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 전쟁, 페르시아와 아라비아(4)
아킬의 우려와 달리, 상민에게 사막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라비아와 낙타는 처음이지만, 갈증과 신기루에 대한 기본적인 주의사항들은 다른 사막들에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 땅은 이 땅만의 위협이 있겠지만, 상민은 상당한 자신감을 품었다.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 기나긴 세월의 혜택이라고 해야 할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거의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가지 못했을 수많은 오지를 탐험했으니.
훗날 TV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생존 전문가도 상민처럼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신체적 능력도 차이가 좀 날 테고.
정말로 많이 개량되어 신뢰성이 높은 군용 나침반, 육분의, 정밀한 시계와 함께면 사막에서조차 완벽히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혼자가 되고 싶어도 혼자가 될 수 없는 몸이기도 했다.
은밀히 행동한다고 하지만 도시의 인파와 지형지물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막에선 제아무리 여의국 요원들이라 하더라도 그 존재가 도드라지게 보일 수밖에 없지.
저 멀리, 상민과 벌어진 거리를 줄이기 위해 허겁지겁 뒤따라오는 낙타들을 발견한 상민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낙타를 뒤로 몰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하오나 폐하. 이곳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 아닙니까?”
여의국 요원들이 항명했다.
보기 드문 광경이다.
이해는 되었다.
그동안 탐험했던 남북려대륙의 오지는 어디까지나 자국 내의 영토였기에, 이들은 불안한 마음이지만 연락 두절을 감내했을 터.
하지만 생판 떨어진 외국에서 이러고 있으니, 아마 답답한 마음이 들겠지.
그러나 상민은 단호했다.
그가 고려에 대해 해주는 것은 있어도, 상민은 자신의 삶이 이들에 의해 구속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는 황제도, 시중도 아니었으니.
그 또한 그를 위해 살 때도 있는 법이다.
이건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그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아니라.”
‘매번 말하는 것 같은데….’
사실 그를 호종하는 요원들은 십 년 정도 있으면 바뀌니,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 십 년의 세월도 짧게 느껴지는 상민으로선 매번 이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은은한 노기를 띤 상민의 추상같은 꾸지람에 여의국 요원들이 모두 부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 누가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한 몸은 충분히 건사할 수 있다. 도리어 너희들이 나와 같이 가는 것이 더 내게 위험한 일이다.”
그럼 아예 가지 않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상민은 요원들의 표정에서 나오지 못한 질문을 읽어냈지만 가볍게 묵살하고 낙타 머리를 돌렸다.
요원들 중 한 명이 황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폐하! 떠나신 바로 직후에 국제 정세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가 올라왔었습니다.”
그래, 그건 듣고 가야지.
요원 하나가 겉표지에 크게 비밀이라는 도장이 찍힌 두툼한 보고서를 올렸다.
날짜는 한 달도 전에 작성된 모양.
외진 곳에 있다 보면 소식을 몰아서 듣는 때가 많았다.
전신선이 안 깔린 지역은 배로 편지를 실어날라야 했으니 더더욱.
지도상으로는 좁아 보이는 오스만의 소식도 마찬가지였고.
“오스만의 아흐메트 3세 술탄이 예니체리 반란으로 폐위되고 새 술탄이 즉위했었다 합니다.”
“했었다?”
“예. 그 술탄 또한 불과 일주일 만에 암살당했다 합니다.”
“그럼 아흐메트 3세의 복위는 불가능한가?”
“예니체리는 건재하니, 기존의 술탄이 돌아오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차기 술탄의 지위를 놓고 격한 내전이 발생할 것이라 예측하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해방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해원이 이놈이 머리 좀 아프겠구만.”
조약을 체결하고 차르가 마침내 모스크바로 돌아간 것도 이제 겨우 4년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러시아도 한동안 숨을 골라야 할 터. 곧바로 준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려의 경계도 아직 충분히 건재하니까.
반면 오스만은 지금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바로 직전처럼 보였다.
이게 꽤 흔히 있었던 예니체리 반란과 폐위라면 그렇겠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독 해상헌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오스만의 민심과 정치 상황이 이전까지의 내전과는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마치 왕조 자체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듯한.
해씨 종친회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입장에서, 애초에 해원에게 상헌을 추천한 이도 상민이었다.
그런 만큼 그 또한 상헌의 안목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지.
그가 콘스탄티니예에서 그렇게 느끼고 보았다면 정말로 그러할 것이다.
보고서를 꼼꼼히 읽은 상민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예상외다. 오스만이 이렇게 빨리 무너진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상민은 아라비아에서의 행동을 빠르게 해야만 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들어서기엔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 아닌가.
