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전(2)
불가리아는 러시아의 종속국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난 뒤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하지만 불가리아는 그 의무에 제대로 부응하지 않았었다.
결국 차르의 분노가 잔뜩 담긴 서신이 몇 번이나 왔을 때야 비로소 일리안 아센은 소량의 군자금과 군량을 지원하는 데 동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단 한 명의 불가리아 사내도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았다.
“불가리아는 원체 작은 나라라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면 국가가 휘청입니다.”
블라디미르 2세는 여전히 노여워했지만, 어쨌든 군자금과 군량을 받는 것으로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개전 이후로 이 군자금으로 인한 금전적 부담은 점차 커져 갔다.
그리고 러시아도 더욱더 권위적이게 되었고 더 이상 이전과 달리 무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그래도 사정과 민심을 살피는 척이라도 하며 일리안 아센이 주는 대로 군량과 군자금을 가져갔던 이들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부르가스 축선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 강압적인 강도가 훨씬 더 심해졌다.
이제 크레믈은 터르노보에서의 물자를 조금 더 원활히 조달, 아니 조금 더 확실하게 착취하기 위해 외교사절과 징수관을 파견했다.
숫제 약탈 수준이었다.
터르노보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수도도 이러한데, 다른 촌락은 훨씬 더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게 자명했다.
그럼에도 일리안은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항하는 게 가능한가?
제아무리 지지부진하고 난잡한 전쟁을 치르고 있더라도 이곳에서 지척인 바르나와 부르가스엔 아직도 엄청난 규모의 러시아군이 있었고, 이들이 총구를 돌리면 불가리아는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는 자애공이라 불릴 정도로 신민의 목숨을 아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일리안 아센은 이런 상황에 큰 답답함을 느꼈다.
당장 무얼 해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터르노보의 시가지에 암행을 나선 그는, 러시아에서 온 징수관들이 도시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한 곳에서 무리 지어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것도 발견했다.
“우리 위대한 러시아는 너희들을 오스만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너희 불가리아인들도 이 은혜를 갚아라, 어서!”
불가리아는 러시아와 언어적 유사성이 몹시 높았다.
키릴 문자가 불가리아 제1제국에서 북방으로 퍼져 나갔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불가리아에서도 여전히 문자를 읽고 쓰는 것은 상당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기에 일반적인 신민들은 그저 말하고 듣는 영역에서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생활 회화에서도 두 나라의 언어는 비슷했다.
그러니 지금의 이 현장은 더더욱 비극적이었다.
일리안이 평소 신분을 감추고 암행할 때 꽤 자주 가는 곳이 있었다.
작은 술집인데, 경비들이 자주 오가는 궁과 가까워 소란스럽지 않고 음식이 맛이 있었다.
주인장의 특제 양념이 묻은 닭꼬치는 어찌 주인장을 설득해 저기 고려에 점포를 내 봐도 좋을 정도였다.
주인장은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옛 오스만 강점기 시절부터 살아왔다고 들었으니 나이는 일리안보다 확연히 많을 거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도 많아 보였다.
평소 그는 은전 하나만 주면 재치 있는 입담을 곁들인 소문을 대접해주었다.
성격은 괄괄하고 거침이 없어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았다.
세상을 꽤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인물이라, 짧은 독립을 쟁취한 불가리아가 머지않아 다시금 러시아에 합병될지도 모른다고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 쉽게 얻은 자유란, 쉽게 빼앗기는 법이 아니겠소?
그리고 그는 지금 자신의 주점을 습격하여 술과 음식, 식자재들을 뺏어가려는 러시아 병사들에 맞서, 오히려 주점에 장작과 밀짚을 쌓아두고 횃불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위협하고 있었다.
“안 된다, 이놈들아! 날 죽여야 이것들을 빼앗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네까짓 게 차르의 명을 거역하는 거냐?”
러시아 징수관들은 노기가 등등한 얼굴로 발을 굴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웃들도 다가와 그를 만류했다.
그중에는 주점 주인의 가족과 친우도 있었다.
“아버지, 다치세요! 제발 내려와요!”
“자네, 어서 내려오게!”
하지만 그의 의지는 완고했고, 정말로 죽어야만 내려올 것으로 보였다.
― 탕
그리고 어디에선가 총소리가 들렸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옆 골목으로 돌아간 러시아 병사 한 명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소총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주점 주인은 배를 감싸며 고통에 횃불을 떨어뜨렸다.
