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5)
“김태인 선임정령이 찾아왔습니다.”
“아, 들라 하라.”
저녁을 든 이후, 잠시 업무를 보고 있던 상민은 자신의 처소로 찾아온 남자를 마주했다.
초췌해진 해군 영관급 장교가 평상시 입는 근무복 대신 정복을 입고 그에게 경례했다.
두바이 분함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부령이자 상승함의 함장이었다.
정식 제독이 부임하기 다소 모호했던 기존의 두바이 작전지역에 대해선, 통상의 보직을 임명하긴 어려웠다.
이 함대도 여기에 오기 전까진 사실 대동양함대의 전대에 불과했다.
고려의 제독은 영관급 계급의 함장과는 달리 장성급 장교가 맡았고, 뭔 일만 있으면 장군을 만들어대어 고려 군부가 별들의 천국이 되는 것을 싫어했던 상민은 굳이 군부에게 제독을 보내라 하는 대신 다만 분함대의 최고 선임 계급에게 작전권을 주었다.
물론 아랍 연방의 일이 해결되고, 이제 조차지까지 얻었으니 조만간 정식으로 함대가 편성되어 제독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령은 자신이 작전권을 도맡은 이 중요한 순간에 일생에서 최악의 순간을 맞았기에 밤새 잠도 못 잔 듯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무슨 일이시오?”
“영공 전하, 미리 먼저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조심스럽게 상민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일을 개인적으로 정리한 문서입니다. 그리고….”
그는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친 뒤 상민의 앞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팔을 붙이며 말했다.
“제 과오로 수병들, 그리고 후배 장교들을 전사케 만들었으니 이에 대해 즉시 보직해임 처분을 명해 주십시오. 추후의 벌은 물론 달게 받겠습니다.”
상민은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윽고 자신의 천막에 있는 술을 한 병 가져왔다.
어차피 마셔도 취하지도 않을 거, 대체 왜 술을 보관하고 있느냐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상민은 상당한 애주가였다.
“앉으시오.”
“하오나 전하.”
두 번 다시 말하게 하지 말라는 시선에, 김태인 정령이 부동자세를 풀고 상민이 가리키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일단,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내게 군 보직에 대한 권한은 없소.”
“알고 있습니다. 다만, 군무부에서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작전에서 제외해주셨으면 합니다.”
“정녕 원하는 거요?”
“예, 화엄의 함장은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친구입니다.”
상민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상승함은 가라앉지 않았소. 물론 여기엔 조선소도 없으니 다시 수리하여 완전히 거동할 때까진 한참 남았지만, 본국에선 이를 위해 최신의 함선을 보내주기로 했지. 수리함이라고, 아시오?”
“송구하오나, 지금 처음 듣는 함입니다.”
“이곳에 보낸다고 결정하기 전까진 기밀이었으니 당연할 테지.”
상민은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포도주와 포도주를 증류하여 만드는 브랜디, 즉 소포주(燒葡酒) 계열의 주요한 시장이 프랑스에서 고려로 넘어간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프랑스는 전 유럽적인 포도뿌리혹벌레의 재난에서 돌파구를 공유해준 고려의 생물학자들 덕분에 네덜란드나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들처럼 다시 와인 산업을 일으키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브랜드는 거의 회복되기 힘들었고, 최고급 포도주 혹은 와인 하면 고려의 미주 나파골, 혹은 남려 서부의 무릉골이라는 등식은 이미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고려와 친한 알비온 연합의 술은 명성이나 술의 시장이 도리어 성장했다.
에이레와 스코틀랜드의 전통 증류주, 위스키는 보리라는 다소 평범한 원재료를 씀에도 그 방법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고려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호박색 술을 잔에다 따라주자, 머뭇거리던 김 부령도 공손히 잔을 잡은 뒤 고개를 돌리고 단번에 들이켰다.
축배가 아니니 건배와 같은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오랜만에 술이 들어간 함장은 아주 약간이나마 마음이 가라앉은 듯 남몰래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어쨌든, 지금 귀관은 배를 가지고 있는 함장이라는 소리요. 나도 그렇고 군부도 단번에 그대를 해임하진 않을 겁니다. 상승함이 결국 석정까지 가서 폐기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자리를 지키고 있으시오.”
상민의 말에, 김태인 부령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상승의 뜻은 항상 승리한다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귀관의 함이 중파된 것과는 별개로, 아부다비 방어전은 승리로 끝났소. 적어도 패배한 것은 아니지.”
