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아부다비의 전투 이후, 각국은 제대로 된 참호가 공격군에게 보여주는 교환비에 상당히 놀랐다.
물론, 소식에 놀랐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교리가 하루아침에 바뀐 것은 아니었다.
소문은 들었지만, 아직도 고리타분한 장군이니 전술가니 하는 자들은 용기 있게 총을 꼬나쥐고 적으로 돌진해 총을 쏘다가 총검으로 상대방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군대란 무기의 방면에선 상당히 진보적이었지만, 가끔 전술의 부분에선 상상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이것은 국가가 가진 육군전통과는 또 다른 문제로, 육군 자체가 아닌 개별 부대의 독자적인 전통(혹은 악습)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남의 나라 군대를 조련한다는 것도 그런 면에서 좀 답답했다.
더군다나 이미 존재했으며, 이미 먼 과거부터 명성을 쌓아온 군대의 체질을 개선한다는 것은 막대한 정치력을 요구했다.
고려가 처음 예니체리를 손보려 했을 때도 그들의 반발은 상당했고 튀르크 사회에서 고려인에 대한 반발이 확연히 늘어났으니까.
오스만은 전열보병 전술도 유럽에서 가장 늦게 받아들인 축에 속하는데, 이제는 그 전술도 버리기 싫어 미적대곤 했다.
반면 니자므 제디드는 훨씬 양호했다.
처음 창설된 신식군은 그야말로 백지상태.
아무것도 없으니 발목 잡을 것도 없었다.
폐위되기 전 아흐메트 3세에 의해 선발된 젊은 장교단은 그래도 경험만 없었을 뿐 조국 오스만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고 부패하지도 않았으며 신체적으로 건강했다.
이후 알리 파샤에 들어 더욱 확장된 군대가 된 이후에도 이 장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사실 지금의 군대란 충성심이 전부였긴 했다.
제아무리 신체 건강하고 개별 훈련을 잘 받아도 총탄 한 발에 유명을 달리하는 것은 변함없었고, 이렇게 전선에서 버티는 것이야말로 정예 강군의 아주 기본적인 조건에 속했다.
적의 대포탄이 낙하할 때, 참호 안으로 몸을 수그린 니자므 제디드들은 루스인들에게 쌍욕을 뱉을지언정 와해되어 달아나지 않았다.
그 이후 총을 메고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대해서도 총을 들이대어 반격할 깜냥도 있었다.
― 타타탕
무시무시한 포탄이 떨어져 분명히 튀르크인들이 육편 조각이 났거나, 혹은 달아났을 거라 기대한 러시아인들은 빼꼼히 내밀어지는 소총 사격과 거치된 다혈포 사격에 정통으로 맞아야 했다.
“효력사 확인. 잘 쏘고 있습니다!”
튀르크 포병대의 활약도 대단했다.
대포의 절대적 수 열세로 화력 자체는 밀렸지만, 화포란 정확도가 생명이기도 했다.
적 포병이 아군 참호에 포격을 가한 이후, 적 포병대의 위치를 확인한 튀르크 포병대는 적의 보병대에 사격하는 대신,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다.
지금 보병 한둘 줄이는 것은 전황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은 마찬가지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뽐낼 수 있는 적에게 쏴야 했다.
고려군은 이를 알았고, 대포병 사격을 가장 먼저 교리화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 교리를 받아들인 튀르크 포병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튀르크 포병대의 야포나 적의 야포나 사실상 가시거리 밖에서 쏘는 곡사포가 대부분이었기에, 튀르크 포병대는 미리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관측병들로 하여금 적의 포연이나 섬광을 관측하고 삼각측량을 실시해 표적의 위치를 획득했고 이렇게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고려군 포병장교는 자신이 가르친 이 답답한 훈련생도들이 마침내 사람으로서 기능을 하기 시작하자 무릎을 쳤다.
“우리가 쏜 순간부터 우리의 위치도 적에게 노출되었다 가정해야 하니 적 포탄이 낙하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퍼붓고 떠나야 합니다!”
대포병 사격도 결국은 아군 대포의 위치를 노출시켰다.
