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17화 (417/653)

지중해에 감도는 전운(4)

* * *

물론 베네치아인들은 그들과 그들의 선조가 힘들게 만든 도시를 너무나 사랑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도시가 너무 좁아터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의 도시 바로 코앞에 있는 이탈리아의 내륙에 역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제아무리 상업공화국이라도, 무역에 온전히 의지하여 농업을 등한시한다면 위태로운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베로나, 파도바, 트레비소.

이런 주요 도시국가들은 베네치아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베네치아는 이로 만족 못 해 페라라나 우디네까지 넘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시국가 시대가 끝나고 보르자 가문의 통일이 완수된 이후, 이곳은 필연적으로 분쟁지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탈리아와 베네치아는 오스만을 두들겨 팰 때나 맘루크에게 비수를 꽂고 수에즈 운하를 개통할 땐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즐거이 웃던 사이였지만, 이미 자신들도 그들 사이에 있는 갈등의 요소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훈훈했던 과거의 관계가 무색하게, 이탈리아―베네치아 분쟁이 일어났다.

순수성을 지킨 베네치아 도시의 사람들과 다르게 내륙인들은 라틴인들은 물론이고 이곳을 지배했던 민족들에 따라 랑고바르드니, 프랑크니 게르만이니 하는 온갖 민족이 섞인 북이탈리아인들이었으며, 당연히 베네치아의 대의인지 지랄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던 일반인들이었다.

이들은 베네치아가 강성할 때는 고개를 숙였었지만,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강성할 때는 이탈리아로 붙기를 원했다.

이 순수한 ‘로마 베네치아인’들이 증명되지도 못하는 혈통을 근거로 북이탈리아인들에게 차별을 가하는 꼴이 같잖아서라도 그랬을 것이다.

포 강가에서, 베로나에서, 비첸차에서.

베네치아와 이탈리아는 몇 번이고 전쟁을 벌였고, 그때마다 가장 고귀한 공화국을 자청하는 한낱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는 무력하게 패배했다.

가뜩이나 현지 민심도 돌아섰는데 배가 발이라도 달려 육지에 올라갈 수 없는 이상, 베네치아가 이탈리아 육군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둘의 분쟁은 17세기 중후반에 들어서 끝을 맺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베네치아가 점유하고 있던 내륙지방을 모두 흡수한 뒤, 딱히 영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었던 베네치아의 도시만큼은 존속을 허락한다는 이야기를 선심 쓰듯 내뱉었지만 이미 베네치아의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후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행할 방법은 단 하나.

내륙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 낡은 도시를 떠나 진정한 그들만의 낙원으로 아예 이주를 하는 것이 분명할 터다.

이탈리아―베네치아 분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

해상십자군 이후 베네치아는 튀니스의 경략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며 베네치아인들은 튀니스와 안나바, 수스와 스팍스, 가베스 등의 북아프리카 해안가를 점령했으며, 그 후에는 캐루안 같은 내륙지방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화기가 빠르게 발전하는 유럽끼리의 전쟁과 달리,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전쟁은 애초에 기술 격차로 인해 성립이 안 되었던 것이 컸다.

하프스 왕조는 멸망했으며, 베네치아인들은 튀니스를 기점으로 북아프리카령 베네치아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본토보다 몇백 배, 혹은 몇천 배가 넘는 땅을 손아귀에 쥔 것.

그러나 공성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베네치아도 도시를 얻는 것에 성공했지만 이를 경략하는 것엔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무슬림들이었다.

북이탈리아인들도 순수하지 않다며, 미개한 게르만이나 프랑크의 피가 섞였다며 경멸하는 마당에, 이들이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너무 당연했다.

* * *

순수함에 대해 집착을 하는 베네치아에는 유서 깊은 전통이 있었다.

16세기 초,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게토(Ghetto)’라는 제도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이것은 도시에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을 정치사회적, 법적, 혹은 경제적으로 압박하여 하나의 구역으로 몰아넣고 그곳에서만 살아가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곳들은 주로 소수민족의 격리에 이용됐다.

