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94화 (394/653)

태평천국(4)

마안산 전투.

정황기 선봉대와 태평천국군이 부딪힌 이 전투는 그 규모가 대단히 많이 차이 나는 전쟁 중 하나였다.

경사를 노리고 남쪽에서 오는 적병들은 거의 오만에 육박하는 데 반해, 정황기는 불과 일천오백이었다.

심지어 정황기 전체가 온 것도 아니고 기장을 포함한 선봉대만 왔으니 그 숫자는 심히 미약했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옥저가 나머지 정황기들은 물론이고 양황이나 정람 같은 다른 기들도 추가로 파병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마안산에서만큼은 그들은 혼자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들의 무훈은 이들이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었다.

― 두 발로 걷는 놈들은 전부 죽여라!

저명한 고려 군사전문가는, 총기의 시대 이후 기병은 이전과 같이 주요한 전투 병력이 아닌 그저 기동성을 올려 보병이 할 수 없는 다른 잡다한 일들을 하는 병력에 불과해졌다고 단언했다.

대부분은 그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열강급의 군대가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은 뒤, 적의 기병돌격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아야 해당되는 말이었다.

공교롭게도 내로라하는 열강들 사이에서는 이제 후장식 소총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고, 도리어 전열보병들은 한물간 전술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명도 나름대로 그 흐름은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완전 총기의 전쟁에 도태된 것은 아니었다.

합종국의 이윤신과 연횡국의 웅정필이 맞부딪힌 조명전쟁에만 하더라도, 명나라는 고려의 훈련지원을 받은 조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서 겉으로는 엄청난 위용을 뽐내는 총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도 열강의 전술을 도입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들의 수준에서는 전열보병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화기의 기술발전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은 산개전술은, 사실은 그저 흩어진 오합지졸과 같았다.

향병이라 하나 엄연히 정규군인 명군이 태평천국군에게 패배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은 태평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애초에 전술이랄 것도 별로 없이 그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믿고 행동했다.

북왕과 남왕이 이끄는 태평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병들이라면 모를까, 각지에서 그저 관수경에 호응해 무기를 들고 일어난 잡졸들은 더더욱 그랬다.

이들 중에선 심지어 제대로 된 기병을 본 적도 없던 사람들도 있었다.

인마가 돌진해 온다고 하더라도 화기는 장난이 아니었고, 수석식 소총은 강철로 된 흉갑이라도 뚫어버릴 수 있었다.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며 정확한 부위에 제대로 쏜다고 가정했을 땐.

그러나 그것이 제일 어려웠다.

물론 북왕과 남왕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일익을 담당하고 있던 태평천국의 지휘관도 이것을 알긴 알았는지 아무런 전열보병식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을 억지로 뭉쳐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총을 들도록 시켰다.

그러나 번쩍이는 흉갑들과 잘 벼린 기병도가 자신을 노리고 물결치며 다가오는 광경을 바라보면, 훈련받지 않은 사람 대부분은 혼비백산하며 도망가기 마련이었다.

옆 전우들의 숫자가 수십 배라지만, 자신이 죽어 나가면 결국 끝이 아닌가.

사람도 동물의 세계에선 최고의 포식자.

눈은 단안시가 아닌 양안시였다.

때문에 전우가 있다 하나, 자신의 옆을 볼 수가 없다.

그저 적병을 바라볼 뿐.

그렇게 된다면, 이 명의 농부들은 자신들이 대체 왜 포식자로 여겨지는지 의문을 품으며, 자신들에게 돌진해오는 진정한 포식자들에게 공포가 옮아 두 손의 병기를 내려놓고 도망가는 것이다.

전우애와 규율을 다지는 것은 군사 전통과 풍부한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밭과 논을 갈던 농부들이었다.

게다가 옥저가 파병을 준비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명장을 보냈다.

이윤진은 자신의 욱하는 성정을 알았기에 옥저의 인선이 그릇되었다 생각했지만, 팔기 중 전투력을 최우선적으로 본 옥저 군부는 양황기나 정람기 같은 곳보다도 이윤진의 정황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기대를 품고 이곳에 온 옥저 명장 이윤진도 그의 능력을 출중하게 발휘했다.

그는 총기를 준비하는 저들의 정면에 대놓고 돌진하진 않았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 정황기는 우월한 기동력과 지휘체계로 철저히 자신들이 원하는 전장으로 적병들을 유도했다.