그 전에 최대한 적 포병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도망가야 했다.
“후우, 후욱.”
튀르크 지휘관들과 포병들은 야포가 들어갈 만한 포대 진지를 구축하랴, 행여 적 포탄이 날아들어도 파편 정도는 방어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쌓으랴 거의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힘들어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막상 전쟁에 돌입하자 극도의 흥분상태에 들어갔는지 기계적으로 포탄과 장약을 날랐다.
이후 한바탕 쏟아부은 그들은 말을 동원하여 견인포를 진지에서 끄집어냈고, 근처에 있는 다른 포대 진지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러시아군의 대응포는 착탄되지 못했다.
진격하던 일개 연대가 말 그대로 갈려 나가는 참상을 목도해도, 러시아는 꾸역꾸역 전선에 병사들을 밀어 넣었다.
튀르크 포병대에 박살이 나도, 러시아의 대포가 불을 뿜는 것을 멈춘 적은 별로 없었다.
당연히 포격은 장난이 아니었다.
참호가 이 피해의 대부분을 흡수해준다지만, 애초에 포격이라는 것의 위력이 너무나 강하다 보니 최전방의 니자므 제디드들 중엔 포격에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살아남은 니자므 제디드들도 사기를 잃고 후방의 참호로 도망가야 했다.
다행히 참호는 하나가 아니었고, 방어선은 다시금 결집했다.
― 쿠웅 쿠웅.
멀리서 포탄의 진동 소리가 우르르 떨리는 후방 참호의 진지에서 이 상황을 수집하던 고려군 연락장교가 연필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부다비의 전투와 같이 튀르크 군대들은 참호와 철조망, 다혈포로 이루어진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이 전투가 아부다비와는 다른 결과가 날 것이라는 사실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니자므 제디드들이 예상보다 더 잘 싸운 것은 맞다.
하지만 상대는 페르시아가 아니라 러시아였다.
나름대로 총을 쏘면서 반격해오고, 후장식 소총은 엎어져서 사격할 수 있기도 했으니 비교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대포도 차원이 달랐고.
‘다혈포도 한계가 있는 물건이다.’
장전 없이 탄통의 탄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발사할 수 있는 강력한 총이라도, 어디까지나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불편함을 가진 다혈포는 은엄폐에 꽤나 불리해 그 사수는 의외로 많이 죽거나 다쳤다.
고려군 상부도 이를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무기를 발명 중일 테지만, 그 성과가 빨리 나와야 할 터였다.
‘적병을 효과적으로 가로막아야 할 철조망도 오스만산이니 질이 영 좋지 않다. 대량생산 하는 철의 품질 자체가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긴 하겠다만, 평상시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만든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것들이 전부 녹슬어 끊어지고 난리도 아닌가.’
최고의 군대라는 니자므 제디드들의 군수품도 이럴지언대, 예니체리와 향군은 그저 거품으로 만든 군대거나 혹은 군대의 명부에 이름만 올려놓은 것이 아니냐며 장교는 혀를 찼다.
하지만 전훈 분석을 하던 그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이 상태로 볼 때, 흑해 서부 부르가스 축선의 공세가 지지부진하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
부르가스에 적 병력이 결집하고 있는 것은 불가리아 대공 일리안 아센도 알았고, 동네 주민들도 알았고, 오스만 사람들도 알았다.
트라키아 지방에 사는 세 살배기 꼬맹이 애들도 알았을 것이다.
미친 패륜 차르가 북쪽에서 우는 아이를 잡으러 온단다 하면, 울던 애도 울음을 그쳤다니까.
그러니 오스만도 진작부터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들의 대응이 정말 궁금하군.’
러시아도 자신들의 정보가 누출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기에 그는 빠르게 이 상황을 콘스탄티노플에 올렸다.
* * *
튀르크 전쟁이 한창인 1727년 5월 21일, 달빛 없는 밤.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카닉(Canik).
