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시대, 살기 나쁜 시대(2)
옥저의 모피 무역은 많은 것을 낳았다.
소빙기가 도래하자 옥저 일대도 과거 약간 따뜻했던 시절보다 확연히 추워졌지만, 옥저의 조정은 이런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의 농무부와 협력해 내한성 있는 밀과 호밀, 보리, 감자 등의 작물들을 개량하고 길러 큰 효과를 낳았다.
조선과 나누어 가진 요하평야 중, 요북으로 분류되는 지역에 성공적으로 농사를 지어 마침내 주요 작물의 자급이 가능하게 만든 것.
그래도 그 전까지 다소 비정상적이었던 국가를 맨땅에서부터 지탱했던 것은 모피 산업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옥저―러시아의 모피 경쟁에서 대규모로 사냥당한 동물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가장 최고의 위치에 놓였던 담비는 물론이고 여우와 족제비, 늑대와 비버, 토끼와 해달, 물개와 스라소니 등 수많은 동물의 가죽들이 세계로 팔렸다.
물론 가장 큰 수요를 자랑하는 것은 고려였다.
고려의 모피 수요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커졌다.
면과 견 등의 다른 섬유 시장도 커졌지만 모피는 모피만의 특별한 무언가, 즉 사치품적인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후대에 추가된 조정의 규제도 한몫을 거들었다.
인종(仁宗) 해찬은 동물보호법을 제정한 이후 희귀동물 개체 수 보존을 위해 무려 기후에 따라 다섯 군데의 다른 위도에 황립 동물원을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자국 내에서의 희귀동물에 대한 밀렵을 이전보다 까다롭게 규제하며 개체 수 보존에 나섰다.
물론 비버(북려비버)나 남려의 물쥐 같은 설치류들은 특유의 번식력과 유해조수로 여겨질 수 있는 특성상 규제가 그리 엄격하지는 않아 꾸준히 공급이 많았지만, 공급이 많은 모피는 희소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때 옥저산 희귀 모피들은 고려의 이런 시장을 잘 공략했으며 지금까지도 러시아에 뒤이어 두 번째로 많은 모피 수출국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한 산업의 부흥에 힘입어 융성한 곳이 솔빈의 모피 거리였다.
옥저의 청년 장교, 나라동훈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피 거리를 거닐었다.
분명히 삼월의 봄인데도 엊그제엔 진눈깨비가 내려 한창 거리가 더러웠다.
게다가 이곳은 시끌벅적 흥정하는 사람들의 악다구니와 여러 가지 소음으로 시끄러우니 아마 방문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간 얼굴을 찌푸릴 것이 분명했다.
모피를 다루는 상점들에서 풍겨오는 그 특유의 괴상망측한 냄새도 그렇고.
하지만 동훈은 전혀 얼굴을 찌푸리지도, 혹은 길을 잃지도 않은 채 자신의 목적지를 찾았다.
[나라종합피혁]
― 딸랑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수많은 모피가 걸려있는 매장의 중앙에서 한 상인과 흥정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여보세요, 총탄 흔적도 뭐도 없는 최고급 흰담비 가죽이에요. 이게 겨우 오십 원이라구요? 적어도 팔십 원은 주셔야지요.”
나라 성씨(Nara hala)는 태조 이자윤이 처음으로 국가를 세우고 주변의 여진 부락을 통합할 적부터 옥저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였지만, 원체 그 수가 많다 보니 잘사는 집안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집안도 있었다.
잘난 집은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산다지만 동훈의 집안은 분명히 처음에는 하루 먹고 살기 힘든 지경인 상당히 가난한 집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추운 대지로 한 자루 총을 메고 사냥을 나가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없을 동안 솔빈에서 피혁점을 운영하셨던 어머니 덕에, 동훈과 동훈의 형제자매들은 제각기 성년까지 번듯하게 자랄 수 있었다.
큰누나와 막내 여동생은 좋은 곳에 시집을 잘 갔고, 그의 남동생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냥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옥저의 군부에 투신했고.
