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지원
대관식만 아직 못 했을 뿐 이제 도이치 왕 프리드리히 2세가 된 프리드리히는 빠르게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프리드리히가 창양이 좋고 베를린이 싫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책임감을 도외시하며 신민들을 버릴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망가뜨린 원흉인 아버지도 죽은 마당에야.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고소하게 여기진 않았지만 비통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복잡미묘한 생각이었다.
안타깝긴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보다 안타까운 건 아마 그가 고려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곳에서 사귄 사람들, 이곳에서 누린 문화들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불가리아의 자애공은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프리드리히야 어차피 심적 거부감이 있어도 언젠가는 왕가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예 통치란 것에 관심도 흥미도 인연도 없는 삶을 살아가다 졸지에 군주가 된 인물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듣기로는 자애공의 옛날 삶은 나름대로 풍족했다 하니, 어쩌면 그곳으로 가는 게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참 비범한 사람이야.’
프리드리히는 숭무감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겨우 한 학기, 그것도 학기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나가니 아쉬웠다.
하지만 숭무감의 총감이 프리드리히의 아쉬움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먼저 특별한 일을 제시했다.
“이번 숭무감 기수에 대해, 특별히 도이치 본토에서 훈련을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이들은 늦든 빠르든 참위 계급을 달고 일선에 나가야 했으니 현지 적응상으로 북도이칠란트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잃을 건 거의 없었고 얻을 건 많았다.
* * *
도이치
베를린.
선친은 베를리너 돔(베를린 대성당)에 유체보존이 되어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선친의 시신을 본 그가 어의에게 사인을 물었다.
“선대왕께서 전선을 직접 순시한 뒤로 몸이 부쩍 쇠약해지셨습니다.”
“유탄이나 파편이라도 맞으셨나?”
“외상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참호병인가.”
참호 안은 정말 지저분했다.
땅바닥은 당연히 지면의 온갖 균과 곤충들, 곰팡이들이 들끓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참호 생활을 하다 보면 그곳에 병사들의 대소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격렬한 전투에 매장하지 못한 시신들이 부패하면 더더욱 끔찍한 상황이 되었다.
가뜩이나 근래에 건강이 나빠졌다는 선친은 그 이후 고열에 시달리다 승하했다 한다.
‘아버지의 병정놀음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군요.’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유언장을 펴 보았다.
듣기론 아버지는 전쟁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유언장을 작성했다 한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때 작성한 유언이 지금까지 있었다면, 프리드리히 2세는 꽤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때는 부자간의 관계가 몹시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최신 유언장의 어조는 담담했다.
부자가 갈등상황에 있었던 것 치고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자신의 권위로 프리드리히 2세의 권위를 세웠다.
그는 도이치의 모든 귀족과 군사들, 신민들이 프리드리히 2세에게 단합하여 복종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매듭짓지 못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길 원했을 것이다.
유언장은 차분한 어조로 쓰여 있었다.
권위와 주권, 경제, 귀족과 종교, 외교의 항목으로 작성된 열두 장의 문서는 군인왕이 스스로 작성한 듯 필체가 날카로웠다.
[위대한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프로이센과 도이치의 정당한 국왕은 내 아들, 프리드리히가 될 것이다.]
[강력한 힘 없이, 평화는 허상이다.
허나 강력한 힘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만큼 나라가 부강해야 하니, 태자는 선후를 적절히 판단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라.]
[도이치는 아직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마을과 마을의 규모가 작고, 산업이 낙후되어 있다. 게다가 융커와 봉건귀족의 세가 강하니, 태자는 이를 적절히 견제하여 중앙집권을 만들어야 한다.]
[유럽의 국왕들은 믿을 수 없다. 또한 공화국의 패당들도 믿을 수 없다. 항상 뒤통수를 맞는 것을 조심하라.]
[선친들께서 말씀하신 좋은 외교란, 고려와 가까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중간에 한 번 어겼으나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너는 다행스럽게도 그러지 않을 것 같으니, 고려가 너의 치세에도 여전히 법규를 준수하고 신의가 있다면 마땅히 우호적으로 지내거라.]
