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2)
창양.
국회의사당.
개천력 445년에 완공된 국회의사당은 중앙대로와 청사 거리가 마주하는 오른쪽에 세운 건물로, 기존의 제국회의와 중서성 의회가 열리던 태성전과 호민전을 대체했다.
고려 고궁, 연경궁의 후원이 있던 넓은 부지에 최신식으로 세워진 만큼, 의사당은 각 의원들의 사무실과 거대 회의실, 기타 보조 시설들을 세워 근무하는 자들의 편의를 향상시켰다.
그동안 황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성형요새를 통과해야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제 시중의 정녕당이나 청사에 방문하는 것이 더 쉬워졌고 이는 업무적 효율성이 상승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물론 태성전이나 호민전이 어디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두 건물 자체가 이제 연식이 너무 오래되었고 그만큼 사람들을 수용할 편의시설이 너무 좋지 않다는 의견이 공공연하게 제시되었기에 현재 연임 중인 강승규 시중의 대에선 아예 현대식 철근강회건물로 새롭게 짓자는 결정이 떨어졌다.
객관적으로도 회의가 길어질 때마다 좁아터진 화장실을 쓰려고 발을 동동 구르던 의원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의원들도 그러할진대, 그 보좌관들은 더더욱 그랬고.
고려가 팽창과 확장을 거듭하고, 또한 신민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날이 갈수록 중서성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니 황상 폐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황성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의 수 자체를 줄이는 것도 맞았다.
이미 중려 합병 이후, 중려 출신의 의원들이 엄청난 숫자로 증가한 상황이었기에 의원들의 의자가 다다닥 붙어 있었다.
그동안 옆자리 의원들끼린 아마 몸에 밴 냄새만으로도 서로 오늘 아침에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이 새로 생겼으니 이전의 두 건물은 이제 의사결정과 의회의 중심보다는 유서 깊은 건축물 겸 문화재로서, 가끔은 특별한 의식을 수행하는 경우로서만 기능하게 될 터였다.
이것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중서성 의원들이 기존에 모두 황성에 모여 토론하는 것은 명백히 고려 제국이라는 곳이 입헌군주정임에도 불구하고 전제군주정의 그늘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순간을 기점으로 시중의 거처인 정녕당, 정녕당 옆에 있는 각 부처의 여러 청사들, 집법령이 있는 대법원과 국회의사당이 모두 황성을 빠져나가게 되면서 고려 조정이라 불릴 수 있는 곳은 황제의 그늘 아래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이제는 조정이라는 말 대신 정부와 의회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어울릴 터.
황실의 가장 높은 어른이 생각하기엔 이는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국회의사당의 편리함을 맛볼 겨를도 없이 이번에 최초로 국회의사당에 열린 임시특별회의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현시점, 국가 파병을 결정하는 곳은 황제도, 시중도 아니라 중서성이었다.
물론 황제는 근위여단과 외인부대(대외적으로)를 운용할 수 있었지만 국가의 정규군은 행정적으로는 군무상서, 상서령, 그리고 시중의 통제를 받았고, 절차상으로는 중서성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군대 파병에 대한 중서성의 난관은 상당히 높았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굳이 나가서 싸울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왜 남의 땅을 탐욕스럽게 갈구합니까? 남의 땅을 위해 왜 싸워줍니까?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고, 우리의 땅을 사랑하며, 우리의 대지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우리의 도시가 땀과 증기로 가득한 것만을 원합니다. 다만 정말로 저들이 우리의 안녕에 위협이 된다면, 그저 우리의 무기를 팔아 저들끼리 싸우게 하면 그만이지요.”
“의원님께서는 동맹국이라는 개념을 잘 모르시는군요?”
“하, 그래서 지금 네덜란드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에이레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말장난하지 마세요. 도이치와 스웨덴은 우리의 우호국일 뿐 동맹을 맺진 않았잖습니까?”
“나바르에 대한 건 어떻게 하시려구요.”
“들어보세요, 허 의원.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신민들이 납득이 가는 개전 명분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 당은 2차 추심전쟁은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가깝기도 하여 작전 수행도 편하고. 그거까지 뭐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는 육지로 프랑스를, 바다로 베네치아의 야욕을 좌절시키면서도 그 이상은 전면에 나설 것 없이 우호국을 지원하는 선으로 아국 젊은이들의 피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이야기는 앞선 두 나라완 다르지요. 그 먼 거리까지 어떻게 원정을 보냅니까?”