이쯤 되면 쉬셔도 좋으련만, 어머니께서는 흰머리가 많아지셔도 줄곧 왕성하게 일을 하셨다.
지금도.
“팔십 원이라니, 너무 가격이 비싸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우리가 해 왔던 거래의 가격들을 생각해보면….”
입구의 벽에 기대 어머니와 상인의 흥정을 듣던 동훈은 이 상인이 상국에서 온 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말하는 억양이 딱 남려, 혹은 미주의 억양이 틀림없다.
다소 발음이 거친 옥저의 말은 우아한 남려말이나 나긋나긋한 백제의 말, 어딘가 알게 모르게 간사한 듯한 조선의 말과는 상당히 구분 짓기 쉬웠다.
고려인들은 그들 스스로 연방의 다른 주끼리 억양을 알아차릴 수 있다지만, 동훈은 옥저를 떠나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그 정도까지 구분하진 못했다.
“최고급 맞춤복 의상점에서도 이 정도의 모피면 구하지 못해 안달일 품질일 거예요. 잘 아시잖아요.”
“아니, 보십시오. 제가 이 담비가 덩치가 조금만 더 컸어도 육십 원, 아니 칠십 원은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저는 오십 원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상으로 부르시면 손해예요, 손해!”
하지만 어머니는 상인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러시아와 북방6국 간의 전투가 일어난 것을 들으셨죠? 저 루스 놈들의 만행에 사람들이 많이 상했다잖아요. 사냥꾼들이 많이 다쳤는데 공급이 많겠어요? 지금 이 가격도 도리어 싼 편이에요.”
옥저의 북방엔 야쿠트와 유카기르, 차브추벤, 니밀란, 축치, 이텔멘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사실 이들을 보고 제대로 된 나라라고 여기기엔 조금 힘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 나라를 세운 옥저보다도 훨씬 절망적인 경우였다.
이 북방6국은 높은 위도와 그에 따른 극한의 기후에 살아가는 토착 원주민들의 나라.
하지만 당연히 그 사람의 수가 많지 않았다.
어쩌면 모두 다 긁어모아 봐야 십만은커녕 몇만도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살아가는 땅덩어리에 비해 터무니없는 규모였다.
그러나 국가란 것은 가끔 강대국들의 필요성에 따라 생성되기도 했다.
표빙해를 사이에 두고 서한주와 유라시아 대륙이 만나는 지역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던 고려는 이 계륵 같은 땅덩어리를 억지로 삼키지도, 혹은 러시아가 동진하는 것을 마냥 방관하지도 못했다.
가뜩이나 서한주도 사람이 없어 원주민들을 동화시키고 있는데 엄연히 다른 대륙의 곳에 팔 뻗기도 힘들었다.
표빙해는 말 그대로 유빙이 둥둥 떠다니는 곳.
이곳에 배를 이용해 개척민을 보낸다는 건 확실히 무리였다.
다만 고려는 원주민들을 책동해 그들만의 협의체, 정부를 만들게 했다.
옥저와 러시아가 서로 불만을 제기할 법했다.
하지만 러시아―옥저 간의 국경을 확정지은 야쿠츠크 조약이 큰 문제가 되었다.
야쿠츠크 조약은 총 3차까지 진행되었지만, 거듭해서 조약을 갱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의 지리적 무지 때문에 꽤나 모호하게 책정된 영토의 범위를 완전히 확정하진 못했다.
특히나 서쪽의 외흥안령산맥의 범위는 확정되었는데 동쪽의 백한산맥과 알단 강의 경우가 그러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옥저는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먼저 선을 넘은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엔 국토에 철도도 깔리지 않았던 옥저는 서쪽에 위치한 사냥꾼 무리들에게까지 중앙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일부 질 나쁜 무리는 본업인 사냥을 하기보다는 조금 더 쉽고 빠르게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길로 빠져들곤 했다.
마적 떼로 변질된 사냥꾼들은 몽골인들과 동화되지 못한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동포인 옥저인들과 조선인들에게까지 해를 끼쳤다.
