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위험한(2)
― 휘이익
맹렬하게 귓가를 때리는 바람.
안전한 작전을 위해 야간을 틈타 하늘을 비행하는 복엽폭격기들은 이전보다 상당히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고 있었다.
정말 기체가 견딜 수 있는 가장 높은 고도까지 올라간 셈이었다.
강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더 좋았다.
산소도 희박할 테고 어마어마하게 추울 테지만, 세희는 이를 악물고 고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두워서 밑은 보이지 않았다.
임무의 안전성과 투하지점의 정확성을 고르라면 아무래도 전자가 더 나았다.
시간상으론 지금쯤 되면 낙하를 해야 했다.
“준비!”
상민은 손을 들며 쩌렁쩌렁한 고함을 질렀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모두 다 알아들은 듯 자신이 탄 날개 반대편의 요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낙하!”
다섯에서 하나까지 수를 센 상민은 마지막 고함과 함께 상민은 고정 걸쇠를 풀고 날개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강하는 한두 번이 아니다.
이미 비행선의 시대에도 충분히 경험했던 일이다.
― 펄럭
그와 동시에 낙하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종단속도가 빠를수록 개산(開傘) 시 소음 발생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냥 낙하하자마자 펼치는 것이 소리 은폐에 좋았다.
검은색 비단으로 만든 주 낙하산을 안전하게 펼친 상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비단을 사용했지만 어둠 속에서도 비단 특유의 광택이 살짝씩 느껴지는 듯했다.
― 어엇!
다급한 경호성이 거센 바람 소리를 타고 들렸다.
뒤늦게 떨어지고 있는 요원 한 명의 낙하산에 문제가 생긴 듯 끈만 풀린 뒤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주 낙하산의 기능고장이야 항상 대비해야 하는 사고라 충분한 훈련이 되어 있었기에 요원은 재빨리 허리에 있는 예비 낙하산을 펼쳤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미처 펴지지 못한 주 낙하산의 줄과 예비 낙하산의 줄이 뒤엉켜 예비 낙하산도 펴지지 않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했다.
상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낙하산을 뜯었다.
근육이 부풀고 질긴 비단줄이 하나둘씩 끊어졌다.
“……!”
다른 요원들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상민은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좁혀 바람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며 빠르게 낙하했다.
가장 먼저 낙하했지만 낙하산이 제대로 작동한 덕에 상민은 사고가 난 이보다 고고도에 있었다.
빨리 행동해야 했다.
자신의 행동도 행동이지만, 저놈이 제대로 말을 들어 먹어야 구할 수 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몸을 펼쳐!”
자유낙하하던 이는 죽음을 마주하고 정신이 혼미해진 상황 속에서 상민의 고함을 들었는지 날다람쥐마냥 최대한 몸을 펼쳤다.
그의 등으로 낙하해 뒤에서 그를 꽉 껴안은 상민은 아예 해결 불가능한 그의 낙하산 배낭을 뜯어버리고 자신의 허리에 있는 예비 낙하산을 펼쳤다.
“녀석, 운이 좋았구나.”
“허흑, 헉, 가… 감사합니다.”
거구의 두 사람을 태운 낙하산이 힘겹게 내려왔다.
인적 없는 넓은 들판.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검은 비단 낙하산을 수습한 상민은 라이터, 아니 발화갑을 몇 차례 켜 자신을 중심으로 집결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떨어진 요원들이 짙은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작은 불빛을 보고 재집결했다.
상민은 집결 장소에서 자신의 낙하산을 모두의 머리 위에 덮어 발화갑의 불빛을 가린 뒤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신들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시다니요.”
“별거 아니었다.”
아무리 감동에 젖었더라도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자신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기가 싫었던 상민은 나침반과 육분의, 지도를 꺼내 상황을 파악했다.
항해 짬밥도 수백 년이다. 상민은 별자리와 같은 여러 단서를 종합해 위치를 빠르게 산출했다.
“꽤 남쪽에 떨어졌구나. 하지만 오차범위 이내다. 무구 점검하고 빨리 자리를 뜨자.”
“예.”
그들은 각기 권총이며 석궁, 그리고 소총을 점검했다.
낙하란 험한 일이라 무구를 잃어버린 자들이 꽤 되었지만 애초에 넉넉히 가져왔기에 요원들은 서로 무기와 탄약, 화살을 주고받았다.
