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국 중 최약체
개천 453년. 6월 21일.
카스티야령 오랑을 거친 고려는 첫 번째 대규모 전투인 알제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중요한 요충지이자 교두보인 알제를 확보했다.
고려도 피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무기의 질과 양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같은 화약의 시대에선 다른 이도 총을 쏜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더군다나 초창기 베네치아인들은 고려가 자신들의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를 완전히 박살 냈다는 것에 울분을 토하며 격렬하게 싸웠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알제에 있는 프랑스인들이 고려를 도왔다.
알제의 총독부에서 고려군 사령관은 떨떠름한 얼굴로 프랑스인 대표에게 악수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하하,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고려와 프랑스는 1차 추심전쟁 때 프랑스령 알제에서 한바탕 치고받은 적이 있었다.
이후 프랑스인 대다수는 베네치아령 알제를 떠나 본토로 돌아갔지만 삶의 터전이 남아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들은 처음, 베네치아와 꽤 친밀하게 협조했던 것 같았다.
베네치아로서도 팔 할이 넘는 원주민 무슬림들 사이에서 소수의 동질적 종교를 믿는 ‘문명인’들을 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지배계급만 베네치아인들이 되었지 여전히 도시의 중심은 프랑스 상인들이 꽉 쥐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 후 이들의 대우는 조금씩 달라졌다.
군비는 아무리 많이 걷어도 모자라지 않았다.
기껏 논밭을 일구는 무슬림들을 착취해 보았자 알제 경제를 통제하는 이들은 프랑스인들이었으니.
그러니 베네치아인들은 최근에 와서는 과거의 협력자들조차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이에 알제의 프랑스인들은 본토인들과는 달리 베네치아가 아덴 해전에서 대패한 것을 몹시 고소하게 여겼다.
이들은 전후 프랑스가 어떠한 처지에 놓일지는 몰랐지만, 만약 기회가 된다면 알제가 독립국화되는 것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사실 알제의 프랑스인들은 따지고 보면 프랑스 혁명과는 별 상관이 없는 왕당파, 혹은 중립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어차피 베네치아의 육상병력은 마라케시에 상륙하여 동진하는 고려의 병력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몸값을 조금이라도 올리고자 방어전을 치르는 베네치아 군대의 배후에서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탄약고와 식량창고 등에 사보타주를 하니 고려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알제를 점령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말씀드리자면 알제가 독립국화되는 것은 우리의 계획에 있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자, 자 사령관님 여기 한 잔 드시지요.”
사령관의 말을 들은 알제 프랑스인 대표가 잇몸이 드러나게 웃어 보였다.
‘그 독립국에서 너희들의 지위가 과연 예전 같을지는 모르지만.’
사령관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프랑스인들이 건네주는 와인을 사양했다.
알제 프랑스인들은 본토인들과 다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본토의 프랑스인들이 섞여 있어 매사에 조심해야 했다.
* * *
이후 6월과 7월 초 동안 고려는 빠르게 전선을 돌파했다.
고려는 상륙작전을 시도한 5월 초 이후, 거의 삼십만에 육박하는 육군 병력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고려도 이 정도 규모의 원정이 처음이라 많은 부분에서 잡음이 있었지만 이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다.
알제를 꽤 손쉽게 얻은 이후, 고려는 요충지였던 알제와 후방의 다른 도시들을 비교해보면 후자의 방어선이 너무 허술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속도전을 벌였다.
북아프리카가 워낙 넓어서 속도전이 속도전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넓다는 기준은 방어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고려군은 내륙으로도 소수의 조공 부대를 보내 진격로를 하나 더 만들었다.
세티프를 거쳐 바트나로 향하는 이들은 훨씬 더 황량하고 사막 같은 곳을 진격해야 할 것이다.
기후 적응을 위해 고려는 택주 출신이나 중려 황무지 인근 출신, 남려 아타카마 사막 출신의 장병들을 선별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보급선이 길어진다는 단점은 여전했다.
반면 이 새로운 진격로는 베네치아가 서쪽이 아니라 남쪽과 같은 다른 곳을 신경 써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되돌아올 것이었다.
더군다나 피지배자들의 게토를 해방시키며 가는 고려군은 현지인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힘든 와중에도 그들은 자체적으로 물품을 기부하기도 했다.
몇몇은 총기를 준다면 같이 싸우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알제 프랑스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고려인들은 베네치아에게서 노획한 무기들을 엄선한 이들 손에 쥐여주었고, 따로 독립여단을 꾸려 진격하도록 시켰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니 베네치아는 확연한 열세의 입장이 되었다.
‘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일시적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그 전날의 감정이 희석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복수는 이상이요, 전쟁은 현실이다.
전방에서는 압도적인 화력 차로 베네치아인들이 번번이 패배하여 와해되는 일이 생겼다.
베네치아인들은 지금 남부 도이치에서 이루어지는 수준 높은 참호전을 구경하지도 못했기에, 방어전략이 너무 허술하고 어설펐다.
