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 해전(2)
― 콰앙
― 콰앙
거의 모든 두 함대의 함포들이 서로 불을 뿜었다.
한바탕 포격전이 벌어졌다.
포연으로 바다가 안개라도 낀 양 새하얗게 변했다.
안개 속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날아드는 포탄.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포탄이 물에서 터져 펑 하고 솟아오르는 물기둥까지.
양측의 해군들은 격렬한 해전을 겪었다.
베네치아 정찰함대와 고려 분함대의 전력을 놓고 비교해보자면 정찰함대가 수적 우위에 있었다.
고려의 기함 전함은 불공급.
소문만 무성하게 들었지 만나 보진 못했다.
순양함은 익히 아는 조익현급 방호순양함.
방호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나 함포의 사정거리는 엇비슷했다.
초계함이나 어뢰파괴함의 숫자도 엇비슷했다.
하지만 포격전의 양상은 달랐다.
오십칠여 분간 이어진 포격전에서 베네치아 정찰함대는 꽤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함대함 결전에서 비슷한 체급의 함선은 비슷한 체급의 함선과 마주한다.
전함은 전함끼리, 순양함은 순양함끼리, 파괴함이나 초계함급은 그들끼리.
누구도 약속하진 않았지만 묵시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만약 전함이 다른 전함이 아니라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는 순양함부터 노린다는 것은, 잠재적 적에게 한 대 더 얻어맞는 것을 의미하니 몹시 비효율적이었다.
베네치아의 초계함 전대와 고려의 파괴함 전대의 싸움은 파괴함 전대의 판정승이었다.
일단 베네치아 초계함들은 나름대로 지중해에선 덩치가 컸지만, 애초에 중소형함치고는 크게 설계된 파괴함을 압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괴함도 강철의 선박을 단번에 침묵시킬 수 있는 큰 주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서로 결정타를 입힐 무기가 부재한 터라 이들끼리 벌어진 소소한 함포전은 지금 당장 결과를 도출해내진 못했다.
순양함끼리의 싸움은 달랐다.
사실상 전함 대신 식민지와 대양을 오가야 하는 두 선박은 서로에 대해 꽤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주 만나보기도 했다.
고려도 베네치아의 트리폴리급에, 베네치아도 고려의 조익현급에 익숙했던 것이다.
게다가 순양함급의 주포는 두꺼운 장갑을 두른 전함에겐 택도 없었지만 서로에게는 충분히 유효타를 줄 수 있었다.
순양함 결전에선 베네치아가 우위를 점했다.
일단 세 척과 네 척의 차이는 컸다.
게다가 조익현급은 불공급 혁신이 이루어진 과도기적 상황에서 언제고 뒤로 물러날 수 있는 함선이었다.
아마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퇴역할 수 있는 운명이었을 터.
허나 지금의 해전에선 서로 주포를 주고받다 꽤 많은 상처를 입었다.
한 척은 아예 조타 능력을 상실해, 진형에서 이탈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다른 두 척은 이리저리 피격당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추진부는 멀쩡한 덕에 최대 속력을 기동해 아덴만을 빠져나갔다.
베네치아의 순양함 한 척도 치명타를 맞은 덕에 유폭되어 그 자리에서 침몰했다.
다른 한 척은 함교가 직격당해 함장이 사망했지만 배 자체의 문제는 없어 항해를 지속했다.
나머지 두 척은 자잘한 상해를 입었지만 비교적 멀쩡했다.
전함과 전함 간의 싸움은 완전히 달랐다.
불공급 전함 상승은 산 안드레아급 전함 콘타리니와 함포전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콘타리니는 한 시간 남짓한 포격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 쿵
그래도 사거리 싸움은 되었던 다른 함선들에 비해 콘타리니는 애초에 제대로 된 싸움을 걸지도 못했다.
맨 처음 속력과 방향의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아주 가깝게 달라붙을 수 있었고, 그때 몇 차례 주포를 발사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주포들도 함대함 전투가 그러하듯 대부분 빗나갔다.
사실 빗나간 것은 상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니었다.
도리어 적중한 포탄이 문제였다.
로도비코는 똑똑히 보았다.
그들의 주포가 고려의 측면장갑을 뚫지 못하고 방호되는 것을.
텅 하는 불길한 소리.
거리상 분명히 이곳까지 들리진 않았을 텐데, 그 소리가 분명히 들렸던 것 같았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구경 싸움에서 밀리다니…….”
