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23화 (423/653)

균열

개천 451년 4월 30일

콘스탄티노플.

해상헌이 이끄는 콘스탄티노플 지부에 정보총국의 내사국장이 도착했다.

정보총국 제5국 내부감사국은 인원은 다른 부서에 비해 상당히 적었지만 고유의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총국장, 아니 총국장을 넘어 황제 해원의 명령을 받았고 정보총국의 행동이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효율적이며 규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감시 및 조언과 제언을 하고 있었다.

오직 비밀에 부쳐진 제4국 빼고는 대내국, 대외국, 마약단속국, 분석국, 지원국, 과학기술국 등의 모든 정보총국의 다른 국의 행동들은 5국의 견제를 받는 셈이다.

자정작용이 없는 단체란 언젠가는 파멸로 향하니 당연한 처사였다.

특히나 정보총국이 가진 권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볼 때면 더더욱.

정보등급이 높아 4국의 존재를 알고 있긴 한 일부 요원들은 제4국은 대체 뭘 하는 기관이기에 5국의 감사조차 받지 않는가란 의문을 품긴 했지만, 사실 제4국의 인원들이야말로 창설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가장 혹독한 내부 감사에 시달리는 불쌍한 존재들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왔으니 피곤해질 게 분명하다.

내사국이 행하는 업무의 성질로 미루어볼 때, 일선의 실무자들과의 마찰은 예정된 것과 다름없어 상헌은 내사국장이 도착한 순간부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사국장은 그와의 만남 자리에서 일단 화제를 돌려 근황부터 물었다.

그야말로 호랑이나 곰도 무서워 벌벌 떤다는 사람이라도 쌍용지손에 임명직이라지만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곳을 직접 다스리는 사람을 함부로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상헌은 언뜻언뜻 보이는 날카로운 내사국장의 눈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 실라다르 다맛 알리 파샤가 정권을 잡겠군요. 이제 이곳을 오스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오스만의 이름을 쓰지 못하지만 국호가 뭐가 되었든, 국가의 본질은 별달리 바뀌진 않을 겁니다.”

상헌은 오스만의 현 상황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분석국에 자료를 올려, 정보총국 전체가 지금의 상황을 알게 한 상태였지만 현장에서는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부르사 시대.

아흐메트 3세 술탄이 폐위된 것도 모자라, 다음 술탄이 한밤중에 단검으로 암살당하고, 다시 그다음 술탄은 독살당하고, 또 그다음의 술탄이 죽었던 사건은 셀림브리아 조약 이후에 무려 십 년간 여덟 명의 오스만 술탄이 허망하게 죽거나 폐인이 되는 시간을 이르렀다.

이 시기, 오스만의 혼란은 명나라 못지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자유시가 없었다면 이 시기를 틈타 오스만을 넘보려는 자들이 이 허약한 제국을 물어뜯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이렇게 러시아가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도 어중이떠중이들이 발이라도 담가보겠다고 침을 질질 흘렸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혼란기 동안 오스만은 예니체리와 관료들, 카디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내전을 치렀다.

얼마 전까진 네브셰히르리 다맛 이브라힘 파샤(대신)와 실라다르 다맛 알리 파샤가 서로 경쟁하던 구도였다.

둘 모두 혼란기 동안 짧게나마 사드라잠(대재상)을 한 번씩 역임했던 사람이며 각기 예니체리와 관료를 대변했다.

고려로서는 이브라힘 파샤보다는 알리 파샤를 미는 것이 좋았다.

공동으로 러시아와 대항해도 모자랄 판에 이브라힘 파샤의 추종자들, 즉 예니체리 파벌은 도리어 러시아와 거래하여 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을 내주고 평화를 맺은 뒤 남진하여 잃어버렸던 아랍 내부의 질서를 수복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보통은 군부를 상징하는 예니체리가 더욱 침략자에게 강경해야 했을 터.