[바이에른 출신의 빨갱이들은 일부 프랑스에, 일부 오스트리아에 넘어갔다. 또한 러시아에서도 구제동맹이라는 세력이 한 번 말소되었다가 다시금 숨어들었다. 호엔촐레른을 위해 이들을 조심하라.]
[군대의 규모와는 별개로 절대 정당하지 않은 전쟁을 하지 말라. 만약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주님의 노여움과 신민의 노여움 모두를 살 것이다. 정의를 등에 업고 방어하는 자는 불의를 가지고 공격하는 자의 열 배에 달하는 역량으로 싸울 수 있다.]
[러시아, 베네치아,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곧 패망할 것이다. 너의 대에서 비로소 전후처리를 논의할 수 있을 터.
허나 기억하라. 지금의 전쟁은 이전과 달라 군주 간의 다툼이 아니다. 전후처리를 한다면 태자는 두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것이다. 상대방을 완전히 와해시키거나, 그럴 수 없다면 용서하여 서로 구원을 씻는 것이다.
당부하건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후자를 택하라. 합스부르크의 인물들은 증오 마땅한 머저리들이지만 오스트리아의 신민들은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언어를 쓰는 자들이다. 때로는 용서가 증오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
“…잘 알면서, 나를 그렇게 대했단 말입니까?”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의 유언장을 찢으려는 듯 두 손에 힘을 꽉 주었으나, 이내 입술을 깨물며 그것을 곱게 말아 품속에 넣었다.
* * *
도이치 중부를 잇는 참호는 견고하고 단단했다.
그리고 이 참호선은 참호선을 우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길이가 확장되었다.
지금 참호선은 현시점 중립을 지키고 있는 보헤미아의 국경선부터 독일 중부를 지나 나사우 공국, 그리고 네덜란드의 국경선을 잇고 있었다.
이제는 그 두께도 상당해져, 참호를 돌파하더라도 공격자들은 다른 참호들이 겹겹이 뒤에 쳐져 있는 것을 보고 학을 뗄 것이 분명했다.
이 어마어마한 길이의 참호선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진격을 틀어막았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군인왕이 고열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르(Sarre, 자를란트) 지방에 대공세를 한 적이 있었다.
나사우는 현 네덜란드의 속국, 공국의 군대는 없었고 네덜란드가 방위하고 있었다.
외젠은 이때 나사우와 도이치 참호의 연결 부분, 그 나약한 곳에 공세를 집중하자는 판단을 내렸다.
선택은 주요하여 프랑스는 뤽상부르며 트리어를 취하고 코블렌츠와 리에주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도이치의 반응도 재빨랐다.
네덜란드는 바스토뉴와 아르덴 숲에 참호를 파냈고, 도이치는 트리어를 내줬더라도 비트부르크라는 작은 마을에 참호를 연결하니, 프랑스는 적의 국왕이 죽은 틈을 타 대공세를 취했음에도 많은 이득을 얻지도 못했다.
전략적으로는 훨씬 불리해진 것은 덤이었다.
공세가 끝나고 보니, 그들은 그들 스스로 더욱 넓어진 전선으로 발을 디밀게 되었으니까.
네덜란드 참호선에는 가뜩이나 십만 고려군이 있었고, 알비온 육군도 이제 완전히 배치되어 퍼져 있었으니, 프랑스 공화국은 이제 인적으로도 열세였다.
‘빌어먹을 고려! 대체 왜 다혈포와 철조망 그리고 참호전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서!’
이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달라진 양상에 각국의 지휘관들은 서로 참호와 상대방의 비겁함에 욕을 하면서도 이 대단한 방어전술을 무력화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만 했다.
전술전략적 가치와는 별개로 병사 개개인들에겐 참호전은 더없이 끔찍했다.
이들에겐 차라리 예전 방식대로 전열보병의 회전을 벌이는 것이 백 배는 더 나았을 것이다.
그때의 전장은 삶과 죽음이 단번에 갈리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엔 편안하게 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참호전은 이전의 전쟁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비인간적이었다.
