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96화 (396/653)

태평천국(6)

하북군이 패퇴하여 물러난 이후, 명은 태평천국 토벌에 어떠한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열강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4개국까지 포함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할 일은 할 일이었다.

누가 했는지 정확한 사태 파악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말도 일부 일리가 있긴 했다.

이곳까지 온 나라들이 기대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하북군이 그 기대를 배신한 것이다.

중원은 열강에게 이득을 주어야 했다.

다만, 고려는 이를 꽤 기분 나쁘게 여겼다.

그들의 현재 역량은 이라크에 닿아 있었고, 가장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군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계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피렌체는 이 일과 무관합니다.”

핑핑 돌아가는 주위 환경에, 주명 이탈리아 대사가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고려의 대사관으로 와 비밀리에 회동했다.

그는 이탈리아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명백히 밝히러 온 것이 분명했다.

얼추 이 일이 프랑스 혹은 오스트리아의 계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고려 대사는 이탈리아의 변명을 받아들였다.

한밤중에 이렇게 와서 해명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대사는 이어지는 이탈리아 대사의 말과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은 강화에게 맞은 뒤통수에 대한 복수와, 다시금 중원에 대해 적절한 이권을 행사할 수만 있다면 반고려노선과 비슷한 길을 걸어 나가고 있는 국가들과 연대하는 것을 그만둘 수도 있다, 그리 말하고 있었다.

대체 뭘 또 해줘야 하는가?

그들이 강화와 명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도 고려가 중재해야 하는가?

물론 이탈리아는 고려와의 외교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적대국이라기보다는 협력국에 가까웠으며, 심지어 고려 내에서의 인연도 상당히 대단했다.

“보르자 가문은 옛 위대한 가면시중들 중 한 분과 이어져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예당과 맵시 전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지요. 허나 대사, 그 핏줄에만 의지해 외교를 하려다가는 욕을 볼 겁니다.”

가면시중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정체들이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그들 중 하나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이 후손들은 당연히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면시중이 방계 황족이었다는 가설이 유력하게 제기되면서 이들도 어쩌면 고려의 황족일 수도 있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이미 그때쯤에는 황족이 너무나 많았고 방계들은 완벽한 일반인 신분으로 취급되었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

대신 이탈리아의 왕가는 고려 내의 이 해―보르자 가문과 친목을 다지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왕위 계승권 같은 것들이 넘어갈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이 가문은 고려 재계에서도, 세계에서도 거대 부호에 속하는 친족들이니 친목을 다져서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어찌 고려의 정계에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보였고.

그러나 이탈리아의 보르자 왕가는 수없이 많은 자신의 후손에 대한 교통정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핏줄 운운하는 것은 씨알도 통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방에서 다른 서류를 꺼냈다.

“이건 사실 본국의 주려대사가 창양에서 직접 건네어야 할 성질의 문서입니다만, 어찌 저 또한 귀하께 먼저 정보제공을 허락받았습니다.”

고려 대사는 시큰둥하게 서류를 받아 들다, 이윽고 눈을 치켜떴다.

“이 서류가 사실이오? 당신들이 이탈리아―베네토 분쟁에 우리를 끼어들게 하려는 것은 아니고?”

“고려 쪽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것도 그랬다.

고려 대사는 이탈리아가 건넨 서류로 마침내 확신했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제 버릇 남 못 주었구나.’

비분강개한 고려 대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본국에 하루빨리 이 정보를 전달하는 게 맞았다.

방을 나서기 전, 그는 이탈리아 대사를 바라보고 말했다.

“대사께 묻겠소. 만약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이 다가온다면, 귀국은 어디에 설 것이오?”

이탈리아 대사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이겨왔고, 앞으로도 이기는 자의 편에 설 것입니다.”

현명한 선택이다.

* * *

경사.

자금성 내 가장 깊은 곳엔 습기 찬 감옥이 있었다.

너무나 깊어서 보통은 죄수가 없는 이 감방엔 최근 들어 아주 엄정한 감시를 받는 새로운 주인이 들어섰다.

북왕 오흠광은 그 특유의 삐죽삐죽한 수염이 더욱 길어진 채로 물기가 흥건한 바닥에 좌정하여 앉아있었다.

경사의 사람들에겐 이 산적 같은 자가 매 끼니마다 어린아이들을 구워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정작 그는 그 악명을 기꺼이 여겼다.

