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70화 (370/653)

셀림브리아 조약(2)

오스트리아는 꽤나 복잡했다.

그들이 지배하던 왈라키아를 러시아에게 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리스까지 해방해야 했다.

물론 이전부터 두 나라 모두 정교회라 가톨릭이 국교인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꾸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리스는 처음엔 오스만이 나약할 때 남진하여 그리스를 점령한 오스트리아의 카이저에게 환호했으나, 나중에는 그들의 친가톨릭화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러시아, 심지어 저 멀리 있는 진주의 테르샤로마 같은 곳에 지원을 요청하려는 독립운동 세력도 생겨났다.

오스트리아로서도 같은 가톨릭인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도 통제하기 힘들어 죽겠는데 종교도 다르고 걸핏하면 어깃장을 놓는 그리스인들은 더욱 좋게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만연한 시대, 식민지와 속국, 보호국을 마냥 힘없이 잃어버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이 얼마나 자국에 이익인지는 따져보아야 한다지만, 영토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러시아와 고려가 간섭하여 왈라키아를 뜯어내고, 그리스까지 해방시키라 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을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지금 동맹이며, 심지어 마리아 안나는 러시아의 황후인데도!

하지만 고려는 곧바로 적절한 이권을 보장해 주었다.

고려가 해적을 토벌하고, 그리고 추심전쟁 이후 프랑스의 향료제도를 압수한 이후, 누산타라는 사실상 고려의 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려는 해결책으로 오스트리아에게 자와섬과 티모르섬 일대를 제시했고, 이는 오스트리아를 좋은 의미로 크게 흥분시켰다.

바다로 나간다니.

사실상 누산타라와 인도는 쟁쟁한 해양 열강들의 손에 휘둘러지고 있었으니, 후발주자인 오스트리아로서는 제아무리 그들이 육지와 유럽 내에선 강력하다 하나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곳이었다.

추심전쟁 이후 향료제도와 알제를 빼앗긴 프랑스조차도 아직 아프리카의 이곳저곳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수에즈가 뚫리기 전까지 지중해의 해외 식민지 접근성은 그야말로 참담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제아무리 열대기후의 작물들을 재배할 수 있다지만 자와와 티모르의 생산력은 당연히 그리스에 한참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경제력만큼이나 큰 유지비가 들었고 조세저항도 컸으며 독립운동으로 골칫거리였던 반면, 플랜테이션과 상업작물, 바다와 해외식민지의 개념은 국민들을 만족시키기엔 실로 충분했다.

남부 누산타라의 원주민들 입장에선 실로 냉혹한 제국주의의 현실이겠지만.

러시아도 삐진 오스트리아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며 달랬다.

앞으로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훼손시킬 수 있는 남슬라브계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확고히 부정하겠다고.

러시아가 폴란드를 공격하며 천명한 ‘범슬라브주의’는 발칸반도에 있는 남슬라브계 민족들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에 사는 남슬라브족은 슬라브인들이 주축이 되는 국가 건설을 같은 슬라브인 루스에게 지원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이 같은 약속은, 특히나 남슬라브계가 많으면서도 정교회의 비중이 많기까지 한 세르비아를 극도로 실망시켰다.

이에 불만이 생긴 세르비아인들은 차라리 아예 독립한 불가리아나 그리스, 혹은 옛 폴란드 땅이나 지금은 러시아가 된 곳으로 넘어가게 되니, 세르비아의 ‘범슬라브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상당히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독립을 하게 된 그리스는 얼떨떨해하며 만세를 불렀다.

다른 정교회 삼국이 러시아 차르를 해방제라고 부른 것처럼, 그리스는 해원을 해방제라 부르며 칭송했다.

심지어 아테네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질 예정이란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독립 이후 새롭게 정부를 꾸리는 데 너무 많은 혼란을 겪었다.

자유라는 것은, 피로써 쟁취해 얻어낸다면 더없이 값지지만 하루아침에 주어진다면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기 마련.

혁명 이후 국민의회를 통해 프랑스를 다스린 프랑스1공화국과는 달리, 그리스 공화국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해방 그리스를 다스렸지만 정책을 어찌 집행해 볼 정부의 권위조차 없었다.

명백하게도 그들은 군주가 필요했다.