산 안드레아급도 위엄급과 동일한 250미리의 주포를 탑재한 상황.
사실 산 카를로 보로메오급과 같은 구경이긴 했지만, 구경장이 조금 더 길고 정교하게 개량되어 사거리와 정확도 모두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불공급은 이 정도 피해는 몸으로 버티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콘타니리함의 최신 함포를 방호시키고는 방금 전의 선물에 화답했다.
피탄당하는 와중에 고려의 전함도 이미 몇 차례 일제사격의 탄착 협차를 조절한 상태.
이번에는 콘타리니가 맞을 차례였다.
여덟 문의 함포가 불을 뿜었고, 그중 한 발의 함포탄이 콘타리니에 명중했다.
그 한 발은 선수에 큰 폭흔을 남겼다.
설상가상으로 거리조차도 벌어지고 있었다.
산 안드레아급은 16노트의 속력으로, 산 카를로 보로메오보다 1노트 더 빨랐다.
하지만 저들의 최대 속력은 그보다 족히 4노트는 더 빠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에 콘타리니는 상승이 다음 효력사를 쏠 동안 맞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사격 속도도 재빨랐다.
다음 여덟 발 중 두 발의 포탄이 콘타리니에 피탄되었다.
두 번째 주포좌가 박살 났고 증기 굴뚝 또한 박살 났다.
충격에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기관부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필연적으로 함선의 측면을 때릴 수밖에 없는 직사사격에 비해 일제사격으로 떨어진 낙탄은 그 피해가 가히 궤멸적이었다.
“이런 미친…….”
거대한 충격에 이리저리 바닥을 굴러야 했던 콘타니리의 함교 인원들도 모두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로도비코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서둘러 망원경을 들어 불공급 전함을 바라보았다.
적 전함은 콘타리니에 마무리를 하려는지 북쪽으로 선회하여 주포를 돌렸다.
“젠장.”
로도비코는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천만다행으로, 정찰함대의 뒤에선 그동안 해전 없이 순항하던 베네치아 대함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적 전함은 판단을 접고 상처 입은 그들의 분함대 전력을 보호하며 아덴만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베네치아가 이곳까지 와서 제대로 된 함대결전을 선포할 정도라면 지금 분함대의 전력으론 부족할 터다.
“혹은…….”
로도비코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뒤따라온 베네치아 본함대에서 신호가 왔다.
해군기와 반사광을 해석해 볼 때 그들은 저 분함대를 뒤쫓길 원하는 모양이다.
다니엘레 제독은 7함대가 분리되어 있는 이 순간, 그 분함대들을 각개격파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찰함대끼리의 전투는 자신들이 패배했지만, 저들을 추격해 잡아낸다면 그게 더 이득이었다.
승리하기만 한다면.
“제독께 빨리 전하라!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본함대에선 로도비코의 신호를 무시했다.
* * *
상승함 함장이자 7함대 제독의 밑에서 제독이 임명되지 않은 별개의 분함대를 이끌고 있던 김태인 정령은 순양함들의 피해를 공유받았다.
“미끼라곤 했지만, 순양함들이 꽤 많은 피해를 입었군.”
함정장교 권한수가 무언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차라리 순양함들이 전투에서 열외하여 소말리아의 해안에 정박하면 어떻겠습니까. 이탈리아가 통제하는 해안이라 안전할 겁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속도가 떨어지면 우리가 제 역할을 못 해.”
태인은 훈련적인 면에서 타협의 여지가 없었지만, 전술적인 면에선 남들이 보기완 달리 다른 장교들의 의견을 잘 들었다.
신호를 보내라 명령하는 그에게 권한수가 덧붙였다.
“그럼 순양함 전대가 경로에서 이탈할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분함대는 북북동으로 변침한다. 순양함 전대는 남동으로 나아가 해안에 엄폐하라.”
태인은 자신의 임무를 잘 알았다.
그는 그저 저들을 매혹시켜 계속 끌고 오는 역할이 전부였다.
하지만 다른 함정과 그 안에 탄 수병들을 많이 잃고 싶지는 않기도 했다.
눈만 감으면 예전의 페르시아만의 상황이 떠올랐다.
“소코트라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한바탕 요란하게 춤을 추자꾸나.”
“예, 함장.”
* * *
11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고려 분함대 나머지 전력이 교란을 위해 기동한 덕에 순양함들은 위치를 들키지 않고 보사소까지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상승함과 그 분함대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열세의 상황에서 아덴만 중부에서 동부,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지점까지 홀로 적의 본함대를 상대하고 끌어들여야 했다.
