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2)
“뭘 봐요?”
신문을 읽던 해원은 자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을 느꼈다.
해원은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루이제의 볼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제는 그녀도 상당히 늙어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은 여전히 그녀가 이십 대처럼 예쁘고 아름다워 보였다.
“깨셨소?”
“한숨 소리가 침대까지 들리는 거 같아서요.”
“난 낸 적 없는 것 같은데.”
“수십 년 함께 살아온 남편의 한숨 소리야 굳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아는 법이지요.”
루이제가 의자를 끌어 탁상에 가까이 앉았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무릎도 가끔 아파오는지, 루이제가 자신의 무릎을 두어 번 두드리는 것을 바라보던 해원이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어떻소?”
“누구요?”
“당신이 친정에서 데려온 그 아이 말이오.”
“아.”
내관이 부부의 앞에 잘린 겹빵이 담긴 그릇 몇 개와 껍질이 벗겨진 삶은 계란 등을 공손히 내왔다.
커피 대신 결명자차를 한 잔 들이켠 루이제가 말했다.
“일단은 좀 안정된 것처럼 보여요.”
해원이 투덜거렸다.
“도이치의 국왕도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능력과 성품이 항상 비례하는 법은 아니니….”
자신의 조카에 대해 비난하는 셈이라 말꼬리를 흐린 루이제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조카가 성질이 단단히 났을 텐데.”
“그건 아동 학대요. 도이치 왕 그 작자가 화가 나든 말든, 나는 그 아이가 직접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상 도와줄 생각이오.”
현 도이치 국왕은 여전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였다.
프로이센에서 도이치 왕국으로 국명을 바꾼 그는 꽤 어릴 적에 즉위했었던 터라 여전히 정정했다.
물론 식습관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에 근검절약하며 군사적으로 규율 잡힌 생활을 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그는 군사적으로 도이치의 전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아버지로서는 최악의 인물이라,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를 군인화하겠다며 어릴 적부터 갖은 폭행으로 훈육했다.
이 감수성 넘치는 어린 소년은 그런 학대에도 묵묵히 참았지만, 결국 고모할머니가 베를린에 왔을 때 비로소 쌓이고 쌓인 울화가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열세 살의 어린 프리드리히는 밤중에 고모할머니의 방에 찾아와 무르팍에서 엉엉 울었고 프리드리히의 딱한 사정을 들은 루이제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어른으로서, 고려제국의 황후로서 한바탕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나무랐다.
그리고 그녀가 베를린에서 다시금 창양으로 귀환할 때는 가정폭력에 범벅된 아이를 제도의 높은 교육을 받게 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구출해냈다.
졸지에 장남이 고모의 손을 잡고 고려로 도주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몹시 격노했다.
심지어 계집애 같은 장남이 도이치의 왕위에는 모자란다면서 계승권을 박탈하느니 마느니 난리법석을 피웠다.
주도이치 고려대사를 불러 큰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도이치 대사가 뭘 어쩔 수 있었겠는가.
이건 어디까지나 호엔촐레른 왕조와 해씨 황조 내부의 문제였으니, 도리어 이 사건을 국가적인 공무로 비화시키는 것은 옳지 못했다는 소리만 반복했을 뿐.
그래도 아내부터 시작하여 딸들, 호엔촐레른 친척들, 도이치 귀족들이 필사로 왕의 진노를 뜯어말렸고, 또한 스웨덴이니 네덜란드니 하는 국가들에서도 우려의 서한을 보내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지금 황성 근처에 있는 창양황립중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이 학교는 해원이 황태자 해청의 또래 교육 및 사회성 함양을 위해 만든 곳으로, 뇌전병에 걸리기 전의 해청도 중학교 교육을 훌륭하게 이수했으며 또래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그 아이도 그 아이인데, 요즘 당신 우리 막내딸한테 예전보다 관심 뜸한 거 알아요?”
“세희도 이제 자기 일을 알아서 찾아서 할 때가 되었잖소.”
둘째 연희는 사업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궁정의 의복이 어떤 주기를 가지고 바뀌는지 꼼꼼히 기억하고 커가면서 궁 내의 유행 흐름을 주도했으며, 지금은 고려와 동아시아, 유럽의 복장을 전부 섭렵한 다음 자신만의 의류기업을 만들어 거느리고 있었다.
