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11화 (411/653)

비행기(4)

“그래, 갈증은 좀 풀었나?”

상현은 경례 대신 진심을 담아 그의 상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모름지기 기체는 직접 가동해야 하는 법, 눈으로만 검수해서는 안 될 일이지.”

어쩌면 나중에도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상현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려고 할 때, 갑자기 부익사의 정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뭐지?’

출입금지구역이라 대문짝만하게 적힌 곳에 구태여 올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리고 행여 왔더라도, 다시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부익사에도 경계를 서는 군 병력들이 있었고 행여 외부의 첩자가 오더라도 무력으로 초기 대응을 할 수 있게 수칙까지 정해둔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소란은 쉬이 사그라들 것 같지가 않았고, 상현은 저도 모르는 호기심에 그곳으로 향했다.

부익사의 보안담당관인 중년의 특무정교가 상현을 보고 반색했다.

“아, 다르크 정위님.”

“담당관님, 무슨 일입니까?”

“저 사람… 아니 저 아가씨가 자꾸 이곳의 총책임자를 불러달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그래요?”

상현은 흘깃 밖을 바라보았다.

외투로 입은 판초의 모자로 인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쫓아내지 않으시구요?”

“근데 그것이….”

이어진 특무정교의 말로는 사람의 옷차림과 분위기가 조금 일반인과는 달라 혹여나 하는 생각에 제지를 못 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게다가 저 정체불명의 여자가 자신을 황제의 딸이라고까지 하는 상황.

“간첩이었으면 저렇게 대놓고 오진 않지 않겠습니까?”

“그럼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호기심 때문인지,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상현은 자신이 철조망 너머의 사람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리고 상현은 그동안 밤에 잘 때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자신의 꿈의 주인공을 오랜만에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통적인 고려의 여성 의복과는 조금 많이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굴곡이 도드라져 보이는 가죽 바지는 피부와 바지의 틈으로 인한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가 입은 검정 모직 상의 또한 가죽 바지와 짝을 이루듯 펄럭이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신분을 감추기 위해 몸을 둘러싼 검은 보랏빛의 모자 달린 판초는 그녀의 신분을 쉽사리 알아차리기 힘들게 하면서도, 시선을 잡아끌기엔 충분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제아무리 오랜만에 보더라도 그녀의 모습은 상현에겐 실로 익숙했기에 그는 재빨리 경례를 하여 실례를 저지르지 않는 데 성공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당신?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세희를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상현만큼이나, 세희도 이곳에서 상현을 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첫 번째 만남은 우연이라지만 두 번째 만남은 필연이니, 세희는 보다 편하게 그를 대하기로 했다.

“그게… 좀 긴 사정이 있어서….”

세희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잘랐다.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게요.”

그녀가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게 시간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상현은 방금 그녀의 말이 그녀가 나중에 또 자신을 만나주겠다는 의사 표현인지, 그저 지금 입을 다물라는 말의 부드러운 표현인지 헷갈려하면서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가 부익사인가요?”

세희도 구성에 황실 땅이 많아 황실이 투자한 기업들의 공장이 몇 개 들어서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것이 부익사인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비행기가 이곳에서 뜬 이유를 찾아낸 세희가 환하게 웃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감히 누가 그녀를 보고 불가하다고 할까.

종통이라는 위엄뿐만 아니라 저 미소를 본 어떤 사내가 반대의 말을 하겠는가.

상현은 결국 자신의 권한으로 그녀를 들여보냈다.

보안담당관도 그녀의 신원부를 보고서야 기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른 이들의 미심쩍은 눈길은 피할 수가 없어, 아마 상부에는 알려지긴 할 것이다.

그 전에 무슨 일인지, 그의 상관을 대면하는 것이 좋겠지.

뜬금없는 공주의 방문에 상현의 상관도 펄쩍 놀랐다.

“공주 전하께서? 대체 왜 이곳까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당당한, 너무나 당당해서 할 말을 없게 만드는 공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힌 두 명의 군인에게 오직 한 가지를 주문했다.

