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급 전함
두려워하지 아니함.
불공(不恐)급 전함.
개천 450년(CE 1725), 정보총국이 드리웠던 정보 장막을 걷어내고 나온 전함의 이름이었다.
고려의 모든 산업, 모든 기술이 집약된 이 최첨단의 해상병기는, 자그마치 만 칠천이백 톤의 기준배수량을 자랑하는, 당대에서 가장 큰 군함이라 칭할 수 있었다.
전장은 159미터, 폭은 24미터.
선원은 육백오십 명이 탑승하여 운용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고, 칠백 명 이상을 거뜬히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전함은 이전까지의 최고 등급의 전함, 위엄급을 모든 면에서 능가했다.
하지만 불공급의 본질은 단순히 크기와 선원의 숫자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위엄급이 건조된 지도 이제는 꽤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그동안 고려는 몇 척의 실험급 배를 건조했지만 선보이거나 양산하지 않았다.
기술의 구현을 위해 전함을 건조했지만, 상민은 이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혁신이 담기지 않은 배를 만들어봤자, 드레드노트가 나오는 순간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다.’
어차피 버려질 함선이 될 바엔 그냥 돈을 좀 아끼고 저금해 놓았다가 준비가 되었을 때 쓰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대신 상민은 그동안 구슬을 모으듯 하나씩, 하나씩 준비를 했다.
그 시기는 길었다.
상민이 구슬을 모을 동안 세상의 다른 나라들도 위엄급을 따라가기 위해 전함에 매달렸었다.
여러모로 고려를 따라 하다 된통 당한 게 많은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 그중에서도 ‘나 열강이오’ 하는 나라들은 전부 이에 매달렸다.
해상에 투자할 역량이 없어 포기한 나라들도 전함이 아니더라도 순양함급 군함 건조에 착수했다.
여전히 물류는 기범선도 쓰이고, 심지어 목선까지 써야 했지만, 적어도 군함에 대해선 철제함을 건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멍청한 일이었다.
전투에서 나무배는 하등 쓸모없는 허수아비와 같다.
물론, 세상 물정 모르는 멍청한 군주는 여전히 남아있기에 예맥한계나 유럽의 국가들은 명 황제 주동휘에게 철 지난 전열함과 장갑함을 열심히 팔아대어 자금을 마련했기도 했다.
도이치와 스웨덴은 고려의 위엄급을 구매했었지만, 한 척으로는 부족했는지 자신들도 순양함과 초계함의 자체 개발에 나섰다.
양질의 철이 있어 제철산업도 양호하고, 섬나라인 덕에 바다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알비온은 소속된 세 나라가 자본을 모아 각 나라의 국왕의 이름을 명명한 세 척의 전함과 그들을 호위하는 함대를 건조해 내었다.
네덜란드는 단일 국가로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과 금융 수준을 자랑해 김홍급이라는 두 척의 전함과 호위함대를 뽑았다.
카스티야와 아라곤도 전함 개발을 느지막이라도 시도하고 있었고, 포르투갈은 건조를 포기했는지 베네치아에 구입을 문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건선거에서 이미 뼈대와 골격을 다 갖추어 포좌를 비롯한 무장을 올리는 과정을 끝낸다면 제대로 작동하는 전함이 나올 수 있었다.
러시아는 이미 작동하는 전함 두 척이 편제된 흑해함대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새로 즉위한 블라디미르 2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이 두 척을 더 건조하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었다.
해양에 상당한 돈을 투자하는 베네치아도 그 위세가 대단했다.
바다에서만큼은 러시아도 비할 수 없는 그들은 무려 3척의 전함과 상당한 수의 호위함대를 편성하여 지중해의 제해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으며, 그 기술력으로 다른 나라에 전함을 수주받고 건조해 팔기도 했다.
동시대 어뢰의 개발까지 착수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이 가진 바다에 대한 집착 수준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예맥한계 국가들은 미묘한 상황에 있었다.
이들의 정치와 국민 여론은 상국에 대해 지극히 우호적이었지만, 군부, 그중에서도 해군부는 상국의 행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불만이 아니라 토라져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도이치, 아니 프로이센과 스웨덴에게만 위엄급을 판 상국은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 안 파는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 상국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건함경쟁이 동아시아까지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예맥한 3개국과 강화, 그럴 역량은 없더라도 주나 유구까지 이에 매달린다면 상국도 골치 아플 것이 분명하다.