포성과 총성, 그리고 비명과 신음이 오가는 서부 트라키아 전선이나, 오스만 지방군으로 이루어진 방어군이 결집하여 흑해 동부에서 밀고 내려오는 축선을 수비하려는 트라브존과는 달리 중북부에 속하는 이 해안 도시는 평화로웠다.
전쟁 초반기 흑해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러시아 함대가 이리저리 기웃거려 이를 방어하기 위한 오스만 병사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부대의 규율은 썩 좋지 않았다.
이들은 신식군인 니자므 제디드들도 아니었고, 부패한 기득권 군사 계급인 베일릭 예니체리도 아니라 그냥 러시아에 맞서 알리 파샤의 명으로 현지에서 징집된 일반적인 병사―세크반―였다.
세크반은 극초창기에 예니체리 편제로 들어가 있었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떨어져 나와 그저 대충 동원되는 일반 징집병을 의미했다.
이들도 애향심이 있었고, 러시아 놈들이 아나톨리아를 침범하는 것에 분개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오스만 행정의 한계상 세크반들은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군의 기강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실제로 밤새 해안포나 경계 초소에서 근무를 서야 할 병사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양심이 있는 병사들 소수만 대충 나무와 흙벽돌로 어설프게 지은 감시초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으음…….”
이전까지 카닉의 평범한 어부에 불과했던 세르핫도 고개를 열심히 떨구었다.
징집된 것에 대해 봉급은 아니더라도 특별 보상이라도 해주었으면 모르겠지만, 사실상 의무만 강제한 채 보상은 하나도 없는 터라 이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낮에는 눈치를 봐 가며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 털썩
모아놓은 자재들에 기대 자던 그는 자재 더미가 쓰러지는 바람에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에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세크반들처럼 그냥 눈치 보다 집에서 자는 것이 나았겠다.
여기 있는 오스만 장교도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군수품을 호주머니로 빼돌리고 있었고, 몇몇 병사들은 수석식 소총도 아니라 위에만 칠한 나무막대기를 들고 있었으니 세크반들이 이렇게 근무에 태만한 것도 눈감아줄 터였다.
하지만 다시 잠을 청하려던 그는 수평선에 무언가 그림자 같은 것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뭐지?”
이런 초소에 그 귀한 망원경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어, 그는 미간을 찌푸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달은 아예 없어 빛을 기대하긴 힘들다.
그러고 보니 항구의 진입로를 비추어 줘야 할 등대도 불이 꺼진 채 고요했다.
다행히 세르핫의 눈은 상당히 좋은 편이라, 그는 그 흔들리는 그림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림자가 파도치며 다가오고 있다.
세르핫은 등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계속 보다 보니 희미한 형체도 구분이 되었다.
파도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분명 이곳으로 노를 저어 오고 있는 작은 나무배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야음에 완전히 녹아든 거대한 철선들이 있었다.
제아무리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날이라 해도 저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카닉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저 침입자들도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저렇게 대놓고 상륙을 하려는 모양이고.
“이런 미친!”
그는 미친 듯이 종을 두드렸다.
― 땡 땡 땡
“늦었다, 늦었다!”
― 탕
그리고는 소총을 겨누어 그림자를 향해 발사했다.
총소리라도 들어야 다른 병사들이 듣지 않겠느냐며.
하지만 그는 저 희끄무레한 철선의 함포가 그를 향해 겨누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진작 포를 쏠 수 있었음에도, 그들은 조용히 넘어가길 원했을 텐데.
가냘픈 소총의 섬광이 발사된 방면으로 벨리키 이반함의 주포가 불을 뿜었다.
* * *
콘스탄티노플에 연락한 서부 방어군의 고려군 연락장교의 생각은 맞아 들었다.
러시아는 이미 흑해 주도권을 쥔 상황이었으니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에르진잔, 에르주룸 등의 오스만 동쪽의 군사 도시들은 험준한 아르메니아고원을 끼고 있었다.
이들은 알리 파샤와 이브라힘 파샤의 권력 다툼에도 중립을 지켰으며 지금의 지휘관들도 정말로 오스만을 방어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트라브존은 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한번 호되게 겪은 도시였기에 해안가를 통해 밀고 들어오는 적병을 막을 태세가 되어 있었고.