이곳에 와서 전선을 순시하기만 한 군인왕도 결국 이 우울한 현장에서 병을 얻어 끝내 승하했을 만큼, 이곳의 환경은 열악했다.
총과 대포를 맞은 자도, 병든 자도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오히려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시신이나마 후방으로 가 안식을 취할 수 있으니까.
낮에는 총성과 포성, 욕과 신음, 온갖 소리가 오가는 죽음의 현장이었다.
그나마 잠잠한 밤에도 잠을 못 재우려는 모양인지 간헐적으로 포 사격이 있었고, 야음을 틈타 상대방의 참호를 점령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참호에서는 매일매일이 전쟁이며, 목숨이 오가는 현장이었다.
병사들은 몰려오는 전투피로에 자신들의 참호가 아니라면 포성이 들려도 대충 어디에 쓰러져서 잤다.
병사들은 자면서도 자신들이 내일 평생 불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심한 전상을 입어 후송되는 것을 꿈꾸었다.
국가가 죽음을 넘나드는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오직 있다면 바로 먹을 것을 제때, 싸울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양을 주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조약국에겐 이 기본적인 사항도 사치였다.
비안덴(Vianden) 참호선에서 도이치군 병사이자 연락병 랄프 마이어는 목숨을 걸고 참호와 참호를 뛰어 서신을 전달한 뒤 본대에 복귀해 자신이 받은 식량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이걸 먹고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식량이 다 떨어진 도이치는 이제 일선의 병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군량도 처참했다.
전쟁 초창기, 도이치는 다른 곳은 몰라도 최전방의 군인들에게는 풍족한 식량을 주기 위해 노력했었다.
최전방은 조리할 여유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만큼 육포와 딱딱한 비스킷을 주었다.
약간 후방의 참호로 순환된다면 그때는 중대 단위로 배급된 채소와 고기를 이용해 조리해서 먹을 수 있었는데, 한 명당 이백오십 그램의 고기와 동일한 무게의 채소가 배정되었다.
하지만 1728년 8월이 지나는 시기, 고기의 그램은 불과 백사십 그램이었고 채소도 백팔십 그램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도 고기를 계속 먹을 수 있는 것은, 도이치와 알비온이 우호 관계라 외부의 식량이 조금씩이나마 들어올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절대적 열량 자체가 심히 부족하고, 일선의 병사들이 주린 배를 호소하자 도이치는 머리를 짜내어야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즉위하자마자 구황작물들을 주목했다.
그는 배은망덕하고 더럽게 항문에 감자를 넣고 도망친 전 카나리 대공 후안 1세와는 달리 고려에 제대로 청을 해서 고려가 그간 품종개량을 한 감자와 순무 같은 구황작물들을 들여왔다.
물론 개량된 구황작물을 들여온다고 곧바로 재배 가능한 것은 아니라, 여전히 그것들이 자랄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도이치군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톱밥이나 기타 부산물들을 식량에 넣어 양을 부풀려 먹어야 했다.
“이런 XX, 똥을 못 누겠어.”
도이치군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상실한 채, 식사시간마저 암담하게 보내야 했다.
밥은 중대사항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사기는 바닥을 쳤고, 탈영과 사건사고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적들도 도이치와 비슷할 것이나 적어도 자국 내에서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기에 사정이 조금 나을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땅 자체가 몹시 비옥하니까.
그러나 10월 2일부터 상황은 서서히 바뀌었다.
랄프는 도이치 제93여단 소속이었다.
93여단은 작계상 비안덴 지역을 방어해야 했다.
예전과 같이 프랑스에게 빈틈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 이젠 네덜란드의 28여단이 바로 옆에 있었다.
10월부터 전선이 보강된다는 소식과 함께, 이제 드디어 도이치 영내에도 고려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이치 93여단과 네덜란드 28여단의 틈바구니엔 이번에 새롭게 훈련된 고려군 17여단이 끼어들었다.