상민은 일어나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김태인 부령이 작성한 문서는 집어 들었다.
“직위 유지와는 별개로 귀관이 쓴 서신은 받아들이겠소. 귀관이 이번 작전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궁금하군.”
상민은 위스키의 연참나무 마개를 닫아 병째로 그에게 건넸다.
“어차피 귀관의 함은 당분간 이곳에 박혀 있을 테니 드리는 선물이오. 알아서 근무와 휴식을 구분하시오.”
군인으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처분을 바라고 왔던 패장, 김태인 부령은 얼떨결에 고급 위스키까지 가지고 돌아가게 되자 다소 혼란스러워했다.
“그대가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이었다면 내 이런 것을 드리진 않았을 거요. 다만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이었기에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 생각하시오.”
상민의 손짓 축객령에 김태인 부령은 자괴감과 감사함, 그리고 의문이 가득한 표정에도 순순히 경례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가 나가고 곧바로 들어온 사도는 다소 놀란 얼굴로 상민을 바라보았다.
패배한 장수에게, 태조시자 용께서 직접 어주를 하사하시다니.
너무나도 과한 처사가 아닌가.
꾸지람과 질책을 받아도 무방했는데 대체 어찌?
“왜 그렇게 보나?”
“아니옵니다.”
그러나 사도의 생각과는 다르게 애초부터 전투기록을 본 상민은 그를 벌할 생각이 딱히 없었다.
만약 그가 진주만에서 일제의 공격을 받았던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과 같은 이였다면, 상민은 그를 불명예전역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이었으니.
하지만 기록과 보고서를 본 상민은 작전에 실패한 그의 책임을 딱히 벌하고 싶지가 않았다.
주포로 육상 포격 지원을 하면서, 부포로는 먼바다의 페르시아의 해적 다우선을 경계하다가 예상치 못한 적들의 신무기에 당한 것은 경계의 실패라기보다는 그저 적의 작전에 패배한 것에 불과했다.
선후미에서의 공격을 다소 소홀히 한 것은 있을 터.
그러나 정말로 완벽하게, 흠결 없이 작전을 짜는 것은 지극히 힘들다.
그것도 그런 종류의 공격이 처음이었다면.
예전 삶에서, 철권이라는 유명한 게임의 해설 도중 나온 명언이 있었다.
모르면 맞아야지, 뭐 어쩌겠는가.
상민은 그와 김태인 부령이 마신 잔을 직접 치우며 말했다.
“모든 이들이 이윤신과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변흠규도, 김홍도, 조익현도, 강명호도, 황덕승도 제각기 패배나 좌절을 겪었다. 다만 그들은 그와 같은 패배를 다시금 겪지 않은 걸로 조국에 보답했지.”
상민이 줄줄이 열거한 자들은 제각기 고려 해군사에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물론, 김홍은 고려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부왕(夫王)이자 대공이 되었지만 도리어 그는 고려의 장수가 아니게 된 이후부터 더 큰 명성을 쌓았었다.
“김태인 부령이 그 정도의 인물이라 생각하십니까?”
“내 말이 여의국의 판단이 될까 싶어 답하지 않겠다. 다만 능력과 성품이 괜찮은 사람에 한해선, 누구나 불운을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도가 상민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이윤신과 같은 명장들은 세기에 한 번 등장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조차도 패배를 겪기도 한다.
지금까지 육전에서 불패의 명장이었던 나디르 샤가 마침내 아부다비에서 패한 것처럼.
내가 패하고, 제국에 수치를 안겨주었으니 복부를 갈라 천황께 용서를 구하고 패배의 수치를 씻겠다는 일제군부식 생각은 전혀 멋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배 지휘관들이 그것을 보고 다음 작전에서 대체 무슨 판단을 할 것인가.
당연히 보신주의적 선택만을 내리다 알아서 자멸할 터.
패배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건전한 군부였고, 그래야 그 이성은 나중에 지휘관들이 더 나은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상승함?
물론 전함은 값비싸지만 배는 언젠간 다시 건조할 수 있다.
반면 제국의 해군 전통은 돈을 들여 쌓아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상승함이 항해 가능할 만큼 수리된다면 석정으로 가서 폐기시키도록 하라.”
최초의 전함은 의미가 있었지만 이번에도 보았듯 단점도 상당했기에 상민은 신형 군함이 건조된다면 기존의 위엄급 전함들을 개장하거나, 개장이 불가능하다면 폐기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팔아치우기에도 영 묘했다.
