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조야가 시끌시끌하구나.”
“아무래도 조금 그렇습니다.”
“일부 외신들이 짐에게 태자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고 했던 말도 있었지? 해명, 해명이라. 재미있는 단어로구나.”
외신도 외신이지만, 내신들도 당혹한 티가 가득했다.
시중은 행여 황태자가 실질적 권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닐까 우려하기까지 했다.
“원론적인 이야기들이 아닌가? 식민지의 해방 건도 그렇지. 애초에 고려는 식민지를 가진 적도 없거늘. 명칭 자체가 보호국이었으니 마땅히 보호의 기간이 끝난 뒤에는 풀어주는 것이 옳다.”
아들과 의견 차이가 있었더라도, 해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차지도 마찬가지지. 허 참, 나라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들을 쉽게 보는 이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지적하기도 어렵구나.”
“송구하옵나이다.”
“박 내관이 송구할 게 무에 있겠는가.”
해원이 등을 돌렸다.
“어차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부로 짐은 태자에게 양위할 터이니, 박 내관은 지금 즉시 동궁에 알리고 황실의 인원들과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양위 및 즉위식을 계획하도록 하라.”
황제는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지를 아들에게 해주기로 했다.
전통적인 왕정 국가에서 양위는 가끔 군주가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한 도구로 작동했었다.
허나 고려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
좀팽이처럼 선위쇼를 했다가는 자칫 범과 곰의 목을 돌리는 무시무시한 존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다.
‘네까짓 게 뭐냐며 말이지.’
그분께선 분명히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었다.
황제가 양위를 입에 담았다는 것은 결심이 필히 섰다는 의미, 그 아무도 반문하지 않았다.
여론은 반반으로 갈렸다.
대전쟁이라는 국난 앞에서 황제가 바뀌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반면 황제가 적절한 순간에 후계자에게 양위하는 것은 분명히 고려의 전통적인 미덕이라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게다가 민간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설립 이후부터 조금씩 황태자 해청의 외교적 능력을 꽤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엄청난 폭탄을 던져놓긴 했지만, 도덕을 중시하는 고려인들은 꽤나 황태자의 발언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언론도 잘 주무르는 것이 있긴 했지만, 애초에 고려는 식민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 * *
개천 454년, 해원은 양위 후 스스로 전쟁이 일어나는 유럽으로 넘어갔다.
예전, 그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뒤, 청명원 객원 전체를 빌려 머물기로 했다.
이번에도 빌럼은 예전처럼 상황의 행차를 반기며 치안병력을 증파했다.
어찌 보면 친정의 개념이긴 했지만, 실제로 손규호 총사령관의 작전권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해원이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고 재능도 있다지만, 애초에 한평생 군문에 종사한 유능한 장군을 넘긴 조금 힘들었다.
대신 해원은 그의 작전권이 더 온전히 발휘되기 위해 배후에서 지원할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유럽의 정치인들에게 태자의 행동에 대한 ‘해명’을 할 겸.
‘이 전쟁이 공짜로 벌이는 행동이 아니라고 주지시켜야겠지.’
사실은 해명이 아니라 압박이라고 봐야 하겠지.
전쟁이 끝난다면, 이들은 영수증에 적힌 것들을 다시금 찬찬히 봐야 할 터였다.
그때가 되어서야 적힌 금액을 보고 화들짝 놀라겠지만.
물론, 해원의 유럽행에 막내딸이 점유한 지분이 아예 없다고도 말하진 못했다.
딸의 일은 손규호 대장이 잘 처리해 주었다.
하지만 곧이어 다른 문제가 생겼다.
“실종된 조종사들에 그놈이 포함되었다 이 말이지….”
딸 가진 사람이 많이 공감하듯, 아끼는 딸을 채갈 놈팽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해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섯 명의 조종사들이 실종된 사건은 분명히 비극적이었기에 해원은 그 천둥벌거숭이가 포함된 사고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깊은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살아는 있는가?”
“확실치 않으나 다른 편대가 그들이 추락하기 전 낙하산을 펼치는 것을 관찰했다 합니다. 근처의 위치도 기록했습니다.”
“위치는?”
“부다페스트 남쪽, 도나우강 주변입니다.”
“적진의 한가운데군.”
“생사불명이고, 포로로 잡혔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저들의 포로를 좋게 대우하는 것과 별개로, 저들은 우리의 포로를 좋게 대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조종사는 더더욱.”
전쟁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포로가 생겼다.
오스트리아도 일반적인 보병 포로에 대한 대접은 그리 막장은 아니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고, 아직까지 나름대로의 기사도 정신이 있는 오스트리아는 적어도 일반병에 대한 전쟁범죄를 크게 저지르진 않았다.
포로 맞교환도 가끔 이루어졌으니까.
