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39화 (439/653)

의무

고려가 본격적으로 지원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그 의미를 아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모두가 이런 규모의 전쟁은 처음이었다.

봉건주의적 질서에서의 전쟁은 규모가 조금 크더라도 민간에는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국민개병제로 어마어마한 군인을 동원하기 시작한 뒤, 전쟁에 참여한 각국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반에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중 제일은 식량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지 한 해가 넘어가자, 각국은 그동안 모아왔던 군량들이 거의 동이 나는 것을 느꼈다.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하루하루 생사를 넘나드는 군인들은 막대한 식량을 소비해야 했다.

전투력은 충분한 열량에서 나온다.

이를 단지 정신력으로 극복하려는 지휘관들은 요행으로 만사를 해결하려는 부류의 족속들이었다.

유럽의 군주와 지휘관들도 알긴 알았다.

전쟁에서 군량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고대 로마나 그리스 이전부터 누누이 강조되었던 사항.

하지만 참호에 전개된 병사의 수가 수십만, 지금껏 소모된 보충병과 투입 준비를 하는 예비군까지 합하면 이제 금방 백만 단위에 진입하려는 지금은 과거와 차원이 다른 단위의 식량이 필요했다.

또한 애초에 징집된 군인들은 대다수가 노동자 혹은 농민이었다.

당연히 각국은 동원된 병력만큼의 건장한 남성을 일터에서 잃었다.

그 말은 다른 일을 하고 했던 인력들이 원래 일에다가 더해 농사나 험한 일들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인들, 아이들, 노인들.

이들의 생활환경도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전쟁은 특정 기술의 발달을 촉진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전체적인 후생은 단연코 낮아지는 것이다.

이 같은 피해는 대부분의 나라가 동일했다.

물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자는 도이치였다.

“…….”

“…….”

예전에 한번 그를 불러다 장남의 일에 대해 항의한 이후, 거의 얼굴도 보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주도이치 고려 대사는 침묵 속에서 먼저 상대방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인상을 찡그렸다.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이 의례적인 대답 이후부터 고려 대사는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국왕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분명히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게 분명했다.

‘고얀….’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대사의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근래에 들어 그의 몸은 온갖 곳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물론 고통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여러 만행들을 옹호해주진 않았다.

그는 장남도 모자라 아내인 왕비도, 심지어 딸과 신하, 병사들에게 폭행을 가했으니.

그러나 그런 그라도 실낱같은 이성은 있었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려의 도움이 필요하오.”

‘이 고집 센 인간이 드디어 도움을 청하는구나.’

실로 감개가 무량하지만 고려 대사는 그 말을 듣고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외교관은 그런 걸로 일희일비하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 감정절제도 딱히 필요 없었다.

도이치의 전황은 그만큼 썩 좋지 않았으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벌컥 화를 내려다 참았다.

“후우… 당장은 백성과 군인들을 먹일 식량이 필요하오.”

도이치의 농업 잠재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지금 도이치의 영토는 이미 그들 역사 속에서도 가장 넓었다.

비옥하기로 소문난 프랑스나, 혹은 그 유명한 흑토지대(초르노젬)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식량의 자급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잠재력 말고 지금 당장 이 시점을 바라보자면, 농업은 도이치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일단 그 광대한 영토 중 일부는 적의 수중에 있다.

적의 수중에 있지 않더라도, 전쟁터가 될 곳은 이미 사람들이 피난해 있었다.

전쟁터가 아닌 지역들, 즉 중북부와 북부는 사정이 좀 괜찮았다.

하지만 이곳은 이곳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다.

엘베강을 기준으로 동북부는 전통적인 프로이센 공국의 영토였다.

이곳에 살아가는 보수파 토지 귀족 세력 융커들은 아무리 기가 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라도 완전히 부리지 못했으며, 조세저항도 꽤 컸다.

반면 엘베강 서부, 즉 일반적으로 도이칠란트라 불리는 가장 넓은 지역, 작센이니 튀링겐, 베스트팔렌은 애초에 지금 도이치 땅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튜튼 기사단에서 프로이센 공국으로 바뀐 것은 이백 년 전이지만 프로이센 공국에서 왕국, 그리고 국호를 바꾸어 도이치 왕국으로 변화한 시점은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강국이 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우리도 북대동양 조약의 가입을 공식적으로 청하는 바이오.”

“본국에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평소에 고려의 북대동양 조약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조약이 어떠한 구속력을 지니고 있는지, 이 혼란스러운 유럽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사람이 청해야 했다.

“…아들은 잘 지내고 있소?”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는 주도이치 대사였으니까.