특히나 유대인들이 주로 게토에 박혀 살아야 했다.

게토라는 이름 자체는 베네치아에서 기원했지만, 이전에도 유럽인들은 유대인 격리를 몸소 실천했었다.

사실 대부분의 유럽 나라가 그랬다.

유대인은 아슈케나지와 셰파르디로 나뉘긴 하지만, 대체로 인종이 아닌 종교로 구분했다.

겉으로는 가톨릭이나 정교회, 개신교를 믿는 척하면서 뒤에선 비밀신앙을 고수하고, 따로 모여 살며 ‘우리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니 저것들은 지옥에 떨어질 종자들이다’라고 중얼거리는 유대인들을 곱게 볼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들은 예수를 죽였다는 씻지 못할 죄를 저질렀음에도 이후에도 계속 주로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며 규탄을 받는 처지였으니, 유럽인들 눈에 이들은 사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와 비슷했다.

물론 이런 반유대주의는 소수의 유대인들을 끈끈히 결속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결속력이 정녕 좋은 것이냐 묻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지도 몰랐다.

자신들끼리 진정한 유대인인지 아닌지 인종차별을 하는 추태도 있었으니.

차라리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다른 사회와 동화되어 현지의 법과 관습을 존중하는 것을 택한 유대인들이 더 나았을 터.

유대인들과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고 우생학 퇴치 이후 인종으론 별 차별을 하지 않았던 고려 또한 한창 이민을 잘 받아들일 시절에도 이들의 종교적 비밀성과 비동화성, 여전한 선민의식을 문제 삼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들의 고려 이민은 그 수요에 비해 허가가 아예 나지 않았었다.

고려에 이민 오기 위해선, 외인부대에 투신하여 종교가 아니라 국가와 황실에 대한 충정을 증명해 보이고 동화의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는 것 이외엔 없었다.

하지만 베네치안 게토는 다른 나라들의 단순한 유대인 격리와는 다른 흉험한 악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베네치아 내에서 특별한 자치권을 가지긴 했지만 절대 베네치아의 시민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게토를 나갈 때마다 유대인을 증명하는 옷과 모자를 걸치고 마크까지 달아야 했다.

저녁에 성 마르코 종탑에서 가장 큰 종인 마랑고나가 울리면 게토의 출입구는 봉쇄되었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금 마랑고나가 울릴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열리지 않았다.

이들의 주거지역은 가톨릭인들에게 24시간 감시되었으며, 마랑고나가 친 이후에 돌아다니는 유대인에겐 혹독한 처벌이 뒤이어졌다.

다른 나라들에 의해 해도 해도 좀 너무한 건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베네치아 당국은 ‘꼬우면 나가든가’로 일관했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유대인들이 온갖 지중해의 금이 오가는 베네치아를 제 발로 나갈 수 있겠느냐는 당국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하여, 유대인들은 차별을 수용하면서도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실컷 뜯어먹으면서도 안정과 순수성은 누린다.

이미 한번 게토의 효용성을 맛본 베네치아인들은 튀니스와 북아프리카령의 등지의 점령지에도 이와 같은 정책을 널리 시행하고 있었다.

이제 유대인 게토의 옆에 무슬림 게토가 생기게 된 것이다.

순수 베네치아인들은 정말로 한 줌.

이들이 최근 들어 출산율이 증가했다 하더라도, 이들 수가 광대한 북아프리카를 지배할 만큼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 유명한 고려의 삼별초도 동화를 택한 마당에.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순수한 자신들이 불결한 무슬림들 혹은 소수민족들과 동화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는지 도리어 다른 방안을 생각해냈다.

이들은 소수민족들의 게토를 만들어내었고, 그들 간의 경쟁을 통해 통합을 막았다.

튀니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실로 다양했다.

상업, 그리고 노예 산업도 특출나게 발달했던 도시였던 만큼 무슬림이 대부분이었지만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다.