상민도 그의 다혈권총 약실에 탄을 재웠다.
베레타에서 만든 이 다혈권총은 일반적인 다혈권총과는 외형이 달랐다.
예전 아라비아에서는 장거리 사격을 위해 연장총열을 쓰곤 했지만, 지금은 그 앞에 두툼한 소음기가 달려 있었다.
소음기의 구조야 의외로 간단했다.
상민이 개발을 지시하지 않아도 전통적인 총기 제작자들은 화약무기가 냉병기에 밀리는 거의 유일한 단점, 즉 소음을 줄이기 위해 과거부터 열심히 노력했었다.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실패가 헛짓거리는 아니었다.
마침내 조반니 베레타의 대에 유의미한 수준의 소음기가 등장한 것이다.
탄약은 발사된 뒤 일직선으로 빠져나갈 수 있지만, 뒤의 연소기체는 탄약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한 구조물을 통과하며 소음이 작아졌다.
하지만 그 이후엔 다혈권총의 구조적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약실과 총열 간 아주 약간의 유격만 있어도 소음통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요원용 다혈권총, 베레타 5 권총은 발사할 때마다 약실이 총열에 밀착되어 약실의 연소기체가 사용자를 해할 위험성을 제거하고 소음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게다가 베레타 5에 들어가는 탄약은 구경에 비해 장약이 그리 많지 않은 10미리 저속탄환, 총기의 발사 소음이 놀랍도록 적었다.
유일하고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특유의 구조로 장전 속도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는 것인데 당장 그것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실제로 정보총국은 베레타 5가 나오자마자 제식화하여 전 요원에게 이를 지급했고, 작전에서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베레타사(社)는 최초의 특별작전용, 혹은 특수부대용 권총과 부속품을 성공리에 개발하며 고려 내에서 안정적인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투자를 조금 더 해도 되겠어.’
상민은 마지막으로 옷 안에 걸쳐 입은 메리나산 방탄복을 한 번 두드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오스트리아 장교복과 병사복을 입은 요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럽에 있는 고려인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그중에서도 교류가 가장 적은 축에 속했으니 상민은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물론 인종 이전에 덩치와 체격을 보았을 때, 더더욱 그렇겠지만.
그래서 그들은 접선 장소로 갈 때까지 될 수 있으면 숲과 한적한 길만을 이용한 채 가야 했다.
적진에 침투한 이후, 언제든지 전투가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마을에 남자들이 없구만.”
“정말로 그래 보입니다.”
농가엔 젊은 장정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퀭한 눈동자의 노인네가 죽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희망을 잃어버린 아낙네들은 행여 군인들이 그들을 해할까 두려워하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벌러톤 호수 근처의 낡은 농가 접선지에 도달한 상민은 늙은 헝가리 여인이 아무 말 없이 내준 수레에 몸을 실었다.
노새가 이끄는 이 수레는 외견상으로는 견고하지만 허름한 것이 누가 봐도 군용 수레였다.
다만 안에는 미리 제작된 특수제작된 공간이 있었다.
상민이 억지로 몸을 구겨 넣은 뒤 뚜껑을 닫고 위를 밀가루가 가득 든 포대들을 쌓으니 영락없는 보급대와 같았다.
동맹국들은 열차가 깔려있지 않은 지방의 보급은 여전히 말과 수레에 의존하고 있었다.
상민으로선 그야말로 관짝에 누워 있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의 불편함을 참을 수 있었다.
도리어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죄스러워할 정도였다.
철저한 준비를 했는데도 가는 길은 무탈하지만은 않았다.
몇 번 검문에 걸린 적이 있었다.
“이봐, 어디를 가는 거냐?”
“부다페스트로. 보다시피 군량을 수송 중입니다. 여기 명령서도 있습니다.”
대충 이런 말을 둘러대면 대부분은 이상하지 않게 여기며 보내주었지만, 아주 가끔 까탈스러운 장교는 직접 물건을 검사한답시고 이리저리 수레를 뜯어보기도 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곡물 더미죠.”
“말투가 이상하구나. 어디서 왔냐.”
“남쪽에서. 왜 그러십니까?”
“흥, 크로아티아 촌놈이었군. 썩 꺼져라.”
“…….”
