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르 샤(2)
적국의 군주가 자신의 땅과 봉신들을 버리고 귀순을 청해 온 이 전무후무한 일에 상민도 놀랐다.
해씨고려에선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왕씨고려에선 견훤이 그러했겠지만.’
어쨌든 나디르는 안전하게 슈슈타르에서 바스라로 운송되어 상민의 눈앞에 놓이게 되었다.
곱게 생각하긴 힘든 놈이라 좋은 대접을 해주고 싶진 않았지만, 그의 건강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안락한 감옥을 내주었다.
“믿을 만한 놈은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제일사도, 윤성도가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한때 주군이었던 사파비의 샤를 쫓아내고 자신이 스스로 참칭한 전례가 있지 않겠습니까?”
윤성도는 주군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아마 주군께선, 이자를 어떻게 쓸지 고민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용의 심계는 깊어 범인으로선 감히 재단하기 어렵지만, 윤성도는 적어도 이 머저리가 대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던 상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려와 페르시아는 서로 죽어라 싸워대고 있는 처지였다.
이놈이 대체 왜 러시아가 아닌 고려로 도망쳐 왔는지는 모른다.
단지 이스파한이 러시아의 땅과는 멀어 대신 슈슈타르를 선택했을지도.
하지만 이자가 제아무리 스스로 고려에 왔다 하더라도, 상민은 이놈을 풀어준다는 선택지를 내리진 않을 것이다.
‘이놈보다 쓸만한 패는 더 많다.’
이나크 칸의 죽음으로 인해 나디르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자그로스의 잔드 부족은 고려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도 나디르와 아프사르 왕조를 적대하고 있으니 부디 고려와 잔드 부족 간의 평화를 논해보자고 한 적이 있었다.
죽은 이나크의 아들인 카림 칸 잔드(Karim Khan Zand)와 부다크 칸 잔드는 케르만샤를 기점으로 하여 자신들만의 왕조, 잔드 왕조를 창업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상민은 그 젊은 청년과의 만남을 기억했다.
― 그대는 선대의 복수를 염원하는가?
― 나디르는 폭력으로 제국을 세웠으나, 결국 비참하게 몰락할 것입니다. 허나 당신들은 관용과 자비로 나라를 세웠으며 이는 영원히 아라비아와 이라크에 남을 것입니다. 제가 다스릴 땅이 어떤 길을 택할지는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고려로서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상황.
상민도 이들을 지원해줄 계획을 생각해보라며 지시를 내린 참이었다.
잔드 부족이 아니더라도, 고려는 나디르를 지원해 주기 힘들었다.
상민이 제아무리 황제와 여의국을 통해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지만, 그조차도 국내 여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특히나 나디르는 비록 외세의 사주를 받았다고는 하나 그의 좆대가리―활대기뢰―로 이미 한번 고려를 골탕 먹인 적이 있는 자였으니.
적국의 군주를 존중해 처형하지는 않더라도, 그를 풀어주어 다시금 무기를 쥐여 주는 행동은 국민들로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일 것이 분명했다.
외인부대의 사기도 떨어질 것이었고.
“또한 이자는 그 성격이 난폭하고 잔혹하여, 자신을 위해 싸워왔던 부하는 물론이고 자신의 혈육에게도 몹쓸 짓을 한 자입니다. 질이 떨어지는 자이니, 가까이 두지 마소서.”
그의 말마따나 나디르를 처분하는 가장 최선의 방책은, 죽이지 않고 어디 한적한 곳에 유폐하듯 가택 연금시키는 것이었다.
태평양에는 경치 좋은 섬들이 많았으니, 대충 물자와 함께 던져놓으면 알아서 살다 죽을 터.
그러나 상민은 계속 미련이 남았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엔 아까운 놈이란 말이지.’
솔직히 그는 탐이 났다.
저 저돌성과 재능이.
비록 고려에 계속 패배했었고, 무굴 정벌 이후 귀환하는 과정에서 큰 패착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정말로 전투의 귀재라 부를 수 있는 자였기도 했다.
절대강자에게 패한 것은 수치도, 허물도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법칙일 터.
사실 나디르는 아부다비나 알 쿠와잇의 전투에 딱히 낙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상대가 나와 고려가 아닌가?’
* * *
일단 상민은 나디르가 정신을 차리고 원기를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만나본 적은 없고, 오로지 보고서로만 접한 인물이니 대화라도 나누어봐야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있겠다 싶었다.
서른다섯 살.
시대상 적지 않은 나이지만, 많지도 않은 나이니만큼 그의 육체는 아직 이런 시련에도 빠르게 회복하는 모양이었다.
“끄응.”
나디르는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쇠창살 안, 그의 몸을 구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로소 그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인식했는지, 그는 한바탕 껄껄거리며 웃다가 돌연 정색했다.
거칠고 갈라진 음색의 아랍어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놈은 누구냐?”