이런 추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선 파괴함은 그저 숫자에 불과했고 오직 전함 전력만 유효했다.
그리고 훨씬 더 까다롭기도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상승함이 적 전함보다 4매듭 정도로 속력의 우위를 점하는 것일 테다.
상승함은 이 상황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파괴함을 함대의 선두로 돌리곤 후미에서 적들을 유인했다.
동맹함대는 눈이 시뻘게진 채로 상승함에게 달려들었다.
이젠 저들도 사거리 싸움에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는지 직사보다는 곡사로 쏘아대었다.
허나 불공급과 달리 일사불란하게 사격제원을 따는 전투함교가 없는 그들은 협차계산이 잘 되지 않는지 명중률이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물론 후미를 보인 이상, 상승함은 한 대도 피탄되면 안 되었다.
후미 장갑은 ‘전부 혹은 전무’식 장갑을 채택한 중앙 구역에 비해 두껍지 않았고, 게다가 행여 수면 밑에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소용돌이 추진기가 맞기라도 하면 제아무리 불공급 전함이라도 바다에 떠다니는 고철 덩어리가 되고 말 터였다.
그러니 김태인 정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동했다.
도주할 땐 사실상 후면의 두 포탑만 쓸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
앞의 두 포탑은 함교와 굴뚝 등에 가려져 쏘지 못했다.
하지만 마냥 저들이 속 편하게 사격하게 내버려 둔다면, 하찮은 명중률로도 어쩌면 적중할 수 있었다.
저들에게도 계속 반격을 해야 했다.
협차계산과 위력상으론 될 수 있으면 주포가 모두 사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태인은 남동과 북동으로 번갈아 변침하며 함포의 사각을 최소화하여 후미로 포탄을 쏘아 보냈다.
사격장교와 병사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 위에서 울부짖으며 사격 제원을 땄고, 그들의 처절한 노력 덕에 고려는 한 번 대각선으로 운행할 때마다 일제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뒤에서 따라잡으려고 하는 자들에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기동이었다.
“미친놈!”
망원경을 든 다니엘레가 고함을 질렀다.
고려의 불공급 전함은 마치 꼬리를 흔드는 것마냥 이리저리 계속 변침하며 모든 함포를 전부 쏴대었다.
그러고도 속력이 비슷한 것이, 오싹한 괴담과 다름없다.
아.
다니엘레는 방금 전의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괴담은 따로 있었다.
저들의 포탑이 번쩍일 때마다 정말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렇게 기동하니 저들도 명중률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겠지만, 베네치아 함대보다는 양호했는지 결국 그들이 집요하게 노리던 카이저 막시밀리안이 피탄되었다.
함포의 구경은 크면 클수록 좋다.
카이저 막시밀리안은 265라는, 당시로선 좀 어울리지 않는 구경을 가진 전함으로, 균형 잡혔다 여겨지는 250미리 함포의 전함들을 은근히 깔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300미리의 함포에 얻어터지자 그들은 다른 어떤 함선들보다도 심한 비명, 즉 화염과 연기를 내뱉기 시작했다.
어찌나 연기가 심한지 과장 좀 섞어 아마 인도양 반대편에서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손상통제를 해야 하는데 저치들은 대체 뭘 하는 거냐?”
다니엘레는 망원경으로 카이저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오스트리아 함대의 자랑은 석탄고라도 피탄되었는지 공황 상태에 빠져들어 있었다.
베네치아 해군들이 속을 쳤다.
“오스트리아 놈들은 너무 멍청하고 답답합니다!”
최근에서야 수마트라라는 식민지를 얻은 덕에 뒤늦게 바다에 발을 담근 그들이지만, 해양전통이 하루 이틀에 생기던가.
행동이 둔할 수밖에.
어차피 별로 기대도 안 했다.
“젠장, 내버려 둬라. 우리는 계속 추격한다!”
결국 이렇게 되니 동맹함대, 아니 베네치아 함대는 네 척으로 저 분함대를 상대해야 하는 꼴이었다.
로도비코가 탄 콘타리니는 금방 피해를 수습할 수 있겠지만, 카이저 막시밀리안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음?”
다니엘레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동맹함대가 일련의 소동을 수습할 동안 거리는 더 벌어졌다.