하지만 부르사 시대를 열었던 아흐메트 3세는 구시대적인 예니체리 군대와 그 제도가 지금 고려와 유럽의 선진적 군대 체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예니체리는 지금 시점엔 군대가 아니라 무력을 사사로이 휘두르는 정치집단과 같았다.

이에 아흐메트 3세는 부르사 천도 직후 예니체리 대신 고려의 후원을 받아 구입한 무기와 대포로 니자므 제디드라는 군대를 편성했다.

신식군대를 만들어 구식군을 숙청을 하려 시도했던 것.

허나 예니체리는 이미 술탄의 권위 위에 존재했고, 숙청의 칼날이 그들에게 도달하기 전에 먼저 칼을 찔러넣는 것에 성공했다.

오스만 수도인 부르사에는 한동안 이브라함이 이끄는 예니체리의 시대가 열렸다.

다만 니자므 제디드도 완전히 숙청되진 않았던 터라, 북쪽의 게브제로 도주하여 계속 예니체리를 견제해 왔으며 마침내 관료층을 규합한 정계의 실력자 알리 파샤가 이들의 후원자가 된 이후엔 일어설 수 있었다.

오스만의 마지막 술탄, 셀림 4세의 시대에 이르러 술탄들의 직계가 거의 다 죽고 방계도 너무 혼란해 술탄의 혈족인지는 의심스러운 상황이 펼쳐졌을 때, 비로소 두 파샤들은 ‘오스만’이라는 이름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서로 미래의 정권을 위해 경쟁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정말로 열심히 알리 파샤를 지원해 마침내 그가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예니체리들은 정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과거 그렇게 피비린내 나게 싸워왔던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었다.

일부 예니체리들마저 그 모습에 학을 떼며 중립을 지키거나 혹은 전향했다지만 여전히 구식군대는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국가의 원수와의 동침도 상관없어 보였다.

오스만이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고려의 서아시아 구도는 완벽히 무너지게 된다.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제4국의 요원으로 추정되는 박성민이라는 희대의 능력자에 의해 이라크와 아랍 연방이 고려의 편으로 돌아섰고, 고려는 지중해에 의지하지 않아도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을 통해 서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엄청난 이점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것도 말짱 헛것이 될 테다.

그렇기에 지금 해상헌이 이룬 공로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괜히 황제가 직접 콕 집어서 일개 방계에 불과한 그를 지금 이 시대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정보전에서 중요성이 높은 지부로 발령했는지 이 얼음 같은 내사국장마저도 은연중에 감탄했다.

상헌은 알리 파샤의 세력이 정쟁에서 승리해 다시금 부르사를 수복할 수 있게 도왔다.

패배한 이브라힘 파샤는 아나톨리아 안쪽, 앙카라나 카이세리로 이동하여 할거를 통해 항거하고 있지만 일단 정국의 주도권 자체는 부르사와 이즈미르를 통제하는 알리 파샤에게 있었다.

이에 고려에게 감사함을 느낀 알리 파샤는 아흐메트 3세가 체결한 셀림브리아 조약을 수호할 것을 천명했고, 지난 러시아 중소형 군함이 의도적으로 포이라즈를 포격한 이후에는 니자므 제디드가 고려와 함께 트라키아 방면에서의 수비전략을 공유하며 구체적인 훈련까지 받게 한 적이 있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지부장. 귀하께서 이룬 성과에 황상께서도 흡족해하십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이 말을 하려고 오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내사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가 나왔다.

“무자파르 건은 대체 어쩐 일입니까?”

“…제 불찰입니다.”

내사국장이 미간을 좁혔다.

“무자파르를 보호하지 못한 이상 이집트 정권의 저항은 기대할 수 없고, 또한 알 가잘리 왕조 존속에 대한 의미는 사라졌지요. 이집트가 지중해에 가지는 중요성을 미루어 볼 때 전혀 좋은 일이 아닙니다.”

“…….”

“그것이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상헌은 침묵했다.