적성국은 역설계로 정보를 얻을 것이고, 우방국에게 이걸 팔 수도 없고.
‘너무 답답하게 느리단 말이야. 이번 같은 사고도 만약 상승함의 추진기관이 증기분사기관이었다면 저들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
“예, 폐하.”
“그러나 상승이라는 함명은 이어서 다음 전함의 함명에 쓰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이곳에서 싸운 이들을 기억하는 방법이니.”
“알겠습니다.”
상민은 문득 김태인 부령이 쓴 보고서를 보았다.
그가 저번에 본 기록과 거의 일치했다.
도리어 조금은 자책이 많이 들어간 묘사가 보이기도 했다.
다만 마지막에는 건의 사항과도 같은 것들이 있었다.
― 중소형 선박에 대해 빠르게 대처할 수 있고, 또한 적의 비행정과 같은 공세에도 효과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유효 사거리가 높은 대구경의 다혈포, 혹은 속사포가 필요함.
이렇게 한번 당한 사람은, 적의 다른 무장에 대해서도 경계하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러시아가 비행정을 제작할 기술이 없더라도 이렇게 미리 근심하게 되는 것처럼.
따지고 보면, 반잠수정도 만들었는데 비행정도 언젠가는 만들어 낼 거라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 함선의 방뢰를 위해, 선박 외부에 탈착 가능한 그물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상민은 그 자리에 앉아 그가 제시한 몇 가지 방법들을 더 살펴보았다.
* * *
아부다비에 있는 병사들은 조금 시무룩해져 있었다.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해군도 해군이고, 승리한 해병대도 꽤 많은 피해를 보았다.
군 진료소에는 부상자들이 넘쳐났고, 사람들은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있었다.
“우리가 복수해 줄 테니. 죽을상 짓지 마라.”
“고생했으니 편안히 쉬고 있어. 나머지는 우리가 하겠다.”
전장 정리가 끝난 뒤, 임시로 지어진 막사의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모닥불을 쬐며 이 사막의 땅을 욕하고 있던 해병대 병사들은, 문득 그들의 곁에서 행군하며 지나가는 이국적인 병사들을 보았다.
그중 몇 명이 걸어가다 친근한 척 경례하면서 말을 흘렸다.
나름대로 위로의 목적으로 한 말이 분명하겠지만, 정작 얻어맞은 자들은 자존심에 도리어 발끈했다.
“야, 정성규. 괜히 분란 조장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
아부다비에서 수비전을 치른 한 줌의 해병대와는 달리, 외인부대는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완편 여단이 4개에 부속 부대도 있으니 거의 이만에 달했다.
“아니 말을 뭐같이 하잖아.”
“딱히 욕한 것도 아니잖냐. 뭐 드잡이질 할 거면 너 혼자 하든가.”
“해병혼도 없는 새끼.”
“같은 고려군에게 해병혼을 보여줘서 뭐 할 건데?”
병사들의 숫자가 많으니, 불만을 토로해보려던 해병대원도 금세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외인부대는 인간 군상도 다양한데, 제각기 덩치들도 한 덩치를 했다.
고려는 훈련소에서 의도적으로 일반인보다 거의 한 배 반, 두 배에 가까운 식량을 배급하여 군인들의 건장함을 키우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평상시 개인 훈련이 빡세지 않다면 그 음식물은 뱃살로 치환될 것이다.
하지만 저 인간들의 영양소는 배기름이 아니라, 분명히 형형한 눈빛뿐만 아니라 건장한 삼각근과 대흉근으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
어깨총을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가는 건장한 병사들의 피부색은 실로 다양했다.
고려인 같은 예맥계 병사도 보였고, 아프리카 흑인들도 보였고, 대체 어디서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다 비슷해 보이는 유럽인들도 보였고, 누산타라인 특유의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도 보였다.
“쟤네 봐, 장비가 엄청 좋구만.”
“장비가 좋으면 뭐 하는데? 전투는 악으로 깡으로 싸우는 거지. 저런 걸로….”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여전히 투덜거리는 병사와는 다르게, 한 해병대원은 호기심에 벌떡 일어나 행군하는 외인부대의 병사들과 나란히 걸으며 최신 장구류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해병대원은 외인부대의 총기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보니까 평범한 정윤식 소총이다.