얼마나 일 처리가 야무진지, 선조께서도 해원을 통해 가지신 자금을 투자해주시기도 했다.
둘째 딸이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 이후부터, 해원은 웬만하면 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랬다.
물론 그 상대가 도덕적 결함이 있거나 놈팽이 같은 놈이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황금장식 이중총열 산탄총이 그 몹쓸 놈을 향해 겨누어질 수도 있겠지만.
마음씨만 착하고 올바르다면 정말로 창양의 김 아무개니, 박 아무개니와 교제하고 심지어 결혼하는 것도 상관이 없었다.
이러한 것은 황실의 권위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고려도 귀천상혼은 승계서열 배제가 되었다.
황족의 의무에 엄연히 정략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승계서열 배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귀천상혼도 가능하단 말이었다.
도리어 귀천상혼이야말로 황실의 가장 큰 목적, 즉 모든 국민의 동경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유지하는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 아닐까.
뭇 여인들이 백마 탄 황자를 꿈꾼다면, 뭇 사내들도 아름다운 공주를 꿈꾸기 마련이니.
물론, 보통의 황실의 사람들은 지위가 지위다 보니 황왕족이 아닌 평민이라도 상류층과 어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결합되기 마련이었지만.
“세희가 요즘 이상하잖아요. 그 좋아하는 책도 요즘 들어선 잘 읽지도 않고 이젠 궁을 아예 떠나더니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연희가 하는 사업을 견학하러 갔다잖소.”
“당신은 그 말을 믿어요?”
“그럼 딸 말을 안 믿나?”
“어휴, 답답한 사람.”
서로 간의 애정은 충만하지만, 그렇다고 부부가 다투지 않는 건 아니라 자식 문제에 관해선 부부는 자주 옥신각신했다.
“해청이 그 아이는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남매간 약속이라며 이 어미한테는 아무것도 안 알려주잖아요. 아들자식 키워 봤자 정말 쓸모없다더니, 정말….”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 루이제를 당혹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해원이 그제서야 그녀를 안고 토닥이자, 루이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어쨌든 세희 좀 잘 관찰해봐요.”
“알았소. 알았소.”
* * *
부익사에서의 한차례 소동―공주의 비행―이 있었던 후의 일이었다.
군무부로 복귀한 다르크 상현은 어느 날 밤, 자신의 숙소에 은밀히 찾아온 일단의 무리를 마주했다.
‘뭐지? 간첩인가?’
하지만 창양 한복판에서, 그것도 군무부 직원들 숙소에서 그럴만한 능력을 지닌 자들은 없었고, 이내 그 사람들이 신분을 밝히면서 상현은 집 안에 있던 방망이를 내려놓고 경계를 풀 수 있었다.
그들은 태자가 상현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다.
야심한 밤에 뜬금없이 영지(令旨)를 받아들게 된 상현은 당황한 와중에도 빠르게 정복으로 환복한 뒤 동궁으로 향했다.
부익사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분이었기에, 상현은 동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잔뜩 긴장해 무슨 말씀을 하실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태자는 규칙적인 생활로 유명했다.
뇌전병을 얻은 이후에는 건강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엄격한 식이요법을 실시하고 건강에 좋은 차나 기타 먹거리를 챙겨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태자는 성정이 엄격하며 깐깐하고 꼼꼼하다 들었다.
마침내 동궁에서 태자와 마주하게 된 상현은 편하지만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는 태자가 집무실에 앉아 자신의 이력서를 훑어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경례를 받아준 태자가 껄껄 웃었다.
“이력이 재미있더군. 다르크 정위.”
“…송구하옵니다.”
“자네의 인생인데, 송구할 게 뭐 있나? 하지만 부황께서 계신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할 정도면 배포 하나만큼은 인정해도 되겠다.”
실로 유구무언이었다.
“지금은 군무부에서 병기관리평가를 하고 있다… 그것도 비행기와 전투기 안전 쪽이다? 좋아.”
