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5)
가장 먼저 준비하고 있었던 옥저의 증원군을 시작으로 가까운 조선, 백제, 강화의 파병군이 경사에 당도하자, 태평천국군의 진격은 합비를 점령한 뒤에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좋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 유럽의 군대는 거리상 오려면 좀 시간이 걸리지만, 그들도 결국에는 이곳에 발을 들이밀 테니까.
그러나 태평천국군의 본대도 이 열강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최선의 준비를 해야 했다.
기병 전력에 중심을 둔 옥저군은 보병이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이는 반대로 보병을 중심으로 파병한 조선과 백제, 강화의 군대와 만나니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다.
연횡국 출신이었던 강화를 빼곤 삼국은 예전에 합종국 소속이었으며 지금은 예맥한계 동맹을 유지하는 국가라 군사 협력에 대한 기본적인 수칙이 있었다.
먼저 파병되어있던 이윤진이 현 상황을 가장 잘 알고 또한 좋은 공훈을 세웠기에 4국 총사령관이 되었다.
경사 내에 있는 고려의 대사관에는 다시금 되돌아온 주명 고려 대사와 함께 각국의 외교관들, 각국이 파견한 군대의 수장들이 전부 모였다.
“승전과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장군.”
“고맙습니다.”
이윤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정장 계급으로 승진한 것도 그렇지만, 일단 큰 전훈으로 옥저의 명성을 사방에 떨치게 한 게 제일 컸다.
부하들도 주동휘의 장난감들을 취했으니 좋아할 것이다.
주동휘가 얼마나 사치를 많이 부렸는지, 승리를 거둔 정황기가 그렇게 많이 취했는데도 현무호에는 여전히 금배들이 많았다.
“자,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명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지금까진 놀랍도록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고려의 대사가 마침내 입을 열자, 좌중의 대사들과 장군들은 기대감 섞인 얼굴들로 제각기 의자를 끌어당겨 제대로 앉았다.
참석한 인원들이 둘러앉은 탁자에 올려져 있는 물건은 단지 지도 하나였을 뿐인데, 모두는 만찬장에 온 것처럼 침을 삼키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듯한 명의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국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명의 국체를 훼손시키지 말라. 가급적이면 태평천국을 무사히 진압하고 원래대로 주씨 일가가 계속 통치를 이어나가는 것을 원하오.”
하지만 고려 대사는 먼저 초를 쳤다.
전부 다 식기를 들어 눈앞의 고깃덩이를 잘라 먹고 싶은데, 고깃덩이가 아직 덜 익었다는 망측한 소리였다.
“태평천국과 같은 거대한 급진주의 반란은 명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습니다. 지금 참석하신 분들께서 그걸 원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국성이 바뀌어 명이 아닌, 다른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대체 뭘 할지 예상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황상께선 분명 그것을 경계하고 계셨다.
“지나의 후대 왕조가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습니까?”
사실 지금 회의를 주도하는 고려의 대사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받은 명령은 그렇지 않았기에 그는 여전히 경각심 있는 어조를 유지했다.
그래도 동시대에 진행되고 있는 반면교사가 있었다.
마침 프랑스 제1공화국은 이번 개입에 참여한 나라였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 우애를 주장하면서, 그네 프랑스인이 아닌 나라의 인권은 누구보다 앞장서 깔아뭉개려는 게 대단했다.
그러나 그 의의는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고려 대사는 다시금 강조했다.
“프랑스에서 왕의 목을 자른 지 불과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았소. 명이라고 해서 비슷한 꼴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제2의 외젠이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지금의 인민들은 과거 봉건 귀족들이 억누른다고 해서 마냥 억누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억누른다면, 터져버릴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런 면에선 명을 천천히 개혁하자는 지금의 자강운동이 차라리 흐름과 여파를 파악하기도 쉬웠다.
“천조의 공식 입장입니까?”
조선 대사가 망설이며 물었다.
“성심과 일치합니다.”
“…….”
“당하와 조정이 바뀔지언정 이 기조 자체는 바뀌지 않을 테지요.”
여당과 야당이 바뀌면 고려의 정책 기조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대명 외교에 관해선 고려의 세 거대정당 모두 현상 유지를 원하고 있으니, 아직까지도 하북을 탐내는 조선으로서는 약간은 속이 답답했다.