정윤사는 종이탄피를 사용했던 381식 이후 무연화약의 폭압을 견뎌야 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상부개폐식 399식을 만드는 등 여러 삽질을 했고, 결국 해군과 해병대에선 제식무기로 채택되지 못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설계를 가져온 홍강과는 다르게 꾸준히 노리쇠전진식을 고집한 이들은 결국 가장 많이 생산된 381식의 작동부 몇 가지만 바꾸면 새롭게 신형 소총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윤 430식은 우수한 호환성을 자랑하며 폐기물 취급을 받던 예전의 종이탄피 총기를 재사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대로 육군의 제식 소총으로 남아 있었다.
노리쇠전진식의 연사력이야 새롭게 등장한 상부개폐니, 이중개폐니 하는 것보다 빨랐기에 환경과 오염에 대한 신뢰성보다는 화력을 더욱 중요시하는 병사들에겐 어울렸다.
반면 투구나 등에 멘 군장은 신기했다.
머리에 쓴 것은 최신형으로 제작된 투구가 틀림없었다.
알기론 근위여단도 지금까지는 검은 피립과 같은 모자를 썼고 해병대원들은 위장 효과와 일광 차단의 목적으로 만든, 빳빳한 챙이 인상적인 상륙모라 불리는 모자를 썼다.
물론 둘 모두 총탄에 대한 방호력은 아예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외인부대의 전투용 철제 투구, 철모는 무거워 보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방호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비가 틀림없었다.
물론 대놓고 철모에 총을 쏘면, 무연화약과 홍강소총의 위력상 분명히 뚫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머리를 일격에 맞아 즉사하는 사람은 전장에서 의외로 보기 힘들었고 대부분 파편과 같은 것들을 맞아 죽었기에 철모는 그런 목적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방어하는 핵심 장구류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는 고려의 제철 산업이 바야흐로 엄청난 수준에 달했다는 의미였다.
철모와 더불어 군장도 현격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지게의 구조를 이용해, 철제 뼈대와 그 위를 덮는 배낭으로 된 군장은 기존까지 대충 엉성하게 부속물들을 끈으로 고정한 군장과는 완전히 편리함이 달랐다.
황동탄피 구조가 보편화되기 시작함에 따라, 고려는 기존의 허리띠에 결속된 화약낭에서 시대의 변화에 맞게 바뀐 어깨끈과 탄띠, 탄약낭 등의 단독군장을 채택했다.
이러한 단독군장에는 몇 가지 더 부속품이 생겼다.
총검용으로 쓸 수 있는 검과 검집, 그리고 표준화된 수통과 구급대 등이 생겼으며, 척탄병들은 수류탄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공병들은 접이식으로 만들어진(더럽게 무거운) 철제 삽이 껴들기도 했다.
등에 진 군장은 침구류와 의복, 식사 도구와 판초(마푸체의 여행복이지만 대체로 우의 및 외투로 쓰였다) 등이 있었고, 만약 예상되는 보급대가 없다면 개인천막이 포함되기도 했다.
물론 구조가 개선돼도 욕 나올 만큼 무거운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변동이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동화 속에서 마귀할멈에 대항해서 남매가 빵 한 조각씩 떨어뜨리고 가는 것마냥 질질 흘리고 다니진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전지속능력의 괄목할 만한 상승을 의미하기도 했다.
군복과 장구류의 색상도 완전히 달라졌다.
이는 비단 외인부대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군대에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자랑스러운 근위여단의 또 다른 이명인 적포군은 이제는 조금 생소한 말이 되어버렸다.
물론 전통을 고려하여 근위여단의 구성원들이 가진 정복의 두루마기는 그대로 화려한 붉은색을 유지했지만, 전투복 자체는 완전히 바뀌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이전 전열보병의 시기보다는 훨씬 더 칙칙하고 어두운 색깔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다혈포와 제사총의 발달, 그리고 후장식 소총의 보급은 병사의 산개가 밀집대형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었고, 이젠 눈에 띄는 아군의 옆에서 같이 듬직하게 나아가기보다는 어딘가에 엎드려 적의 총탄을 피하고 내 총을 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적에게 총탄을 맞지 않으려면 당연히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더 현명했으니 군복의 색깔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사막에 처음으로 파병된 외인부대의 전투복은 좋게 포장하면 어두운 모래색 혹은 갈색, 나쁘게 말하면 똥색으로 정말 미관상으로는 좋지 못했지만 미관이 목숨 구해주진 않았다.
[작가의 말]
홍강―427은 레밍턴 롤링블럭으로, 정윤―430은 그라 소총(어쩌면 르벨 M1886)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