그런 악명이라도, 이 쓰레기 같은 경사 놈들을 위축시킬 수 있으면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운명도 여기서 끝이구나.’

바닥에 고여있는 이 썩은 물이 계속 피부에 닿으면 아마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살이 썩어 문드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당장 내일이라도 거열형이나 능지형을 당할 수 있는데 그까짓 피륙이 무슨 소용이냐.

한동안 바닥에 앉아 쓴웃음을 짓고 있던 오흠광은 갑자기 옥 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곳의 간수들은 재미없는 인간들이라 전부 무뚝뚝하여 그의 도발이나 유도 질문에도 응하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저런 소란이라니.

혹여 자신을 구하러 온 태평천국교도들인가 하는 헛된 희망을 잠시나마 품은 그가 고개를 저을 때였다.

― 끼이이익

녹슨 경첩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거슬리는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은 가녀린, 그러나 어딘가 위엄이 서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나가 보아라.”

들어온 사람은 이곳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오흠광이 단 한 번도 마주해본 적 없는 이 신분 높아 보이는 여인에게선 악취가 나는 감옥에서도 선명히 맡을 수 있는 농도 짙은 향내가 풍겨왔다.

― 찰박 찰박

약간 물이 고인 곳을 슬쩍 지나친 여인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손과 발은 쇠사슬에 포박되어 그 끝이 벽에 고정되어 있었기에 오흠광은 거리상 이 여인을 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여인의 몸으로 사악한 악귀나 다름없는 역도들의 수괴를 만나러 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자신이 이제 이 대명제국의 제일가는 실권자가 되었다면 더더욱.

“무슨 일이냐, 계집.”

북왕은 일단 모욕감부터 치솟아 올랐다.

다 잡은 먹잇감에 대고 조롱하거나 회유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그녀는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흠광이라는 사내는 죽어도 명조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러나 흠광의 모욕적인 말에도 동황비는 격노하지 않았다.

“듣던 대로 기개가 뛰어난 인물이구나. 사교 무리와는 어울리지 않아.”

“단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러 이 누추한 곳까지 왔는가? 너는 이 썩어빠져 언제든 무너질 나라의 누대 위에서 백성의 고혈을 짜 빚은 술을 마시며 승리감에 도취된 채 살아가면 그만일 터, 날 회유하려 해도 소용없다.”

동황비는 문 앞에 누군가 가져놓은 간이 의자를 들고 와 오흠광의 앞에 앉았다.

“너와 나는 공통점이 많아.”

그녀는 이제 대놓고 쇠사슬의 범위 아래 와 있었다.

족쇄에 묶어놨다 하더라도, 전쟁을 경험해본 이런 무장들은 그렇지 않은 여인의 목을 단번에 꺾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흠광은 일단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헛소리.”

“살아온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동황비가 말했다.

“합비에서 너희 역도 무리들은 서로 힘을 합치지 않았지. 너도 그걸 알잖느냐.”

주동휘가 명을 좀먹는 와중에도 시원찮은 지원만으로 북방에 앉아 홀로 하북군을 육성해낸 서기효 그 노인도 범상치는 않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북왕과 남왕이 제대로 힘을 합친다면 태평천국군이 우월할 수 있는 전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반란군의 수괴들은 항상 서로에게 힘을 합치기 힘들었다.

이는 모두가 근본이 없었기에 서로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컸다.

자수성가의 신화나 다름없는 명 태조 주원장과 같은 이는 보기 힘들었다.

일신의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 태평천국을 이 정도까지 일으켜 세운 관수경이 주원장보다 아래라 마냥 여기기도 힘들었다.

오흠광이나 곽인귀가 서달의 아래라 보기도 힘들었으며 진사당이 이선장이나 유기에 비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시대가 문제가 되었다.

천명을 움켜쥐려면, 하늘까지 도와야 했다.

그러나 주원장의 상대는 고작 장사성과 진우량, 그리고 몰락해가는 원이었다면, 지금 관수경의 상대는 명과 더불어 이 비좁은 중원 땅이 아닌 사해의 바다에서 온 열강들이다.

열강들의 대사와 장군들은 중원보다도 군사적으로 더욱 빠르고 격렬하게 돌아가는 유럽에서 살아온 자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상대에도 불구하고, 태평천국군은 아직도 온전히 하나의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흠광은 관수경이 처음 군세를 일으켰을 때, 남왕 곽인귀보다도 먼저 합류한 개국공신과 다름없었다.