적의 전함은 이제 꽤 먼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적의 전함은 이제 밉살맞은 엉덩이 흔들기를 그만 둔 상태였다.
적 전함의 옆에 거대한 섬이 보였다.
소코트라섬이었다.
* * *
11일.
오후 두 시 오십 분.
추격하는 베네치아 함대에 상승함은 속도를 줄이고 회전했다.
그 와중, 드디어 베네치아 함대의 주포도 상승함을 두드릴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상승함의 나약한 후미 대신 두꺼운 측면 장갑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콘타리니가 느꼈던 절망감을 다시금 느꼈다.
네 척의 전함이 쏘아 보낸 포탄 중 세 발이 상승함에 명중했지만, 그중 한 발은 방호되었다.
다른 두 발은 피탄되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
불길이 조금 일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보였다.
고려 함의 손상통제도 기민하고 신속했다.
강철의 거함은, 그저 맞는 것이 수치라 피한 것뿐이지 버티려면 버틸 수 있다는 듯 주장하고 있었다.
“오냐, 그 대단한 걸작이라는 네 놈들의 함선이 전력 차의 네 배를 맞이해서도 버틸 수 있는지 보자꾸나!”
하지만 베네치아 함대들은 왜 굳이 속력이 빠른 전함이 그 우위를 일부러 내려놓고 그들과 마주했는지 아주 잠시간 망각한 대가를 치렀다.
“견시보고…! 소코트라섬 남동쪽에 정체불명의 대함대 발견!”
산 안드레아의 견시가 비명을 지르자, 그제서야 다니엘레는 밖으로 나와 그 방향으로 망원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전함과 아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순양함, 그리고 한 번에 세어 보기도 힘든 파괴함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함의 숫자는 한 척이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주포를 겨누고 있는 저 상승함과 소규모 파괴함까지 합치면, 그 전력(戰力)은 분명히 7함대의 전력(全力)이다.
“미끼였군…….”
그제서야 다니엘레가 한숨을 토했다.
7함대와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7함대도 인도양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작전을 벌인다 들었다.
그러니 그들은 재빨리 분함대를 격퇴하고 전력을 조금씩 깎아 먹어 마지막 결전을 벌이는 것을 최고의 전략으로 가정했다.
그래서 분함대에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던 것이고.
하지만 지금 보니 고려는 그들이 튀니스 항을 출발해 수에즈를 통과하는 것을 이미 파악해 놓았던 것이 틀림없다.
베네치아의 요란한 교란작전은 의미가 없었던 것.
생각해보면, 수에즈 운하의 동쪽에는 아랍 연방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아마 그들 속에 있는 첩자들이 알렸을지도 모르겠다.
고려의 분함대는 단지 자신들이 스스로 아덴만의 끝자락에 나오길 유도한 셈이 아닌가.
스스로의 불리함을 자청해 가면서 좁은 홍해가 아닌 넓은 대양에서 싸우자고 속삭였고, 베네치아는 이에 홀려 여기까지 나온 셈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자신들의 퇴로까지 차단한 뒤 다시금 베네치아의 함대가 모항으로 귀환할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고려는 베네치아 함대의 진행 방향을 잘라내듯 정확히 정북의 방위로 직진했다.
지금 함선의 속도를 줄이고 당장 변침해 후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상 사거리 내이니, 오히려 후퇴하려는 찰나에 전함의 일방적인 포격을 맞고 박살이 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져갈 바엔 확실히 함대결전을 걸어야 했다.
그래도 베네치아는 전함의 수적 우위가 있었다.
함대결전을 걸어볼 만한 유일한 근거.
그러니 지금도 어쩌면 해볼 만할 것이다.
오후 세 시.
베네치아는 돌파하려는 종진, 고려는 경로를 막아 세우는 횡진을 이루었다.
이는 고려의 전법으론 ‘ㅜ(우)’ 자 진형, 베네치아에서는 T자 진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과 횡의 구도는 보통 가로로 늘어선 횡이 유리했다.
함포의 수적 우위를 보장할 수 있었으니까.
이런 구도는 포격전이 생겨난 시절부터 전열함 시대를 거쳐 지금의 철제 군함의 시대에까지 유지되었다.
물론 이런 구도를 해소한 예외적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함대를 이끄는 제독이 오직 확실한 신념과 규율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적의 횡진을 반으로 갈라, 오히려 그 구도를 역으로 만들어버리는 수준의 전술가에 도달해야 했다.