― 허나, 유럽인들이 전함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전함은 국가의 자존심이다!
자국 안보에서 전함이 있고 없고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전함은 전함으로 상대해야 하는 종류의 무기.
숫자가 적더라도 한 척은 있어야 했다.
아예 전함조차 가지지 않고 있다면, 대화는 무용이다.
그리고 전함은 비단 전술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그 국가의 국민들 또한 자국 함대에 ‘함대의 자랑’이 편제되기를 그 누구보다 원했다.
특히나, 다른 나라들이 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더더욱.
그러니 예맥한 3개국과 강화의 정치인들까지 군함 건조를 천명하게 된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조선은 자국 군함에 왕의 이름을 넣어도 되느냐 마느냐를 따지다가, 마침내 태조대왕이라는 함선을 건조하고 다른 한 척도 곧 착수할 예정이었고 백제도 명색이 해양대국인데 적어도 조선에 뒤지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었다.
옥저는 건조할 예산이 없었지만 적어도 한 척은 있어서 체면이라도 세우길 원했으며, 강화는 백제보다 많아야 한다는 지론을 내세워 자신들이 가진 역량 이상으로 두 척 동시 건조를 계획하다 사회와 재정에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서는 어쩌면 고려 해군의 제1원칙, 1>2+3+4의 원칙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 * *
하지만 시기는 완벽했다.
도리어 좋았다.
괜스레 다른 나라들이 전함 개발을 안(못) 하고 있을 때 이런 혁신을 내보인다면, 그들은 그 혁신이 더 이상 혁신이 아니게 될 때 전함을 만들 테니까.
상민의 악랄한 내면은, 분명히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길 원했다.
이후 때가 되었다 판단한 상민은 자신의 손에 들린 구슬들의 숫자를 헤아리고는 불공급 전함을 건조하라 지시했었다.
모든 구슬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구슬은 전부 확보한 상태.
이것만으로 패러다임은 바뀔 것이다.
고려는 그동안 모아놓은 예산과 자원을 이 시기에 한꺼번에 집행하면서 불공급 5척을 무리 없이 건조한 상태였고, 이후 이 불공급들을 건조하면서 얻게 된 기술 발전을 적용한 차세대 전함 5척을 거의 곧바로 건조하기 시작했으니 해양 안보의 공백은 체감되지 않았다.
그리고 목표했던 불공급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고려도 다시금 전함 개발을 미루지 않고 꾸준히 한두 척씩이라도 뽑아낼 것이기에 이후에는 상관이 없었다.
불공급이 언젠가 새로운 함선에 밀려 도태되더라도 다른 나라에선 여전히 주전력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는 잘 포장해 어디에 보관해 놓으면 쓸 데가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고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기에 알긴 알았다.
함선의 이름도, 제원도 몰랐으나, 고려가 동시다발적으로 거의 열 척의 전함을 건조한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 이게 가능키나 한가?
물론 이 사실은 다른 나라로서는 대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역량이었기에, 몇몇 나라들은 이를 거짓된, 혹은 기만하기 위한 정보라 생각했기도 했다.
제아무리 예산안을 오래전부터 확보해 놓고 있었다 하나, 이것이 가능한 수준인가?
하지만 애초에 산업화의 최선두 주자와 후발주자들의 격차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광대했다.
고려에서 시작된 제철기술들 중 철 지난 기술들, 즉 전로법과 같은 것들은 동아시아와 유럽의 열강들도 이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철의 양산 자체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철제 군함을 만들 생각이라도 했을 터.
그러나 동시대 이미 고려는 기존 전로법의 한계를 위해 평로법을 도입해 온도를 높여 강의 정련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백운암(Dolomite)과 역청을 이용하여 새로운 형식의 탈인제강법(김종태 탈인제강법)을 완성하여 전로와 평로, 강의 산성화를 해결한 현대적 용광로를 완성한 상태였다.
최근에는 전기를 사용하여 고합금강이나 고급강, 특수강을 제조해 보자는 개념도 제시된 상태였다.
생산성은 아득하고, 질 또한 비교할 수 없다.
누아에린과 뉴펀들랜드에서 가져온 질 좋은 철광석을 물 마시듯 흡수한 포항의 제철소는 꾸준히 당대 최고급 강철을 뽑아냈으며, 이 전부를 열차를 통해 석정의 조선소에 실어날랐다.