하지만, 대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태자는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주도이치 대사가 슬쩍 눈치를 보며 왕자가 아닌 왕태자(Kronprinz)라 말을 했음에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건저문제를 운운하며 아직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우구스트 빌헬름에게 왕좌를 물려주겠다고 한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외부의 적은 가족관계도 다시금 봉합할 가능성을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열여섯이니 이제 사내로서 잘 행동하겠지. 조약과 기타 사항을 논의하도록 창양에 사신을 보낼 테니, 그 아이가 왕족으로서 그들을 인솔토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 * *

프리드리히는 신을 믿지 않았다.

개신교적 문화에서 자랐지만, 그는 여전히 어릴 적부터 신의 존재나 인간의 인식에 대해 회의감을 품었다.

어둡고 칙칙하며 우울하며 끔찍한 베를린에서 그와 같은 처지로 살아본다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머니도, 누나도 그를 가정폭력에서 구원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폭력 앞에 어린아이는 발가벗겨진 채로, 끊임없이 학대당했다.

그는 몇 번이고, 차라리 일찍 요절했다는 형들이 살아있었으면 하고 생각도 해 보았을 정도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프리드리히가 특출나게 영민하여 커가면서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법을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재능과 책임감으로, 그는 아버지 앞에서 믿을만한 장남을 연기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는 열심히 군사적 자질을 배웠다.

하지만 상황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신체적, 영혼적으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구원자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나이가 든 그의 고모할머니가 베를린에 온 그 순간을 기억했다.

베를린은 귀빈의 방문에 들썩였었다.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잔혹했던 아버지도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귀빈 맞이에 신경 쓰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었다.

[고려의 황후이자, 로마의 임페라트릭스이며, 도이치와 프로이센의 공주인 루이제 해 아말리에 폰 호엔촐레른 전하께서 드십니다!]

고모할머니는 초상화로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 아름다움은 워낙 유명해서 증조할아버지께선 할머니의 초상화를 베를린 궁전 이곳저곳에 붙여놓았다 했다.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드신 할머니는 젊음의 아름다운 대신 온화함과 자비로움, 위엄이 고루 자리잡혀 있었다.

할머니 앞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압도당하는 것을 지켜본 소년은 문득 그 동아줄을 잡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모할머니의 귀갓길에 맞추어 도주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폐태자를 한다고 협박을 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을 믿지 않았던 어린 소년에게도 고려는 천국이었으니까.

도시는 아름답다.

예술의 전당에선 그가 사랑하는 온갖 종류의 가극과 음악회 등을 볼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사 먹는 고려의 식사는 오히려 근검절약하느라 칙칙하고 밍밍하며 가끔 흙 맛이 나는 베를린 궁정의 음식보다도 더 나았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썩 인기가 없는 감자도 훨씬 더 맛이 있었다.

아마 농업기술력이나 종자 개량의 수준이 달라 그럴지도 모른다.

프리드리히는 길거리 음식이나 다름없는 회오리감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아버지도 결국 우물 안 개구리였다. 절반만 맞았어. 강국의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선, 일단 강국으로 불릴 수 있을 만한 국가로 번영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모국에 대한 상념을 하는 그의 손에는 항상 토마토나 치즈, 소금과 같은 양념이 발린 회오리감자 꼬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자유로운 학풍과 교육이었다.

중학교에 보내겠다는 루이제의 판단은 주효했다.

학대로 인해 심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같은 나이 때의 또래 애들과 어울리며 천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창양황립중학교는 황실 및 왕실들, 상류층 자제들의 학교로 유명하니, 프리드리히 2세는 배려 속에서 굉장히 편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드디어 졸업이다!”

“야, 프리드리히 여기로 와. 사진사를 불렀으니 헤어지기 전에 사진이나 한번 찍자.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키가 작고 왜소한 프리드리히에 비해 그의 친우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컸지만, 그래도 그는 낑겨서라도 마지막 추억의 흔적을 남겼다.

“이제 뭘 할 거야? 전하?”

프리드리히는 또래들 중에서 유난히 친한 친구가 있었다.

열일곱의 최세환이 그랬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그러하듯, 둘은 서로에게 허물없이 지냈다.

“뭘 할지 모르겠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더 공부하기 위해선 대학에 들어가야 했다.

세환이 넌지시 운을 띄워 보였다.

“나는 대학에 가겠지만 너는 숭무감에 가는 게 어때?”

“…….”

원래 같았으면 프리드리히는 성질을 냈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에게 해방되어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그는 다시는 군복을 입거나 요란하게 병정놀이를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세환의 말에도 딱히 아무런 분노를 표출하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나라가 전쟁터이니 그럴 수밖에.

