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2)
― 다그닥 다그닥.
정황기는 장강을 타고 올라가 남경, 즉 경사에 도착한 뒤 경사의 남쪽 방면에 군영을 치고 일부 선별된 인원들만 자금성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경사의 대로를 거니니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비록 지금은 오래전의 선배들로 여겨지긴 했지만, 초창기 갓 창설된 팔기가 조명전쟁에서 조선 측을 위해 싸우고는 봉명관을 지나 연경을 약탈하고 불태운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 노획한 물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도 그때의 일이 전설처럼 회자되곤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로부터 거의 백오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반대로 이들을 위해 싸운다니.
나라동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사는 솔빈보다 훨씬 컸다.
단 한 번도 명대에 수도로서 기능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북경이라는 명칭을 받은 연경이 조명전쟁 이후 완전히 정치적, 경제적 기능을 잃어버리면서, 명은 경사로의 중앙집권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어찌 인구수만 보면 정말로 고려의 창양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너무나 광대한 국토를 다스리기 위해선 창양과 청해, 창강대평원에 사람이 몰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곳들의 성장세는 국가의 성장력이 커지는 와중에도 어느 정도 절제를 하고 있었다.
반면 이곳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이미 도시의 인구만으로 삼백만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많은 인구수를 가진 도시가 항상 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청해와 같은 철저한 계획으로 세워진 도시들도 과잉인구에 몸살을 겪기 마련, 그렇지 아니한 도시들은 인세의 마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나, 경사의 하늘은 과장을 조금 보태어 아편과 대마를 피우는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라동훈은 추운 솔빈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다른 동료 장교 하나도 입을 열었다.
“수도에도 망조가 들었군. 저길 봐, 다 썩은 동태 눈깔들이야.”
그의 어조는 좀 과격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경사는 유난히 빈민들의 비율도 높았다.
하수도 체계도 없어서 역겨울 정도로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의복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사는 명인들은 정황기 장교들에게 길 안내를 하기 위해 앞서가는 명 관리들의 호통을 받고 무기력하게 물러났다.
그보다는 사정이 나은 사람들도 구경을 나와 있었지만, 이들의 얼굴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쉿, 조용히 하라고. 저들이 들을라.”
이미 려어(고려말)는 세상에 너무 널리 퍼져있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찾기 어렵지도 않았다.
유럽인들도 그러했고, 명인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도리어 고려와 교류가 적은 동유럽계 나라들보다, 고려말을 표준어로 제정한 예맥한계 국가들과 붙어있는 명인들이 그 측면에선 훨씬 유리할 것이다.
절로 입조심을 시킬 만큼 자금성으로 향하는 내내 정황기 장교들에게 쏘아지는 시선들은 따가웠다.
적대감이 피부에 와 닿았다.
사전에 단단히 주의를 들은 말이 있기에 정황기들은 별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몇몇 인원들은 미리 탄과 화약을 재어놓은 권총을 옷 밖에서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이 정도는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반면 주명옥저대사관에서 자국군의 편의를 위해 파견된 외조 소속 외교관 하나가 부대장인 이윤진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
속 편한 소리인지, 아니면 익숙해져서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지, 외교관은 계속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옥저가 아니라 다른 나라 군대였으면, 돌이라도 날아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조금 아찔하기도 했다.
아무리 정병이라 하나, 이십 명 정도의 인원으로 폭도로 변질된 군중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분노한 옥저의 화를 감당해야 하는 명 조정의 뒤처리는 끔찍하겠지만, 그래도 정황기들은 자신의 목숨 아까운 것은 잘 알았다.
이윤진은 자신의 뒤에 있던 정위 한 명을 불러 다른 장교들로 하여금 다시 긴장을 좀 풀라는 명령을 내리곤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경사에서는 우리에 대한 적대감은 그리 심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옥저가 명에게 불러일으킨 악감정은 한 세기는 지난 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들이 자행하고 있는 일들이… 좀 대단하지요.”
“다시 보니 선녀라 이 말이군요.”
윤진의 말을 들은 관리의 얼굴에서 문득 쓴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에 대한 분노도 분노겠지만, 지금 현 상황 자체에 개탄스러워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조정의 무능함에 대해서 말입니까?”
“정상적인 나라라면 자국 내란과 농민봉기를 진압하는 데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을 테니까요.”
당연한 소리였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저들은 정말 봉기를 진압할 군대가 이리도 모자랍니까? 무창을 공격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을 우리에게 맡긴다니요.”
윤진의 물음에 관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앞에서 길 안내차 먼저 걷고 있는 명나라 관리들의 귀를 피해서 속삭였다.
“명 황제는 의심병이 많습니다. 봉기를 진압한답시고 큰 규모의 군대를 키워 군벌의 위협을 가시화하느니, 차라리 우리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 더 낫겠다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옥저 외조 관리의 설명은 가관이었다.