― 불이야!
터르노보에서 함부로 사람을 쏴죽인 사태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지만 모인 사람들은 일단 주점에 번지는 불길부터 잡으러 달려들었다.
“본보기가 되었겠지.”
러시아 징수관들은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의기양양하게 되돌아갔다.
일들이 너무나 빨리 일어난 탓에, 눈앞에서 넋 놓고 이 상황을 바라보던 일리안도 그제서야 불길을 잡는 무리에 두 손을 거들었다.
주점의 화재는 거의 모든 곳이 그을렸지만 건물 자체는 완전히 연소하지 않고, 주변으로 불이 번지지 않는 정도로 끝이 났다.
반면 주점 주인은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그의 딸은 의원을 부르러 달려갔고, 아내는 그저 화상으로 울긋불긋해진 손을 잡고 오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는 흐릿한 눈을 들어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일리안은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잔뜩 쉰 목소리로, 주점 주인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전하께… 말…동무는 못… 해드리겠군요…….”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재웅아. 온갖 소문을 다 듣고 다니는 이들이 네 정체를 몰랐을까.
모른 척했을 뿐이지.
― 쿨럭 쿨럭
숨이 끊어질 듯 기침을 한 그는 자신의 복부를 감싸 지혈하려고 하는 아내의 손길을 만류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백 년이 넘도록 오스만의 노예로… 살았으니… 이제는… 러시아의 노예가… 아니라, 불가리아의 자유민으로 살길 원합니다.”
꺼져가는 눈빛은 마지막 말을 토하고는 스러졌다.
“당신이… 지금껏 보여준 길은… 올바르니… 전하, 우리를 그 끝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 * *
그 이후에도 일리안은 정처 없이 터르노보를 떠돌았다.
수금을 마쳤는지, 혹은 분위기가 흉흉해서 오늘은 물러나고 내일 오자고 생각했는지 징수관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터르노보는 이미 도적떼에 약탈이라도 당했는지 을씨년스러웠다.
일리안이 깔아놓은 시내의 주요 벽돌 도로는 징수관들이 무겁고 험한 수레에 군량을 잔뜩 쌓아두고 다녔는지 깨져있는 곳이 많았다.
사람들은 황망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저항하다 다친 사람은 주점 주인 하나가 아니었는지 도로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보여야 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시장 거리에서 물품을 파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흥정하는 이들도 없었다.
하다못해 이 자그마한 분수대 한쪽에서 항상 성냥과 꽃을 팔던 여자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울음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일리안은 자신의 등에 싸늘하게 소름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금 전, 말벗을 잃어버렸다.
다른 누군가를 더 잃어버리면, 정말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일리안은 말에서 내려 떨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분수대에 주저앉았다.
무엇이 신민을 위하는 길인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기 싫어 선택한 길인데, 그 방향이 아예 잘못되었는가.
이들이 지금 가하고 있는 폭력이 전쟁이 아니면 무엇인가?
주점 주인의 유언과 자신이 처한 현실, 수도의 끔찍한 광경이 역겹고 냄새나는 꿀꿀이죽처럼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 치이익
하지만 그때 일리안은 자신의 앞에서 자그마한 성냥에 불을 붙인 채, 그에게 건네는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불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이거 드릴게요.”
“팔지는 않는 거니?”
“하나쯤은 드릴 수 있죠. 많이 사주셨는데.”
일리안은 걸핏하면 소녀에게서 이름 모를 잡꽃들을 사 옐레나에게 갖다주곤 했었다.
안도의 한숨인지,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가 자신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소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좀 늦었구나.”
“안 늦었는걸요. 사람들은 저녁때나 되어서야 꽃이랑 성냥을 사러 오시거든요.”
그제서야 일리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태양은 떠 있었다.
“그래. 아직 안 늦었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방황하던 그의 눈동자는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은전 하나를 꺼내 소녀에게 건넨 그가 말했다.
“아이야, 네 동생들, 네 친구들에게 글피에 궁성으로 오라 하거라. 너희들을 가브로보 요새에 보낼 마차가 있단다. 걱정 마라, 그곳은 안전할 테니.”
자신도 아마 각오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 * *
대공비 옐레나는 저녁 시간도 넘기고 늦게 돌아온 남편을 마주했다.
될 수 있으면 같이 식사를 하자는 것이 부부가 서로에게 한 약속이다.
하지만 옐레나는 남편에게 화내지도, 토라지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꽃을 사 온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이를 건네주었다.