상민은 꽤 호기심 있게 그를 바라봤다.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해도 그 특유의 덩치와 근육으로 인해, 상민의 앞에서 이놈이며 저놈이며 말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몸은 좀 어떤가?”
“짐은 격이 어울리지 않는 자와는 이야기하지 않아. 네 상관을 불러오거라.”
상민은 턱을 긁었다.
뭐, 한때 상관이었던 사람은 있긴 했지만.
죽은 배중손이라도 불러오랴?
“쫓겨난 페르시아의 거렁뱅이는 내 격에도 맞지 않아. 그대는 그대가 처한 현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군.”
나디르가 발끈하며 일어났다가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그 모습을 본 상민이 페르시아어로 중얼거렸다.
“안타까운 일이야. 그대의 몸이 조금 더 괜찮았다면, 연무장에 가서 먼지 나게 패서 현실을 깨우치게 해 주었을 텐데.”
그제서야 나디르는 눈앞의 사람이 보여주는 위압감을 확연히 느꼈는지 입을 닫았다.
“그래, 나디르 콜리 아프사르. 페르시아의 샤여. 고려에 귀순한 까닭이 무엇이냐?”
나디르는 묵묵히 상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윗사람 불러오라며 하는 허튼소리를 하는 대신, 그는 제대로 요구사항을 말했다.
“복수를 원한다.”
그가 으르렁거렸다.
“정당한 페르시아의 군주를 몰아낸 저 역적들에게 응당한 복수를 원한다.”
“고려가? 왜?”
나디르가 침묵했다.
이 인간은 정말로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을 단단히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수성가로 일국의 군주까지 오른 인물들이 가진 공통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크흠.’
상민은 헛기침을 하며 생각을 끊은 뒤, 말했다.
“지금까지 실컷 싸워온 적국 수괴의 복수를 해 달라고?”
“…페르시아는 고려와 적대하지 않겠다.”
상민은 이 어리석은 샤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적대하지 않는다고? 재미있는 소리군. 지금 그대가 도망쳐서 이곳에 느긋하게 누워있을 동안, 그대의 나라가 어떻게 갈라지고 있는지 아는가? 파슈툰계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천명했지. 또한 자그로스의 자잘한 부족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독립을 욕망하고 있다. 네놈이 가봤자 이제는 자리가 없단 소리야.”
“그깟 피라미들, 모조리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짐은 나디르다. 그런 놈들이 감히 짐의 앞길을 방해할쏘냐?”
“쓸어버릴 군대조차 없을진대 참으로 위풍당당하구나.”
“흥, 짐은 열일곱에 불과 삼백 목동을 모아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군대의 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이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눈빛이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감에 빠져 있던 사람이랑은 어울리지 않았다.
상민은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으나 이내 진정했다.
이놈이 남색을 한다는 보고는 들어 보지 못했으니, 무언가 다른 측면에서 신이 나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패배하고 신이 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리 묻는다면, 이 정신병자가 보통의 사람과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부류의 사람이라고 답할 수 있을 터.
지금까지 이놈은 풀이 죽어 있었다.
까칠하고 오만하게 굴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부하들과 반역자들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로 몹시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상민과의 대화를 통해, 마침내 자기 자신의 기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낸 이놈은, 한 번 빈손으로 제국을 움켜쥐었으면 또다시 그러지 못하겠느냐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광기에 물든 시선을 상민의 어깨 너머에 고정시킨 나디르가 중얼거렸다.
“그래,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처음부터, 차근차근 병사를 모아 반적 놈들을 하나씩 토벌하는 게지. 한번 당한 것들은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 짐은 승리를 거듭하여, 다시금 영광을 거머쥐어 샤의 자리에 오르겠다!”
상민은 그제서야 나디르의 본질을 완벽히 알아차렸다.
이놈은, 전쟁중독자.
그야말로 밥 먹고 전쟁하는 것만 신경 쓴 사람이다.
이놈이 만약 전쟁이 별로 없고, 있더라도 대체로 일방적인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아마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말과 칼’을 하며 폐인처럼 지냈을 운명일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해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절망하겠지만 전쟁광은 다시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만만한 놈들 쥐어패면서 승리의 달콤함을 충족하겠지.’
못 말리는 놈이로세.
상민은 의자의 뒤에 기댔다.
덩치와 근육의 무게를 지탱하는 나무 의자가 삐걱거렸다.
“꿈 깨라. 난 널 풀어주지 않는다.”
무슨 꼴을 보려고.
“너는 두 번 다시 페르시아를 밟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위험하고 너무 난폭하니. 네놈은 결국 고려의 땅에서 최후를 맞이하겠지. 아, 걱정하지 말거라. 고려는 군주를 참하지 않는다. 게다가 넌 스스로 우리에게 귀순을 요청하기까지 했으니 직접 싸우다 포획된 것보다는 대접이 좋을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갈 터이니 번잡스러운 것을 뒤로하고 평온을 누리며 살다 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민의 이 같은 말은 한창 원기 왕성할 서른 중반 나이의 전직 샤에게는 모욕과 비슷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나디르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쳐다봐도 상민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상민은 슬그머니 웃었다.