“어중간한 지원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텐데요. 아국이 그렇게 주의를 주고 경고했는데, 지금 저들은 자신들의 위기에도 태세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직 도이치만 제대로 된 규모의 군대를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우리도 육군 병력 규모를 키우는 방안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겁니다. 지금 이 전쟁은 고작 십만 명으로 뭘 할 수 있는 전쟁의 수준이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의 국토를 방위하기 위한 병력도 그만큼 필요하니까.”
귀당과 경당, 교당의 논의는 뭔가 합의점을 도출할 것 같으면서도 평행선을 달렸다.
전면적 파병에서 한 번, 지원의 성질에서 한 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기에 자리한 모두가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대한 명분 자체는 크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약과 채권은 고려의 노기를 촉발하기엔 충분했다.
* * *
결국 고려는 일차적으로 우호국에 대한 군수 지원을 선포했다.
하지만 스웨덴과 나바르에 무기를 주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스웨덴은 강국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북방국의 한계로 인구가 충분하지 않아 다른 곳도 국민개병제를 도입한 이상 인원수에서 힘들었고, 나바르는 하나의 나라라고 보기에도 힘들 정도로 나약했다.
논의 끝에 결국 2차 추심전쟁 이상까지도 상정한 파병안이 통과되었다.
귀당은 땅을 쳤지만, 경당과 교당은 서로 손을 맞잡고 협치로 이룩한 성과에 만세를 불렀다.
파병은 육군 자체의 병력 증강이 필요했다.
그동안 고려의 육군은 언제고 크게 늘어난 적이 없었다.
북원을 정벌한다고 서벌군을 개편하던 시절의 중앙군이 그때 그 시절의 편제 규모에서 두 배가 증가한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도 고작 십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예전에야 십만의 숫자는 엄청난 대군이라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수치였다.
근위여단과 외인부대, 해병대를 다 합치면 육상 전투병력 자체야 꽤 많겠지만, 현 고려 육군의 규모 자체는 군사강국이라고 보기엔 좀 힘들었다.
첩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러시아가 이번 남하를 꾀하며 준비한 군세는 최소 백만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섬뜩한 보고서에서는, 러시아가 거의 삼백만이 넘는 군세를 추가로 더 투입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프랑스 1공화국의 병력도 만만치 않았다.
어뢰정에 투자하고 있는 빈약한 ‘청년해군’과는 달리, 프랑스 육군은 정병 칠십만, 그리고 추가로 이백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고 보고되었다.
물론 국가 예산의 칠 할을 군대에 퍼붓고 예비군 제도를 혁신적으로 개혁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도이치는 오십만의 상비군과 무려 러시아와 비슷한 삼백만의 예비군을 제도화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군세였다.
국민개병제가 등장하긴 했지만 보편화되진 못했던 이전의 대전쟁, 대북방전쟁도 그 이전의 전쟁들에 비교하면 엄청난 군세가 치고받았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때보다도 각국의 군사 수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한 국가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작심하며 싸울 때 어떻게 되는지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제아무리 바다 건너에 있어 이 광경을 물 건너 불구경으로 바라보던 고려도 이쯤 되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덩치 큰 해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려 또한 군비 규모를 늘리며 국민개병제를 본격적으로 건드렸다.
군비뿐만 아니라 가용한 병사의 범위도 확장되었고, 이에 드넓은 땅에 신병들을 훈련시킬 훈련소가 먼저 지어졌다.
적절한 남성에 대한 일차적 징병제가 발효되었으며, 여전히 농업과 가정 구조를 중시하는 고려에 어울리게 한 가정에서 한 사람의 남성을 징병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이 징병법은 국가의 지식 계층이 될 수 있는 학생들을 유예시켜 배려했고, 이 기점으로 중학교의 진학률이 상당히 높아졌다.
어쩌면 중학교까지의 제대로 된 공교육이 자리 잡히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려가 일차적으로 훈련시키게 된 병력은 오십만 명.
적어도 일 년간의 훈련이 완수된다면 파병할 수 있는 수준이 되리라 예상 가능했다.
징집병이 모집되고 훈련하기에 앞서 근위여단도 따로 훈련을 실시했다.