“서둘러야겠구나. 너희들은 두바이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 핫, 핫, 핫!
불을 붙여 보고서를 완전히 태워버린 그는 서둘러 낙타를 때렸다.
* * *
상민이 예상하고 있는 경로는 두바이에서 출발해 후푸프 오아시스, 그리고 그곳의 북쪽에서 시작하는 카라반들의 루트를 이용해 부라이다를 거쳐 하일로 가는 길이었다.
가장 빠른 루트는 사우드의 본거지인 리야드를 통과하는 것이지만, 그건 학자의 조언을 따라 기각했다.
그곳을 굳이 찾아갈 필욘 없었다.
그러니 해안가를 따라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곳에서 아드 다나(ad―Dahna)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아라비아반도는 이곳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통상적인 관념처럼 하나의 거대한 모래 둔덕의 지형이 아니었다.
이곳에도 오아시스와 계곡, 고원이 있으며 산이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도 물론 있었고.
그중 현지의 베두인족에게도 위험할 정도로 가혹한 지형은 아마 북쪽의 네푸드(Nefud) 사막과 남쪽의 룹알할리(Rub' al Khali) 사막일 것이다.
길이는 엄청 길지만 폭 자체는 그리 넓지 않아 빠져나오긴 상대적으로 쉬운 아드 다나 사막과는 달리 네푸드와 룹알할리 사막은 길이도 폭도 모두 넓어,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선사해주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상민조차도 이 두 사막을 통과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아니고.’
그럴 바엔 차라리 리야드를 통과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아무리 사우드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 이해관계가 없었던 고려인에게 곧바로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짧지 않은 여정 끝에 도달한 후푸프 오아시스 도시에서, 상민은 곧바로 혼란스러운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야드와는 거의 2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에도 전쟁은 찾아온 모양이다.
객관적으로는 꽤 먼 거리지만, 전쟁에서 안전하기엔 그렇게 멀지도 않은 거리기도 하니.
꽤나 크고 번성한 오아시스의 도시 주변에는 이리저리 치우지 못한 시신들이 널려있고, 모래가 흡수하지 못한 핏물들이 엉켜 있는 광경이 보였으며 옷가지와 무구 같은 유품들이 땅에 떨어진 광경도 보였다.
이 처절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는 부족들도 멀쩡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니 이들이 처음 마주한 상민의 면전에 대고 곧바로 총부터 겨누는 것은 무리가 아닐 터.
그들의 총은 페르시아 등지에서 쓰인다는 제자일(Jezail)보다는 북아프리카에서 쓰이는 무칼라(Moukahla)와 더 닮았다.
물론 가장 가까운 것은 오스만의 총기겠지만.
상민은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서서, 유창한 아랍어로 이곳에 온 목적과 적대의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상민의 외모가 말과 일치하니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무장 해제시킨 상민을 데리고 곧바로 그들의 족장 앞으로 보냈다.
“고려라. 이 궁벽한 곳에서도 위대한 제국의 위명은 들리기 마련이지. 도대체 어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편안하게 머물다 가시게나. 여봐라, 내빈의 무구를 돌려드려라.”
상민은 몹시 신기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에도 무덤덤히 다혈권총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순방함대의 일주 이후, 세계에서는 고려를 모르는 자들이 없을 것이었다.
이곳에조차 소문은 퍼지고 퍼져, 그 국력에 대한 위압감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했다.
아프리카인이나 열강도 아닌 기독교인 어중이떠중이나, 인도와 페르시아 남쪽에서 굴러먹던 사람들처럼 취급하여 노예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들 바니 칼리드(Bani Khalid)계 부족의 성격도 질 나쁜 도적들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 자들을 노예로 파는 짓을 하지 않았고.
원래부터 아라비아 사막에서 살아가는 부족민들은 의외로 여행자들과 이방인들에게 관대하곤 했다.
특히나 상민의 매력인지 기품인지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족장일수록 예사롭게 넘기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상민에게 좋은 만찬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국에서 온 젊은이여, 환대해 주지 못해 미안하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부족과 도시의 상황이 이 지경이라 이해해주시게.”
상민은 족장의 태연해 보이는 얼굴 속에 깃든 절망감과 슬픔을 눈치챘다.
“어떤 자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소?”
부족장은 말해 줘도 어차피 외지인이라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침묵을 지키다, 부족의 상처에 바를 약에 쓰라는 상민의 금화 ‘기부’에 입을 떼야만 했다.
“이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를 놈들이 사우드 놈들 말고 누가 있겠는가?”
그의 태연한 얼굴이 일순간 무너졌다.
감정을 참고 참다가 터져버린 모양이다.
