민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금 쐐기를 박아넣었다.

“아니, 정정하지. 지금 오스트리아는 패했다.”

베네치아에 이어서 오스트리아까지. 그리고 남은 두 국가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상민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 프랑스와 러시아의 입에서 오스트리아가 3국 동맹 중에서 최약체라는 망언이 나올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베네치아 도제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무조건 항복 문서에 재빨리 서명했지. 물론 그자도 전후에 정식으로 전범재판을 받겠지만 교수형이 선고된 다른 10인위원회의 구성원들과는 달리 영원토록 가택연금당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야. 그가 더 이상의 피를 바라지 않고 항복을 했다는 것을 참작한 것이다.”

상민은 피가 잔뜩 묻은 단검을 들어 그의 목 옆에 박아넣었다.

“너는 네 자신이 지금 이 상황에 놓인 것에 안도해야 할 게야. 독재자이자 신민들의 배신자인 외젠과 희대의 패륜아이자 전쟁광인 블라디미르 2세는 너처럼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날 정말 살려줄 거요?”

눈앞의 남자가 대체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돌프 2세는 이제 공손하게 질문하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힐끔 바라본 상민이 고갤 끄덕였다.

“오스트리아와 결부된 그대의 가문 재산은 마땅히 압류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스위스 아르가우에 있는 옛 합스부르크 고성을 사들여 그대에게 주지. 그대는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겠지만, 충분한 하인과 경비병들을 대동할 수 있게 해주겠다.”

“우… 우리 오스트리아는?”

상민은 꼬마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이해했는지 아돌프 2세가 눈물을 참으며 공주를 불렀다.

“이리 오렴, 테레지아.”

“아빠…!”

테레지아는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민을 쳐다보다 이윽고 아버지의 품에 달려가서 안겼다.

눈물 나는 부녀상봉을 바라보자니 상민은 자신이 한 가정을 파괴한 거대한 대악마처럼 보이는 이 광경에 아주 조금은 찜찜해졌다.

이윽고 딸을 끌어안고 있던 아돌프 2세가 대답을 독촉하는 상민의 시선에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소, 알겠소. 아무나 한 명 불러 주시오.”

이 지경이 된 이상, 카이저의 눈에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 * *

호프부르크 습격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 빈에서도 한바탕 전투가 일어났다.

상민의 재치로 도망칠 수 있었던 반군 귀족들이 그들이 포섭한 수도군 중 일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도 근위대가 그들을 체포하러 온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기에 상민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작전을 해봐야 했을 터였다.

― 탕

오스트리아 군복을 입은 자들이 서로 총을 겨누었다.

친카이저파 장교들이 고래고래 악을 썼다.

“배신자들을 죽여라!”

목소리는 독립파, 혹은 반카이저파의 장교들도 만만치 않았다.

반란을 무조건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죽을 테니, 필사의 각오는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짓된 카이저에게 죽음을!”

본래는 이런 부류의 반란은 카이저가 멀쩡하다면 힘없이 끝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고려의 지원조가 그들과 접촉해 카이저 납치 작전의 성공을 알리자 반란은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우리가 카이저를 확보했다! 이놈들을 몰아붙이면 성공이다!”

“너희들의 손으로 카이저가 일으킨 전쟁을 끝내라!”

빈에선 해가 뜰 때까지 전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날 아침, 수도는 완벽히 반합스부르크―헝가리 독립파―주화파의 손아귀에 놓였다.

빈에는 피아식별을 위해 붉은 완장을 찬 반합스부르크 병사들이 계엄령을 내리고 통제하고 있었고, 도시 사람들은 밤중에 일어난 전투에 밤잠을 설쳐 퀭해진 얼굴로 시신들과 전투의 흔적을 수습했다.

카이저의 근위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더 이상 군대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카이저의 호위를 담당하는 최정예답게 동이 터 오를 때까지 항전했으나 마침내 카이저의 설득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며 총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들은 곧바로 무장해제당하고 감금당했다.

반합스부르크파는 호프부르크를 점령하면서 반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동안 많은 인내심과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긴 했지만, 작전의 성공 여부에는 다소 회의감을 품고 있었던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이미 궁전의 안에서 태연자약하게 앉아있는 상민과 그 일행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사람들이군.”

역대 참수작전, 아니 특수작전이라고 불릴 만한 것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려 역사에 이름이 적힐 호프부르크의 잠입 사건은 훗날 수많은 정보단체나 특수부대의 설립에 크게 기여할 것이 분명했다.

트란실바니아 공작 자신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일단 우리의 존재는 은폐해 주시오. 사전에 협의했던 것처럼.”

“알겠소. 나머지 세부 사항들은 곧 오게 될 조약국의 협상단과 논의하겠소이다.”