도이치군들은 추레한 자신들과는 달리 총도 번듯하고 철모도 쓰고 군장도 제대로 된 인간들이 들어오자 일단 경계와 질투심부터 품었다.
‘흥, 니들도 곧 이 똥통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악취와 병을 달고 다닐 거다.’
물론 고려인들도 사람이니 이 열악한 환경을 좋아하진 않았다.
총과 대포를 맞으면 죽어 나가는 것도 다른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고려군은 다른 나라들이 보기에 기형적으로 발달한 공병부대를 통해 자신들이 머무는 전선 후방에 대대적으로 보급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도이치와 네덜란드엔 철도기반이 꽤 충실하게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그것도 모자라 포격 사거리가 닿지 않는 곳이라면 모세혈관마냥 단선이라도 철도를 이어대었고 심지어 얇은 시내와 개울에도 임시로 교량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는 이후, 조약국 최대 항구인 암스테르담에서 어마어마한 물량의 보급작전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본격적인 지원’의 시작이었다.
연락병 랄프는 도이치 장교의 서신을 품고 고려군 영역 내의 참호로 달려갔다.
― 타타타타
막 전투가 일어났는지, 고려군 참호도 몹시 시끄러웠다.
하지만 쉴 새 없이 퍼붓는 고려의 신형 기관총, 아마 자우어 450식이라고 들은 기관총은 적에게 거대한 공포심을 불어넣었다.
“일단 대기해라.”
튼튼히 보강된 참호 안에서 망원경을 보며 적병의 약진을 바라보던 고려군 장교는 마침내 서 있는 프랑스군이 보이지 않자 한숨을 돌려 도이치군 장교의 서신에 답장을 보냈다.
“그대의 도이치군 장교에게 고려어에 됬이라는 글자는 없다고 말해주게.”
미친놈인가, 랄프는 목구멍 바깥까지 튀어나온 욕을 억눌렀다.
“…알겠습니다.”
“흠.”
하지만 고려군 장교는 랄프를 돌려보내기 전에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제일 위험한 중대 연락병치고는 영양 상태가 불량하군.”
“…….”
“고려어에 나름대로 능통한 그대가 죽으면 우리도 골치 아프지. 자, 이걸 받아서 속을 든든히 하게. 다음 연락 때도 보지.”
랄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괴상한 문법성애자를 욕했지만 자신의 손에 들린 큰 통조림과 기다란 막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랄프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려군 장교에게 경례를 붙이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걸 자신의 참호에 가져간다?
당연히 굶주린 늑대들이 득달같이 뺏어 먹을 것이 분명했다.
전우는 소중한 존재였지만, 지금 그는 그 소중함을 느끼기엔 너무 배가 고팠다.
랄프는 복귀하지 않고 고려군 참호 내에 걸터앉아 대검으로 통조림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 안의 내용물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호주머니에서 꼬질꼬질한 스푼으로 음식을 떠서 먹었다.
‘고기다, 고기다!’
첫맛은 조금 짭짤했다.
하지만 뒷맛은 황홀했다.
분명히 부드러운 고기의 맛이었다.
랄프는 한 스푼을 떠먹고 통조림의 겉면을 한 번 보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표지의 글자는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수햄
랄프는 이후로도 허겁지겁 통조림의 고기를 떠먹었다.
“크흡, 컥, 쿨럭, 쿨럭.”
그 와중에 너무 급하게 먹었는지, 그는 목이 메어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려야 하기도 했다.
“저런. 물이라도 좀 마시쇼.”
바로 앞, 참호의 지지대를 밟고 선 고려군 병사 하나가 자신의 뒤에서 쿨럭거리는 소리에 등 뒤를 바라보더니 이내 랄프에게 수통을 끌러 주었다.
“Danke, 아니, 고… 고맙소.”
랄프는 그제서야 생각했다.
사실 이곳의 병사들도 잠재적 그의 식량의 적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서야 양팔로 자신의 통조림과 아직 포장지를 벗기지 않은 막대기를 가렸다.