도리어 외부인이기에 어차피 상관없을 말이라 생각했는지, 부족장은 온갖 비속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비속어는 공부하지 못해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억양과 어조로는 눈치챌 수 있었다.
“디리야의 무크린, 아니 사우드는 그냥 일반적인 부족이었지. 가끔은 괜찮은 이웃일 때도 있었을 만큼. 하지만 지금 그들은 완전히 미쳤네! 미친 만큼 잔혹하고 사악해졌지! 카디자드의 추종자들을 들이고 그 사악한 말에 현혹된 이후에는 더더욱!”
말을 하면서 더욱 격분하는지 부족장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로 외쳤다.
“전사와 전사 간의 긍지 높은 전투? 하, 그건 옛말이네! 이제 그들은 세 번의 항복을 권유한 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싸움이 끝난 이후 여자와 아이까지 모조리 죽이고 있어! 더러운 돼지 같은 놈들!”
― 퉤!
그가 상민이 앉아있는 방향과는 반대편을 바라보고는 침을 뱉었다.
안타깝게도, 의도했던 모래가 아니라, 양탄자 위에 떨어졌지만.
“우리야 이번에는 목숨을 건졌지만, 저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리야드에 살던 부족도, 카탄에 살던 부족도, 다와시르에 살던 부족도 그랬던 것처럼 죽거나 혹은 평생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테지.”
본래 이들 또한 오스만의 신하이나, 오스만이 이들을 결집시킨 것은 오로지 세속적인 군대의 힘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힘이 강성했던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오스만은 이들을 빠져나갈 수 없게 강제할 여력이 전혀 없었으니까.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헤자즈 토후국 간의 관계도 오스만 칼리파의 우위권을 인정받고 자치권을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중화 천명을 자청한 청과 그것을 인정한 조선의 관계 정도라 봐야 하겠지.
그러니 아라비아 부족들 하나하나는 더더욱 간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까지 오스만의 신하를 자처하는 것이 편하면 그것을 이용했고, 불편하면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사우드 가문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정말로 강력한 아라비아만의 왕조가 나오게 되는 것.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발흥하니, 이제는 이곳에서도 그 여파가 닿는 것 같았다.
범고려주의, 범예맥한주의, 범게르만주의부터 범슬라브주의와 범튀르크주의, 이제는 범아라비아주의까지.
그러나 세속 지도자들은 사우드가 기치를 올린 범아라비아주의를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옆 동네에서 비슷하게 살아가던 놈이, 갑자기 미쳐서 내 집 앞에 와서 나에게 총을 겨누고 복종하라 하면 대체 누가 예 그렇게 합죠 하고 고개를 벌떡 숙인단 말인가?
게다가 내 손에도 총이 있다면 더더욱.
“그대는 지금 오만이나 예멘에서나 쓰는 터번을 쓰고 있지. 괜찮네. 나는 그런 걸로 뭐라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니까. 하지만 조심하시게. 저 병신같은 놈들은 차라리 그대가 그대 나라의 모자를 쓰는 것을 더 좋아할 테니.”
그는 자신의 하인에게 손짓했고, 이윽고 하인이 쓰는 케피야와 이깔을 가져왔다.
그것을 받아든 상민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우드 가문에 반하는 자는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굳이 하일 오아시스에 가지 않아도, 이곳 바니 칼리드 부족 연맹의 사우드에 대한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해 보였다.
그러나, 반대로 상민은 이제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만약 상민이 또 다른 부족을 내세워 베두인들을 힘으로써 ‘통일’하고자 한다면, 다른 베두인 부족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반발할 수 있을 거라고.
너무나 당연한 소리겠지.
그리고 그런 갈등은 결국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반사우드 연합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안 해보셨소?”
상민의 질문에 족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랍인들, 특히 이 사막의 베두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성싶은가? 사도 무함마드가 현신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이도 가능하지 않네.”
오죽하면 반사우드 연합조차도 제대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말일까.
* * *
부족이 혼란한 와중에도 족장은 손님에게는 그 예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인지, 혹은 세계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금화의 위력이었는지 상민에게 넓고 좋은 천막 하나를 주었다.
그러나 이틀 정도 이곳에 머물며 낙타의 배를 채우고 다시금 여정을 떠날 생각이었던 상민은 떠나기 전날 밤, 천막에서 곤히 잠을 취하다 새벽녘에 들린 엄청난 함성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 알라 후 아크바르(اللّٰهُ أَكْبَر )!
메아리가 나올 수 없는 지형인데도 메아리가 들리는 착각은, 정말로 엄청난 수의 대군일 때나 느껴지는 소리가 분명했다.