남편의 눈빛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겁쟁이 같은 사람.
당신은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더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 있지.
바보 같은 사람.
이렇게 바보 같으니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 중 하나에게 대항한다는 생각을 하겠지.
옐레나도 꽃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하는 수밖에.
남편은 바빠졌다.
그가 조련한 근위총병여단의 사람들이 수시로 궁전을 들락날락했다.
불가리아 병사들 중 몇 명은 말을 타고 남쪽으로 가 무겁고 수상한 상자들을 가지고 오기 시작했다.
그 상자들엔 아랍어와 고려어가 적혀 있는 것이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도시에 사는 아녀자들도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소란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파견한 사람들은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처음 옐레나는 그들을 다독였다.
“해방제의 딸이자 차르의 여동생인 나를 뭐라고 생각해요, 대체?”
“죄… 죄송합니다.”
“터르노보는 크레믈의 명을 따를 거예요.”
하지만 권위로 찍어눌렀음에도 의심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마침내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로 알현을 요청한 러시아 관료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는 대공을 뵈어야 하겠습니다! 대체 그분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옐레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갑자기 처연한 얼굴을 한 채로,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대… 대체 무슨?”
“그이가 요즘 저에게 화가 단단히 났어요. 그래서 절 멀리하느라 플로프디프에 가 있지요. 다른 여인과 바람이 난 것이 분명해요.”
군사적 접촉을 했다는 의심은 뜬금없는 대공 부부의 불화설에 밀려났다.
밀려나진 않았더라도, 귀족의 개인사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옐레나의 어머니는 미녀로 소문난 슬라브족에서도 특히나 빼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닮은 옐레나의 미모는 블라디미르 1세로부터 물려받은 강단과 더불어 환상적인 연기력으로 승화되었다.
이후 몇 달동안에 걸쳐 옐레나는 이 관료를 완벽하게 구워삶았다.
늦은 밤, 와인을 한잔 같이하자는 권유에 마련된 자리에서, 옐레나는 평상시에는 남편만 볼 수 있는 고혹적인 옷을 입은 자신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러시아 관료의 시선을 느끼고는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옐레나는 남편의 흉계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그녀가 일리안의 계획을 러시아 사람들이 모르게 방해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관료도 이제는 대공 부부의 불화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간통이야 유럽 귀족의 평범한 생활이라 한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바람이 났단 말인가?
“그이는 내가 러시아의 사람이고, 크레믈에서 자랐기에 날 불신하고 있어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런…….”
옐레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그래도 차르께서는 나와 내 자식, 차기 불가리아 대공을 위해 병사를 보내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차르께선 이미 다 준비하고 계십니다. 대공은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겁니다.”
옐레나는 확답을 들은 이후, 이제 노골적으로 관료를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마냥 붉어져 있었다.
“불안해요.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면 조금은 안심이 될 텐데…….”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관료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대공비의 외로움을 잘 달래 줄 수 있다면, 자신이 어쩌면 차기 불가리아 대공국 섭정의 정부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의 나래까지 펼친 상태였다.
“바르나의 총병연대 셋이 이미 슈멘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부쿠레슈티에 있던 연대도 루세로 향할 것이고, 둘 모두 지시만 떨어지면 북과 동에서 터르노보를 들이칠 겁니다.”
“성내에서 내가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당신은 금방 떠날 테니까.”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옐레나의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그가 열심히 입을 열었다.
“피르도프 백작, 암볼 백작은 우리 쪽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터지면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대공의 죄에 대한 증거도 그들이 확보했으니 믿을 만할 겁니다.”
“다른 이들은요?”
“다른 이들은…….”
한동안 주절거리며 대공비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나불거리던 관료는 갑자기 환하게 웃는 대공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찌익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옷을 찢었다.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르의 여동생과 침대에 함께 눕는 꿈을 꾸고 있던 그는 대공비가 갑자기 비명과 고함을 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꺄악
“거기 누구 없느냐!”
문밖에서 대기하던 근위대가 갑자기 들이쳤다.
한동안 대공이랑 같이 있느라 보이지도 않던 근위대장도 금방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자가 나를, 나를!”
그제서야 이 거미의 줄에 걸렸다는 것을 안 관료가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대공비를 바라보았지만, 대공비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치욕과 분노에 범벅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것도 분명히 연기일 터다.
잔뜩 분노한 불가리아의 병사들이 그를 우악스럽게 체포하고 지하 감옥으로 질질 끌고 갔다.
