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79화 (379/653)

아라비아 통일 전쟁

아이샤, 아니 하팀과의 교감이 있고 난 뒤, 상민은 샴마르를 기반으로 마침내 그의 계획을 완성시킬 행동에 나섰다.

자발 샴마르의 서신을 품은 알 알리의 청년들이 사방의 부족들을 향해 흩어졌다.

상민도 두 명의 베두인 전령에게 각기 다른 것을 부탁했다.

“그대는 다마스커스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가고, 그대는 두바이로 가시오. 길고 힘든 여정이 될 것이오.”

상민은 심부름으로는 과할 정도의 은화 몇 닢을 더 얹어주었다.

“그대 부족의 흥망이 그대들에게 달려 있소.”

상민은 가지 못했다.

이곳에서 그가 자리를 비우면, 샴마르는 언제든지 몰락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몰락하기 전에 그가 온 것만 해도 다행인 셈이다.

실제로 위기는 금방 닥쳐왔다.

상민과 하팀의 밀약과는 별개로 하팀은 여전히 부족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사람 생각이 그렇게 잘 바뀌었으면, 세상일은 훨씬 수월하게 풀렸을 터.

하팀은 항복하지 말자는 여론 중에서도 이주를 원하는 여론은 항전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항복하자는 여론은 설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봉합되지 못한 갈등은 이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상민조차 그들이 그렇게 빠르고 과감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상민과 고려의 접근이 그들에게 약간의 위기의식을 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상민이 그들의 상식 너머에 있다는 것은 몰랐겠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추억의 맛이로군. 흠… 산화비소?’

그가 알고 있는 자들 중 가장 독극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자는 파라콜라의 아버지, 파라켈수스였다.

하지만 실제 암살에 쓰이는 독의 사용 요령에 대해 통달한 자는 놀랍게도 루크레치아였다.

그녀 자신이 기원한 보르자 가문은 어릴 적부터 독에 대해 많은 지식을 축적했고 그만큼 많은 정적들을 숱하게 제거했으니까.

그들은 음식의 맛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의심할 수조차 없게 독을 사용하는 것을 즐겼다.

허나, 이 자기주장이 강할 만큼 어설프게 섞은 투박한 독은 뭐란 말인가.

어쨌든 상민은 이 한적한 베두인 세계에서조차 정적을 독살하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아니한가.

상민은 반쯤 마신 커피를 내려놓고는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 막 커피를 마시려는 하팀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았다.

“무슨 짓이오!”

사방에 둘러앉은 씨족의 원로들은 상민의 신속한 행동에 한 번 놀랐고, 두 번째는 그 행동의 무례함에 다시 놀랐다.

하지만 상민은 빼앗은 하팀의 커피도 반쯤 마시고는 드디어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지금 일부의 사람들은 무례함보다도 다른 세 번째 이유로 훨씬 더 놀라고 있을 것이다.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과 하팀의 커피에 독약이 있었다는 상민의 주장은, 커피를 타던 한 씨족 청년이 끌려와 남은 에미르의 커피를 마시고 곧바로 절명해버리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사람들은 그 독약을 먼저 마셨음에도 어떠한 증상을 내보이지 않은 채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들을 노려보는 상민의 모습에 기함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는 그가 아니라 어린 소년이었다.

열네 살의 아이.

하지만 군주의 자리는 그 어린 소년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특히나 방금 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더라면.

“누구인가?”

활활 타오르는 듯한 에미르의 분노에, 씨족의 셰이크들이 눈을 피했다.

“에미르, 우리 씨족은 절대 허튼짓을 꾸미지 않았습니다! 저 청년은 필히 다른 자의 사주를 받고 독단적으로 했을 겁니다!”

절명한 부족 청년의 씨족장이 엎어졌다.

어린 소년이 신고 있는 신에 입을 맞추고 간청하는 꼴이 실로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좌중의 모든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에선 웃음기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믿지요. 나는 내 아버지의 친우였던 당신을 믿겠습니다. 아니, 우리 씨족 간의 신의를 믿겠습니다. 샴마르라는 우리 모두의 이름을 걸고 말이지요.”

한동안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던 하팀이 이내 한순간 미소 짓는 듯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하팀은 조용조용 말하며 셰이크의 어깨를 감싸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이들의 속내는 고문을 하지 않는 이상 알기 힘들었다.

누가 이런 모략을 꾀했는지도 알기 힘들 것이다.

지금 하팀의 권위로는 이것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이 어설픈 독살 시도는 하팀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모략에 참여한 자들은 행여나 그들의 행적이 들킬까 봐 겁에 질렸으며, 모략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도 다른 씨족장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것에 큰 불쾌감을 느끼며 하팀을 지지했다.