다만 이들도 특수 병종에 대한 증오는 꽤 컸다.
일방적인 무기력함을 선사해준다는 것에서 더욱 그랬을 터다.
포로로 잡히면 가장 악랄하게 다루어지는 자들은 저격수들이었다.
조준경으로 멀리서 참호를 오가는 적병이나 지휘관들을 쏘는 저격수들은 포로로 잡힌다면 곱게 죽지는 못할 운명을 각오해야 했다.
지금은 도이치도 고려를 모방해 저격수 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고려가 외인부대 소속 저격수를 통해 이브라힘 파샤를 저격한 것은 유럽에서도 유명해서, 프리드리히도 하노버 같은 곳의 사냥꾼들을 이용해 저격부대(Scharfschütze)를 창설했다.
하지만 남이 무방비한 시점을 노려 일방적으로 목숨을 빼앗고, 심지어 평민 주제에 귀족의 목숨을 앗아가는 병종을 오스트리아군이 좋게 여길 리가 만무했다.
도이치군 저격수 포로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죽은 것은 뒤늦게 몇 번 알려지곤 했다.
반면 조종사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들은 전부 다 장교였으며, 유럽에서는 장교는 귀족이 아니더라도 아직도 일반적인 병사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들은 고문의 가능성에 노출되었다.
조종사들은 좋은 정보를 가질 확률이 높았다.
일단 하늘에서 보는 정찰 정보도 그러했고, 장교라는 신분도 그랬다.
그러니 고문을 해서라도 포로에게서 정보를 빼내려는 것이 궁지에 몰린 자들의 심정일 터다.
손규호 대장이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폐하, 소장에게는 그들을 구출할 방법이 없습니다.”
규호도 알고 있었다.
조종사들이 떨어진 것은 비극이다.
하지만 뭘 어찌할 수 있는가.
지금 당장 부다페스트까지 병력을 진전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소. 당장 경에게 명령하려는 것이 아니오.”
행여나 그 정위와 공주 간의 모종의 특별한 관계가 작전에 영향을 주지 않을지 우려한 규호의 생각과는 반대로, 해원은 어떠한 부담과 압박도 주지 않았다.
다만, 대답은 의외의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
“아국의 병력이 그곳에 있다면, 될 수 있는 한 그들을 구하는 것이 군대의 의무요. 게다가 조종사들은 너무도 귀한 자원이 아닙니까.”
손규호는 저 사람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다.
아까부터 있었지만 저자는 상황과 총사령관의 대화 동안 의자를 돌려 객원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상황 폐하의 옆에서….’
굉장히 건방진 놈이다.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 사내가 마침내 회전의자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을 때, 천성이 군인인 손규호조차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절로 느꼈다.
거구의 사내.
일반적인 군인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크고, 근육도 거진 두 배가 많은 맹수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려 군부의 최정상에 서 있는 자조차 본능적인 공포감을 애써 지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반면 해원은 딱히 위압감이 들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그는 당혹한 얼굴로 도리어 저 사내에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
해원이 규호의 얼굴을 보곤 흠칫하며 말을 바꾸었다.
“아니, 뭔 생각인가? 설마 직접 가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당혹한 해원과는 달리 사내는 너무나 당당했다.
“내 손주 구한다는데, 폐하께옵서 말리시겠습니까?”
‘앙왕가의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놈의 손주는 무슨…! 그렇게 따지면 제국의 숱한 신민들이 제각기 족보에 어떻게든 그대를 넣었을 텐데.”
규호는 고개를 저었다.
앙왕가는 아닌 모양이다.
‘모르겠다.’
“그대는 그대의 행동 뒤에 닥쳐올 여파까지 모두 고려했는가? 그대까지 포로로 잡힌다면…!”
어쩐지 익숙한 말이었다.
손규호는 문득 조종사 출격을 두고 논쟁을 벌인 공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 말 못 하고 상관의 논리와 권위에 복종했던 공주와는 달리, 이 사내는 무려 상황의 명령도 귓등으로 듣고 흘리고 있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죽을 수 있으면 딱 좋은 게지.”
어딘가 노인네처럼 말을 흘린 사내가 말했다.
“어쨌든 사령관. 단지 우리가 작전할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 주시오.”
손규호는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상황을 바라보았다.
해원이 체념한 얼굴로 그에게 소개했다.
“사령관… 소개하지. 박성민이라 하네,”
거구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규호는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하는 와중에도, 어쩐지 그러지 말아야 할 기분을 느꼈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무례하다고 느낀 걸까.
정체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건만.
다만 해원은 정확한 소개 대신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네.”
* * *
암스테르담에서 프랑크푸르트 조약국 기지로 복귀하는 기차의 안.
사령관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내’와 독대하기로 했다.