긍지가 있었던 과거와 비참한 현재를 잇는 교두보가 필요했다.

또한 거대한 국가들 사이에서 조약 하나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공상에 가까우니,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강하고 믿을만한 보호자도 필요했다.

마침, 이 모든 것이 성립하는 존재가 있었다.

게다가 그 압도적 정통성이야 말해 무엇하랴.

러시아의 속국이 된 아센 방계의 불가리아 대공국과는 달리, 그리스는 단 한 가지를 요구했다.

아주 대담하지만 명백한 한 가지를.

‘그 선택받은 사람’은 단연코 한 사람이다.

그리스인들은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의 시장이 될 해상헌도 그들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 생각했다.

“우리의 바실렙스여, 콘스탄티노플의 해방자여, 서쪽의 용이여, 가장 고귀하고 고귀한 자여.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나이다!”

오직 해씨 황실과 팔레올로고스의 종통이자 고려의 군주인 해원만이 그리스의 적법한 왕일 테니까.

* * *

해원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아흐메트 3세와 대러시아 협력체계를 비롯해 양국의 긴밀한 관계를 다져나가자는 취지의 회담을 나눈 이후, 잠시간 머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비통에 잠긴 술탄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해원도 꽤나 승리감을 맛보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갈망의 도시에 대해 러시아인들만큼 대단히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고, 그나마 신경 쓰는 이들도 대부분은 진주 토박이들이었다.

다만 황실 내부에서는 대대손손 어느 정도 이곳을 의식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대에 와서 정치적으로 이곳을 관리하게 되었으니 해원도 입가에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할머님! 제가 노바 로마를 수복했습니다!’

이미 황릉에서 영면을 취하고 계실 선조―헬레나 팔레올로기나―는 분명히 웃고 계실 테다.

그러나 해원은 시간이 지나 창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도중, 동행한 외무상서가 올린 말에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짐보고 아테네에 가서 왕관을 써달라는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돌겠군.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전해라.”

그리스의 왕?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러시아도, 오스트리아도, 오스만도 모두 불편해할 것이 뻔한 왕관이다.

‘동로마의 황제’라는 명목상의 칭호와, 이제 실제로 존재하는 독립국 ‘그리스의 왕’이라는 칭호는 엄연히 달랐다.

심지어 지금까지 고려가 행한 평화 유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해원은 그 순간 콘스탄티노플의 총독이자 시장이 된 해상헌과 불가리아 대공이 되어버린 일리안 아센을 떠올렸다.

상헌 그 아이야, 조카 중에서 특별히 선별한 인원이라 해원의 명령에 잘 따를 것이다.

종통 방계를 군왕으로 임명하는 관습은 아직도 미주를 포함한 몇 개의 전통적인 주와 새롭게 편입된 주 중 인구가 많고 이민자 출신이 대다수며 사회 통합이 필수적인 곳에서는 계속 실시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언제든지 종통에 의해 반쯤 강제로 공직(그들 스스로는 이런 직위를 황직이라 불렀다)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계라도 종통과 가까우면 황직의 가능성이 높았으니 인기 관리 노하우나, 올바른 처신을 통해 황가의 명성에 흠을 내지 않는 법 등을 계속 훈육해왔던 것.

반면 그런 관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진주 왕가의 청년, 고려식으로 아센재웅(성씨를 앞으로 두었다)으로 불렸고 이제는 불가리아식으로는 일리안 아센으로 불릴 아이는 하루아침에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는 소리에도 낯빛이 지극히 어두워진 채로 콘스탄티노플에 와 해원을 만났었다.

황제의 앞이라 내색하지는 않았겠지만 테르샤로마보다도 낙후된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콘스탄티노플보다도 훨씬 낙후된 불가리아로 팔려 가듯 떠나는 자신의 처지가 비관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일리안 아센은 앞으로 오스트리아와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소피야 대신, 소피야보다도 낙후된 터르노보(Търново)를 사실상의 도읍으로 할 생각이었기에 더욱 우울해졌던 것이다.

터르노보야 불가리아 제국의 역사적 수도였지만, 오스만 제국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불과 이삼십 년 전(CE 1686)에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후 오스만의 노골적인 탄압으로 도시 자체가 쇠락해 있었다.