하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더라도 치졸한 술수를 써서 샴마르의 에미르를 죽이는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위협받은 목숨을 대가로, 하팀이 드디어 권위를 찾았다.

나중에 하팀은 상민을 따로 독대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다소 회복된 에미르의 권위는 이제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과정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게 다 귀빈 덕분입니다.”

하팀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기분을 느끼며 상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진 잔, 단번에 청년 하나의 숨통을 끊어버릴 독이 있었지.

그러나 이 사내는 그것의 절반을 마시고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하팀은 이자가 정말로 그 액체를 목으로 넘겼다는 것을 확신했다.

상민은 이를 설명하길 거부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위기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이었지 상민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 * *

하지만 하팀의 감사 인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못했다.

에미르에 대한 암살 시도는 분명히 중요한 일이었지만, 앞으로 닥쳐올 것들에 비해선 시시한 일이라 볼 수도 있었다.

“무하마드 빈 사우드가 이끄는 사우드군이 부라이다에서 출정했다 합니다!”

무려 일만 팔천의 대병력.

샴마르군이 전 부족의 미래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달달 모아서 만든 병력이 사천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격차는 심대했다.

술탄의 폐위와 오스만 내부의 분열이 확인되고 예니체리마저 전부 하일 오아시스를 떠나자 마침내 무하마드가 결심을 한 모양이다.

지금이 가장 큰 걸림돌을 뽑아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시점일 테니.

이 군세의 위압감은 실로 대단하여 일시지간이라지만 하팀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을 거라 추정된 세력, 주화파들도 기세등등해져 다시금 항복을 주장했을 정도였다.

“아니,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그러나 하팀은 이번에는 완고하게 주장했다.

자발 샴마르의 요새에서 수성하자고.

“사방의 부족에게 전령을 보내고 자발 샴마르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봉화를 올리세요. 우리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이미 하팀은 이들과 상의 없이 전에 한 번 전령을 보낸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급박한 위기를 싣고 또 한 번 전령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가 무너지면 이제는 당신들의 차례일 테니 우리가 요새에서 끝까지 항거할 동안, 빠른 결단을 내리라고.”

이미 세계는 한참 전부터 대포의 시대로 진입했다.

하지만 이곳 궁벽한 아라비아에는 아직도 전장식 대포가 활약했으며, 전장식 대포마저도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애초에 대포가 많이 도입될 요인도 별로 없었다.

돈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이곳엔 거점을 방어하는 요새 성채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베두인들은 유목민, 돌아다니는 자들이지 지키는 자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항구적인 오아시스 주변에는 요새가 지어져 있긴 했는데, 상민이 보았던 후푸프의 오아시스 요새처럼 너무나 평탄한 지형에 있어 수성하기에는 영 별로인 곳들이 많았다.

그나마 사우드의 본거지인 디리야 요새 정도나 굉장히 정교하게 지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발 샴마르 성채는 아라비아에서도 상당히 특별한 성채였다.

자발(Jabal)이라 하면, 아랍어로 산(山)을 뜻한다.

애초에 샴마르 부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자발 샴마르라는 명칭은 정확히 따지고 보면 샴마르 부족의 산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사막 산부족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17세기에 들어서 알 알리 씨족이 주도하여 짓기 시작한 알 아리프 요새(A'arif fort)는 근방의 험준한 자발 샴마르의 산세에서도 특별히 까다로운 암석 봉우리 위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 이 광경을 본 공성자들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속을 칠 것이 분명했다.

에미르의 빠르고 완고한 결단과, 샴마르 자체의 복수에 대한 갈망, 그리고 다소 약해진 원로들의 권력 덕에 마침내 부족은 끝까지 항거해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상민은 이번에는 관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도 요새에서 이들과 함께 싸우기로 작정했다.

요새, 좁은 곳.

좋지 아니한가?

길목 하나만 막으면 된다면, 그는 실로 만인을 상대할 수 있다.

사실 먼저 그의 코털을 건드린 쪽은 사우드였다.

상민도 속이 마냥 넓지는 않아, 그를 암살하려 한 쪽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든 혼쭐을 좀 내보이고 싶은데 이번 기회는 적당했다.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적당한 숫자의 아군.

디리야, 무하마드 빈 사우드 앞에서 깽판을 치는 것보다야 지금이 훨씬 더 안전해 보였다.

그가 보낸 전령이 결과물을 가지고 당도하기 전까지 먼저 메인 디시의 맛을 조금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열 명 남짓한 가문 척살대는 그에게 그저 에피타이저도 아니라 도리어 허기만을 증폭시키는 식전 음료수에 불과했다.

