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3)
당신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가?
만약 누군가 세희에게 그런 말을 던졌다면, 세희는 한참 고민하다 고개를 저을 것이었다.
이제 혼례를 논해도 될 정도로 나이가 찼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딱히 마땅히 마음에 드는 남자를 발견하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심정은 어떤가.
창천궁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보름이 흘렀지만 그때의 그 광경만 생각하면, 아직도 세희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붉어졌으며 손에선 땀이 났다.
아침에 운동 삼아 정원의 외곽을 뛴 뒤에도 그녀는 궁으로 돌아가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담화를 나누거나 혹은 아버지나 오빠를 방문하거나 하는 대신 이젠 정원의 풀밭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푸른 하늘, 정말….
누군가 그녀의 시선을 가렸다.
세희의 궁녀였다.
“전하, 제충국 향수는 뿌리셨죠? 풀 속에 사는 진드기도 병을 옮길 수 있대요.”
“아니.”
눈동자만 돌려 신분을 확인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세희는 다시금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하, 무슨 일이 있으세요?”
“별일 아니야.”
제충국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는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세희의 팔과 다리를 슬쩍 들어 돗자리 바닥에 분무기를 몇 번 뿌리던 궁녀가 마침내 그렇게 물어보았을 정도로 그녀의 상태는 썩 정상적이지가 않은 것 같았다.
평상시라면 궁녀는 더 이상 공주를 귀찮게 하지 않고 물러나 그녀의 근처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시선만 둘 것이었다.
내명부 개혁은 한참 전에 있었고, 지금의 궁녀는 과거처럼 군주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국가공무원화가 되었으니, 결혼도 자유로웠으며 기혼자는 따로 제공되는 숙소를 쓰지 않는다면 도성 내에서 알아서 살 수도 있었다.
봉급은 먹고 살 정도가 아니라, 가히 상당하다 말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는 해씨 황조가 자신들을 모시는 자들에게 적절치 않은 봉급을 줄 이유가 있겠는가.
내관이든 궁녀든, 재정이 풍족해야 사기도 오르고 혹여나 못된 마음을 품는 외부의 인물이 모략을 꾸미더라도 그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원자는 항상 넘쳐났다.
반면 선별과정은 그만큼 엄격해져 이제는 그 능력과 성품, 외모(적어도 자기관리에는 철저해야 했다)에 대해 시험을 봐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엄격한 신원조사를 통과해 불량한 사상이나 가족에 위험 요소가 없는지 확인까지 해야 했다.
궁인들도 궁인들이 가진 직책 나름이겠지만 이렇게 종통 가까이 모시는 궁인들은 웬만한 관리들은 기가 죽을 만큼 실제적 계급도 꽤 높았으며, 황족들과의 친분 덕에 정치적인 계급은 그보다도 더 높았다.
물론 궁 내부의 공무원들은 전부 정치에 발을 들일 수 없긴 했지만.
세희의 옆에 있는 궁녀는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내 온 덕에 그녀와 아주 친했고, 이번에는 그녀를 모시고 같이 허종욱 비행장까지 호종하기도 했던 터였다.
허종욱 비행장의 존재 자체가 군사기밀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비취인가가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궁녀가 갑자기 능글맞게 웃었다.
얘가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은 세희가 그녀를 바라봤고, 궁녀는 이제 아주 공주의 옆에 살포시 앉아 본격적으로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 장교분 때문이신가요?”
“뭐?”
“그때 그 비행기 조종사라는 사람 말이에요. 이름도 기억나요. 다르크 상현이라고 했었잖아요.”
궁녀는 헤죽 웃었다.
“정말 잘생기긴 했죠.”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아니래도?”
세희가 미간을 좁히자, 궁녀가 아뿔싸 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세희는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네 생각이 완전 틀렸다곤 안 할게. 그런데 정말 그 사람 때문은 아니야.”
사실 세희로서도 상현에 호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손수건을 괜히 주었겠는가.
심지어 그를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허종욱 비행장.
그 황량한 활주로에서 보였던 모습들.
사실 그때의 그 기억들이 여전히 세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맞았다.