영문을 모르고 단지 황태자의 입에서 어떤 처분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던 상현은 뚱딴지같은 말을 들었다.
“귀관이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청은 상현에게 그가 보던 것들의 밑에 있는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창양수도비행장 건립에 대한 서류야. 자네는 내일부터 이곳으로 출근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황제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 왔던 업무 중 적지 않은 부분을 황태자에게 이양했고, 앞으로 더 많은 분야에서 그럴 것이었다.
노년엔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거나 아예 양위를 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보고픈 황제가 한둘이었는가.
선대로부터 내려온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군무의 일도 마찬가지.
누구의 핏줄인지는 너무나 명백했던 터라, 해청도 군사 업무를 굉장히 꼼꼼하게 수행했다.
사실 대부분의 일은 상서성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최고 통수권자와 예비 최고 통수권자로서 할 일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수도비행장이라니.
상현이 긁적이며 물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감히 제도를 넘볼 자들이 있습니까?”
“없지. 하지만 공군은 왜 근위대가 없느냐는 항의가 빗발치다 보니까 나와 시중은 새 병과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지으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제도에 대한 방위는 과함이 없는 법이고 공군은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선전거리와 볼거리가 되니까.”
“그렇군요.”
왜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태자의 말을 들어보니, 납득이 가는 논리였다.
비행기에 대한 기밀이 풀리고 양산과정에 돌입한 지금은 그 활동하는 모습을 숨기기도 어려워졌다.
이에 고려의 사람들은 순수한 궁금증에 하늘을 유연하게 오가는 물체를 보기 위해 쫓아다니는 사람도 생겨나곤 했다.
비행선은 이제 질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직 들고 다니기에는 조금 거추장스러운 사진기까지 사용하다 적발되니, 방첩 분야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할 거리가 많아졌다며 큰 짜증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민간에서는 이에 감명을 받아 자신이 손수 항공기를 만들어 보겠다며 도전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활강기를 자체적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있었던 만큼, 이 복엽기는 기관 문제만 해결된다면 어떻게 민간도 운용할지 몰랐다.
그때가 되면, 군용기 기술력은 다시금 도약하겠지만.
“그러니 자네는 다시금 현장으로 복귀할 걸세.”
그전까지 태자의 앞에 있어 긴장이 가득했던 상현의 얼굴에 차마 숨기지 못한 기쁨의 미소가 은근슬쩍 피어올랐다.
사정없이 자기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웃음을 참는 상현을 바라보던 태자가 다른 서류를 하나 건넸다.
“그리고 자네는 그 비행장에서 이자에 대한 교육을 특별히 더 신경 써야 할 거야.”
“예? 예….”
상현은 그에게서 다시금 새로운 서류철을 건네받았다.
“읽어보게.”
자신의 현장 복귀에 정신이 팔려 그저 받은 서류를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상현은 태자가 독촉하고 나서야 그 내용을 빠르게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걸린 은은한 미소는 사라졌고, 입 끝은 당혹스러움에 요동쳤다.
“세희를 두 번 만나봤다고 했지?”
“…예.”
“막내는 이 일의 적임자가 그대라고 계속 말했네.”
“저, 저 말고도 다른 괜찮은 자가….”
“그 말이 본심이 아니라는 건 알아.”
“…….”
“다르크 정위. 지금 나는 그대에게 경고를 하는 걸세.”
해청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상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보다시피, 세희는 이제 수도비행장에서 자신이 비행기 조종사가 되길 원하고 있다. 그날 부익사에서의 비행 한 차례로 끝날 줄 알았던 내가 멍청했었지.”
비행에 매료된 그녀를 본 상현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오빠를 설득했는지는….
“막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거의 보름 동안 먹지도 않고 단식을 하며 날 설득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그 아이의 유일한 희망을 들어주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가 비행을 하는 것 자체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야. 일단 몹시 위험하잖나.”
“그 뒤로도 부익사에 많이 오가셨습니까?”
상현도 부익사를 많이 오갔는데, 어찌 기회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질문하지 말고 들어.”
“예, 알겠습니다.”
“그대가 안전 점검에 꽤 소질이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비행 자체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다고도. 또, 한번 인생이 크게 엿을 먹어 본 경험이 있으니 앞으로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맞나?”