“삼촌께서 이곳에서 싸우셨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요?”

부족들이 짐을 챙겨 부랴부랴 요새로 떠나야 하는 상황.

남녀칠세부동석이건 뭐건 이제는 그런 것을 고려할 수 없는 혼란한 풍경 속에서 두 남녀는 밀회 아닌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요새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꼭대기에서 요새의 상황을 감시하던 상민의 곁에 아이샤가 다가왔다.

하팀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고려인에게 먼저 요새로 떠난 아이샤와 여인들을 지켜달라 부탁했던 터.

지금은 둘이 함께 있어도 별로 이상하진 않았다.

“아니, 그분께선 최선을 다하신 것이오. 항상 수비할 순 없소. 나가서 싸울 때는 나가서 싸워야지.”

“우리 또한 이곳에서 말라 죽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도, 저도. 동생도.”

“다른 부족들이 결단을 내릴 것이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늦기 전에 도착하길 바라야겠지.”

아이샤는 벽에 등을 지고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항상 보면 이상할 정도로 신념과 자기 확신에 차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정녕 알라께서 당신을 인도하시는 건가요?”

상민은 울퉁불퉁한 요새 벽의 촉감을 느끼며 그녀와 비슷한 자세로 기대었다.

“인간 이성이 나를 인도하오. 신의 말씀이 아니라.”

그는 더 이상은 그녀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저지를까 하여 덧붙이지는 않았다.

허나 내 존재는?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상민에게 아이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결혼했나요?”

“했지. 아주 많이.”

무심하게 대답하는 그의 대답에 왠지 울컥한 아이샤가 덧붙였다.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신가 봐요. 그렇게 많이 결혼하셨으면 그 모든 아내를 똑같이 사랑했나요?”

“그랬었지.”

과거형이었다.

의문 섞인 그녀의 눈동자에 상민이 마침내 한숨으로 대답했다.

“다 죽었소.”

“…….”

“질병이건 노화건, 모두 내 곁을 떠났지. 사람 인생이라는 것은 너무나 짧아 내 감당하기 어렵소.”

아이샤는 상민의 무거운 대답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가 여러 번 결혼한 것에 약간 심통을 부렸더라도 그녀는 도리어 그녀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상민을 보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사도 무하마드도 자그마치 열세 명의 부인들을 두었다.

다수의 처는 흠결이 되지 않았다.

아이샤는 스스로 자책했다.

어른인 척 굴려 해도, 질문은 여전히 어리구나.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른다.

“별에 대해 아시나요?”

어쨌든 그녀는 힘겹게나마 사담을 이어가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 노력이 가상해 상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학이라.

그래 지금까지 살면서 좀 배운 것이 있지.

상민은 자신의 맏아들 해준은 물론이고 갈릴레이 갈릴레오와 요하네스 케플러라는 이민자 출신의 학자들, 동역학적 우주론의 선구자들과 나눈 대담을 떠올렸다.

물론, 이번에는 저번처럼 그녀를 골탕 먹이려 하진 않았다.

공전주기와 궤도와 같은 행성 운동에 대한 케플러 운동법칙처럼 어디서 이해하지도 못할 말들을 뱉어냈다간, 그녀는 금방 시무룩해질 것이 분명했다.

“고려와 동아시아, 그리고 이곳 서아시아의 별자리는 전부 다 다르오.”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하여 그리스식 신화의 이름이 붙은 이슬람, 유럽식 별자리와 중국에서 기원한 동아시아의 별자리.

고려는 아무래도 후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에, 정말로 단조롭게 이름이 명명되는 학술적인 부분이 아니고서야 여전히 이에 대한 설화들이 전승되어 내려오곤 했다.

“이곳에서 저 별은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염소자리라 부르겠지. 허나 고려에선 저 별을 견우성이라 부른다오.”

사실, 초창기 남반구에만 머물러 있던 시절의 고려 별자리는 이미 왕씨 고려에서 이어져 내려온 전통 별자리와는 완벽하게 달랐지만, 뭐 어찌 되었든 북려까지 통합한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다.

아라비아는 북반구이기도 했고.

“저 별은 직녀성이라 부르지.”

아이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견우와 직녀, 무슨 이야기일까요?”

사막 특유의 탁 트인 밤하늘의 매혹인지, 둘은 두런두런 떠들었다.

‘이런…….’

상민은 자신이 신이 나서 꺼낸 대화의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자신이 이 여인을 완전히 홀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는 이미 저지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