그 젊은 청년 장교를 떠올리느냐고?
그건 아니었다.
다만 하늘을 날고 싶다는 아주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자신의 누구의 딸이던가.
관함식 당시 직접 그 위험하다는 비행선에 승선한 부부의 딸이었다.
그 이후 정작 남매들은 위험하다며 탈 수가 없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말씀하실 때마다 항상 당신들의 인생에서 그렇게 재미있고 짜릿한 순간은 없었다고 하셨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 그녀는 하늘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가 흘러가며 꺼낸 이야기들도 있었다.
군무의 비밀 중 하나였지만, 세희는 입단속 하나는 자신이 있었고 의외로 군무의 일엔 부모를 똑 닮아 상당히 명석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 상대가 되기엔 충분했다.
아버지는 이 비행기라는 존재가 미래의 병기로서 저 하늘을 지배할 것이라 누누이 말씀하셨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묘사로 한 사람이 탈 만큼 작다는 날틀이 어찌 저 거대한 비행선을 몰아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비행장에서 본 것은 그녀의 상상 밖의 일이었다.
둔중한 비행선과는 달리, 비행기는 빠르게 이륙하여 너무나 우아한 몸짓을 해 보였다.
단지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고 있다는 표현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그 청년 장교, 상현이라고 했나.
그 사람이 보여준 그 묘기가 마침내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전투무기.
비행기가 어떻게 진화하고 나아갈지는 사실 지금으로선 그녀라도 제대로 알진 못했다.
다만 그녀가 아주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저것들엔 결국 총기나 다혈포, 혹은 비행선에 실었던 폭탄 따위가 달릴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이제 육지와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 위라는 전장에서 싸우는 시대가 올 것이란 의미.
세희는 손을 뻗어 하늘에 대고 검지의 끝으로 숫자 팔을 계속 그렸다.
벌들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하늘에는 다시금 무인들과 기사들이 등장해 합을 겨룰 것이고, 그 광경은 신화 속의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언니들과는 달리 세희는 부드럽고 아름답기만 한 자신의 외모 안에, 어쩌면 육신과는 조금 괴리감 있을지 모르는 성격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자매들 모두가 용의 혈통을 지녔으며,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유럽의 고귀한 혈통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질이 마침내 황제의 막내딸이라는 영 엉뚱한 존재에게서 발휘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 생각해보면 그녀는 독특했다.
그녀가 마음 설레는 이야기는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도, 가슴 절절한 비극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는 안시성주가 화살을 쏘아 이세민의 눈을 맞추었고 아킬레우스가 파리스에게 발뒤꿈치를 맞아 전사했다는 야사를 더욱 흥미롭게 보았으며, 그 영웅들의 서사시에 같이 맥동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는 옛날 북려에서 고려의 황족과 함께 아즈텍을 멸망시킨 앙왕계의 시조 잔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같이.
그러나 그녀는 하늘을 휘젓던 팔을 떨어뜨렸다.
꿈은 꿈을 꿀 때마다 그 내용이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동시에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를 크게 아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나중의 전쟁에 나가는 것도 필히 반대할 것이다.
군무를 논하는 것과 비행기에 앉아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달랐다.
철부지 꼬맹이가 조르기에는 하늘은 위험했으며, 전쟁은 너무 참혹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 오후의 백일몽을 접어두기로 했다.
* * *
― 쪼르륵
“그래서. 군무부로 전출이 된 거냐?”
새로운 근무지에서의 새로운 일이 끝난 상현은 술잔에 따른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래. 아주 엿같다니까.”
“적어도 진급하긴 했네, 정위라며.”
“폐하께서 칭찬까지 하셨는데 그럼 벌을 줄 수는 없었겠지.”
그래도 상현의 일은 겉보기에는 잘 풀렸다.
심지어 근무지도 창양의 군무부고, 계급까지 이 젊은 나이에 벌써 정위를 달았으니까.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말 부대장의 말대로 책상물림이 되어 버렸는데.
제아무리 고되더라도 고려의 군인들은 현장직을 내근직보다 훨씬 선호했다.
진급도 현장직이 더 잘되었고, 인식도 더 좋았다.
