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파 사건
지중해의 열강들에게 인도양이란 지중해 다음으로 중요한 대양이었다.
이들은 어차피 대동양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한 상태.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양을 오가는 것이 대부분의 대외 무역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니 고려가 함대를 인도양에 두는 것은 다른 열강들을 크게 자극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지금이야 석유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예전에 페르시아만에 굳이 찾아가 기어코 주둔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정말 고려가 인도양까지 어찌 위협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었다.
그 함대가 사라졌을 땐 인도양엔 다시금 평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함대가 와 버렸다.
불공급 두 척이 편제된 7함대는 명칭상으론 고려의 여섯 개 함대 중 하나였지만, 그 전력은 열강 하나의 함대를 넘어서 있었고 대적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나라는 손을 잡아야 할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이번 7함대의 기함, 전승함에는 특별한 손님들도 타 있었다.
고려국 마약단속국 소속의 정예 요원들은, 명에 풀린 아편의 근원지를 제대로 탐사하기 위해 이번에 인도로 향하길 원했고 함대는 이들을 실어나르는 목적도 있었다.
그 말인즉, 고려는 다시금 아편이라는 명목으로 유럽 열강들의 목줄을 챌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몹시 공교로웠다.
마약류는 고려가 마음 놓고 휘두르는 대의명분 중 하나였고, 유럽의 부도덕한 열강들에게는 큰 돈줄 중 하나였으니.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포르투갈과 같은 나라들은 자신들의 동맥 위에 지그시 칼날을 가져다 대는 고려의 행동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이에 군비증강은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산업의 충분한 발전 없이 군비를 마냥 확충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제아무리 베네치아가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버는 나라라 하더라도 군비경쟁은 돈 먹는 하마와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넘었을지도 모른다.
베네치아는 안 그래도 이전부터 군함 건조와 어뢰 개발 등을 위해 여러 게토들에 특별방위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이 방위세는 조금씩 커져, 나중에는 정말로 민생에 엄청난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본래 그들의 정책이 처음부터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당연히 위태로운 정책이었다.
어떤 식견 짧은 도제가 이런 일들을 벌인단 말인가.
베네치아가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했었더라도, 이들은 그만큼 탐욕스러웠기에 오랫동안 숨을 붙여놓고 뽑아내길 원했지 이렇게 끝으로 내몰아 비참하게 죽여버리진 않았다.
이득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고려가 아라비아에 손을 뻗자 베네치아도 게토들을 끝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자기합리화까지 해 가면서.
― 이게 다 고려의 인도양 위협 때문이다.
물론 고려는 애초에 식민지인들의 고혈을 빨고 명인에게 마약을 팔아 부를 유지했던 타락한 식민제국들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었지만, 베네치아는 나름대로 고려를 미워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
예전,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수출품은 무라노섬의 유리였다.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와, 수제 유리공예품을 소규모로 생산하는 공방이 남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리공장은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이유는 뻔했다.
바다 건너에서 질도 좋고 가격도 싼 유리가 대량으로 들어온 게 이미 백 년도 전의 일이었다.
비단 유리공예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농산물은 말할 것도 없었고 다른 가공산업들까지.
차라리 대동양과 접했다면 그 부가 이익을 얻었겠지만, 지중해는 그러지도 않았으니 애초에 지중해 상인들은 일방적으로 물품을 팔 수 있는 동방무역 없이는 자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고려도 이를 아는 만큼 그들을 달래기 위해 프랑스에서 뺏은 알제까지 팔아주었지만, 판매한 가격이 적은 것도 아니었고 알제가 특출나게 비옥한 것도 아니라 베네치아는 여전히 고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비극이 뒤를 이었다.
증가한 세금으로 고기 한 점 없는 허여멀건 밀가루 수프로 삼시세끼를 해결하는 아래 계층의 게토들은 심지어 배를 곯다가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니 사람들은 도망가거나 난을 일으키거나 선택해야 했는데, 양쪽 모두 결과가 좋지 못했다.