“다만 나는 너에게 제안을 하려 한다. 네가 무기력하게 밭이나 갈면서 여생을 마무리할지, 혹은 네가 그 좋아하는 짓거리를 계속해 나갈지는 네 선택에 달렸지.”
“…뭐라고?”
“전투와 전쟁을 원하지 않나? 내가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는 소리다. 영원히.”
나디르는 저 정체불명의 고려인이 구사하는 페르시아어가 잘못 학습된 게 아닐까 고민하다, 이윽고 그 뒷말을 파악했다.
“지금, 감히 짐에게 고려의 장군이 되라, 그리 말하는 것이더냐?”
“고려는 너 같은 지휘관을 필요치 않아. 너는 오로지 네 욕망만 신경 쓸 뿐이지 병사들의 안위를 챙기진 않지 않느냐?”
물론 나디르도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호라산부터 그를 따른 병사들을 아꼈다 한다.
하지만 고려는 수많은 군대가 다양하게 얽혀 있는 복잡한 군대.
그의 편협한 지도력은 적절치 않았다.
더군다나 병사 한 명 한 명에게 동시대 어떤 나라들보다 좋은 대우와 투자를 하는 고려로서는 인명을 지극히 중시하고 있었고, 이는 나디르와 같은 자들의 지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이자의 명령을 들을 리도 만무했고.
“아,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군.”
하지만 상민은 갑자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네가 맡을 부대가 딱 하나 있다. 그러나 너는 고려를 위해 싸우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지. 너는 고려에게 대적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나디르의 얼굴에 대고 상민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네놈이 버려두고 간 페르시아 포로들이 좀 있었지. 거기에 언어가 통하는 자원자들을 더 보낼 테니 너는 네 군대를 이끌고 고려와 싸워라.”
“……!”
“너희 부대는 우리의 부대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똑같은 수준의 물자를 공급받을 것이다. 비용은 걱정하지 말거라. 다만 무기는 콩으로 만든 탄이건, 고무로 만든 탄이건 비살상 목적의 무기들을 운용해야 하겠지. 그러니 전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터. 우리가 만족하고, 발전하고, 진보할 때까지, 너는 정말 영원히 우리와 싸워야 할 것이다.”
이미 철 지난 나디르의 전술적 능력도, 고려군의 무기를 쓰고 고려군을 상대하다 보면 상승할 것이다.
고려군 또한, 철 지난 군대에게서 점차 신무기에 익숙해져 가는 열강의 군대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냐?”
상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네가 좋아서 까무러칠 천국을 내가 선사해주겠다는 게지. 페르시아의 샤여, 마땅히 경외해야 하지 않겠느냐?”
* * *
한 나라의 황제를 대항군의 수장으로 쓰겠다는 발상을 한 상민은 거침없이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적어도 해원만큼은 상민의 결정에 몹시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디르는 잘 포장되어 고려로 운반되었다.
그의 곁에는 엄선된 인원이 24시간 눈을 떼지 않고 붙어 있었다.
이들은 나디르가 화장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보고할 것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선 당연히 가족이 그리울 만한데, 나디르는 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사파비조의 공주와 결혼을 했었으나, 아직까지 아이도 없었던 그 결혼생활은 썩 만족스러운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왕 대항군을 운용할 겸 페르시아 포로들과 난민들 몇 명을 같이 보내니 알아서 하겠지.
고려로 가는 배에 탄 뒤, 나디르는 그가 무굴에서 약탈한 공작 왕좌가 떡하니 고려로 가는 화물선에 조심스럽게 실리는 것을 보고 탄식을 흘렸다.
“네놈들이 아프간을 책동했나?”
나디르를 호송해 가는 사도가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아니오. 우린 발루치스탄을 움직였을 뿐, 아프간은 도리어 그대를 패퇴시킨 후에 우리에게 접촉해왔을 뿐이오.”
아프간은 먹지도 못할 공작 왕좌를 군자금과 바꾸길 원했고, 상민은 자신의 사비를 털어 공작 왕좌 감정가의 두 배를 아프간에게, 그의 절반을 항의하던 무굴에게 지불했다.
어차피 뺏길 거, 돈이라도 받아 제국을 수습할 여력이 생긴 무굴은 더 이상 항의하지 않았고, 공작 왕좌는 세상 신기한 것들을 수집하는 상민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나디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짐은 패퇴하지 않았다! 파슈툰 놈들은 비열하게 습격했으면서도 대부분의 군세를 잃고 물러났다!”
전리품을 챙기고 도망간 것이겠지.
“…대항군을 운용할 때는, 보다 유연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대처해야 할 겁니다.”
분명히 콩탄에 맞았는데도 부하들에게 아픈 척하지 말라고 윽박지를 것 같은 나디르의 행동에 사도는 처음으로 주군의 결정에 회의감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