지금 당장 한 계급 더 올라간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땐 과연 좋은지도 의문이 들었다.
정말 상부에 단단히 찍혔다면 앞으로 현장에 복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반성문이라도 써야 하나?’
상현은 오랜만에 본 숭무감 동기에게 투덜거리며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모름지기 사내들이란 친구의 이런 ‘소소한’ 불운에는 위로 대신 빈정거림이나 놀림이 먼저 나오는 법이다.
“가뜩이나 공군은 신설 병과라 행정 볼 사람이 별로 없댔다. 넌 책상 앞에서 탈출하지 못할 게야.”
“윤 부위, 말이 심해? 윗사람에겐 말을 가려서 해야 하지 않겠냐?”
“어이고, 이젠 계급으로 어쩌시려고? 내가 지옥주 때 네놈이 진흙탕에서 똥을 지린 것을 네 미래의 제수씨에게 일러주랴?”
“형수님이지 왜 제수씨냐, 진짜 죽을래?”
둘은 한동안 투닥거렸다.
씩씩거리던 상현을 골려 먹던 동기는 말을 멈추고 이내 자신도 한 잔을 들이켰다.
“나도 북려로 전출된단다.”
“왜?”
“비밀이라 자세한 사항은 말 못 하는데, 육군도 한창 신병기 개발에 매진 중이다.”
“개인화기 쪽?”
“아니. 그건 조병창이나 화기 회사들이 해야 할 거고. 이번 건 좀 달라.”
어차피 양산과정에 들어가면 비행기도, 육군 무기도 비밀이 아니게 될 것이니 서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네.”
“좋긴 개뿔, 난 곤충을 혐오한단 말이야.”
지옥주 때 별꼴을 다 보았던 동기는 아직도 곤충에 큰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메뚜기가 기승이냐?”
“아니, 요즘은 좀 덜해진 거 같긴 하던데.”
내일은 토요일, 일과 걱정 없이 마실 수 있었기에 그들은 꽤 오랫동안 주점에 머물렀다.
“비행선 제작이 중단된 덕분에 다시 순대니 부어스트니 하는 것들의 가격이 내려간 건 참 좋은 일이야.”
상현도 그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달이슬 하나 더 주시오.”
탁자를 돌아다니던 점원이 상현의 주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로 가 술병 하나를 더 가져왔다.
하지만 자리가 파했는지 옆 탁상에서 일어난 이가 비틀거리며 점원을 밀치고야 말았고 점원도 가지고 오던 소주를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변상을 하지요.”
문제의 원인이 된 자가 사과하고 떨어뜨린 술값을 계산해 사건은 별 탈 없이 지나갔지만, 탁자에 술이 튀었기에 동기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행주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잠시만.”
점원의 말에, 상현이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뭐 해, 닦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현이 머쓱하게 웃으며 손수건을 품속에 넣었다.
“아, 미안하오. 그냥 행주를 가져다주시오.”
“예, 손님.”
* * *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몇 달 뒤, 상현은 병기개발단이 본격적으로 비행기의 생산에 들어갔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시제품은 그동안 충분히 많이 만들었었고 상현과 같은 조종사들도 운용하여 자료들을 쌓았었다.
이제는 믿음이 생긴 모양.
공군은 초기 양산형을 무려 백여 대나 만들어 운용할 예정이라 했다.
비행선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대신, 예산의 여유가 있는 모양이다.
최근엔 공군 예산 자체가 많이 증가하긴 했으니.
‘백 명이나 탈 수 있는데 나는 왜 못 타는데?’
부러워 죽겠군.
담당 상관인 정령에게 올릴 서류를 열심히 작성하던 그가 자신의 현실에 자괴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도 비행기를 타진 못하더라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그의 상관은 이번에 양산되는 초기형과 그 개량형 기체에 대한 군무부 검수를 맡게 되었고, 상현 또한 현장경험을 인정받아 상관과 함께 비행기의 생산을 맡은 부익사의 공장에 갈 수 있었다.