민간분야의 조선을 위해 해문에도 제1조선소가 남아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주 시설은 석정으로 확장이전한 황립조선소, 제2조선소는 오랜만에 건선거가 미어터질 만큼 군함을 찍어내고 있었다.
먼저 건조된 불공급 5척은 그 대부분이 대동양함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는 대동양의 위협을 확실하게 무력화했다.
유럽이 지금 벌이는 전함 경쟁은 불공급이 등장한 이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기존 함선의 숫자는 존재했었으나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각국은 다시금 0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자는 아직 없었다.
이제 막 이름만 달랑 듣게 되어 다른 나라들은 이 함선이 뭔지,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전함 구입을 말릴 때 눈치챘어야지.’
동맹국들도 큰 손해를 입게 될 상황.
그만큼 상민이 모은 구슬들 하나하나의 의미는 너무 거대했다.
불공급에는 크게 네 가지 혁신이 담겨 있었다.
첫 번째는 주포의 통일화였다.
포좌에서 포탑으로 넘어간 것도 상당한 진보일진대, 고려는 불공급을 통해 기존의 250미리 함포에서 300미리 함포로 화력을 상승시켰다.
그리고 선수 측에 두 함포탑을, 선미 측에 두 함포탑을 세워 네 함포탑이 가지런히 정렬될 수 있게 설계했다.
[모든 함포(All big gun)를 전부 집중하여 쏠 수 있도록 한다.]
즉 ‘전포사격’의 원리는 좌현과 우현 가릴 것 없이 300미리 거포를 총동원하여 화력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두 번째 혁신, 협차사격이 뒤를 이었다.
함포란 보통 사거리가 길었다.
하지만 이는 평온한 환경에서 곡사사격을 할 때, 즉 연안에서 정박해서 포격지원을 할 때 정도에나 가능했지 함대함으로 싸울 때엔 여전히 더 명중률이 높은 직사사격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탄도학이 발전하고 계산자를 도입하며 해군 장교들의 역량이 상승함에 따라, 고려 해군은 함대함 결전에서도 곡사사격을 욕심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곡사사격은 사거리가 직사사격에 비해 훨씬 더 길었다.
계산한 바로, 거의 두 배 이상이 높았다.
해군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로 먼 거리에서 먼저 때린다는 압도적인 이점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개별 함포의 개별 사격으로 곡사사격을 행해 적의 함선을 단번에 맞춘다는 건, 전쟁을 날로 먹겠다는 발상과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소리.
이에 자연스럽게 모든 함포를 동원한 전포사격으로 한 번에 포탄을 쏟아붓고, 형성된 함포들의 탄착군을 적의 함선에 가까이 가져다 대는 일련의 과정, 즉 협차사격(straddle)의 방식이 채택되었다.
전투함교의 등장은 이미 위엄급 전함에서도 이루어진 바가 있었지만, 불공급에서 비로소 완벽한 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탄착군 자체를 줄이기 위해서는 대포의 아주 정밀한 가공이 필요했고, 대포의 질 자체도 좋아야 했다.
포항제철소 정도의 최고급의 강철을 대규모로 쏟아내는 제철소는 물론이고 공작기계, 절삭기계 등의 가공기술이 일정 부분까지 도달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아마 그 탄착군 내의 집탄률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할 것이다.
세 번째는 ‘전부(全部) 혹은 전무(全無)’형 장갑이었다.
이는 기술의 진보라기보다는 인식의 전환이라 해야 했다.
장갑의 재질이야 현재 채택된 표면경화장갑이겠지만, 전부 혹은 전무 장갑은 재질이 아닌 개념으로서 전투 시 군함의 핵심 부위를 우선순위에 놓아 지키는 방식이었다.
전투가 벌어졌다면 승무원의 거주공간이나 식당보다는 기관부나 탄약고, 함포와 관련된 핵심구역이 더 중요했다.
방수구획을 확충하는 것은 어떤 구역이든 비슷하게 중요했지만, 핵심구역은 물리적으로도 중요했다.