비행을 가르쳐 달라고.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두 눈을 끔벅거리는 상현을 향해 세희가 재촉했다.

“가르쳐 줄 거예요? 말 거예요?”

부하의 곤경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정령이 주춤거리다 나섰다.

“송구하오나, 전하. 비행은 몹시 위험한 것으로 훈련되지 않은 조종사가 기체에 타는 것은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세희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모든 조종사가 처음부터 훈련된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미간을 좁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상현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참았다.

“당연히 제가 직접 기체를 몰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허종욱 비행장에서도 좌석이 하나 더 있는 비행기를 봤어요. 여기도 몇 대 있더군요. 그냥 방해 않고 뒤에 타고 있기만 할게요.”

그 와중에 대체 단좌기와 복좌기는 또 어떻게 구분하여 보신 건지.

이번에 양산 결정이 내려진 백여 대의 비행기 중 열두 대는 훈련용 복좌기였다.

말 그대로 좌석이 두 개였다.

덕분에 날개가 조금 더 커지고, 기관의 힘이 더 좋아졌으며 항속거리가 짧아졌다지만 훈련용이라서 별문제는 없었다.

상현이 어찌하느냐는 듯 상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속내는 너무나 복잡했다.

비행은 위험한 것이라, 공주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그다음에는 자신의 또 다른 비행, 그것도 자신이 아는 한 최고의 미녀와 함께 하늘을 누빈다는 생각을 해 보자 순식간에 생각의 무게추가 뒤로 쏠렸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의사는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전하, 이 기체들은 아직 안전 점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로….”

“아까 비행하는 걸 봤는데요?”

“보신 건 복좌기가 아니라 단좌기에 해당됩니다. 아직….”

“일반적인 사내 둘이 타는 것보다 내가 타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하오나….”

“지금 거절을 위한 변명만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세희가 은은한 노기를 보였다.

고귀한 혈통에 대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의 위엄이 범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일 테다.

제아무리 젊다 못해 어린 처녀라지만, 고려 황제의 막내딸이라는 휘광은 일반적인 군인에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었다.

황제와 제국, 그리고 신민을 위하여.

그들은 그 좌우명에 살았으니.

“제발, 단 한 번만.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네?”

게다가 이렇게 애절하게 부탁까지 하니, 정령조차도 난감하다는 듯 짧은 턱수염을 긁었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상현을 보았다.

“귀관, 방금 전까지 비행을 오래 했었지. 체력은 괜찮나?”

“팔팔합니다.”

이 새끼가.

정령이 눈치 없는 정위에게 눈을 치켜떴다.

비로소 자신의 대답이 틀렸다는 것을 인지한 상현이 눈을 내리깔았지만, 세희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모시고 다녀와.”

공주는 뛸 듯이 기뻐하며 창고의 밖으로 달려가듯 걸어 나갔다.

상현은 사물함에서 그녀에게 씌워줄 보안경을 줍다가, 상관의 손짓에 재빨리 다가갔다.

눈앞에 있는 장교 놈의 귀끄댕이를 잡아당기려는 유혹을 애써 참아낸 정령이 엄하게 말했다.

“행여 전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나도 너도 죽는다. 알지?”

상현이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전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은 자신의 신변에도 이미 이상이 생겼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닌가?

* * *

난생처음 비행기에 앉은 세희는 이 비행기라는 것이 그녀가 상상하던 하늘을 나는 페가수스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일단 비좁은 좌석에 앉자마자, 휘발유 특유의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그녀의 덩치가 실로 작은 것을 생각해보면, 장교들도 끙끙거리며 앉아야 할 상황일 것이다.

“이거, 좌석을 키워야 하지 않겠어요?”

“건의해보겠습니다!”

게다가 기관이 켜지고 바람개비가 돌아간 후에는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준비되셨습니까?”

“네!”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했다.

누군가 자신의 엉덩이를 잡아 위로 끌어 올리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발밑이 갑자기 휑했다.