수도권과는 좀 떨어진 한적한 지역, 구성에 위치한 부익사의 공장은 바쁜 현장을 보여주듯 목재 뼈대와 두꺼운 직물들, 그리고 여러 철제 잡동사니들이 이리저리 산적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반대편의 넓은 마당에선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비행기들이 늘어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군용 상징이나 도색은 아직 되어있지 않아 착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비행기들의 날개와 몸집은 자신이 허종욱 비행장에서 탄 것보다 날개가 더 크고 견고해 보였다.
“일단 귀관은 뼈대와 날개들이 잘 생산되었는지, 잘 작동하는지 한번 보라고.”
“알겠습니다.”
동체와 바람개비, 주날개와 꼬리날개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만듦새를 평가한 상현은 조종석에 풀썩 들어가 몇 가지 단추를 실험해 보았다.
승강타나 방향타가 잘 작동은 하는지.
제대로 알기 위해선 기관에 시동을 걸고 운용을 해야 하겠지만 그는 나름대로 몇 차례 점검을 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제법 잘 만들었으면 전우들도 괜찮게 타고 다닐 것이다.
“전반적으로 훌륭합니다.”
상현은 동그라미를 그린 보고서철을 상관에게 건넸다.
“타고 싶나?”
보고서를 검토하던 상관이 흘러가듯 물었다.
“예?”
“타고 싶냐고.”
상관의 성품으로 볼 때, 절대 약을 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 꿀꺽
침을 꿀꺽 삼키지만,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하는 상현의 말에 정령이 끌끌 웃었다.
“양산 결정 이후 비행기의 존재 자체는 기밀에서 대외비로 격하되었지. 마침 부익사에선 자체적으로 시범운행도 하는 모양이고…….”
“그 말씀이시면?”
“한 시간 주겠다. 네 전우들에게 갈 비행기의 성능을 실험해 봐라.”
그 말을 들은 상현은 경례조차 할 생각도 못 하고 비행기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부익사에서 나온 사람이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는 상현을 위해 안내해 주었다.
“가장 왼쪽의 기체가 연료가 채워져 있는 상태입니다. 저기 장교님, 누차 말씀드리지만 안전에….”
그날의 빌어먹을 짓에 대한 후회는 지금도 하고 있었다.
“안전이라면 정말 누구보다 잘 지킬 겁니다. 걱정 마세요.”
* * *
광진과 구성, 삼천 등 창강대평원의 건조한 서쪽은 밀 농사를 짓는 곳이 많긴 했지만 여전히 목장으로 쓰이는 곳도 많았다.
적제 목장과 같이 황가가 사적으로 소유한 넓은 목장도 있었는데, 각종 예식에 쓰이는 공용 말은 물론이고 황실 구성원들이 타고 다니는 개인적인 말들도 이곳에 방목하여 기르고 있었다.
황제나 황후는 물론이고 황족들은 대부분 자신의 말을 한 필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족 회동을 가지기로 한 종통의 남매들은 결혼하여 출가한 세희의 두 언니까지 모두 목장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기로 했다.
가족이 우선이라는 해원도 아들딸들이 서로 남매간의 우애를 다지는 것을 몹시 기특하게 여겼으니, 흔쾌히 목장의 관리인에게 언질을 주기까지 했다.
이 황실 목장엔 당연히 귀빈들을 모시는 숙박시설도, 마당의 모닥불에서 직화구이를 해 먹을 수 있는 곳도 있었다.
할 것도 없었던 터라 일찍부터 먼저 도착해 승마복을 입고 자신의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주던 세희는 말고삐를 쥐고 초원으로 나가 능숙히 안장에 올랐다.
그리고는 작은 마당의 한 바퀴를 슬슬 돌더니, 큰 초원으로 나아갔다.
본래라면 한 바퀴 신나게 말을 타 바람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세희는 초원으로 나아간 뒤에는 그저 멍하니 저 지평선 끝과 맞닿은 하늘 자락에서 조그마하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일반적 사람이라면 대체 저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수군거리거나 혹은 근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금 큰 수리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한번 저것을 보았던 사람에겐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그녀의 운명이 속삭였다.
“이랴, 이럇!”
그녀를 호종하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랄 만큼, 세희는 말을 타고 질주해 마침내 목장의 울타리를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