그러니 러시아가 아나톨리아 중북부의 해안가를 노리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왜 카닉 같은 요충지의 도시 방비가 그토록 형편없었는가 하는 것일 터다.
“이브라힘 파샤의 농간일 텝니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알리 파샤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말했다.
“카이세리와 앙카라, 초룸과 토카트. 이 내부의 도시들은 그들의 손아귀에 있지요. 카닉에 보급품을 주기 위해선 흑해 해안가를 지나거나 이브라힘 파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들을 지나야 하는데, 둘 모두 위험합니다.”
적의 침입에도 내전을 하고 있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알리 파샤가 뒷말을 흐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 인간들이 동부에 있는 다른 이들과 같이 조금만 더 식견이 있었다면.”
예니체리도 다 같은 예니체리가 아니라, 에르진잔과 에르주룸 같은 국경에 있는 제마아트 예니체리들은 중앙 권력 다툼을 하는 이브라힘 파샤의 베이릭 예니체리들을 혐오하고 러시아에 맞서 담담히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배신자들이 아예 반기를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기엔 우리 인민들이 가진 러시아에 대한 혐오가 크지요. 지금은 이렇게 방해를 하는 것만으로 그칠 겁니다. 허나 정말 이브라힘이 미치광이라면 러시아와 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저들의 밀약이 어디까지 논의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카닉을 점령함으로써 러시아는 트라브존을 사실상 포위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가 생겨났고, 동쪽의 방어 병력을 중앙과 서쪽으로부터 아예 격리시킬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브라힘 파샤가 정말 매국노로 돌변한다면, 사실상 아나톨리아 전역이 위험했다.
절망이 회의장을 휩쓸었다.
알리 파샤를 비롯해 그 측근들과 니자므 제디드의 고급 지휘관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의 주먹은 여전히 분노에 꽉 쥐어져 있었지만, 그 분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일지 몰랐다.
동부는 확실히 러시아의 손에 유린당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튀르크의 국가도 이미 끝이다.
알리 파샤는 이 전쟁 이후 자신의 왕조를 개창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스만을 완전히 개편할 야욕을 가지고 있었지만, 러시아에 손에 오스만이 멸망당하는 것은 그냥 나라의 몰락이며 저 잔인하고 폭급한 이교도들에게 신민이 유린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알리 파샤와 같이 깨어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 낡고 병든 제국을 다시 번영의 길로 인도하려 했지만, 타락한 자들이 만들어낸 제국의 병폐는 한 번의 개혁으로 뒤바꾸기에는 너무 심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해상헌은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러시아에 맞서 동부를 지키겠다는 제마아트 예니체리들은 중앙의 말을 조금 들을 여지가 있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생각이신지요.”
알리 파샤가 상헌을 바라보았다.
“다른 나라의 군대가 그들이 지키고 있는 곳을 통과하게 내버려 둘 수 있냐는 뜻입니다.”
알리 파샤의 뒤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냅다 불쾌하다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알리 파샤는 그저 해상헌의 눈길을 해석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헌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당장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라크가?”
상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헌도 지금의 상황에 놀랐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는 이틀 전에 자신이 받은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다.
설마 황실과 4국은 예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준비를 해 왔던 것일까.
상헌은 이라크에 있는 ‘그자’가 대체 누구인지 너무 궁금했다.
아랍 연방 제일의 미녀와 결혼한 데다가, 그 복잡한 이라크를 단번에 휘어잡고 문명을 건설하고, 부족 갈등을 봉합한 고려인.
이라크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그자는 바그다드 대도서관이나 궁전 같은 유적지를 복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유전 같은 것만 개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의 인도하에 이라크는 바스라 항구를 개발했다.
그 뒤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잇는 전신선과 철도도 개발했다.
티그리스 철도는 처음에는 바스라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아마라와 바그다드를 거쳐 이제는 모술 북부까지 도달했다.
이는 사실상 고려의 외인부대가 모술까지 힘들이지 않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모술부터 오스만의 영토인 마르딘, 디야르바키르까지는 정말 멀지도 않았다.