정신이 아찔해져 크게 숨을 들이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미 대지에서 이륙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생각보다 더….’

비행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빠르고, 훨씬 맹렬했다.

훨씬 더 역동적이었다.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하는 것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거친 바람이 눈과 귀를 때렸다.

보안경을 안 썼다면, 눈도 못 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십니까?”

바람개비를 움직이는 기관의 소리에다가 이제는 바람 소리까지 합쳐지니 어찌나 시끄러운지 앞에 앉은 상현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구요?”

“괜찮! 으십니까?”

괜찮냐고?

세희는 자신의 육신을 감싸 떨어지지 않게 고정시킨 안전띠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고개를 뻗어 밖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끝도 없이 광활하게 뻗은 평원.

파종을 하여 초록색으로 가득한 곳과, 울타리가 쳐져 있는 곳과 그리고 아직도 풍차를 이용하는 전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쪽 아득한 곳에 있는 숲과 서쪽 아득한 곳에 있는 거대한 산맥의 자그마한 자락까지.

괜찮지가 않았다.

그 정도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끝내주게 좋아요!”

그녀답지 않게 앞뒤 가릴 것 없이 이곳, 부익사로 쳐들어와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온갖 생떼를 부린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지금의 경험은 그 부끄러움 따위는 정말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황홀했다.

“그때, 그거! 해줄 수 있어요?”

문득 세희가 상현에게 말했다.

주어도 뭐도 없는 말이지만, 상현은 즉시 그 말을 알아듣고는 목청껏 대답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녀는 몇 차례 상현을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한 번 군생활이 수렁에 처박힐 뻔했던 그는 이번엔 정말로 미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세희가 진정을 했는지 다소 잠잠해지자 상현은 부드럽게 하늘을 선회했다.

사실상 훈련용 비행기의 뒷좌석은 단지 정말 비행을 체험한다는 용도만으로 쓰이고 있는지 거의 아무것도 달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후방의 좌석에 총을 달 생각을 하고 있다지만, 다혈포를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계획만 한 상태였다.

경치만 구경하시는 것이 전부겠지?

마침 시간대가 그렇게 되었는지, 이제 어느덧 해가 저물며 서쪽의 태동산맥 자락에 노을이 끼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광경.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강한 바람에 머리를 고정하던 끈이 사라져 길고 검은 머리가 요란하게 펄럭였지만 그녀는 그저 멍하니 동체의 왼쪽에 기대어 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현은 이 공주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고귀하거나 아름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몹시 큰 이유긴 했지만, 상현은 그녀가 본질적으로 그와 완전히 같은 동류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늘이라는 곳을 더없이 사랑하는.

젠장, 어쩌면 내일부터는 그녀가 꿈속에 정말로 매일 등장할 수밖에 없겠다.

동시에 상현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어쩌면 다시 현장에 복귀할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얌전해지고, 과거의 일이 잊혀지고, 반성문과 탄원서를 열심히 써서 제출해본다면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로 무엄한 말이나, 황상께서 광증이 생기시지 않고서야 금지옥엽의 비행을 허락하실 리가 만무할 것이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활주로에 다가갔다.

비행에서 가장 어렵고 위험한 부분이라면 단연코 착륙이 꼽힐 것이다.

자신 하나의 목숨을 담보로 했다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지금 그는 어쩌면 제국의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책상물림이 되었다 하나, 그동안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기억에 의지한 그의 정교한 손은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매끄럽게 비행을 종료했다.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비행.

뒷자리에 앉아있던 세희조차도 이 상현이라는 청년이 가진 조종사적 잠재력에 찬탄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그녀가 활주로에 내렸을 때, 그들은 또 다른 방문객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래, 비행은 재미있었느냐?”

서른 살 즈음의 남자가 가벼운 미소를 짓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 그 가벼운 미소에서 흘러나왔다.

그 옆에는 정말 죽상이 된 정령과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보안담당관, 그리고 몇 명의 호종인들이 서 있었다.