핵심구역은 함내의 성채라 불릴 만큼 내부적으로도 장갑이 한층 더 보강이 되었으며, 적어도 불공급과 동일한 수준의 함포 공격을 받아도 이를 견디며(대응방어) 역공을 할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그러니 네 번째 혁신은 첫 번째부터 세 번째 혁신 모두를 감내해야 했다.
포탑이니, 대구경 주포니, 향상된 전투함교니, 전부 혹은 전무형 장갑이니 하는 개선점들은 필연적으로 함선의 크기가 이전보다 더욱 커지고,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거함화는 필연적이란 소리였다.
추진부의 현격할 만한 발전이 없다면, 이 함선의 속도는 이전보다 느려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은 진작부터 있었다.
사실 네 번째 혁신은 다른 혁신들보다 먼저 있었을지도 몰랐다.
뉴커먼과 세이버리가 상당히 이른 시간에 제시한 ‘증기분사기관’은 특허등록이 되어 있었고, 이미 군함이 아닌 선박(새벽호)에도 한 차례 탑재되어 그 위용을 뽐낸 적이 있었다.
이를 군함에도 적용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선 별달리 수고로움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선박식 증기기관을 증기분사기관으로 대체하니, 증기분사기관이 본격적으로 채택된 불공급 전함은 정말로 모든 면에서 이전의 함선에 비해 우월함을 자랑할 수 있었다.
무겁고 커진 함선이 도리어 이전 세대의 함선보다 기동성 있게 움직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포사격, 협차사격을 위해 불공급 함선은 일정 부분 포기한 것이 있었다.
부포가 그것들 중 하나였다.
페르시아에서 활대기뢰에 당해 패장의 오명을 쓴 김태인 부령이 제시한 보고서대로 고려 해군은 대구경 속사포를 만들었다.
불공급에도 좌우현에 속사포를 배치해 위협적인 소선을 견제할 수 있게 마련해 놓긴 했지만 그 수가 객관적으로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약, 활대기뢰에서 더욱 발전한 형식의 어뢰가 나온다면 그것은 전함에 큰 위협이 될 것이 자명했다.
어쩌면 전통적 관념에서 이런 현상은 전함의 퇴보라고 불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함에 백화점을 차릴 이유는 없다.
그런 종류의 일은 그런 종류의 일에 특화된 선박을 건조하는 것으로 충분히 유효했다.
유효함을 넘어 오히려 더 효율적이었다.
‘잡캐 다섯보다 탱커와 딜러, 서브로 제대로 나뉜 세 명이 더욱 강할 수 있다.’
전함은 방호력과 공격력을 모두 갖춘 거인이나, 이 거인의 발에서 알짱대며 상처를 내는 난쟁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체격이 더 작은 보조 전투원이 필요했다.
상민이 직접 주문한 ‘어뢰파괴함’은 바다 밑에서의 위협에서 전함과 순양함 등의 함대 주전력을 보호하기 위해 편제되었다.
이는 어뢰파괴함들이 기존의 더 작은 소선들, 즉 초계함들은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뢰파괴함에는 활대기뢰와 소선을 견제하는 대구경 속사포가 훨씬 더 많았으며, 자체적으로도 기뢰를 부설할 수 있는 장비도 있었다.
일부 함선은 기뢰 소해장비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김태인이 주장한 대로 해수면이 아닌 하늘을 조준한 대공포도 탑재되어 있었다.
어뢰파괴함들이 전함 전단의 일꾼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들의 수는 순양함보다도 많아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무려 한 전단에 전함과 순양함 숫자의 네다섯 배가 되는 어뢰파괴함이 편제되었다.
그렇기에 고려는 거의 열 척의 전함을 동시 건조를 하면서 그와 동시에 어뢰파괴함도 찍어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어차피 중소형 군함에 속하니 침몰해도 부담 없다, 운용비도 저렴하니 실컷 뽑고 노후되면 해안경비대에 주거나 팔거나 하자.
초계함을 건조하는 것도 부담스럽게 여기는 다른 나라가 들었다면 어처구니없어할 만한 말을 내뱉는 고려국 군부 인물들 덕에 고려의 함대 편제는 동시대 일반적인 함대의 편제 수보다 함선의 숫자가 거의 배 이상 많아지게 되었다.
[작가의 말]
평로법: 지멘스 마르텡 공법
탈인제강법: 토마스법
전부 혹은 전무형 장갑 : All or Nothing naval warship armor
표면경화장갑 : 하비장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