“이 일은 황상께서 덮으라 하셨으니 덮겠습니다. 허나.”

내사국장은 날카로운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황상께옵선 우리의 대의는 소중하지만, 그것이 국제법적인 정의를 해칠 만큼 대단한지는 항상 유념해야 한다 사륜하셨습니다. 이번 일로 베네치아의 악행을 널리 알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큰 명분을 얻은 건 사실이나 동시에 너무나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겼지 않습니까?”

상헌이 끝까지 침묵을 지키는 것을 바라보던 내사국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우리가 끔찍한 일을 직접 저지르지는 않았지요. 허나 알면서도 방치한 것도 때로는 죄악이 됩니다.”

내사국장은 상헌이 그리스 해군부, 그중에서도 요안네스 제독에게 의도적으로 흘린 기밀정보자료, 무자파르 왕자의 이동 경로를 책상에 올려놨다.

“제국의 품위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고, 우리의 고결함은 한번 훼손되면 다시 정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니, 공께선 이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상헌은 내사국장, 그리고 그를 보낸 해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읍했다.

“뼈에 새기겠습니다.”

* * *

베네치아와 고려의 관계는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급속하게 악화일로를 걸었다.

예전 두 나라는 친하진 않더라도 무역적으로 꽤 훌륭한 동반자였다.

대동양을 거친 물류는 카나리에 오가는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지중해로 운반되었고 소비되었다.

물론 제노바를 흡수 합병한 이탈리아나 아라곤 등의 다른 협력자가 있긴 했지만, 베네치아는 교묘하게 그들의 추격을 이리저리 저지했다.

하지만 추심전쟁과 이탈리아―베네치아 분쟁 이후 둘의 외교적 입장 차이가 도무지 좁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부터 두 나라는 서로를 예의주시할 나라에서 점차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나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 국가들은 다른 나라들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강한지 체감을 하기 힘들었다.

물론 고려는 엄청난 땅을 가지고 있고, 발달되고 화려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창천궁이니, 청해의 금융거리인 담쟁이거리니 하는 곳들, 넓고 비옥한 대지와 그곳에서 산출되는 곡식들, 빼어난 기술력은 유럽인들도 많이 알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를 얻긴 힘들었다.

남의 나라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위해선 그만큼의 관심, 즉 인적 첩보를 파견하여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방첩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나라 땅덩이가 넓은 것을 고려해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이런 정보 제한 속에서, 수집한 정보를 교란하는 정보도 있었다.

북려 대평원은 몹시 비옥하나, 잊을 만하면 그 어마어마한 수의 메뚜기가 침략해 농민들을 괴롭혔다.

고려의 산업은 최고이나, 석면과 같은 산업들은 고려의 친노동자 정책, 즉 빨갱이 정책으로 인해 외국으로 이전한 경우도 있었다.

고려엔 광물을 비롯한 천연자원이 있다지만, 땅이 넓은 것에 비해 그 매장량이 많지는 않은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는 것을 즐겼다.

이러니, 고려가 그 압도적인 덩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강함을 객관적으로 체감하기 어려웠다.

당장 러시아도 어마어마한 넓이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고려는 자국 해안의 측량을 단 한 번도 다른 이들에게 허락한 적이 없었고 상세한 측량 지도는 상당히 높은 군사기밀로 간주되었으니 정확한 대지의 면적조차 학자들이 대략적으로 계산한 바에 따라야 했던 것이다.

어쩌면 저 덩치는 그저 물렁살일지도 모른다.

형편이 조금 더 좋은 러시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뜻이 맞는 강대국끼리 힘을 합친다면, 이 세계의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베네치아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이백여 년 전 갈리시아의 엔리케가 했던 생각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일을 꾸몄다.

그러니 불길한 징조는 하나가 아니었다.

개천 451년 6월 2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4개 동맹국 회의가 열렸다.

말로는 베네치아가 이번 우에스카호 사건에 대해 입장 표명을 하는 자리라 했었다.