과연 천막의 입구를 헤치고 나오자 상민의 눈에 오아시스 저 멀리에 있는 모래언덕 위로 엄청난 수의 군세가 보였다.
이곳이 사막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의 군세였다.
특유의 높은 징병 비율이 가능한 유목민이라 이럴 수 있었겠지.
적어도 오천은 넘어 보였다.
상민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곰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술적 판단도 훌륭해. 이곳의 부족민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이미 진작부터 여러 방면에서 포위하며 다가온 모양이다. 저들의 지휘관은 분명 범장은 아니로구나.’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긴 있는데, 상민이 작정한다면 뚫을 수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 또한 제아무리 낙후되었더라도 수석식 소총을 가지고 있으니 위험부담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마침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 족장이 그의 천막으로 말을 타고 다가왔다.
사막 민족 베두인이라고 모두가 항상 낙타를 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오아시스 근처에서는 말을 타는 자들도 많았다.
능선에 서 있는 사우드군으로 추정되는 자들도 말을 탄 자들이 많이 보였으니, 상민은 아마 짧은 거리에서의 전술적 기동성 자체는 말이 낙타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했다.
“손님께선 저 우물까지 물러나 있으시게. 이것은 베두인들 간의 전쟁이지 그대의 전쟁은 아니니, 제아무리 흉폭한 사우드 놈들이라도 그대의 정체를 확인한다면 곧바로 해치지는 않을 것이네.”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것이 현명했다.
“인샬라(إن شاء الل).”
그래도 희미한 걱정과 바람을 담은 그의 대답에, 족장이 경직된 얼굴을 풀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인샬라.”
그가 돌아가서 검을 뽑는 것이 보였다.
“우린 개처럼 굴종하지 않을 것이다! 나가서 싸우라! 알라 후 아크바르(اللّٰهُ أَكْبَر )!”
― 와아아아!
바니 칼리드의 부족들 또한 고함을 지르며 총과 휘어진 칼을 뽑아 들었다.
오아시스에는 아랍 특유의 건축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은 성이 있었지만, 바니 칼리드의 족장은 이곳에서 항거하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어차피 말라 죽을 것이고, 그럴 바엔 그들도 자신 있는 전술로 싸우고 싶어 한 모양이다.
상민은 오아시스 근처 우물의 벽돌 구조물에 걸터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죽어갈 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엔 그는 실로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며 너무나 많은 전쟁을 겪었다.
저들은 전사이며, 저들만의 숭고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하루 전에 만나 대접받은 부족을 위해 목숨을 버려가며 싸울 동기는 상민에게도 없었다.
반면 상민은 나름대로 좋은 기회, 즉 베두인들의 전술과 무기술, 그리고 악명 높은 사우드 가문의 잔혹함을 견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족장. 그대의 말대로 저들이 그렇게 잔혹하며, 정말로 타협의 여지가 없는 종자들이라면, 그대의 복수는 내가 해 주리다.’
* * *
궁기병의 세월은 갔다.
하지만 스웜 전술은 여전히 사막에서는 유효해 보였다.
사막의 유목민들은 낙타나 말을 타고 이 전술을 펼치는 것에 도가 터 있었다.
말에서 발사하는 일제사격 이후, 검을 꼬나쥐고 달려드는 양측이 어지럽게 어울렸다.
인품은 좋아 보였지만, 좋은 인품이 전술적 능력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도리어 반대의 경우가 전술적 능력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잔혹함은 규율로 이어질 수 있으니.
안타깝게도 바니 칼리드의 부족들은 하나둘씩 스러졌다.
원래부터 사우드군의 군세가 적어도 세 배는 많았고, 군의 기세도 높았으며, 좋은 시간에 좋은 선제공격을 통해 우위를 점하기까지 했으니 아마 바니 칼리드의 패배는 예견되어졌을 것이다.
듣기로는 상민이 도착하기 불과 이틀 전에 이미 선봉대와 한차례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 하니까 쉴 시간도 없었을 테고.
다행인 것은, 바니 칼리드 부족민 중 어린아이와 여인들은 동쪽의 같은 바니 칼리드계 부족의 마을로 피신시켰다니 대학살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너는 이곳에서 멈출 생각이 없지 않느냐?’
상민은 저 멀리 능선에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망원경으로나 구분할 수 있는 거리지만 선명하게 잘 보였다.
순백색의 깐두라와 백색의 케피야, 그리고 머리에 올려져 있는 황금색 이깔.
자신감 넘치고 위풍당당한 풍채.
상민은 그가 이 아라비아반도에 혼란을 불어넣은 주인공, 무하마드 빈 사우드라고 반쯤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