한꺼번에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징병하는 터라 징집병들의 훈련을 시킬 사람들도 많이 필요했다.
군부 입장에선 당연히 기존에 있던 경험 풍부한 인원들을 써먹는 것이 좋았다.
가장 강력한 근위여단 소속의 병사들과 부사관들은 이들의 훌륭한 조교와 교관이 될 수 있었다.
그 전에 다소 정체되어 있던 근위여단들의 역량도 높일 필요가 있어, 근위여단은 제일 먼저 훈련장에 들어가야 했다.
훈련은 여건에 맞추어 몇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마지막 훈련은 모든 부대가 동일했다.
근위여단은 육체 및 기본시험과 특기시험 등은 무난히 통과했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전술 최종평가는 또 뭐야?”
“자세한 건 모르는데, 뭐 대항군이랑 싸운다는데?”
“대항군? 아, 제국 소속인데 전문적으로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해 만든 부대 말인가?”
“그래. 그 인간들.”
“뭐 얼마나 대단하기에….”
“별거 없을 거야.”
근위여단은 고려 최정예.
지금은 실전이 더없이 풍부한 외인부대에게 슬그머니 밀리는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황제와 도성을 수호하는 부대이니만큼 자신들도 열심히, 혹독하게 이 이름에 걸맞은 규율과 신체를 유지하기로 명성 높았다.
그런 그들을 앞장서서 훈련시킨다는 부대가 있다?
반발심부터 생겨나는 것이 당연했다.
근데, 그 부대. 예전에 많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이름이 다소 특이했는데.
뭐가 되었든, 감히 근위군의 명성에 도전하는 이의 콧대를 혼쭐내겠다는 각오를 다진 이들은 열심히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 * *
3월이 되자, 서쪽에서 시작된 전쟁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러시아는 대군을 남하시켰다.
예전 일리안 아센이 보았던 그 진격로가 주였고, 다시금 이메레티를 통해 캅카스와 흑해 동부로 내려가는 것이 조공이었다.
예전, 끝내 정복을 완수하지 못하고 도시의 코앞에서 물러나야 했던 러시아군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갈망의 도시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흑해함대의 포격지원을 받으며, 러시아는 오스만을 다시금 공격해나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향상된 전력은 이전의 실패를 다시금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여실히 느껴졌다.
현재 러시아는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소총 몇 가지를 혼용해 쓰고 있었다.
한계가 있는 전장식, 수석식 소총은 대부분 도태되어 밀려났고 오스트리아에서 사 온 슈타이어 소총이 그 자리를 메웠다.
최근에는 블라디미르 1세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슈타이어 소총의 러시아식 개량형인 쿠즈닌 소총이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이 총은 ‘차르의 걸작’이라는 찬사까지 들었을 정도로 작동성과 신뢰성이 우수한 후장식 소총으로 꼽혔다.
고려가 무연화약을 보편화한 것과 달리 질산화합물에 대한 대량생산 기초가 부족하고 또 생산성을 높일 화학적 지식과 식자들이 부족한 러시아는 아직도 몇몇 화기를 제외하고는 흑색화약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쿠즈닌 소총은 종이탄피 말고도 황동탄피를 유럽 최초로 도입할 수 있었고 약실 밀폐의 용이성으로 총기 자체의 내구도도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개인화기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포병전력도 괄목할 만큼 발전했다.
강철 대포의 구경과 사정거리는 늘어났고, 그렇기에 포병의 위력은 강해졌다.
새롭게 만들어진 특별한 무기도 있었다.
한번 비행정에 크게 덴 이들은 그 둔한 하늘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구경이 크진 않지만, 구경장이 긴 대공포를 만들어냈다.
비행정이 운용 가능한 고도까지는 충분히 닿는 이 무기는 그 둔한 괴물이 다시금 러시아군의 하늘에서 그들을 농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제사총은 그 한계로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러시아도 다혈포 계열의 총기를 배치하니 다수의 보병을 상대하는 화력도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오스만군도 예전의 부패하고 뒤떨어졌던 예니체리가 아니었다.
트라키아 방면의 오스만 방어선은 니자므 제디드가 방어하고 있었고, 이들 또한 정윤 381 소총과 강철 대포를 가지고 있는 엄연한 신식군이었다.
전력상 명백히 러시아가 우위에 있었지만, 필연적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