베르베르계, 마라케시계, 반달계, 아랍계, 스페인계, 튀르크계, 유대계, 도통 어디 계인지 알 수 없고 관심도 없었던 흑인들, 그리고 심지어 납치되어온 것으로 보이는 라틴과 그리스계, 프랑스나 이베리아계의 사람들까지.

베네치아인들은 이들 게토 사이의 우열을 정하면서 분열을 시도했고 분열로 인한 통치를 꾀했다.

계급이 명시되진 않았지만, 이미 암묵적으로 정해졌을 것이다.

가장 위에 군림하는 베네치아인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기독교와 유럽인들이 그다음에,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흑인들이 가장 나중에.

통합 대신 분열을 선택한 것치고, 베네치아는 상당히 능수능란하게 튀니스를 다스렸다.

이탈리아에 의해 본토를 빼앗긴 뒤부턴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상인공화국의 통치는 분명히 다소 낙후되고 어설펐던 하프스를 비롯한 이전의 통치자들의 치세와는 달라 베네치아령 북아프리카의 위세를 빠르게 끌어올렸다.

그들은 이미 지중해 무역은 물론이고 이집트와 나일강 상류의 지배권까지 얻은 일류 열강국 중 하나였다.

수에즈 운하의 지분 중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인도 무역으로 큰 흑자를 내기도 했다.

명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아편 무역에 발을 담가 이윤을 톡톡히 누렸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자, 이제는 이탈리아로서도 베네치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베네치아를 불태우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이제는 저들의 본진은 간척 도시가 아니라 꼼꼼하게 요새화된 튀니스였다.

반면 드디어 할 만하다고 생각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분쟁에서의 치욕을 갚아나가기 위해 삼국동맹을 현실화시키려 노력했다.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로 이어지는 동맹을 체결한다면, 이탈리아는 다시금 과거의 비루한 상황으로 회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를 완전히 홀로 장악하여 이탈리아 경제의 숨통을 끊어버린다면 상황은 종결될 것이다.

해외의 이탈리아 영토는 베네치아가 맛있게 잘 먹을 것이고.

이탈리아는 피에몬테를 프랑스에게, 이스트리아와 고리치아, 크라인 서쪽을 오스트리아에게, 파도바와 트레비소를 베네치아에게 돌려주며 체사레 1세의 강역으로 회귀해야 할 것이었다.

“허나, 도제 각하. 그 말은 우리가 어쩌면 고려와의 일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도 세바스티아노 도제의 이 같은 외교적 행보를 불안하게 여겼다.

오스트리아는 아직 아니더라도, 프랑스, 그리고 가장 크게는 러시아와 손잡는다는 것은 서쪽의 용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열강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해상십자군의 수혜를 그 누구보다도 톡톡히 누린 덕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이제는 고려와 척을 진다?

지중해를 제집마냥 돌아다니는 베네치아인들로서도 그 선택지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선택지 중 하나였다.

황금함대의 일주가 일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의 다음 행보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뜬금없이 아라비아반도에 간 고려인들이 페르시아만에 거점을 마련한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는 상관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고려인들 중 박성민이라는 괴상한 자가 나타나, 아라비아를 일통하고 자신의 제자이자 처남인 샴마르 에미르에게 아랍 연방을 세우도록 한 것은 실로 위태로운 일이었다.

아랍 에미르 연방.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나타났지만,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예전 같았으면 베두인 찌꺼기들이야 단번에 총으로 갈아버릴 수 있었는데, 이제 저들은 고려산 무기로 무장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원래부터 사막을 제집마냥 여기는 민족이니만큼, 이들이 사하라 사막으로 대변되는 북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면 베네치아로서는 정말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아랍 에미르 연방이 건국되자 바로 옆에 있던 이집트의 정국이 크게 요동쳤다.

가뜩이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어려운 법인데, 바로 옆에 민족은 조금 다를지언정 같은 이슬람 국가가 흥성하면 기분이 뒤숭숭해지는 것이다.