랄프의 모습을 본 고려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안 뺏어 먹으니 걱정 마쇼. 뭐 쇼콜라야 우리도 특식이긴 한데, 일주일에 한 번은 주니까. 댁네만큼 간절하진 않소.”
“쇼… 쇼콜라?”
“그래요 그거.”
고려 병사의 말 중 막대기의 이름만을 간신히 알아들은 랄프는 그제서야 통조림을 전부 먹었다.
“아, 거 깡통은 주쇼.”
“?”
빈 깡통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랄프는 고려군 병사가 참호 밑바닥에 깡통을 쌓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여기가 워낙 습지여서 말이지. 군화가 젖으면 발이 썩어들어간다고도 하고…….”
어깨를 으쓱한 고려군 병사가 다시금 지지대로 돌아가 소총을 겨눌 때까지 랄프는 고려군 참호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몰랐던 사실이다.
보통의 참호는 바닥이 질퍽질퍽했다.
비가 오면 배수시설이 따로 없기도 했고, 땅을 파면 알아서 물이 나오는 곳도 많았다.
이러한 곳을 다니다 보면, 참호족에 걸려 발가락과 다리를 잃는 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고려군은 그 참호의 밑바닥을 아예 깡통으로 하나씩 메우고 있었다.
물렁한 지반을 통조림으로 메우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그 귀한 통조림이 얼마나 된다고.
남들이 들으면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러나 랄프는 그제서야 자신이 디디고 선 땅부터 저 멀리까지 차곡차곡 만든 깡통 참호 바닥을 볼 수 있었다.
* * *
고려의 지원은 도이치의 사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11월이 넘어 12월이 되자 도이치군은 무려 전쟁 초창기 수준의 군수품을 보급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여전히 고려가 자국군에게 보급하는 수치에 한참 모자랐다.
연락병 랄프 마이어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했다.
11월 5일의 일이었다.
고려군과 같이 싸우게 된 지 이제 막 한 달이 넘은 시점, 그는 고려 17여단 중 친해진 자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랄프는 자신의 적절한 친화력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이번의 보상은 평소보다도 좀 더 많았다.
“거, 마이어 씨. 돌아가지 말고 저녁 함께 들지.”
“오늘 뭔 날인가?”
“성탄절.”
“성탄절?”
“아, 유럽의 성탄절 말고 고려의 성탄절. 태조께서 탄생하신 날이니.”
기독교인 랄프에겐 약간은 위화감 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특히나 먹을 것을 준다면 더더욱.
랄프는 기대감에 손을 비볐다.
“호… 혹시 오늘 저녁엔 뭐가 나올지 물어봐도 되겠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보내기 전에 여기에 왔거든. 그래서 북려의 농장주들이 우리 군을 위해 직접 철 늦은 추수감사절 선물을 보내줬다더라고.”
고려인들이 열심히 쑥덕거렸다.
“칠면조 백숙은 또 처음인데 말이야.”
“안에 찹쌀은 제대로 들어가 있겠지?”
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랄프는 곧이어 이 최전방 참호선에 거대한 통을 끌고 나타난 일단의 무리를 보고 경악했다.
지금 형세론 조약국이 고지대를 완전히 점유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긴 했지만, 여전히 최전방은 위험했다.
그러나 고려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특식을 주지 않는 적이 없었더랬다.
“자, 자 배식 인원 빼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정찰 첩보는 프랑스 놈들이 근시일 내로 공세를 펼치지 못할 거라 했지만 그래도 칠면조 백숙 먹다 포탄 떨어지면 개죽음이야, 알간?”
“예, 알겠습니다!”
랄프는 고려군 틈바구니에 껴서 배식을 받았다.
고려군 취사병은 받는 사람이 대놓고 도이치 군복을 입고 있어도 별말을 하지 않고 국자로 국그릇에 백숙을 떠주었다.
백숙에는 몽둥이만큼 큰 칠면조 다리에 살이 가득 붙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네소타 산 인삼, 대추와 황기, 둥근파와 대파, 찹쌀이 모두 있었다.
“끄윽, 흡, 흑.”
뜨끈한 국물을 마신 랄프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울음소리에 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