즉, 이윤신 정도의 수준에.
다니엘레는 그 동아시아의 제독 겸 장군의 일화를 충분히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그때의 전술을 완벽하게 구현하여 저들의 진형을 반으로 가르자.
하지만 그들은 자리를 잡은 불공급 전함이 얼마나 멀리서, 얼마나 정교하게 포격를 할 수 있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의 방어력은 부수적인 것일 뿐, 그들의 화력이 전함의 성능을 규정했다.
우 자 진형을 반으로 갈라 십자로 만들기 위해선 선두함의 충분한 내구력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나, 산 안드레아나 산 카를로 보로메오가 그럴 수 있는가?
다니엘레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선두전함 산 안드레아는 불공급 두 척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어마어마한 포탄이 단 한순간에 한 함선을 향해 낙하했다.
열여섯 문의 대포 중 열한 개의 포탄이 선두전함을 헤집었다.
강철이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나무 갑판은 불길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산 안드레아는 한 차례 사격에 이미 전투 불능이 되었건만, 그 사격은 한 번이 아니었다.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이 다시 가해졌다.
이번에는 심장과 폐, 간과 비장이 박살이 났다.
그 충격은 실로 건장한 전함이라도 단숨에 절명해 버릴 정도였으니.
산 안드레아 또한 버티지 못했다.
― 콰아앙
포격하는 고려군조차 깜짝 놀랄 만큼 귀청을 찢는 어마어마한 폭음이 산 안드레아에서 터져 나왔다.
한순간에 햇빛보다 밝은 화염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전함 탄약고의 유폭으로 산 안드레아는 그야말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바다로 가라앉았다.
전투가 끝난 이후 고려가 자국의 인도주의적 방침에 따라 그곳에 탄 베네치아 수병들을 구하려 노력한다 하더라도 아마 큰 성과는 보지 못할 것이다.
베네치아 함대에겐 비극을 애도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선임함장 마칸토니오 디에도가 잔여 병력을 이끌었다.
이미 베네치아 함대의 사기는 적 함대와의 조우와 선두전함의 침몰로 바닥을 헤매고 있었고, 거대한 폭발을 보자마자 진형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마칸토니오도 눈이 있기에, 귀가 있기에 지금의 상황을 보았다.
불공급은 이전의 전함과는 차원이 다른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 능력을 지금 당장 제대로 비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여섯 척이 한 척도 제대로 추격하지 못했는데, 그 수가 두 척이 되면 어떠할까.
보다 많은 순양함들의 보호를 받으면 얼마나 강할까.
‘이미 패배했다. 베네치아는 수에즈를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우리가 레기아 마리나를 압도했던 것 이상으로, 고려는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력은 심지어 여섯 함대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
마칸토니오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는 무책임하게 죽은 다니엘레 대신 이들을 살려내야 했다.
“너희는 베네치아의 미래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라!”
마칸토니오는 자신의 전함으로 열심히 저항하며 퇴로를 열려 시도했다.
그의 처절한 노력 끝에 베네치아 함대는 포탄이 오가고 바다가 뒤집어지는 와중에도 기어코 변침에 성공해 항로를 재설정할 수 있었다.
산 안드레아와 순양함들, 초계함들이 바다에 가라앉는 와중에도, 많은 함대들이 살아남았다.
마칸토니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금 아덴만으로, 다시금 홍해를 거쳐 평온한 지중해로 가거라.
수에즈까지만 도달한다면 그곳의 해안포가 고려 함대의 접근을 저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너희들은 다시금 지중해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말라.
하지만 7함대는 이미 성과를 거둔 뒤, 이제는 도리어 느긋하게 횡진을 풀고 추격용 종진을 이루었다.
저들의 속력이 빠르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싹한 일이었다.
마칸토니오는 그의 기함이 희생을 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라고 직감했다.
‘내 함선을 버리고 두 척을 살린다.’
가면서 낙오된 카이저 막시밀리안과 콘타리니가 합류한다면 여전히 그들은 네 척의 전함이 있으니, 그들만 건재하다면 지중해 방어는 성공적일 것이다.
‘…….’
물론 3함대가 그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지중해에 진입했을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희망이라도 품지 못한다면 마칸토니오는 권총을 뽑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마칸토니오가 소코트라를 지나 아덴만으로 다시금 되돌아가려고 할 때, 그는 헛것을 보았다.
“…뭐라고?”
이미 두 척의 배가 그들의 경로 앞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