심지어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를 공격하여 민간에 큰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지금이라면 이런 일쯤은 상관없었을 수도.
고려―러시아 관계는 갈수록 날이 서고 있었으니, 이런 사소한 분란쯤은 고려도 별 신경 안 쓰거나, 속으로는 고소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섭정을 보고 있던 황태자 드미트리는 친고려파였기 때문에 옥저는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고려의 눈치를 봐야 했으며 약간의 대의명분에도 손해를 보게 되었다.
옥저가 조약에 적힌 외흥안령을 넘어 북방의 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어진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저와 고려는 러시아의 동진을 원하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죽고 블라디미르가 즉위한 다음엔 더더욱.
야쿠츠크에서 논의된 옥―러 경계, 구체적으로 알단강에 대한 해석이 마야강(그 마야가 아니다)으로 확장된다면 러시아는 어찌어찌하면 야쿠트해에 진입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야쿠트 지방은 부동항이 아니다.
솔빈과 달리 위도가 한참 높은 그곳은 겨울에 꽁꽁 얼어붙는 곳이었으며 대문에 군항으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러시아가 태평양에 항구를 짓는다는 것 자체를 용인하기 어려웠던 고려는 베르호얀스크산맥 너머에 사는 한 줌의 원주민들을 모집해 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방침을 내세웠다.
비현실적인 방침이지만, 교묘한 작업이 있다면 그 방침도 가끔은 가려지기 마련이다.
민족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쓰였다.
옥저, 조선, 백제가 주도하고 고려의 일부 학자들도 참여한 범예맥한주의 학계에서는 북려대륙의 원주민이 어쩌면 아시아에서 표빙 해협을 통해 넘어온 자일 수 있다 주장했다.
고려 원주민의 기원을 어찌어찌 찾아보면 반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설이었다.
당연히 러시아는 반발했다.
―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오!
― 범슬라브주의는 말이 되고?
결국 지금 이 상황은 패권전쟁의 한 갈래라 인식한 블라디미르는 베르호얀스크산맥을 넘어 재동진을 명령했다.
그 재동진의 선봉에는 러시아의 개척가이자 카자크,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용맹하고 개척정신이 뛰어났지만 그 성품이 지극히 좋지 못했다.
사실, 카자크에게 인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몰랐지만.
원주민 남성은 도륙하고, 원주민 여성에겐 강간을 통해 ‘씨를 뿌린다’라는 그의 막장스러운 개척행위는 원주민들에게 어마어마한 반발을 일으켰다.
원래라면 이들의 자그마한 비명 소리는 국제 정세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고려―러시아 패권전쟁의 한 전선이 분명했으니, 자신들의 땅을 무자비한 카자크로부터 지켜낸다는 지극히 당연한 대의명분을 가진 원주민들은 고려의 무장 지원을 등에 업고 러시아인들과 거대한 타이가(북방수림)에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제아무리 고려의 무기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한 줌 원주민들이 러시아 카자크를 이길 순 없었다.
때문에 옥저도 북방6국에 사냥꾼의 탈을 쓴 의용병들을 보냈으니, 그 갈등은 격화되고 있었다.
‘그래. 적어도 불알이 얼어붙을 수 있는 타이가에서 러시아 놈들이랑 드잡이질을 하는 것보단, 명에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나라동훈의 생각은 그곳에서 멈췄다.
이렇게 지체할 때가 아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어머니의 일을 방해하지 않고 일이 끝나실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겠지만, 동훈은 상관에게 소식을 듣고 빠르게 정리하여 내일까지 준비해놓으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날이 늦기 전에 숙영지에 돌아가 부하들의 상황도 점검해야 했다.
“흠, 흠.”
언쟁을 하느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어머니가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어서 오렴.”
“이분께선?”
아까의 신경전이 무색하게, 노모는 함박웃음을 띠었다.
“제 장남이에요. 둘째지요.”
한숨 돌릴 기회를 얻은 고려 상인도 표정을 수습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군직에 종사하시는 분이신가 봅니다.”