반면, 고려는 다혈포의 명백한 상위호환인 자우어 450식 반동기관총을 미친 듯이 찍어내 일선에 보급하고 있었다.
이미 공격부대의 중대급 규모는 최소한 한 정의 자우어 450을 들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대체로 평탄한 지형에서는 말로 대포를 움직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그럼에도 고려는 견인기를 찍어 나르기 시작했고, 견인기를 움직이기 위해 강철로 된 원통에 휘발유까지 동봉해서 보냈다.
지금 베네치아의 영토에서 싸우는 이 전쟁조차 보급의 능력은 고려가 확연한 우위에 있었다.
보급뿐만 아니라 인력도 그랬다.
방어전을 수행하기 위해선 전면 부대에 지속적으로 인력을 충원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베네치아는 전방 부대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국동맹의 다른 일원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인력을 공급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장비와 규율, 훈련도는 형편없겠지만 허수아비라도 세워서 참호에 박아 둔다면 공격자에겐 나름대로 골칫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래도록 그 땅을 통치한 왕조였고, 그만큼의 민족적 동질성을 어느 정도라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자체 인구수도 북아프리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다른 전통적 나라들과는 사회 구조가 다른 베네치아는 국민개병제니, 예비군이니 하는 제도를 제대로 시행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토인들이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기꺼이 총을 들어 예비군이 되겠는가.
오히려 그들의 손에 총을 쥐여준다면 베네치아 병사들의 뒤통수에 납탄을 박아넣기 위해 무던히 노력할 것이 뻔했다.
고려의 통제를 따르고 있는 독립여단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아니 모래폭풍처럼 커져 가는 것이 이 사실을 증명했다.
7월 26일부터 베네치아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카이로가 함락되었다.
지금껏 헌신적으로 방어하던 베네치아령 이집트 방면 사령관 안드레아 피사니가 마침내 어딘가에서 날아온 총탄에 전사했고, 그 군대는 와해되었다.
이집트는 아랍 연방의 군대와 이탈리아, 에티오피아군을 모두 맞이했다.
카이로는 억압자에서 해방되었고, 억눌려왔던 이집트인들은 지금껏 베네치아에 기생해 왔던 친베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알 가잘리 왕조도 위태로웠다.
이집트인들에게 지금껏 실망과 분노만 안겨주었던 알 가잘리 왕조의 유일한 희망은 술탄의 그 수많은 자식들 중 단 둘뿐이었다.
개혁을 선도했던 바시르 왕자, 그리고 바시르 왕자가 죽자 그 의지를 이어받은 무자파르.
둘 중 하나라도 집권을 했다면, 알 가잘리는 아마 명맥을 이어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둘 모두 결과적으로는 베네치아에게 살해당하자, 민중들은 알 가잘리에 대한 모든 긍정적 감정들을 잃어버렸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왕조는 필히 몰락할 터.
혹자들은 아랍 연방에 합류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랍 연방은 괜스레 화근을 자초하진 않았다.
땅덩어리는 아랍 연방이 넓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는 비옥한 나일강을 낀 이집트인이 훨씬 많았고, 이에 아랍 연방에 이집트가 참여한다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주도권은 메카와 메디나, 하일 오아시스 등이 아니라 카이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집트인들과 베두인이 같은 아랍어를 쓰는 것 빼고는 민족적으론 그다지 썩 친하진 않았던 것도 있었다.
아랍 연방은 현명하게 고려에게 손을 벌리기로 했다.
“추후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이집트엔 고려의 군정이 실시될 것입니다.”
* * *
8월 초. 고려군은 안나바와 바트나를 함락시키고 튀니스 근처의 베자와 캐루안으로 가는 관문인 테베사를 확보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베네치아 안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고려가 베네치아를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는 암담한 전황이 알려지자 지금껏 억눌려 있던 게토의 사람들이 마침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가 베네치아의 상징을 불태운 것은, 베네치아에게는 큰 분노를 일으켰지만 베네치아의 피지배인들에겐 희망의 불길과도 같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베네치아는 이런 소요와 폭동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특히 절대다수를 자랑하는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해, 베네치아가 사실상 수도 튀니스를 제외하고는 자국 영토 내에서도 행정과 군사작전을 벌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소요나 폭동 수준이 아닌, 베네치아 정부에 대한 내란이라고 칭해도 무방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외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는 꼴이 되었다.
베네치아가 자중지란에 휩싸이자 이 틈을 타 고려와 고려의 동맹국들은 기뢰로 인해 사실상 마비가 된 다른 항구도시나 봉기가 일어난 내륙 도시들을 건너뛰고 수도 튀니스를 사실상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8월 17일.
너무나도 허망하게, 튀니스가 항복했다.
베네치아인들이 꿈꾸는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제국은 모래성과 다름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었다.
국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해군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후, 베네치아는 육지에선 고려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은 물론이고 인간 이하로 여겼던 아랍인들과 흑인들도 이기지 못했다.