맛있는 엿을 먹다란 표현이 왜 삼별초 시절부터 쭉 욕이 되었는지는 고려의 국어학자들도 잘 모를 것이다.
어쨌든 태자의 입에서 나온 상스러운 소리는 신경 쓸 겨를 없이, 상현은 그저 마른 입술을 깨물며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긍정했다.
“예, 그렇습니다.”
“자네는 지금부터 쭉 세희를 감시하고, 훈육하고, 또한 그녀가 탈 기체를 점검해야 할 것이네. 다른 이들에게 멍청히 맡겨놓지 말란 말이야. 그대가 먼저 타 보든 뭘 하든 그건 알아서 하게.
다만 세희가 잘못된다면, 내 친히 자네까지 잘못되게 만들어 주겠어. 그것 하나는 정말 장담할 수 있네.”
서슬 퍼런 말에 상현은 동궁의 집무실에 있는 고풍스러운 천장 장식물들이 흔들려 보이는 경험을 느꼈다.
“그 말괄량이를 어떻게 훈육할지는 그대에게 달렸네. 그 부분에 한에서는 종통 모독죄를 조금 유하게 적용시켜주지.”
상현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비록 그녀를 동경하고, 심지어 남몰래 연모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들어오게 되는 것을 바라진 않았다.
“행운을 비네.”
* * *
개천 451년 11월 11일.
인도
베네치아령 뭄바이.
[뭄바이시 당국은 수사에 협조하라.]
7함대 전력은 뭄바이 앞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함포를 겨눈 채, 마약단속국 인원들이 가져온 증거를 가지고 뭄바이에 최후 통첩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는 어마어마한 수의 마약이 이곳을 통해 거래된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그저 건드리지 않았던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명에서의 난리와, 명의 사람들에게서 예맥한계 국가나 강화의 사람들로 퍼져 나가는 아편과 대마들이 고려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공급책을 박살 내는 것이 필요했다.
바다 건너의 일이었고 여러 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이상 완전히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적어도 그 수량은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도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저 대외적 명분과 대내적 명분 두 개를 모두 확보한 고려가 마침내 베네치아의 행동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제국의 진노를 풀기 위해선 어찌해야 할까.
아마 고려는 베네치아가 이집트를 해방하고, 수에즈 운영권을 다른 나라들과 공유하며, 게토를 해산하고 인본주의적 정책을 실시한다면 화가 풀릴 수도 있을 터.
허나 이들이 이런 정책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전승호에 탑승한 제독이 망원경을 내려놓고 함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함, 전포를 동원해 가까운 앞바다에 발사하라. 배 한두 척을 부수는 부가적 피해는 상관없다.”
“예, 제독!”
불공급 전함들의 거대한 포탑이 뭄바이로 향했다.
4개의 포대, 2문의 함포, 두 척의 배.
열여섯 개의 거포들에 포탄과 장약이 채워지고, 마침내 우렁차게 함포를 발사했다.
― 콰아앙
엄청난 화염이 포구에서 번쩍였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바다도 뒤집혔다.
엄청난 충격파에, 일시적으로 함포 구경장의 끝에 있는 부분의 바다는 찰나 간 다른 수면에 비해 살짝 내려갔으며, 충격파가 해소된 이후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파도가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
위력은 한 차례가 아니었다.
예전보다 확연히 성능이 높아진 주퇴복좌기는 구경이 늘어났음에도 함선에 가해지는 충격을 더 부드럽게 흡수했고, 재장전을 더 매끄럽게 만들었다.
끙끙거리며 거대한 포탄을 옮기는 수병들의 노고 덕에 불공급 전함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장전을 마무리했고, 다시금 포탄들을 쏘아 보냈다.
그 와중에 상승호가 전승호보다 장전 속도가 확연히 더 빨라 보였다.
제독의 말대로 고려 해군은 정말로 부가적인 피해를 신경 쓰지 않았고, 항구에 정박한 어선들은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 휘청거렸다.
고려는 이곳에 장난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의사를 읽었는지 마침내 뭄바이 항구 요새에서 흰색 천이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