명의 정치는 대혼란의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미 지금 태평천국의 난 이전에도 각지에서 군벌이 항거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조명전쟁 이후, 사실 언제고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명의 수명을 억지로 늘리던 최후의 충신, 원숭환 이후 명에는 이렇다 할 유능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간적들은 많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오삼계가 있었다.
당대의 뛰어난 무장으로 평가받던 그는 황제의 기대를 안고 이자성과 싸우기 위해 서안으로 진격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리저리 눈치를 보더니 낙양에 둥지를 틀고 군벌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암살당해 죽었지만 그의 행적은 큰 파장을 낳았다.
이후에 그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려는 간웅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세상천지에 조조만 있고 제갈량은 없다는 명 황제의 비탄 섞인 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야심을 품은 자들을 제한다면 오직 속 좁은 소인배들만 남았다.
이 소인배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국의 이익 따위는 언제고 버릴 게 분명한 자들이란 것이다.
이들은 명 내부의 개혁 운동에서 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좋게 말해서 적극적 외교였지, 이는 사실상 매국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처럼.
명 조정은 친려(고려)파니 친저(옥저)파니 친제(백제)파니, 혹은 심지어 친러(러시아)파니 하며 그 여론이 복잡하고도 기괴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시대에 따라 그 세력이 휙휙 바뀌었다.
한때는 고려와 가장 먼 관계에 있었던 친화파가 득세했던 적도 있었다.
친화파는 나름대로 고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해양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강화의 힘을 빌려 당시 해남도를 점유하고 있던 이탈리아로부터 영토를 탈환하려고 시도했다.
절반은 확실한 성공이었다.
이탈리아의 동아시아함대는 그들의 전력이 집중된 지중해와 인도가 아니더라도 꽤나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낙후된 명과 명백한 후발주자인 강화 연합함대가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이탈리아를 쫓아낸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틀림없었다.
명에 발을 담그고 있던 다른 유럽의 국가들도 지레 겁을 먹어 이후에 서로 여러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는 원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엔 섬나라인들을 믿기 힘들다는 고려의 속담이 그대로 적중했다.
고려 앞에서 사실상 발라당 배를 까뒤집은 이후, 강화는 바로 옆에 위치한 예맥계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팽창욕을 해소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고려는 덕천씨가 들어선 이후 국가 이름을 바꾸고 과거의 일들을 청산하려는 강화의 노력을 가상히 여겼으나 이들에게까지 동남아시아의 이권을 보장하진 않았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아양을 더 잘 떠는 백제 같은 나라들이 있는데.
심지어 아이누의 독립도 확고해진 상황.
그러니 열강이라면 하나씩 패용하는 장신구 같은 식민지를 얻지 못해서 안달 난 강화인들은 명과 합작하여 이탈리아를 해남도에서 몰아낸 이후, 명을 배반하고 낼름 그 땅을 삼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섬나라인들을 믿은 죄로 친화파는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친화파의 몰락 이후, 주도권을 잡은 이들은 우리입니다.”
외조 관리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우리는 상국의 외교기조를 많이 배웠지요.”
어찌 되었든 외교적 승리라 봐도 무방할 터.
윤진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뭐, 어찌 되었든 우리에겐 좋은 일이군요. 그나저나, 명 왕의 앞에서는 폐하라 해야 합니까? 전하라 해야 합니까?”
“군부의 전통은 모르겠으나, 외조의 공식적인 지침은 명의 황제국 지위를 인정하는 상국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굳이 이들의 자존심을 해칠 이유는 없지요.”
명은 조명전쟁 이후 예맥한계 국가들의 기준에선 완전히 천명을 상실했다.
그렇기에 삼국과 강화까지 포함해 이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명의 군주를 황제가 아닌 왕으로 지칭하고 있었다.
그런 것에 가장 열정적인 나라는 조선이었다.
유학적인 풍습이 남아있었는지, 혹은 단순히 명에 대한 적대감인지.
이는 백제와 강화도 비슷했다.
따지고 보면 원나라의 강제적인 관제 격하가 명대에 들어서 반발심으로 되돌아왔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들 국가들은 지금도 고려와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설 수 없으니 왕의 존칭을 전하라 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고 등급의 행정조직을 성이 아닌 부로, 실무조직을 부가 아닌 조로 하여 상국의 체계보다는 한 단계 아래를 자청하고 있지만.
그런 만큼 아직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명이 외왕내제도 아니라 외제내제를 하고 있는 것을 꼴사나워할 것이다.
반면 정작 고려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세계 전체와 외교하는 고려로서는 러시아도 제국이고, 오스만도 제국이고, 오스트리아도 제국이고, 심지어 페르시아와 무굴도 제국인데 명 하나 더한다고 해서 딱히 뭐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천명’은 그런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고려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통적 천조질서가 붕괴되었거나 혹은 아예 고려로 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옥저도 고려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명의 호칭이 뭐 대수인가.