고려 인솔자는 자연스럽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노새를 몰아 수레를 끌고 지나갔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유럽 귀족들의 강도 같은 본능은 꼭 일을 만들었다.
“밀가루 몇 포대만 내려놓고 가. 위에는 알아서 보고하고.”
그러나 한 차례 히죽이며 수레에 접근해 밀가루 포대에 손을 대려던 병사들은 수레의 숨구멍에서 노려보는 눈동자와 마주하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 탕
* * *
그렇게 몇 번 권총이 불을 뿜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일은 적어졌다.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이자 헝가리의 수도인 페스트.
도나우강의 이 아름다운 소도시는 도이칠란트 지방을 잃어버린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헝가리의 영향력이 커진 이후부터 맞은편의 부더라는 도시와 합병되어 부다페스트라 불리게 되었다.
현시점의 성세는 가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두 번째 대도시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수레를 이끌고 가는 일행은 너무 당당하게 부다페스트 도시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 당당함을 끝까지 유지한 채, 군인들이 오가는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갔다.
“멈춰라!”
경비병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그들을 막아 세웠다.
“군량이 왜 이곳에 오느냐, 저기 군량 창고에 가야지.”
크로아티아 출신 대원 하나가 고개를 으쓱했다.
“저는 명령받은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뭐라고?”
대원은 다시금 주절주절 말을 꺼냈다.
경비병은 딱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만, 들여보내라.”
하지만 경비병의 뒤에서 나타난 귀족 장교 하나가 그런 말을 하자, 경비병은 더 이상 반문하지 않고 출입을 허가했다.
“해가 지는 곳에서 왔소?”
“해가 저물지 않는 곳에서 왔습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새가 이끄는 수레는 저택 내 마구간에 들어갔다.
상민은 마침내 그곳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오는 길이 험했던 모양이군요.”
“별거 아니었소.”
상민은 몇 발의 탄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들은 저택의 뒷문을 통해 들어갔다.
고풍스럽게 지어진 저택은 소유주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심지어 이 저택은 본가도 아닌 별장에 지나지 않을 터인데.
상민은 부하들로 하여금 일 층에서 각기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한 뒤 장교의 안내를 받아 삼 층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민은 쉰이 넘어 보이는 중년의 헝가리 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말려 올라간 콧수염의 끝이 독특했다.
헝가리 귀족이자 트란실바니아의 공작,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꽤나 능숙한 고려어로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한눈에 고려에서 온 자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젊어 보이지만 고려인들은 원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상관없었다.
반면 저 기가 죽을 만큼의 위압감, 대체 제국의 누굴 비교해야 할까.
멍청한 카이저는 분명 비교 대상이 아닐 것이다.
헝가리는 이번 계획에서 고려의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나름대로 굉장히 성의 있는 방식으로 돌아온 듯했다.
“박성민이오. 지금은 이라크의 집정관이지.”
“…허허,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하신 분이 오셨군.”
아라비아의 신화를 쓴 이라크의 집정관은 트란실바니아의 공작과 비교해서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대화가 더 이어가기 전에 라코치의 부하 장교는 응접실의 커튼을 모두 가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헝가리의 최대 권력자치고는 눈치를 심하게 보는 모양인데.”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으려는 자는 항상 있소. 마치 에스테르하지 놈들처럼.”
현 헝가리의 복잡한 귀족사를 아주 간단히 정리하자면 친오스트리아 파벌과 반오스트리아 파벌로 나눌 수 있었다.
어느 사회가 그러하듯, 헝가리에서도 합스부르크 황조의 지배를 온전히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황조는 남도이치가 사실상 프로이센, 도이치의 손에 들어간 이후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도이치인 귀족들을 헝가리에 분봉하기 시작했다.
헝가리인들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도이치인 귀족들을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헝가리 귀족들도 마찬가지였고.
헝가리도 헝가리만의 영웅들을 배출해 낸 적이 있었다.
세기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와 그의 아들 마차시는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후녀디의 왕통이 끊겼더라도, 헝가리 귀족들이 모두 오스트리아에게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의 앞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에스테르하지(Esterházy) 같은 가문도 있었지만, 눈앞의 라코치(Rákóczi)처럼 틈만 나면 독립을 꿈꾸는 가문도 있었다.
“우린 고려의 대답을 들었소. 이곳까지 그대들의 군주가 한 말이 들리더군. 참으로 인상 깊은 말이오.”