군복을 그대로 입고 온 탓에, 주변에서 그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옥저의 동계 군모는 반도 사람이라면 겨울에 남녀 공용으로 쓰고 다니는 남바위(휘양)과 비슷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남바위라 부르기도 했지만, 모양은 여성용 남바위와는 다르게 각지고 통이 높았다.
가운데는 계급장이 부착되어있다는 점도 달랐다.
옥저와 투닥거리는 러시아에서도 귀를 덮는 비슷한 모자가 있었다.
이름이 우샨카라 했던가.
“예. 정황기 부위 나라동훈이라 합니다.”
“오, 정황기라, 대단하십니다.”
동훈은 고려인 상인의 말에 상당히 겸연쩍어했다.
정황기는 자랑스러운 옥저의 흉갑기병대로 옥저 왕의 최고 신임을 받는 팔기 중 하나지만, 그래도 상국 상인에게 칭찬을 듣는 것은 조금 기분이 그랬다.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먼저 말문을 떼셨다.
당신이 바쁘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들이 바쁜 사람이란 것을 고려한 행동이 분명했다.
“무슨 일로 왔니?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더만.”
같은 솔빈에 있다 하나 솔빈이 작은 도시도 아니고 매번 뵐 수는 없었다.
또한 아무리 장교 계급이라고 해도 아직 미혼에 짬도 안 되는 이가 군영 바깥에서 잘 수는 없었기에 그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집에 자주 오지 못했다.
그래도 어머니께선 아들이 어미를 자주 찾지 않는다고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실 것이다.
동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앞으로 꺼내야 할 말도 그녀가 듣기엔 좋지 않을 말이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국가가 부르면 그는 가야 했다.
“오늘 아침에 파병이 결정됐어요. 아마 정황기 선봉대는 내일 당장 출발할 듯해요. 일이 무척이나 시급한 모양이라….”
순간 그토록 강건하던 어머니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근처의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동훈이 부리나케 달려가 어머니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내저어 그를 말린 뒤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언제 돌아온다니?”
“몰라요. 금방 진압하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하지만 아들의 말에도 어머니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무역을 하는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안타까운 점이라면, 어머니께서 다소 국제 정세에 밝으실 수밖에 없어 이렇게 미리 근심하시곤 한다는 점이시다.
“나도 신문은 읽었다. 사태가 심상치는 않다 하더구나.”
어머니가 자신과 가까운 매대에 올려져 있던 종이 뭉치를 끌어당겼다.
개성신보.
거리상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날짜가 조금 지났겠지만, 그래도 개성신보는 동아시아권에서 가장 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신문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근심과 걱정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잘 갔다 오렴. 무탈해야 한다.”
“편지 보낼게요.”
꼭 끌어안는 것으로 작별의 인사말을 대신한 어머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는 듯 나라동훈은 서둘러 피혁점을 빠져나갔다.
그의 어머니는 한동안 우두커니 있다가, 마침내 고려 상인과의 흥정을 마무리 지으려 돌아왔다.
고려 상인은 한참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육십 원으로 하시죠. 여사님의 자제분께서 이곳의 군인이시니 그만큼의 대우를 해 드리는 겁니다.”
“칠십 원.”
고려 상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육십오 원.”
“그래요, 육십오 원.”
거래가 끝나고 고려 상인이 흰담비를 챙기고 일꾼들이 다른 모피들을 옮기는 동안, 피혁점의 여주인은 오늘은 일찍 상점의 문을 닫기로 했다.
오늘 그녀가 잠들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할 듯했다.
북방인들, 옥저인들은 평생 동안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만큼 강인했다.
마음 아픈 일들을 겪어도 사십 도가 넘는 독주를 목으로 털어 넘기는 것으로 끝내곤 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러했고 자식들이 어렸을 적 속을 썩일 때도 그러했고.
아직은 추운 봄날의 저녁.
안동소주건 폴란드 보드카건 심지어 러시아 놈들의 보드카건 그녀는 술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