국가의 국력은 왕이니, 황제니, 대군주니 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광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생산량에서 나오는 것이다.
냉철한 현실적 외교에선 칭호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럼 저도 그에 따르지요.”
이윤진도 굳이 명의 군주 앞에서 전하니 뭐니 들먹여 친저파들을 난처하게 만들진 않기로 마음먹었다.
* * *
하지만 자금성 안쪽의 분위기는 황성 밖의 분위기와 완전히 달랐다.
다 죽어가는 수도의 명인들과는 다르게 명의 고관들과 황족들은 비단옷을 입고 궁성을 거닐며 하하 호호 웃음 짓고 있었다.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수많은 석유등이 벌써부터 불빛을 피워대고 있었다.
“뭐야 이건…….”
이 사치스러움은 옥저군들을 맞이하는 잔치를 거하게 준비한 명 황제 주동휘를 만날 때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인사 올리옵니다. 황제 폐하.”
“하하하, 짐의 요청에 달려오신 옥저의 영웅들이 아닌가! 어서들 오시오! 차린 건 적지만 부디 마음 놓고 즐겨주시구려.”
그가 준비한 연회에는 수많은 돼지와 소, 닭을 이용한 요리가 즐비했고, 달콤한 술이 가득했다.
수많은 향신료가 아낌없이 쓰였다.
이름난 차와 커피, 심지어 파라콜라도 가득했다.
연회의 시중을 드는 미녀들은 도대체 원래의 얼굴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화장품을 화려하게 발랐으며, 향기로운 향수 또한 과할 정도로 뿌리고 있었다.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유명한 수려와 피어나다의 화장품이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동휘가 그들에게 경치 좋은 곳에서 후식을 대접한답시고 경사의 명물, 현무호의 낙락정으로 그들을 데려갔을 때 옥저인들의 충격은 더욱 증폭되었다.
‘여긴…….’
낙락정 자체만으로도 그랬다.
‘이곳은 옛 황제 주우철이 암군일 적 음행을 일삼던 곳이 아니던가?’
이윤진이 그렇게 바로 떠올렸을 만큼, 이곳은 실로 유명했다.
주우철이 홍명제로 연호를 바꾸고 개과천선한 뒤 낙락정은 반쯤 파괴되었다지.
이 암군이 이곳을 다시금 재건한 모양이다.
그러나 낙락정의 존재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이 있었다.
“어떻소? 보기 괜찮지 않소이까?”
― 미친놈인가.
뒤에서 옥저 장교가 얼이 빠져 중얼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말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나중에 크게 경을 치리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윤진은 그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저게 다 무엇입니까?”
뻔히 알면서도 질문이라는 것은 나오기 마련.
“내, 고려의 함대를 흠모하여 직접 현무호에 이렇게 작은 모형들을 만들어 띄워 해군의 묘리를 배우고 있다오.”
주동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말했고, 이에 옆의 신하들이 호응했다.
“하하, 폐하께서 해군의 일을 배우시려는 성심이 실로 아랫것들에게 모범이 되옵니다.”
모형 하나하나의 크기는 거의 나룻배 수준으로 작았지만 그 정교함은 대단했다.
증기기관은 없어 보이지만 안에 사람이 타서 뭘 하는지 스스로 추진하기까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그게 무슨 의미던가.
써먹지도 못할 모형 배에 불과할진대.
대체 해군의 일을 배우는데 이런 모형이 왜 필요한가?
바다는 호수와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를뿐더러, 크기와 작동구조도 모형과 진짜 배는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설령 군사적 시연을 위해 모형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저 배 모양으로 대충 만들면 될 것이 분명한데 저 황제의 장난감들은 차원이 다른 정밀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밀하게 만들면 무엇 하는가?
전함의 내부 구조는 따라 하지도 못할 것이면서.
하지만 그것도 결국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명 황제의 기행이라고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대양함대를 꿈꾸고 있다는 선전물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최소한 철이나 염색한 나무로 만들어졌다면.
“아, 이것들은 도금이 아니오. 강도를 위해 좀 첨가하긴 했지만 엄연히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지.”
“…….”
“물론 금이 너무 무거워 쉽게 가라앉는 것을 막기 위해 고생을 좀 했소. 비… 비중이라는 게 높다고 했던가? 그래서 호수 밑바닥에 침몰한 배들이 좀 있지요. 하지만 그런 노력 덕에 지금의 이런 광경도 있는 법이지. 고려 황제도 짐처럼 진정한 황금으로 된 함대를 가지고 있진 못할 게요. 하하하!”
윤진은 그야말로 현무호를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황금함대를 보고 절로 아찔해져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