따지고 보면 서왕 석개수가 가장 먼저 관수경의 옆에 있었지만, 그는 전위와 같은 장수였지 장료나 장합 같은 사령관이 아니었다.

지휘관으로서 북왕과 남왕은 항상 전공을 두고 다투었다.

남왕의 군재는 흠광도 인정했었다.

일반적인 병략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곽인귀는 새로운 무기를 쓰는 것에는 그보다 확실히 나았다.

그래서 그의 전공이 흠광보다 약간 더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관수경은 전공보다는 자신과 함께한 인연을 더욱 중시 여겼으니, 흠광이 사왕 중 가장 위에 있으며 만세의 천수경 다음으로 구천세의 칭호까지 얻은 것이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냐? 내가 패하면 너도, 그리고 천세지주와 다른 교도들 모두 죽는데 그까짓 전공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게 해?’

흠광은 동황비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이 감옥 안에 들어앉아 곱씹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물론 겨우겨우 속을 다스리고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일 찰나에 이 계집이 다시금 와서 뒤집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동황비의 다음 말이 궁금했다.

“서기효가 패했다.”

“…….”

오흠광이 크게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패배로 태평천국은 끝난 줄 알았다.

명이야 썩어도 제국이니 한 번의 전투로는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처럼 새로운 천하를 열려는 자들은 열 번의 전투에 열 번 모두 승리해야 겨우 새로운 세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게다가 남왕 혼자서는 기세가 오른 하북군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서기효 또한 그와 비슷한 모략에 당한 셈이다.

“…….”

“…….”

이곳에 틀어박혀 어떠한 소식도 모른 채 지내던 자에게 동황비가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자 오흠광은 어처구니가 없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우스꽝스럽고 우스꽝스럽다.

천하 영웅들이 모두 나고 자란 이 땅이 이렇게, 이렇게 우습게 취급받아야 할 땅이었던가?

“그래, 이 꼴이 마음에 드시오? 당신과 당신의 남편이, 당신 남편의 선조들이 만든 지금의 이 지경이 만족스럽소? 저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자들이 사직과 태묘를 농단하는 이 지경을?”

“역도가 사직과 태묘를 논하다니, 재미있구나.”

“나라고 한때는 명의 사람이 아니었겠소? 나라고 해서 한때 그대들을 섬기리라고 생각하지 아니했겠소?”

흠광이 울분을 토하는 말에 이번에는 동황비가 입을 다물었다.

“진사당도, 관수경도, 나도, 심지어 남왕 그놈도 모두가 그랬다. 대명의 백성이거나, 장수였거나, 유생이었거나!

당신들은 우릴 괴물이라 하지. 역도라 하지. 그래, 우리 모두가 너희들이 만들어 낸 괴물이며, 반도며, 역도다. 그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마라. 천하의 명분과 질서가 저 바다 건너 해씨에게 새롭게 쓰여지고 사해의 뭇 나라들이 대려천자에게 조아릴 때, 주씨는 그저 멍청히 여기 앉아 백성의 등에 채찍을 휘두르며 자기 안락만 차렸잖느냐!”

격앙된 흠광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쇠사슬이 맹렬히 절그럭거렸다.

숫제 손을 뻗어 목으로 짓쳐들어올 것 같은 분위기에 동황비 또한 뾰족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만. 오로지 내가 너의 구명이다.”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흠광을 바라보았다.

“거두절미하지. 너는 내일 죽을 예정이다. 그 어떤 자도 널 구해줄 수 없다. 허나 나는 다르지. 나와 이 나라의 천자에게 다시금 조아린다면, 너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으리라.”

어처구니없는 말에 흠광이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는 계집,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적어도 참신한 말을 지껄일 줄 알았건만.

“역도들과 협력하시겠다고?”

“대명을 구하기 위해선, 외세를 멸해야 한다.”

“외세 이전에 대명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택하라.”

동황비가 말했다.

“택하지 않는다면, 너를 따랐던 역도 모두를 처형할 것이다. 잡졸 하나까지 남김없이 모두 묻어버릴 것이다. 네 이름은 명의 사서에 천하의 역도로 규정될 것이며, 네 고향은 네 가족과 네 친우, 네 이웃들의 피로 잠길 것이다.”