그들은 라코치 페렌츠 2세에게 카이저의 안위를 보장받은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직 빈의 상황은 전방 부대에게 전달되진 않았기에 전선으로 탈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라코치 페렌츠 2세는 그들이 무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한편 자신의 손으로 고착화된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된 상민은 탈출이 아니라 미리 섭외한 안전가옥에 가면서도 전혀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자그레브의 안전가옥에 도달했을 때, 상민은 주위를 물리고 고뇌에 찬 얼굴로 단검을 들어 자신의 팔뚝을 그었다.

― 스으윽

날카로운 칼날이 피부를 갈랐고, 피가 배어 나왔다.

이게 정상이다.

“…….”

자신의 근섬유는 굉장히 독특했다.

아주 먼 옛날엔 자신의 몸이 그리 특이하지 않다고 느꼈던 상민은 시간과 비례하여 자신의 신체 능력이 정방향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러 방면으로.

삼별초에서 가면시중, 가면시중에서 그저 민간의 사람으로 내려올 동안 그의 육신은 거듭해서 발전했다.

이미 외형도 일반적 사람이라고 보기엔 힘들 정도로 눈에 띄었다.

사내들은 직립한 영장류가 가질 수 있는 육신의 힘과 아름다움의 극의에 도달한 모습에 경외했지만, 상민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몇몇 여인들은 그의 모습에 꽤 부담스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신체의 힘은 외형보다도 더욱 특이했다.

상민은 자신의 세포 조금을 잘라내 기술선도국에서 특별히 더 믿을 만한 인물들에게 연구토록 했다.

그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상민의 근섬유는 일반 사람에 비해 거의 이분의 일, 혹은 삼분의 일 정도로 가늘었다.

아직까지 그 이상의 성분이나 구조를 파악할 과학력은 없어 연구는 더 진척되지 않았지만, 상민은 자신의 근육이 낼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정말로 고양잇과 맹수나 곰과 맹수의 힘 정도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근섬유의 가늘기 말고도, 근섬유가 낼 수 있는 힘도 강할 것이다.

이에 생각도 서서히 바뀌었다.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설립했다.

적어도 한 삼백여 살 정도까지는 나름대로 자신의 안위에 조심성 있었던 그는 전생과 현생을 합쳐 살아온 세월이 거의 오백 년이 되는 이 시점에는 이제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었다.

솔직한 말로, 오늘이 있기 전까지 자신은 그나마 이해 가능한 범주하에 있었다.

애초에 사람이 이 정도 살다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성과 상식의 범주는 넓게 확장되어 기이한 일도 수용 가능했다.

상식적인 반대급부도 있었으니까.

상민은 자신의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음식물을 먹어야 했다.

미식가였지만, 대식가이기도 한 셈이다.

이 식사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해 이제는 하루에 보통 다섯 끼 이상을 먹고, 한 끼마다 범인들의 두세 배 이상을 먹었다.

‘예전에 성인 남성 권장 칼로리가 이천 중후반이었던 것 같았는데.’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대충 계산해보자면 자신의 신체는 거의 만에서 만 오천 칼로리가 넘는 열량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예전의 생애에서 수영 황제라 불렸던 마이클 펠프스도 하루에 만 칼로리를 먹었다 하니까.

하지만 이번의 현상은 완전히 달랐다.

아돌프 2세가 쏜 권총은 상민이 지금 스스로 자해한 것보다도 더욱 얕은 상처를 남겼을 뿐이었다.

총탄은 분명히 그의 신체를 파고들었어야 했다.

근섬유의 힘이나 밀도와는 관계없이, 총탄의 운동에너지는 그것을 상회했으니까.

그러니 그때의 상황은 무언가 이상했다.

기이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소위 가장 충복들에게도 이러한 사실은 털어놓을 수 없었다.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고민도 생겼다.

가능성은 희박하더라도, 상민은 자신이 만약 정말 이성을 잃어버리거나 자제하지 못해 폭주하는 경우도 두려웠다.

이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대체 누가 자신을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상민의 정신은 이미 정상은 아니었다.

그는 죽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스릴에 미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총탄조차 그의 목숨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의심을 하게 된 순간, 상민은 오히려 안도가 아닌 더욱 엄청난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여차하면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는, 정말 마지막 심적 출구조차 봉쇄되어 버린 불멸자는 휴전 협상이 벌어질 때까지 여의국이 확보해 놓은 안가에서 은거할 동안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신체에 안가가 과연 필요한가? 그냥 들판에 나가 하루 종일 자도 무방할 텐데.’

들짐승은 그의 곁에 오지도 못할 것이다.

곤충들도 그를 피한다.

번개를 맞아도 죽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아이샤에게 가자. 가서 아이들 얼굴을 보고 좀 심신을 다스리자.’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