“정 대사. 과욕을 부리지 마시오.”
예전도 아니고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서 온갖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이 시점에 다른 나라의 영토를 점령하여 유지하기란 참으로 힘든 법이었다.
특히나 명―조선―왜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은 더더욱.
가뜩이나 지금의 태평천국도 한족주의를 외치며 반외세적 운동의 성격을 띠는데, 이에 반하는 짓을 계속할수록 역효과만 불러올 것이다.
반란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고, 지배층은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더욱 잔혹해질 터.
고려가 지금까지 번국들의 사정을 그만큼 신경을 써 주었는데, 이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면 도리어 노여움을 살 수 있었다.
조선 대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봉명관을 넘지 못하는 것은 조선―명 간의 허술한 약속 같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창양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황명을 어찌 어기겠습니까.”
고려의 대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도 부설권, 삼림채벌권, 광업권 같은 이권들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알아서들 하시구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적당히들 하시구려. 넓게 보란 말입니다. 그대들이 지방의 여론을 중앙과 분리시킬 수 있다면 앞으로의 일은 훨씬 더 편해지겠지요.”
이쯤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말을 알아듣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그리고.”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자꾸만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아, 좌중의 표정이 썩 밝다고는 하지 못했다.
‘고려가 아무리 고려라 하나, 다른 나라의 내정에 이 정도까지 간섭하는 것은….’
강화 대사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다른 나라들도 내색하지 않았을 뿐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고려 대사가 다음으로 꺼낸 주제는 제법 섬뜩했다.
“최근 명에서 뿌려진 아편이 심지어 개성에서까지 발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고려인들은 마약 이야기만 하면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이 사람은 감히 다른 분들을 의심하진 않겠지만 조정에서는 귀국들의 반마약정책을 다시 한번 재검토해보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저 유럽인들이 미친 듯이 약을 팔고 있어요.”
백제 대사가 억울한 투로 항변했지만 고려는 꿋꿋했다.
“…그 문제는 머지않아 해결될 겁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귀국들 국내에 유통망이 있다는 소리예요. 우리들의 합동수사 정도는 곁가지만 칠 수 있을 뿐, 뿌리를 완전히 뽑으려면 귀국 조정들의 엄정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예.”
‘머지않아 해결된다고? 대체 무슨 의미지?’
다른 사람들이 고려 대사의 말에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 좌중을 둘러본 고려 대사가 마지막으로 강화 대사를 지긋이 바라보자 강화 대사도 마침내 기어들어 가듯 대답했다.
‘젠장, 고려에게도 이야기가 퍼져 나간 모양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해남도를 점령한 이후, 강화는 몹시 이득을 보았다.
그토록 원하는 식민지라니.
하지만 그들은 또한 아편 문제도 동봉하여 크게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해남도를 둘러싼 강화―이탈리아 전쟁에선 예전 무력계급이었던 사무라이와 낭인들이 마지막으로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전후 강화 조정은 그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못했고, 이들은 뭐라도 한탕 해 보기 위해 자연스럽게 해남도에 내려앉아 그대로 범죄조직이 되어버렸다.
해남도는 광동과 함께 아편 거래의 성지와 다름없는 곳.
아편으로 얻는 수입이 워낙 막대하다 보니 돈에 취해 초동대응이 늦어진 강화는 이제 이 거대해진 범죄조직들을 막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본래 왜에는 바쿠도와 데키야라는 범죄조직들이 있었는데, 지금 이 어원을 알 수 없는 ‘야쿠자’라는 조직은 그들의 세력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도리어 이제는 과거의 전통적 범죄조직을 흡수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조정의 일부 부패한 관리들과도 선이 닿은 흔적이 있었다.
고려가 내치 똑바로 하라는 말을 꺼낸 이유도 아마 강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강화가 해남도의 마약 거래를 금지하고, 있는 물량도 전부 다 털어내지 않는 이상엔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을 어찌 잊으리오.
* * *
가장 먼저 명에 도착한 나라는 동이의 4개국.