도망가는 사람은 여지없이 죽거나 다시금 사로잡혀 이번에는 더 혹독한 아래 게토로 이동당했다.
난을 일으킨 캐루안의 이슬람 게토는 봉기가 일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베네치아가 게토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게토 안의 구역에 흘러넘치는 핏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는 것은 과장인지 사실인지 확인되지 못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모든 게토를 한 번에 다 감시할 수는 없었다.
이내 그들은 종교적 동질성이 같은 상위 게토를 꼬드겨 아래 게토에 대한 징수를 명령했는데, 이 징수가 제대로 잘된다면 상위 게토에 그만큼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몹시 효율적이라, 베네치아는 그 뒤로는 ‘소소한’ 게토 간의 분쟁만 중재했음에도 이전보다 더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속령이 많았다.
그리스 군도들은 이미 예전 오스만 시기에 오스만의 통치를 받다가 오스트리아가 점령했었고, 그리스가 독립한 이후에는 그리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베네치아는 크레타와 키프로스 같은 섬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 섬들은 지중해에서도 꽤나 큰 축에 속해 상당히 많은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크레타는 본래 동로마의 영토였지만,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 이후 동로마에게서 빼앗아 다스린 지 거의 오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베네치아인들은 크레타인들과 거의 섞이지 않았다.
반면 섬에는 원래 크레타에서 살던 그리스계 크레타인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동유럽에서 이리저리 피난 온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과 같은 발칸계, 튀르크계, 이집트계 등이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말 안 하고 잘 살아왔던 베네치아인들이 어느 순간부터 바뀌어, 외부의 지배계급인 그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지인들보고 게토를 형성하여 모여 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뭐요?”
“우리를 이렇게 가둘 바에 한 줌도 안 되는 당신들이 모여 사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소?”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베네치아인들은 총칼과 대포를 앞세워 이곳에서도 분열을 통한 통치를 시작했다.
이런 명령도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 게토별로 세금을 거두어 군비를 증강하란다.
그리고 예상되는 적성국은 심지어 고려였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다른 게토들이 그리스계 그대들의 게토보다 더 많은 돈을 내게 된다면, 그대들의 게토에는 그만큼 세금을 덜 내게 보장해 주겠소.”
베네치아는 항상 하던 대로 그리스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그리스인들은, 구명줄을 찾았다는 듯 다른 게토들을 맹렬히 괴롭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놓겠지.
하지만, 크레타에서는 일이 다르게 흘러갔다.
안 그래도 크레타는 그리스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
그리스의 독립 이후 공공연하게 그리스로 편입되자는 말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
특히나 그리스의 생떼, 즉 고려의 황제에게 냅다 자신들의 왕관을 바친(쓰라고 집어 던진) 것이 유효했다.
정당한 그리스의 바실렙스는 이 혼란스러운 땅에 유일하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또한 그리스계는 다른 이민자들에 비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스계만 꼽자면 거의 칠 할, 혹은 팔 할 이상의 비율을 차지할 것이다.
발칸인이니 아나톨리아계니 무슬림이니 하는 자들과 베네치아인들을 합쳐보았자 이 할을 넘지 못했다.
이 소수의 사람을 뜯어낸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부과한 방위세를 충족하긴 힘들었다.
이런 복합적인 면이 작동하여, 크레타에선 베네치아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자는 운동이 슬며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런 초창기의 움직임은 그 한 줌의 세력을 가진 베네치아에게 진압당했고, 주동자들은 이라클리온(헤라클리온)에 공개처형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크레타인들은 공포에 기가 죽기는커녕 더더욱 끓어올랐다.
“아버지, 이들은 무엇 때문에 죽어 있나요?”
이라클리온을 오가던 어린 소년이 자신의 손을 잡은 아비에게 물었다.
아비는 대답 대신 아들을 보내 저 시신의 악취 나는 발에 입맞춤을 하고 돌아오도록 시켰고, 돌아온 뒤에야 짤막하게 답을 해 주었다.
“자유.”