해청의 5개조 평화원칙을 말하는 모양이다.
적국에도 이 소리가 들렸을 정도라면, 그 파급력은 말해 무엇할까.
시대가 빨리 변하고 있는 만큼 생각과 사상의 변화도 빨라졌다.
“허나 그 문구가 허황된 것이면 어쩌오? 우리는 이미 한 번 알베리히에게 타협을 약속받았으나, 그 후손들에 의해 다시금 배신당했소이다.”
상민은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곧 패배할 터.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에 헝가리가 먼저 무언가라도 해야 전후에 뭐라도 주장할 건덕지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상민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단지 하나, 어쩌면 자신으로부터 촉발되었을지 모르는 이 세계대전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열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리 철혈 같은 그라도 수백만, 어쩌면 누적되어 수천만이 죽어 나가는 이 전쟁을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아니, 그는 오히려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밤마다 정처 없이 참호를 걸어 다니는 영혼들에 대한 꿈을 꾸었다.
사람 하나를 죽이면 살인자지만 수백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 한다.
정말 뭐 같은 소리였다.
그토록 많은 세월을 살아오며 풍화된 그의 마음도 이 전쟁의 참혹함을 바라볼 때면 다시금 제 기능을 하곤 했다.
정말로 오래간만에 상민은 예전 해민의 시절부터 있었던 지독한 불면증과 두통을 달고 다녔을 정도였다.
인류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후, 헝가리는 독립된 왕국을 보장받길 원하오.”
“그리고 그 군주는 라코치가 될 것이고?”
라코치 페렌츠 2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해서 좋군. 그 정도야 충분히 들어줄 수 있지.”
이건 속물적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속물적이어도 애국심이 있을 수 있다.
상민 또한 이렇게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있는 자만이 합당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가는?”
라코치 페렌츠 2세가 갑자기 박수를 쳤다.
딱히 그 의도에서 위협의 징조를 읽지 못해 대응하지 않은 상민이었지만 그마저도 라코치의 박수 소리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고 살짝 놀랐다.
“…음?”
“그… 저… 안녕하십니까?”
포로수용소나 고문실에 있을 거라 기대했던 고려인 조종사 다섯 명이 어딘가 민망한 얼굴로 상민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맞았는지 어디 부딪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것을 제외하곤 신체는 썩 건강해 보였다.
폭격기 분편대는 기러기 두 대로 이루어졌다.
기러기 한 대는 완편을 가정할 시 네 명이 탑승하나, 폭장수를 빼면 세 명이 탑승했다.
그러니 이 다섯 명은 사실상 실종된 조종사의 전부였다.
“운이 좋지 못한 한 명은 교회 묘지에 가매장해 주었소. 역시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더이다. 아, 그 비행기라는 물건들도 어디 농장에 숨겨 놨소. 카이저가 눈에 불을 켜고 수색하라 했지만 뭐 대충 넓은 벌러톤 호수에 빠졌다 했지.”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첨언했다.
“성의가 상당하군. 고맙소.”
이건 상민으로서도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그는 솔직히 고마움을 표시했다.
선제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다. 그의 마음도 약간은 유하게 변했다.
“하지만 고려의 요구 조건은 변동이 없을 게요. 우린 카이저의 목숨을 내버려 두길 원하오.”
“왜 험한 길을 가려 하시오? 그저 아돌프 그 인간만 죽으면 일사천리로 일이 쉬워질 터인데.”
상민이 고소를 삼켰다.
상민은 헝가리가 휘청거리는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고 헝가리 고유의 강역을 넘어 일리리아까지 온전히 삼켜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알바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같은 나라들의 문제도 어느 정도 깔끔하게 정리해야 했다.
제아무리 러시아―오스트리아 간의 모종의 협약으로 발칸 내의 범슬라브주의가 고개를 숙였더라도, 이곳은 언제든지 화약고로 불이 붙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슬림의 치세가 짧거나 없어 종교적 괴리감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오스트리아는 최대한 잡음 없이 처리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인물은 오직 카이저뿐이다.
“그냥 그대는 빈에서 나와 카이저의 독대를 주선해주면 그걸로 되오.”
“카이저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놈인데.”
상민은 씩 웃었다.
“단둘이 이야기해 보면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