하지만 6월 24일과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는 7월 1일에 이번 우에스카호 사건의 피해자인 아라곤의 도시, 타라고나에서 고려를 비롯한 열강들이 당금의 상황을 논의하고 새로운 인도주의적 국제법을 만들기로 여론을 모으고 있었다.

이 국제법에는 유럽 무대까지 새롭게 등장한 조선과 옥저, 백제, 강화, 유구라는 5개국이 추가로 더 조약에 비준할 계획이었다.

허나, 정작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이곳에 참석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대답할 명료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 외교적으로 참 의아스러웠다.

특히나 고려는 베네치아의 행동을 국제법의 수호자라는 그들의 명예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아주 노골적으로 유감을 표시했는데, 이번 사건은 물론이고 게토 체제의 문제, 자국민 학살 사건 등을 결부시켜 베네치아의 부도덕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끝까지 자신들의 행동을 부인했다.

프랑스 제1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이 이를 지지했다.

4개국 내부에서 어떠한 말이 오갔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약간의 불만이 있었더라도, 대의를 위해서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4개국의 결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졌다.

* * *

창양의 신문에서도 이런 국제 정세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해원은 아침에 내관이 가져온 신문을 들고 커피를 마셨다.

잠에서 덜 깨 머리가 피곤했지만, 그는 신문의 머리기사를 읽자마자 졸음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이게 실리는 날이 오늘이었군.’

너무나 대놓고 어용신문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풍부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외국의 일을 꽤나 상세하게 다루는 제국신문은 황실 혹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필수적인 선전을 하는 신문과도 같았다.

물론 시중엔 보다 정부에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문들이 있었으니 제국신문에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보면 되었다.

아직도 이라크에 있는 해원의 선조께서 소유하신 청해신보는 정부의 정책이 그릇되었다고 한다면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어 시중의 미간에 주름을 적어도 두 개는 더 추가하기로 유명했으니까.

[위태로운 시대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베네치아와 러시아.

이 4개국 동맹이 심상치 않다.

군사무관들이 서로 활발히 오가고 핵심적인 군사기술이 서로 넘나들고 있다.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프랑스 육군기술과 베네치아 해군기술은 상대적으로 열세인 빈에도, 모스크바에도 공유되었다.

반대로 부족한 베네치아의 군량은 농지 비율이 많은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에서 보충되었다.

우리는 현 상황, 4개국을 다스리는 군주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블라디미르 2세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그리고 그로 인한 정복전쟁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 냉혈한 군주는 자신의 아비를 퇴위시킨 직후 계속 동유럽에 불길한 구름을 뿌려왔고, 불가리아와 그리스, 오스만을 위협했다.

합스부르크 군주 아돌프 2세는 선대 알베리히 3세 때 잃어버린 제관을 되찾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또한 크라인과 이스트리아의 영토도, 그리고 심지어 그들에게 종속되길 그토록 반항했었지만, 바다 건너 나라에게는 스스로 복속되길 청하는 그리스의 영토까지 욕심을 내고 있다.

그리스가 비록 제국과 연방의 일원은 절대 아니라 하나, 엄연한 주권국이며 자주국이 그러한 위협을 받을 이유는 없다.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 외젠은 어떠한가.

이 군주는 국왕을 불법적으로 처형한 뒤부터 일시지간 조용했으나, 결국 나바르의 몰락 전까지 프랑스 혁명은 완수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군비를 증강하고 있었다.

허나, 본지는 그들이 마치 혁명광장에 세웠던 단두대의 칼날처럼 시퍼런 아시냐를 먼저 바라볼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위 네 국가의 군주들은 하나같이 모두 현 고려가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위태로운 시대라 칭할 수 있겠다.

지나와 인도, 아프리카와 누산타라의 고혈을 마시지 않고서는 그들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들이 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야기가 좋지 않은 결말로 흘러가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제국신문 논설주간 프로코피우스 권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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