그러나 나머지 유럽 세력도 지금쯤이면 바다를 건너 상해로 향하고 있을 상황이 분명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서황비는 힘을 크게 잃었다.
그녀를 지지하던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말하는 자강운동의 결과가 이런 것이었소?”
“외세를 끌어들여 중화를 더럽히다니!”
“탐욕적인 자들이 지금 우리에게 하는 짓을 보시오! 아편을 팔아 중화를 병들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저 더러운 군홧발로 대명천하에 당당히 돌아다니게 되었소. 이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소?”
“중화는 중화일 때 가장 아름다운 법. 항구를 닫고 다시금 척화를 내세워야 아편을 끊고 올바른 정치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동황비는 이틈을 타 거세게 몰아쳐 마침내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것에 성공했다.
심지어 그녀는 황제가 아주 잠깐 정신을 차린 틈을 타, 마침내 그녀의 아들인 주문용을 태자로 올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주동휘가 깨어난 광경을 제대로 본 증인은 하나도 없었던 터라, 서황비를 지지하는 세력은 이렇게 건저문제가 끝났다는 상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황비가 이끄는 파벌은 명을 극도의 갈등상태로 빠져들게 했다.
뜻있는 자들이 제각기 탄식했다.
“하나 되어 반도들을 물리쳐도 모자랄 판에, 이제는 둘로 나뉘어 싸운단 말인가?”
태평천국군은 전부 다 외세들이 토벌하게 생겼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공로로 이전보다도 더욱 극심한 것들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동이의 병사들은 차라리 지나인과 비슷하기라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 불란서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서역인들이 영파로 진입하자, 명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명 조정도 이를 인지했다.
그들이 믿는 최후의 희망은 오로지 조선과의 약조 이후 내려올 수 있는 명의 정예군뿐이었다.
“믿을 건 오직 하북군이다! 하북군이 이들을 먼저 토벌해야 우리의 국체를 보존할 수 있다!”
하북군을 지휘하는 일흔 살의 장수, 서기효는 이러한 명인들의 기대에 훌륭히 보답했다.
멈춘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지, 막장스러운 주동휘의 인선도 맞아들어갈 때가 있는 법.
이 노장은 합비 공방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북왕 오흠광을 잡아 도성으로 압송하기까지 했다.
이 전과는 명인들을 환호케 했다.
분명히 찬란한 전과라 심지어는 12개국 모두 놀랐을 정도였다.
“서 총병께서 회녕을 탈환하셨답니다!”
“오오, 하늘이 명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열강국의 군대들이 지금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투 병력을 보냈는데, 명은 이들에게 그저 하북군에 대한 군수지원이나 하라고 했으니 지금 이 상황은 전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도대체 누가 그러했는지는 그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열강의 한 무리가 수작질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장강의 수운을 타고 하북군에게 도달해야 했을 군량과 여러 보급품을 실은 배가 갑자기 폭발하며 장강의 강바닥으로 사라졌다.
이에 서기효는 자국 땅에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와중에도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말이 현지조달이지, 민간 약탈이다.
관군의 사기도, 지역의 민심도 모두 박살이 났으니 제아무리 명장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유효한 작전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끔찍한 사태를 보고받은 명 조정은 일단 부랴부랴 다시금 군수품을 모으고 그나마 제일 믿을 만한 옥저군을 콕 찍어 호위를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 틈을 타 남왕 곽인귀가 재정비된 태평천국군을 이끌고 무창에서 반격하니 서기효는 많은 군세를 잃고 다시금 초라하게 하북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상당히 황당한 사건이라, 이는 12개국군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도 의견이 나뉠 정도였다.
“이 뭔 짓이오?”
동아시아 4개국 총사령관인 이윤진이 어이가 없어 고함쳤다.
“누군지 몰라도,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소?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의 이권을 챙겨준 것인데.”
반면 네덜란드와 알비온을 제외한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장교들은 누가 봐도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이들은 이권으로 뭉친 자들이었다.
“명이 저들을 스스로 토벌한다면 그만이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것입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유럽인들로서는 먼저 와서 이미 전공을 세운 옥저나, 밀약으로 맺어진 다른 나라들의 지금 이런 행동은 그저 가증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어허,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게요. 우리 모두 문명인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