“자네가 그 이라크에서의 영웅인가? 정보총국 소속의?”
“음.”
상민은 규호의 질문에 긍정인지 뭔지 이상한 대답을 주고는 자연스럽게 사령관 책상 위에 있는 땅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보총국 인원은 대체로 꼴통이며 군부, 특히 군 정보국과는 특이한 경쟁심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손규호 사령관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할 말을 늘어놓았다.
박성민이란 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도 충분히 잘 알았다.
고려 역사상 최고의 요원이라는 이 정체불명의 존재는 심지어 최근까지 이라크에서 공주와 알콩달콩한 삶을 살아가던 인물로도 유명했다.
창양 예술의 전당 소속 극작가들이 눈앞의 이 사람의 일대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대체 왜 자꾸 위험한 것에 자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손규호는 솔직한 말로 사내로서 이자의 용맹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그의 장병을 구해준다는데, 건방진 태도 정도야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복귀를 지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네.”
“육상으로 탈출할 생각은 없소. 도나우강이나 아드리아해로 빠져나올 생각이니까. 둘 모두 작전대로만 이루어질 수 있게 해주시오.”
“지독한 침투로만큼이나 지독한 탈출로로군.”
“생각보다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재미가 있지. 사령관께서도 한번 경험해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으실 거요.”
“아마 이십 년만 젊었다면 그대의 말을 들었을 수도.”
“하하하.”
사내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진정된 후에는, 진지한 얼굴로 바뀌었다.
“사령관, 우리의 작전을 보고 배우시오. 언젠간 군에서도 자체적으로 이러한 특수작전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있어야 할 테니까.”
상민은 자신의 행동이 훗날 적진에 침투하는 공수부대나 지금처럼 조종사를 구하려는 파라레스큐 같은 특수부대의 기반이 되리라 확신했다.
물론 그 부대들은 복엽기를 타고 강하하지는 않겠지만.
* * *
인식과는 별개로, 상민은 단지 상현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해원의 말대로 그의 자손은 대체 몇 명일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많았다.
과장 좀 보태서 제국 내에서 거진 백만 명 이상이 상민의 피를 어떻게든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그 하나하나의 목숨을 신경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래 살다 보니, 인연에 대해 어느 정도 맺고 끊을 수 있었다.
그러니 상민은 지금 구출이라는 의도로 자신의 속내를 포장하고 있었다.
이미 전쟁의 시작부터 상민은 정보자산을 동원해 오늘의 계획을 차근차근 수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자신이 참석하면 점정(點睛)되었다.
영웅심리도 뭐도 아니었다.
가능한 일을 실행하는 것은 그저 그냥 업무를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미 영웅이 된 자에겐 역설적으로 영웅심리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상민은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오히려 계획도 없이 홀몸으로 사우드 가문의 성채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더 미친 일일 것이다.
이번엔 현지 협력자니, 정보원이니 하는 자들이 있었으니까.
잔과 자신의 혈통을 물려받은 꼬맹이도 어차피 빈으로 가는 길에 대충 풀어주면 된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가 보자고.”
상민은 보안경을 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기러기 복엽폭격기 양 날개엔 사람이 엎드릴 수 있는 좌석이 생겨나 있었다.
조종사를 실종시킨 작전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비슷한 작전을 하는 것이 불안할 만도 했지만, 조종사들은 전우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거의 전부가 자원했다 한다.
이번엔 대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교외로 침투할 예정이니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래도 명예로운 일이었다.
자원한 조종사들의 선두에는 어딘가 낯이 익은 여자 조종사가 있었다.
얼굴이 초췌해 보이는 그녀가 갑자기 상민을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상황 해원과 황제 해청을 제외하면, 종통이라도 그의 정체를 알진 못했다.
하지만 공주는 아주 어릴 적 과자를 주던 선조의 모습을 기어코 뇌리의 한구석에서 끄집어낸 모양.
“다… 당신은?”
그녀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상민은 그녀를 지나치며, 그녀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주변 사람들이 기겁했지만 상민은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할애비가 먼 손녀 머리 정도는 쓰다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민은 소총과 권총, 석궁이 담긴 가방과 낙하산을 메고 자리에 올랐다.
도이치계나 동유럽인으로 구성된 요원들이 다른 비행기의 날개에 엎드려 몸을 고정시켰다.
아직까지도 상민에게 눈을 떼기 힘들어 보이는 세희가 조종석으로 가 기체를 작동시켰다.
항공폭탄, 선전지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 가운데서도, 어쩌면 후대에 나타날지 말지 모르는 오토 슈코르체니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라면 구멍이 숭숭 뚫린 오스트리아는 필히 사냥꾼에게 사냥당할 운명에 처할 것이었다.
마침내 고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