그 대부분이 농부이며 그녀의 백성일진대 동황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이 나고 자라는 것은 하늘의 뜻, 중원에 사람 몇 거둔다 해서 사람이 부족하진 않다.

허나 그녀는 반대로 사람을 얻기가 힘들었기에 지금 이 같은 제안을 하고 있었다.

오흠광을 살리고, 그를 그녀의 신하로 부리기 위해.

상당한 도박수였다.

그러나 태평천국이라는 잘 벼린 칼날을 도리어 외세에게 겨눌 수만 있다면.

먼저 채찍을 휘두른 동황비는, 여전히 굴하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는 흠광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먹잇감을 주어야 할 차례였다.

“관수경에게 전하라, 천세지주니, 만세칭이니 하는 행동을 멈추라. 너희들의 구천세칭이니, 팔천세칭이니 그 모든 무도한 행위들을 그만두라. 멸명의 구호 대신, 부명멸양(扶明滅洋)의 구호를 치켜들라.”

하지만 다음의 말을 할 때는 동황비조차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떨면서 말했다.

“만약 너희 우두머리가 교리를 다시금 재정비한다면, 대명 천자의 스승(太師)이 어쩌면 관수경이 될지도 모르지. 어쩌면 나와 다른 신하들도 태사의 가르침을 받을지도.”

명이 상제교를 공인할 것이다.

실로 충격적인 제의에 흠광조차 멍하니 그녀를 바라봐야만 했다.

심지어 그는 한참의 침묵 끝에 말한 자신의 어조가 이전보다 한결 공손해졌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진심이오?”

동황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에도 제국교와 쿠쿨칸교가 있다. 우리라고 해서 너희들을 마냥 탄압할 이유가 없다. 명조의 질서를 따른다면, 너희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으리라.”

천조질서를 표명하는 나라지만, 고려는 종교적 관용 아래 신민들을 다스렸다.

반외세, 척화를 주장하는 명이라도 이미 가장 성공한 제국의 경우를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익숙하니 모방할 수 있었다.

“약속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어찌 그대를 믿겠소? 결국엔 그대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버릴지도 모르는데.”

“나는 제의하고 너는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대명천지에 너희들을 사특한 사교라 규정한 유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겠지? 너를 풀어주는 것도 나에겐 큰 도박일지니.”

오흠광은 고민했다.

“너도 남왕에게 갚아야 할 은원이 있지 않느냐. 그리고 힘을 합쳐 저 외세를 몰아내는 것도 힘든 지경일 텐데. 조정과 백성이 서로 싸울수록 양동이들만 배를 두드린 채 미소를 지을 것이다.”

“…….”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오흠광이 동황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고개를 들라, 대명의 태후로서 네가 앞으로 바칠 명에 대한 충정을 담보로 지금까지의 네 죄를 사하노라. 다만 앞으로 너는 대명에 대한 충정을 보여라.”

오흠광은 꿇어 엎드렸다.

돌고 돌아, 그는 마침내 명의 권속이 되는가.

그토록 많은 것들을 보아왔고, 그토록 많은 것들에 실망해왔으면서 다시금 이들을 믿는가.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허나 오흠광은 그 상념을 잘라냈다.

일단 살아야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온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먼저 감옥을 빠져나온 동황비도 곧바로 처소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녀라고 어찌 저 역도들과 손을 잡고 싶었겠는가.

남편은 저들에 의해 죽은 것과 다름없으며, 그녀조차 비슷한 운명에 처할 뻔했다.

지금껏 그들이 명에게 행한 악행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역도의 수괴를 태사로 올리는 행동은 정말로 명의 권위 그 자체에 엄청난 오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외세의 문제는 오물 정도가 아니었다.

저들은 심장에 꽂을 비수와 같고, 단번에 목을 쳐 잘라낼 수 있는 참수검과 같았다.

오욕을 감내하여 원적을 쳐 없앤다는 그녀의 판단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후대의 사람만이 할 수 있으리라.

[작가의 말]

설 연휴는 따로 공지를 올리겠지만, 지난주 휴재분이 월요일에 올라갈 예정이며 다른 업로드는 없습니다.

다만 수요일까지의 연휴 이후 다음 날인 목금에 연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번 중국 이야기를 다룬 뒤, 본격적으로 새로운 페이즈에 진입할 듯합니다.

2022년, 독자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 전부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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