고려는 자신들 스스로 진정한 공화국인이며 애국자이자 우등인종이라 생각하는 베네토인들이 대거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총과 칼을 거머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한 저항은 없었다.
다가오는 최후에 베네토인들은 자랑스러운 공화국을 수리하거나 함께 침몰하기보다는 앞다투어 배를 빠져나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고려군은 튀니스 안쪽으로 진입했다.
한때 지중해의 패자, 베네치아가 수도를 이전하며 꿈꾸었던 번영과 영광은 더 이상 이 도시에 남아 있지 않았다.
튀니스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호수, 튀니스 호수에는 이미 썩은 시체에서 나오는 악취가 가득했다.
“우욱….”
그 악취는 실로 대단해 고려군은 튀니스 시내가 아니라 튀니스 북동부의 작은 해안도시인 아리아나로 이동해 군영을 펼치고 전후처리를 시작해야 했을 정도였다.
마침, 아리아나에는 베네치아의 가장 저명한 가문 중 하나인 모체니고(Mocenigo)가의 화려한 저택이 있었다.
그곳에서 베네치아의 현 도제, 세바스티아노 모체니고는 항복선언문을 작성했다.
“…이에 베네치아는 어떠한 조건 없이 항복합니다.”
조건이 없는 항복, 즉 ‘무조건 항복’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베네치아로서는 일반적인 항복보다 훨씬 더 까다로우며 더욱 치욕적인 항복은 예상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되니, 그런 예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멸망할 것이다.
도시도 불탄 마당에, 튀니스가 저항한다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진사는 득의만만한 얼굴의 북아프리카 사령관 표창진 대장과 반쯤 꿇어 엎드리며 항복선언문을 작성하는 세바스티아노 모체니고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 * *
전쟁이 일어난 지 일 년 하고도 팔 개월 만에 사국동맹의 한 축이 박살 났다.
사국동맹의 반응은 비슷했다.
― 그자들은 우리 동맹 중 최약체다!
해군력을 제외한 분야에서 베네치아는 사실 다른 나라들보다 확연히 열세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까보니 그 해군력조차 이제는 고려의 새로운 전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전력이 되어버렸으니.
3국은 무너진 베네치아를 보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지만 지금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다만 먼저 무너진 베네치아를 깎아내리며 이 상황을 자국민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3국은 빈에서 서둘러 회의했다.
지중해가 완전히 뚫려 사실상 적의 함선이 제 앞마당마냥 돌아다니는 꼴이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육로는 아직 멀쩡했다.
우리도 반격해야 한다.
유리한 고지를 점해야 한다.
대사들은 촉박한 전쟁의 흐름을 인지했다.
프랑스 대사가 입을 열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같이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었어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참호전에 말려들어 가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고려와의 불화를 어찌 매듭지은 것으로 보였다.
도이치도 소위 말하는 북대동양 조약기구, 타수(TASU)로의 가입이 목전에 있다 들었다.
“고려가 도이치에게도 본격적으로 지원한다는 소문도 들으셨습니까?”
“…예, 본격적이라는 말을 썼더군요.”
네덜란드, 알비온, 이라크, 아련, 오스만, 그리스, 불가리아,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스웨덴.
무너진 나바르까지 치면 이미 고려는 11개국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도, 도이치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을 하겠다 선언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미친놈들이었다.
그럼 지금까진 뭐 제대로 지원하질 않았던가?
지금은 알비온의 병력도 네덜란드에 와 있었다.
고려가 베네치아를 점령한 이상, 그곳 전선에 있었던 더 많은 고려 병력들이 도이치에게 합류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뚫린 이상, 프랑스는 대동양뿐만 아니라 지중해도 신경 써야 했다.
프랑스는 지중해의 해안 방어선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었다.
오스트리아 대사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지중해 안쪽에 있기에, 러시아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쟁이라는 것이 상당히 국지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 제국민들에겐 지금의 대전쟁은 대전쟁이라기보다는 그저 북서쪽에서 으레 일어나는 기존까지의 전쟁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손해가 누적됨에 따라 신민들도 이제는 거리에서 청년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삶이 고약해짐을 느끼고 있겠지만.
전황은 신민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이제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이탈리아의 본격적인 반격을 받아 주춤거리고 있었다.
베네치아가 불탄 이후, 이탈리아는 맹렬하게 우디네와 트리에스테까지 수복했다.
이스트리아반도를 빼면 잃어버린 땅을 거의 대부분 수복한 것이다.
게다가 이젠 아드리아해도 위험하니 자다르나 스플리트 등의 항구도시도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러시아 대사는 세 명의 대사들 중 가장 낯빛이 어두웠다.
그는 심지어 제대로 얼굴을 들지도 못할 정도로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천하의 러시아가, 세계 제이의 제국이 한낱….’
천하에 고려가 우뚝 서 있다면, 그 바로 아래 자신이 서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맹수는 정작 자신의 발밑에 있는 작은 벌꿀오소리조차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터르노보는 아직도 굳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