프리드리히는 책임감이 강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태자로 남을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도이치가 전화에 휩싸였다는 것을 들은 이후부터 줄곧 밤잠을 설쳐왔다.

이 전쟁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고, 어린 자신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교육은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은 창양에 거주하며 다른 인문학적 소양이나 취미 생활들을 풍부하게 누릴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선, 예전의 악몽과 같은 교육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심적 여유가 충분했다.

‘숭무감 사관학교라… 명장들의 고향이랬지. 당장 승리공 김홍도 그곳 출신이 아닌가.’

북려엔 자제감 연방사관학교가 있고, 이윤신이 그곳 출신이라지만 아무래도 환경 자체는 숭무감이 더 나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실시한 군인 교육엔 여러 가지가 있었다지만 제대로 현대전을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의미였다.

마침내 프리드리히의 입에서 긍정의 표시가 떨어졌다.

“생각 좀 해 보고. 내가 아무리 왕족이라지만 숭무감은 고려인이 아닌 외국인이 함부로 입학하긴 어려우니까. 추천서와 신원보증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신원보증? 우리 아버지가 해줄 수 있겠는데.”

세환의 집안도 그를 창양황립중에 보낼 만큼 대대로 변호사로 유명한 집안이라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됐어. 할머니께 부탁드려보지.”

“…음. 그래.”

황후 이야기가 나오자 친우는 더 이상 강권하는 것을 내버려두고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 * *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그로서는 꽤 오랜만에 창천궁에 들렀다.

고모할머니는 오찬 시간에 들라 하셨다.

원래 고모할머니는 그를 안타까워하여 매번 저녁 식사나 오찬에 초대하여 안부를 묻곤 했다.

프리드리히도 해청이나 해원 등과 같이 식사를 한 적도 수십 번에 달했다.

황궁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하도 넓어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곤 여긴 더할 나위 없이 경치와 풍광, 궁전의 건물들 배치가 좋았다.

‘내가 만약 나중에 도이치의 왕이 되고 국가를 안정시킨다면, 변변찮은 베를린에도 도이치에 어울리는 궁궐을 지을 거야.’

어린 마음에 가끔은 궁궐의 이름을 미리 상상했을 정도였다.

마침내 프리드리히는 대전의 앞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들었다.

하지만 그를 소개해야 할 내관이 낭패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음… 전하.”

프리드리히는 내관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그것이.”

대답은 내관이 하지 않았다.

― 지금 뭐라고 했느냐!

― 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구요! 전 알아서 날아갈 테니까.

― 지금 전쟁이 장난인 줄 아느냐?

―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러고 있죠! 나라를 지키는 데 성별이 중요한가요? 이 나라의 공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우리의 청년들이 외국의 땅에서 스러져 죽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바라만 봐야 하나요?

― 말은 똑바로 하거라. 넌 지금 신민들이 아니라 그놈의 안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더냐!

안에서는 두꺼운 나무 문의 바깥까지 들릴 만큼의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졸지에 황실의 싸움을 엿듣게 된 프리드리히도 당황한 얼굴을 지었다.

이윽고 화려한 장식을 한 나무문이 열렸다.

― 끼익

두 손으로 힘차게 문을 열고 나온 여인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흠칫 놀라더니 오촌의 얼굴을 확인하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프리드리히가 마주 고개를 숙여 그 인사를 받아주기도 전 잔뜩 화가 나 있는 해세희는 성큼성큼 대전을 걸어 나갔다.

프리드리히는 머뭇거리며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다.

황제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고, 태자 해청과 고모할머니의 표정도 썩 좋지는 않았다.

“어 왔니. 앉아라.”

물론 프리드리히는 이 ‘화목한’ 가정을 동경했다.

세상에 자식이 아버지와 의견 차이로 언쟁을 벌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건전한 가정인가.

그의 아버지였으면 언쟁은커녕 두꺼운 참나무 매를 휘둘러 다리 하나를 아작냈을지도 몰랐다.

어색한 식사 시간 동안 식탁 위에는 평소와 같이 다정한 말이 오가진 않았다.

해원은 딸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었다.

해청은 자기 자신이 동생의 후원자였으나, 그녀가 비행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개편되고 있는 공군의 조종사로 가겠다고 주장할 줄은 몰라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루이제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상태였다.

문득 외인을 앞에 두고 추태를 부렸다 생각했는지, 해원이 비로소 뒷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왕태자. 잘 지냈는가?”

“폐하의 배려 덕에 그러했사옵니다.”