그리고 디야르바키르는 남부에서 엘라지와 에르주룸, 에르진잔을 갈 수 있는 관문 도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와중에도 이라크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꾸렸다.
그 수는 한둘이 아니라 아마 따지고 보면 니자므 제디드들의 수와 비견될지도 몰랐다.
이들은 언젠가 국제법의 수호자인 고려가 이 땅의 통치권을 내려놓고 물러날 때, 이 땅에 들어설 적법한 왕조를 위해 평화와 질서를 수호할 것이었다.
베네치아가 4국동맹을 주장하며 말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지중해 방어]
사실, 고려가 역으로 지중해를 봉쇄하기 쉽다는 것도 그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들 또한 지중해에 고려의 접근을 차단해야 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의 앞마당에 대함대를 들여보내면 이득보다 손해가 더 컸다.
게다가 베네치아는 사실상의 수도가 항구도시인 베네치아, 혹은 튀니스 해안가였으니.
고로 베네치아가 통제하는 수에즈 운하에는 대구경의 함포도 배치하여 견제한다.
베네치아가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카스티야의 중립지대로 남아있는 지브롤터는 활대기뢰정이나 바다에 까는 기뢰로 적의 대형함이 통과하는 것을 막자.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 고려의 해군이 지중해에 진입할 수 없거나 진입해도 그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비롯한 4국동맹의 행보는 확실히 풀렸다.
어차피 지금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포기해야 했다.
뭄바이가 순식간에 당했는데, 다른 곳은 더더욱 위태로웠다.
지금은 누산타라나 인도에서 가져오는 이윤을 누리기보다 본국에서의 싸움에 주력하는 것이 맞았다.
당분간 손해를 보더라도 이렇게 하면 고려는 그들의 우호국인 튀르크와 그리스, 그리고 그들에게 줄을 타고 있는 이탈리아 등을 구원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지중해 방어작전을 위해 베네치아는 유일한 걸림돌인 이탈리아 함대를 무력화시키며 첫 단추를 잘 꿰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려가 이라크에 얼마나 많은 자산을 투자했는지, 어떻게 그 이질적인 종교를 봉합하고 갈등을 멈추었는지, 어떻게 번영을 약속하고 문화를 키우려는지 인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식민제국에게 식민지란 본국에 부를 끌어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만약 이라크를 점령했다면, 이들은 현지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원유를 추출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철도와 전신을 깔았다면, 그것들에 딸려오는 부속적인 이윤을 식민지인들에게서 착취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고려처럼 다른 이득을 바라지 않고 이들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손해였다. 비상식이었다.
그러나 짧게는 일이 년, 길어 보았자 이삼십 년을 보는 일반적인 정치와 외교는 세대를 넘어 기나긴 기다림 끝의 과실을 추구하는 이의 정치와 달랐다.
후자에겐 손해가 이윤이었고, 비상식이 상식이었다.
그 결과로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땅바닥에서 솟아났다.
관심도 가지지 못했던, 그저 척박하다고만 생각했던 땅에서.
한때는 제국의 중심부로 찬란하게 번영했으나, 점차 튀르크와 페르시아의 힘에 밀려 언제부터인가 그저 두 나라 사이의 분쟁지역으로 남아있었던 땅.
하지만 그 땅이 최초의 제국이 부화한 위대한 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터.
“…….”
알리 파샤는 눈을 감았다.
오스만이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통제하던 이라크를, 그리고 메카와 메디나를 비롯하여 지금의 아랍 연방이 된 땅을 잃어버린 것은 술탄의 몰락이 되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처한 이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자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러시아가 종교를 들먹이며 남진하여 튀르키예의 강역에 파괴와 학살을 불러일으키니…….”
알리 파샤가 붉어진 눈동자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라크의 사내들도 형제들의 평화를 위해, 또한 옳은 정의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예전처럼.”
알리 파샤가 힘겹게 말을 맺자, 상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예전처럼.”
그러니 사악한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에 의해 선포된 십자군에 맞서.
이라크의 왕조가 튀르키예와 함께 싸운다고 알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