풍부한 화약 보급 없이 그저 총기 한 자루 달랑 주거나 그것도 극히 부족하여 죽창으로 무장한 많은 수의 양 떼는, 한 줌의 늑대 떼들에게 유린되었다.

심지어 태평천국군은 정황기의 돌격에 선두의 사기가 무너지면서 뒷열과 앞열이 뒤섞여 아군에게 밟혀 죽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하며 자멸했다.

정말 죽을 각오를 하며 싸우던 정황기들이 도리어 놀라워했다.

“겨우 이따위 비적 떼들에게 명군이 패했단 말이냐?”

워낙 적병들이 많다 보니, 정황기도 성하진 않았다.

이백이 넘는 수가 죽거나 심하게 다쳤고, 살아남은 자들도 입가엔 단내가 피어올랐고 제각기 한두 군데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 한 줌도 되지 않는 ‘제대로 된 군사 강국’의 군대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저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적들이 물러납니다!”

사기가 박살 난 태평천국군은 무려 동릉까지 도망갔으며, 그 와중에도 계속 정황기가 쫓아오지는 않는지 그림자와 혈투를 벌였다 한다.

정황기는 그 틈을 타 동료의 시신과 부상자들을 챙기고 텅 빈 경사로 진입했다.

일차적으로 경사를 방어한다는 그들의 임무는 달성된 지 오래였다.

놀랍게도 민간에 대한 약탈은 전혀 없었다.

이들 모두가 현무호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정황기가 저들을 막는 틈을 타 경사의 백성들을 버리고 귀중품들만 대충 챙겨 부리나케 영파로 도망가고 있던 명 조정은 소주(蘇州)에서 도리어 정황기가 태평천국군을 패퇴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옥저국의 병사들이 그… 그 정도란 말입니까?”

영파로 가자는 주장을 관철시킨 서황비가 제일 크게 놀라워했다.

엄밀히 말해 정황기의 승리가 확실한 희망을 불러일으킬 순 없었다.

반적들은 수십만이다.

정황기가 물러나게 만든 적병들은 그 중의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전멸이 아니라 사기가 붕괴되어 도망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명은 지금 이 순간 이 정도의 승리도 너무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실제적인 전과보다는 그저 조그마한 희망일지라도.

“아국군은 대패하는데, 동이의 군대들은 그렇지 않군요.”

또한 이는 다른 것을 의미했다.

단지 명의 향병들로는 이 난을 진압할 수 없다고.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을까.

서황비는 땅을 쳤다.

황비가 되기 전까지 영파에서 살아왔던 그녀는 다른 나라들이 얼마나 약진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명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자강운동 없이는 명에 희망은 없어요.”

“실로 자명하신 말씀이십니다, 전하.”

간신들과 소인배들이 득세하는 조정에서도, 진정으로 명을 위한다는 신하들은 남아있었다.

이들은 이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도 자강운동을 꾀하고 있었다.

중체동용(中體東用)이라는 구호 아래, 중원의 옛 전통을 본질로 동이의 학문을 배우자는 이야기였다.

고려글은 중원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제아무리 세월이 바뀌면서 라틴어나 그리스어 기반의 문화권에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고려의 언어와 학문이 한자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완전히 맨땅에서 머리를 박고 배워야 하는 지경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현 상황에서는 자강운동 자체는 주나라 배신자들이 도움을 주었다.

지나인이지만 지금까지도 명 이외의 나라에서 꽤 존경받는 왕수인 이래로, 주나라 학자들은 신천명(고려)을 주장하고 있었다.

천인공노할 놈들이지만, 이들이 한문으로 번역해온 고려의 각종 학문에 대한 서책들은 자강파에게 큰 힘이 되었다.

“태자. 태자도 이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명은 우물에 웅크려 있어선 아니 되어요.”

“예, 어머니.”

건저문제는 미궁 속이었고 주문호는 아직 태자도 아니었지만 서황비는 아들을 그리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열네 살의 황자는 어머니의 말에 냉큼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정황기로는 적의 본대를 막진 못하겠죠?”

“예. 북왕과 남왕은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닙니다. 역도들이 이미 회녕(懷寧)을 점령하였으니 합비(合肥)까지는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합비마저 역도들에게 떨어진다면 경사의 북부는 크게 위태로워집니다.”