“보기가 좋구나. 이제 헌앙한 청년이 다 되어가고 있어.”

다행히 프리드리히의 존재 덕에 화제 변경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 왕태자. 숭무감에 입학을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대의 생각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알겠다, 짐이 일러두도록 하겠다.”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일 처리는 빠르고 신속하게 끝났다.

현 도이치 왕을 못마땅해하는 해원은 프리드리히 2세에겐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소식이 있다. 도이치 왕이 그대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 같더구나. 그대를 이번 도이치 외교사절의 명목상 통솔자로 임명했으니 그대의 법적인 지위를 박탈하진 않을 게야.”

좋은 소식이긴 좋은 소식이다.

수틀리면 고려에 정착하고 살 계획이었던 프리드리히로서도, 가끔은 어머니와 누나를 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마냥 쉬이 넘어가진 않았다.

한동안 신변잡기를 묻던 해원이 문득 물었다.

“왕태자.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딸이 아녀자의 몸으로 전쟁에 나가겠다고 하는 걸.”

프리드리히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하지만 고모할머니와 황태자 해청도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그가 평소에 생각한 것들을 담담히 내뱉었다.

“통치자는 국가의 첫 번째 심부름꾼입니다. 통치자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일해야만 하고, 통치자의 자녀 또한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해원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종손에게서 말을 듣고 그제서야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정한 듯 루이제가 해원에게 말했다.

“세희가 알아서 하게 냅둬요.”

“…딸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아비가 되게 할 작정이오?”

“나라고 왜 딸아이를 전쟁에 내보내고 싶겠어요. 하지만 그 아이는 이미 그 청년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자신의 연인이 전쟁터에 혼자 끌려가는 걸 감내할 수 없겠죠.”

“…….”

“혹시 잊었나요? 나도 예전에 프로이센 근위후사르 명예연대장이었는데.”

“내가 그걸 잊었겠소? 하지만 그건 정식편제가 아니잖소.”

“하지만 그때 나는 정말 전쟁이 터진다면 왕실의 인원으로 기꺼이 참전하겠다는 결의까지 했는걸요. 그리고 지금도 난 만약 고려가 정말로 누란지위에 몰린다면 기꺼이 나아가 싸울 자신이 있어요.”

“난 이미 예순이고 당신도 곧 예순이오.”

“그럼 당신은 나나 고려를 위해 싸우지 않을 거예요?”

말싸움으론 해원은 루이제를 거의 이겨본 적이 없었다.

황제는 루이제의 말에도 한동안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나 표정은 이미 조금 풀린 듯했다.

“알겠소. 저 아이는 이제 언제고 멋대로 비행기를 몰아 대동양을 건너서라도 자기 뜻대로 하려 들 아이지. 그럴 바엔 차라리 제대로 임명해야 하겠소.”

‘정말 내 아버지가 저분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네.’

프리드리히는 타인의 생각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해원을 흘깃 쳐다보며, 자신이 왜 성씨가 해씨가 아닌 호엔촐레른인지 원망했다.

* * *

개천 453년

가을학기(남려 기준 3월부터 7월까지).

숭무감 3군사관학교.

전쟁이 터진 이후, 숭무감의 육해공 3군사관학교도 시대상 굉장히 빡빡한 교육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본래 4년 동안 수료할 과정은 이제는 거의 2년 내로 수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생도들은 정신없이 체력단련과 공부 등을 병행해야 했고 밤마다 쓰러지듯 잠들었다.

고려는 지금 갑자기 팽창한 군 규모에 비해 장교단의 숫자는 심히 부족했다.

숭무감과 자제감의 사관학교로는 심히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후에는 전시현지임관을 추진하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거시적 전술을 이해할 수 있기에 현지임관자들도 나중에는 이곳에 와서 수업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도 굉장히 힘든 시기에 숭무감에 들어왔지만 오히려 조기졸업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을학기를 마치기 전에 비보를 들었다.

수업시간 교실에서 그를 불러낸 교장은 교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들에게로 그를 안내했다.

평소 생도들의 출신과 상관없이 하대를 하던 교장도 그 순간만은 존대를 했다.

“전하께서 보셔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교장실에 들어간 프리드리히 2세는, 그가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는 도이치인들을 발견했다.

“그대들은?”

몇 년 세월이 지났다고, 이들을 어찌 다 잊어버리겠는가.

대부분은 베를린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아버지의 곁에서.

프리드리히는 대표로 보이는 이가 그에게 아뢰기 전까지 영문을 몰랐다.

“선왕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새로운 왕 만세(Der König ist tot, es lebe der König).”

국가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문장에 그제야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도이치의 두 번째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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