[크레타인의 운명은 크레타인이 스스로 결정지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에 귀속되건 아니면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건,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섬의 사람들의 의사에 달려 있어야 한다.
크레타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점화되자, 베네치아는 그들 사회의 구조가 본격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크레타뿐만 아니라 키프로스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베네치아는 강경한 대응을 고수했지만, 공교롭게도 크레타에는 그리스라는 뒷배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의 나라 식민지에 불과했던 이 나라는, 의외로 군사적으로는 마냥 무시하지 못했다.
이들의 생떼는 완전히 받아들여지진 못했다.
고려 황제는 여전히 자신이 그리스의 국왕이라 불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고등판무관부도 빨리 대사관으로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은 그리스에게 몇 가지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첫 번째 아테네 올림픽을 위해, 이들은 제대로 된 군함이 단 한 척도 없었던 그리스 해안경비대를 위해 두 척의 방호순양함과 열한 척의 초계함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그 이후로도 급변하는 동유럽 정세에 발맞추어 에게해 단속이라도 좀 잘해 보라는 의미에서 다시금 한 척의 순양함과 일곱 척의 초계함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니, 함대 전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리스가 이 알량한 전력을 가지고 베네치아와 싸우면 필패였다.
고려의 해군 함정이 구형이라도 다른 나라에선 즉시 전력으로 쓸 만큼 만듦새가 상당히 견고하게 졌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중소형함.
대구경의 화포가 실리지 않았고 운용하는 사람들도 고려 해군이 아니라 그리스 해군이니 차이가 현격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배로도 유혈이 낭자한 크레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탈출하는 사람들을 호위하여 실어 나르긴 충분했다.
당연히 베네치아는 그리스의 이 같은 행태에 분노를 표출했다.
키클라데스 제도의 낙소스섬 근처에서 그리스와 베네치아 간의 해상분쟁이 일어나 소형함끼리 서로 포격전을 주고받아 죽거나 다치는 상황이 일어났다.
그리스인들은 조르르 고등판무관부로 달려가 창양에 대고 하소연을 했으며, 이에 상서성은 그리스에 대한 추가적 군사 지원을 승낙했다.
* * *
이집트.
카이로.
카이로의 밤거리는 스산했다.
“밤늦게 어딜 돌아다니는 것이냐!”
베네치아 군인들은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순찰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베네치아의 갈등은 그들의 영토가 아니라 이집트 같은 이런 땅에서 가장 심하게 일어났다.
두 나라가 남의 나라에서 서로 총과 대포를 쏘아대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유서 깊은 이집트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운하의 입구도시인 포르토바르디에서 두 나라의 군인들은 물론이고 애먼 이집트의 백성들까지 피를 흘렸다.
카이로의 현 상황에서 볼 수 있듯, 두 나라의 수에즈 다툼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면서 다시금 이집트엔 평화가 찾아왔지만, 베네치아 군인들은 정도 이상으로 득의만만하게 행세하고 있었다.
마치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이긴 개선군처럼.
심지어 치안을 챙긴답시고 시민들에게 위협을 가할 뿐만 아니라 입에 담지 못할 못된 짓들도 암암리에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카이로 왕궁에서 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집트의 네 번째 왕자, 무자파르 알 가잘리는 혀를 찼다.
“이게 아버지와 형이 원하는 평화인가?”
“쉿,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구요.”
“빌어먹을…! 우리의 왕궁에서조차 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살면 대체 이곳이 알 가잘리의 이집트인가 아니면 베네치아의 이집트인가?”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무자파르는 그 침묵에서 후자의 긍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둘째 형님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진 않겠다.”
무언가 다짐한 무자파르는 발이 빠르고 입이 무거운 부하를 시켜 메카의 순례객으로 위장시킨 뒤 아랍 연방에 서신을 보내었고 빠른 답장을 받았다.
[알겠소. 그럼 아카바에서 봅시다.]
아카바는 아랍 연방이 소유한 이집트와의 경계 도시였다.