베네치아가 사실상 이집트 술탄을 임명했지만, 잔 가잘리 왕조 내부에서 임명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기에 왕족들끼리 친베네치아파니 친아련파니 나뉘어 싸우는 것은 전혀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 고려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 베네치아의 지중해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물론 이 물음을 직접 고려에게 했다면, 고려는 그들의 본심을 대답했을 것이다.

― 그대들의 지중해 패권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 소소한 것들은 신경 쓸 바도 아니고. 아국의 행보는 아국의 행보이니 상관 말거라.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오만하지만 그래도 안심 섞인 대답도 얻지 못하기 마련.

그들 스스로 망상의 나래를 펼치던 베네치아의 반고려 여론에 힘입어 세바스티아노 도제는 사실상 러시아의 후원을 받는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에 그들의 비밀무기를 팔아넘기는 선택을 저질렀다.

활대어뢰를.

게다가 그 활대어뢰는 아주 톡톡히 그 성과를 자랑했다.

이는 무기를 쓴 러시아인들은 물론이고 비밀리에 어뢰 무기에 많은 돈을 투자하던 베네치아인들 스스로도 놀랐을 정도였다.

“고려 전함이 중파했고 순양함들도 침몰했답니다!”

“그… 그게 정말이냐?”

이들은 기뻐 날뛰었다.

바다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미증유의 공포는 이 위대한 작살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제아무리 거대한 크라켄이라 하더라도, 이 작살에 맞으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보였으니까.

이 소식은 러시아와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군부에도 공유되었다.

이들 모두는 이 괄목할 만한 성과에 축전을 보냈으며, 차세대 어뢰의 공동개발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크라켄이 내지른 비명이 어쩌면 기만책일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아무도 하지 않았다.

어떤 나라가 자국이 입은 피해를 과장해서 내뱉는가?

도리어 축소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니, 고려는 그들이 발표한 피해 이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전통적 전함들을 단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요!”

일부 해군 장교들은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도… 전함이 몇 개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큰 것을 좋아해 전함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풍부한 러시아인들이 반문했지만, 프랑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니오! 우리 프랑스는 이미 충분히 헛발질을 했소. 그게 다 무엇 때문이오? 고려가 가는 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했기 때문이 아니오? 이번에야말로 어뢰라는 새로운 시대를 직접 열 것이오!”

바야흐로 프랑스에 청년학파가 등장했던 것이다.

* * *

고려도 마침내 이를 알게 되었다.

이기는 자에 붙겠다며, 주명 이탈리아 대사가 같이 행동하기로 한 프―오―포 가톨릭 연합의 통수를 치며 건넨 서류에는 베네치아의 행동이 여실히 적혀 있었다.

‘이기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를 끌어들이려는 게로군.’

말과는 달리 이탈리아가 고려를 그들의 싸움에 끌어들이려는 행동은 아주 분명했다.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라 고려는 심기가 불편하지도 않았다.

다만, 베네치아라.

“욕심 많은 지중해의 악마가 배신이라는 제 버릇을 못 버린 모양이구나.”

딱히 동맹관계였던 적은 없었으니 배신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악연은 아니었다 생각했었다.

“무기 수출은 우리도 다른 나라에 하는 법. 허나 본격적으로 양산을 한 것들이 아니라 이렇게 대놓고 숨겨와 비수로 쓸 기밀 무기를 양도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실로 무도한 짓입니다.”

“고려의 패권에 도전하는 자들을 한데 결집시켜 동맹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위태롭게 하는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어리석은 행동일 겁니다.”

힘이 없다면 이런 행동은 묵인되어진다.

어쩌면 정당성도 그렇게까지 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힘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행동을 용납하지도 못했다.

저들이 음지에서 비열한 짓을 획책한다면, 고려는 양지에서 거대한 힘으로 찍어누를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힘은 고려의 힘의 근원이었던 바다에서 다시금 등장할 터.

바다에서의 위협?

그것을 나와 그녀, 두 용의 핏줄인 너희가 두려워할쏘냐(不恐)?

“저들은 우리가 건조한 새 함선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윤성도가 상민의 앞에서 엎드렸다.

“그러니 그자들이 똑똑히 알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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