“전하, 전하! 후회하실 겁니다!”
관료의 외침을 뒤로한 채 그녀는 일리안에게 달려갔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 줄 필요는 없었는데.”
“당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내 나름대로 아버지의 복수를 한 거예요.”
“고맙구려.”
* * *
“화친을 주장하는 자가 배신자였구나.”
다음 날 일리안은 터르노보에서 궁정 회의를 개최한 뒤,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는 백작들을 노려보았다.
“저놈들을 체포하라!”
대공의 결단이 내려지자, 러시아가 회유한 불가리아 내의 불순 세력들은 빠르게 그 싹이 잘라졌다.
관료가 주절대며 실토한 덕이 컸다.
운신의 폭이 제한되어 있던 것을 풀자, 일리안은 마침내 궁궐을 나와 연단에 올라섰다.
백성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어 있었다.
일리안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서 난 자가 아니다. 나는 고려에서 태어났으며, 희미한 혈통을 근거로 이곳에 새롭게 임명받게 된 대공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대들의 대공은 러시아에 의해 임명되었다.”
독백과도 같은 말.
구태여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신민들은 수런거렸다.
“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가 아니기에, 그대들이 오스만의 치하에서 어떠한 일들을 겪고 자랐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대들이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어떠한 박해를 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허나 나도 이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피와 신앙을 통해 그대들의 형제를 칭하는 자가, 그대들의 해방을 입에 담는 자가 지금 그대들에게 하는 행동은 과거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지금 저곳에 서 있는 사람은, 지금껏 그들을 다스린 대공이다.
그리고, 지금껏 그들이 보았던 대공이 아니었다.
“혹자는 말한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대항하면 아니 된다고.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그렇기에 지금 너희의 대공은 죄인이라고.
“그렇게 너희들을, 너희와 나를, 우리를 노예로 만들며 말한다.”
모두가 분노하고 슬퍼했다.
누군가는 그 예전 압제자들의 시절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지금 이 현실에 분노하며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저 일리안 아센이 보여준 아주 짧은 시간의 평화와 번영을 기억하며 울기도 했다.
“이런 요구는 더 심해질 것이다. 그대들과 그대들의 아들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저 트라키아의 피비린내 나는 대지에 몸을 뉘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중립적 방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구차한 평화를 원하는가?”
짧은 물음.
하지만 그 누구도 찬성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누군가 외쳤다.
“남을 위하여 싸우느니, 고향과 부모, 자식들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대러시아의 노예로 사느니, 소불가리아의 사람으로 죽겠습니다!”
“옳소!”
“명을 내려 주소서!”
장담컨대, 처음 말을 꺼낸 저자는 자신이 고용한 바람잡이가 아니다.
누군지 알아볼 수도 있었다. 일리안이 평소에 자주 먹는 요구르트를 매일 아침마다 배달하는 자였다.
이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니.
결심을 한 와중에도, 번뇌는 여전했다.
“그대들에게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건만.”
대공의 중얼거림에, 누군가 불쑥 말했다.
“자애공께서 나중에 보여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연설조차 제대로 못 해, 숫제 담화가 되어가는 분위기다.
일리안이 웃었다.
“무슨 빌어먹을 자애공은!”
신민들은 웃음을 터트리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자애공을 위하여!”
본래라면 침묵을 지켰어야 할 병사들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총을 들며 외쳤다.
“불가리아를 위하여!”
일리안이 화답했다.
“자유를 위하여!”
* * *
“당신은 겁쟁이가 아니에요. 방금 당신을 보고 이 세상의 누가 감히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옐레나가 연설을 마치고 온 일리안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다 보면 겁에 질리기 마련이지. 하지만 이제 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소.”
그는 옅게나마 태조 폐하의 피가 흐른다.
부담스러울 때면, 겁에 질릴 때면 일리안은 항상 그 생각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신은 이라크로 피신했으면 좋겠는데. 알다시피 적 군대는 지척에 있어서 금방 위험해질 거요.”
“가브로보 요새로 피신할게요. 그곳에서 여인들과 아이들과 함께 있을래요. 터르노보가 무너지지 않으면, 가브로보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도망치지 말라 이거요?”
옐레나는 그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미 고려에 말했잖아요. 도망칠 마차 말고, 총과 탄약이 필요하다고.”
“…….”
“그러니 무너지지 말라는 뜻이에요.”
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