남자를 본 세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가족 회동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더니, 이젠 네가 제일 늦게 생겼다.”

그러나 해청은 그 이상으로 별말 하지 않았다.

다만 세희에게 어서 목장에 가자는 듯 고개를 까딱한 것이 전부였다.

의외의 반응에 세희가 터벅터벅 걸어갔고 자신이 타고 온 마차에 그녀를 태운 해청이 이윽고 정령을 손짓하여 불렀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황태자.

고려 신민 사이에 그러한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딱히 인기가 없었던 황태자는 실제로 보았을 때는 도무지 그러한 느낌이 풍기지도 않았다.

“이번 일은 모두 함구하시리라 믿겠소.”

대체 무슨 깡이 생겼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상현은 기어코 미친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주제넘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전하, 공주 전하를 질책하지 마소서. 그건 오로지 제 잘못이니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청은 도리어 그에게 반문했다.

“정위. 왜 내가 세희를 질책하리라 생각하나?”

“예? 그러시다면….”

“함구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그녀가 아버지께 혼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황태자도 마차에 올랐고, 상현은 그들이 사라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 * *

“정말로 그래?”

“당연하지! 그 광경을 너희들도 한번 봤어야 하는데.”

아름다운 여인 네 명과 잘생긴 남자 한 명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술과 안주를 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위대한 용의 핏줄은 그 외모에서도 대단히 강력하게 적용되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아름다움이란 전형적인 유전되는 형질이었고 고려와 아시아, 유럽에 걸쳐 통혼하는 황실은 넓은 유전학적 형질 아래에서 건강과 미를 모두 추구하고 있었다.

해청이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선천적 건강과 아름다움은 운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

대개의 뇌전증이 그러하듯, 그의 병도 후천적 요인으로 걸렸으니.

대화는 무르익었다.

“내가 그 의상점 재봉사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너넨 정말 모를 거야.”

둘째이자 장녀인 연희는 진작 출가하여 자신의 사업을 일구고 있었고, 셋째와 넷째는 그녀의 말에 열심히 귀 기울이며 호응해주고 있었다.

주제도 여성 의복에 대한 것이니,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땐 정말 비루했어. 그 사람이 그렇게 아름다운 고급 맞춤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니까?”

반면, 지금의 주제에선 해청이 딱히 어울릴 수 있는 구석은 없었기에 그는 다만 차를 홀짝였다.

의외로 세희도 언니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청의 곁으로 의자를 가지고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오빠에게 질문했다.

“아까 일, 혼내진 않는 거야?”

“내가 널? 왜?”

청이 되물었다.

“위험천만한 짓을 했잖아.”

“알긴 아는구나.”

피식 웃는 오라비의 말속에서 분노와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자 세희는 일단 안도했다.

황태자로서 자신을 혼내거나, 혹은 아버지에게 이를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희는 그 후에 도리어 오빠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참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오빠라는 사람이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행동을 해도 그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덤덤히 내뱉는 청의 말은 세희의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삶이란, 대체 어떤 가치가 있느냐?”

“…….”

그제서야 그의 마음을 알아챈 세희가 오빠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청이 기겁했다.

“뭐야, 왜 이래? 용돈 필요하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고로 친하게 지내는 둘이었지만, 본래 남매라는 존재는 마치 자석의 같은 극과도 같아 척력이 존재하곤 했다.

“진짜, 됐어!”

하지만 세희도, 지금 이 타오르는 장작불과 하늘을 수놓은 별의 바다 속에서, 마침내 그녀의 가족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었다.

“한낱 병이 오빠의 위대함을 좀먹을 순 없어.”

위기의 시대에 신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밝게 빛나는 단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무수한 별들을 품을 수 있는 포근한 밤하늘이다.

지금 이 시대엔 영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 하더라도.’

세희가 이제는 어두컴컴해져 방향조차 확실치 않은 부익사의 공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라고 영웅이 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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