서황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옥저가 지원군을 보내준다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믿을 것은 하북군밖에 없군요.”

“…하북군이 역도 토벌로 그 자리를 비운다면, 조선이 봉명관을 열고 무주공산이 된 화북으로 짓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자가 그런 무도한 제안을 한 것이죠.”

조선 대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서황비를 알현하고 간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그들은 만약 명이 조선의 관대한 제의, 즉 태평천국의 난에 대해 옥저처럼 조선의 파병도 받아들인다면 조선은 화북에서의 어떠한 도발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겠다고 전했다.

무도하고 치욕스러운 말.

그러나 또한 혹한 말이기도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분명히 그들은 토벌 이후 무언가 다른 것들을 제시할 터.

그러나 당장 명으로서는 명의 군세 중 정병인 하북군도 내려보낼 수 있고 조선의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백제와 강화도….”

“강화는 절대로 안 돼요.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은 다시금 명의 땅에 발을 디밀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백제는 저년을 후원하고 있으니 받아들일 수 없어요.”

산동에 조차지를 가진 백제는 당연히 산동 출신의 동황비를 후원하고 있었다.

동황비의 옆에 있는 자들이 자강파와는 달리 척화파인 것을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일단 조선의 제의를 승낙한다고 전해주세요. 대신 그들은 정직하게 행동해야 할 겁니다. 겨우 주도권을 잡은 이 사람을 배신하는 건 동황비를 도와주는 꼴이니까.”

“예, 전하.”

* * *

하지만 단지 옥저만 아니라 또 다른 열강인 조선의 개입은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리며 명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나라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조선과 함께 지나라는 꿀단지를 나누자는 밀약을 체결하고 있었던 백제와 강화가 서황비와 그 신하들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당연했다.

“태평천국인들이 위해를 가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명 조정은 옥저와 조선에게만 손을 벌려 문제를 해결한다니, 이 어찌 몰상식한 행동입니까?”

그리고 당연하게 이 꿀단지에 숟가락을 하나씩 꽂은 자들은 예맥한계 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우리도 우리 조차지와 개항지의 안전, 우리 주민들과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할 예정이오!”

오문(마카오)과 바로 옆의 광주에 둥지를 튼 포르투갈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홍콩을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는 심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파병을 준비했다.

고려에 의해 다른 지역의 식민지가 압박받는 포르투갈과 프랑스는 사실 유의미하게 이득을 창출할 수 있는 곳이 중원밖에 없었다.

가장 열성적으로 아편을 판매하는 자들도 이자들이었다.

만약 이곳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면, 프랑스는 아시냐에 파묻혀 죽을지도 몰랐다.

관수경이 처음 사교의 뜻을 세운 곳도 광동이다.

그러니, 광동 지역은 비록 처음엔 관수경을 쫓아내긴 했지만 지금은 도리어 빠르게 태평천국의 세력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형양(衡陽)과 침주(郴州)도 태평천국기가 휘날리고 있으니, 광동도 절대 안전하지 못했다.

이들도 명의 의사는 상관하지 않았다.

마침내 삼국의 파병이 결정 나자 온 유럽이 들썩였다.

유럽의 공포, 러시아도 한동안 잠잠하니, 모두가 어떻게든 명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기 위해 안달 난 꼬마애들 같았다.

“우리도 자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파병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저 태평천국의 반도들은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어 불태워 죽인다 합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요.”

초창기, 관수경이 이끄는 광동의 상제교도들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에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반외세적 성격이 훨씬 더 발전하고, 관수경 스스로도 명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배타적 교리를 추가해 나가니 지금 이들은 종교가 없는 이들은 관대하게 대할지 몰라도, 도리어 이교도들은 훨씬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그런 건 모르겠고, 돈이나 좀 법시다. 현무호에 황금이 떠다닌다던데.”

체면을 구기고 해남도에서 쫓겨난 뒤 이를 갈고 있던 이탈리아와 파푸아의 물산을 명에 팔아넘기던 네덜란드.

심지어 본능이 명의 땅을 밟으라고 외치는지 잉글랜드의 열성적인 주도로 알비온 연합까지 명의 땅에 군대를 보내기로 했다.

옥저, 조선, 백제, 강화.

오스트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네덜란드, 알비온.

연합의 구성원들을 모두 더한다면 12개국이 태평천국 진압을 명목으로 명의 내부 상황에 본격적으로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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