약간의 분쟁이 있었지만, 이집트로서는 이 조그마한 항구도시를 탐내다가 자신들이 아주 가냘프게 유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영유권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현 예루살렘은 명목상 그들의 소유였으니.
아주 조금의 시종만을 대동한 채 국경선에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무자파르는 아카바에 나온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앗살라무 알라이쿰… 술탄, 아니 대에미르께서 직접 나오셨습니까?”
“와알라이쿰 앗살람. 술탄도 아니고, 대에미르도 아닙니다. 그저 이젠 연방의 책무 중 하나를 맡은 와지르에 불과하지요.”
헌헌한 젊은 청년, 하팀이 낙타에서 내렸다.
“아, 임기가 끝나셨다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타까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 권력은 내려놓을 때 가장 빛나는 법이지요.”
그 순간 무자파르는 자신과 동년배인 이 젊은 샴마르 에미르이자, 아랍 연방 군사부 와지르(장관)가 왜 젊은 나이에도 아련의 국부라는 소리를 듣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둘은 해안가를 거닐었다.
“이집트의 최근 상황에 대해선, 우리도 참 근심이 많습니다.”
“연방이 이 틈을 타 우릴 공격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고, 또한 신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스스로 그리 배웠으니, 이집트의 행동이 알라와 도의에 맞는다면 그러한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베네치아의 행동은 도의에 맞지 않아요. 우리는 아련이 불가침 약속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길 원합니다. 무슬림 동포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격앙된 무자파르의 말에, 하팀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가 무슬림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많이 불경한 믿음을 비밀리에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지금 아랍 연방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서 그러했다.
제아무리 고려에게 철도 같은 몇 가지 기반시설을 제공받았다고 해도, 나라가 세워진 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남의 나라 사정까지 신경 쓸 형편이 되겠는가?
그들은 연방이 세워진 이후 내부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이라크에 계신 그분이라면 다르겠지만….’
하지만, 베네치아의 행동이 도의를 넘고 있다는 무자파르의 지적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크레타, 키프로스, 이집트까지. 이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절벽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아주 조그마한 불꽃이 점화되기만 한다면, 지중해엔 불길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얼굴 한번 보자 말한 것치고 하팀이 명확한 협조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자, 무자파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우리의 추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하겠지요. 허나 나는 궁전에도, 수도에도, 항구에도 믿을 만한 자 하나 없습니다. 명색이 이집트의 왕자에 재무대신인데도요.”
“사람을 원하십니까?”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이십여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의 안전 정도는 신경 쓰고 싶으니까요.”
하팀에게 베두인 출신의 경호원 스물다섯 명을 얻게 된 무자파르는 다음번에는 아예 콘스탄티노플로 가 시장을 만나봐야 하겠다며 마음을 먹었다.
궁정에는 순례를 하겠다고 빠져나온 상황이라 무자파르는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보통 무슬림들의 세 성지는 메카와 메디나, 예루살렘을 꼽았다.
무자파르는 이미 핫즈 순례를 마무리했고, 메디나 또한 그때 같이 들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국의 영토이기도 한 마지막 성지 또한 방문하여 이집트의 재무대신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로 했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항구, 야파항은 연이은 순례객들로 수없이 붐비는 땅 중 하나라 그 이득이 실로 엄청났다.
종교의 세월이 끝났더라도 여전히 신실한 교인들은 있기 마련.
게다가 과거보다 성지 접근성이 좋아졌으니 이집트는 이곳의 외부인 관광을 장려했다.
더 이상 이곳에 칼을 들고 찾아올 미치광이 광신도들은 없는 시대이니까.
하지만 무자파르는 야파항을 순시하다가 한 청년이 그에게 권총을 꺼내 겨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상황이 어찌나 생생했는지, 무자파르는 심지어 그 혼란한 상황 속에서 암살자가 권총의 공이를 당기는 소리도 들었다.
― 철컥
“죽어라! 더러운 무슬림 이교도 지배자!”
[작가의 말]
포르토바르디: 포트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