당연히 전기도, 전구도, 전보도, 철도와 잘 깔린 도로도 없다.

악단과 가극을 볼 극장도 없었고, 하다못해 화장실 변기도 없는 동네다.

아침의 신문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진주에서는 심지어 아랫사람을 통해 자전거로 유명한 음식―아이작 겹빵 등―을 배달시킬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하수도는 있는지도 모르고, 손도 안 씻고 다니는 곳에서 위생 관념이라곤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해원과 만난 이후에는 모스크바까지 가서 블라디미르를 만나고 와야 하니까, 졸지에 두 황제의 틈바구니에서 국제적인 외교술을 보여야 하는 처지에 놓인 청년은 한 나라의 군주고 나발이고, 확 어디 죽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 고민을 풀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

물론 해원은 그의 다리가 박살 나도 불가리아의 대공답게 석고붕대를 하고 목발을 짚고 일어서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를 잘 달래 보냈는데 이제는 그리스가 해원을 귀찮게 했다.

분명히 해상헌과 일리안 아센의 경우를 보고 바람이 든 것이 틀림없었다.

[폐하!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안 한다고 전해도, 그리스인들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고려와 동아시아의 관습에서는 세 번 거절하는 것이 있다며 계속해서 열심히 주청을 올렸다.

심지어 해원이 다섯 번이나 거절하여 정말로 완고하게 부정의 뜻을 보인 이후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진주의 유명 신문사와의 독점 면담에서, 이들은 그들 나라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정했다.

실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 그리스 입헌왕국은 명목상의 군주를 우리의 정당한 바실렙스이자 자줏빛 혈통인 해씨 가문의 황제로 둘 것입니다.

부모에게 억지로 뭘 사달라며 칭얼대는 애들이냐며 화를 내는 해원의 개인적인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저 동아시아에 위치한 반도 나라에서 있었던 입주책동보다도 더욱 대범한 짓을 저질렀고 끝내는 개천력 440, 서기 1715년에 열릴 첫 번째 올림픽의 준비를 인질로 마침내 고려가 그들에게 파견하는 대사의 이름을 ‘고등판무관’으로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 * *

당시,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표트르 로마노프는 이후 고려의 공세에서 퇴각하는 것엔 성공했지만 블라디미르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이후 블라디미르가 모스크바로 돌아가기 전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도 받았다.

전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차르는 그날 밤 등짝의 피부가 눈 뜨고 못 볼 만큼 끔찍한 형상을 하고 엎드려 있는 표트르에게 직접 약을 발라주고는 긴밀한 말을 나누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진 않겠다. 네가 생각한 것이 뭔지는 알겠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차르의 생각을 미리 예측하고 행동하는 신하는 가끔은 좋지만 그보다는 먼저 불쾌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으니.”

“…송구합니다, 차르.”

블라디미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톨리아와 발칸에서의 일은 이제 끝났다.”

또다시 고려에게 가로막혔다.

러시아가 야욕을 드러내면 고려에 의해 제지당하고, 제지당한 곳에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에 야욕을 드러내면 다시금 고려가 거기까지 손을 뻗어 제지하는 것의 반복이다.

더군다나 이젠 러시아가 직접 나설 수도 없었다.

그들도 숨을 돌려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스만을 약화시켜야 할 때지. 대리자들을 내세워서라도. 네가 올린 계책을 실행할 때가 왔다. 그자, 정녕 쓸만하더냐?”

“타고난 군사적 재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

블라디미르가 호승심을 드러냈으나, 표트르가 아픈 와중에도 웃으며 말했다.

“차르, 어찌 한낱 목동과 당신을 비교하려 하십니까.”

“…페르시아는 잠재력이 있는 곳이야.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가 만약 우리의 지원으로 페르시아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면 은혜를 잊고 우리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

“페르시아가 오스만, 그리고 무굴과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설령 그가 사파비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샤가 된다고 해도, 우리 러시아와 대적하기보다는 메소포타미아의 완전한 통제와 메카와 메디나의 영역을 보장받길 원할 것입니다.”

설령 셀림브리아 조약이 서아시아와 발칸에 일시지간 평화를 불러왔다고 하더라도, 블라디미르와 해원 간의 모종의 교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세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고려와 러시아의 패권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곳으로 그 불길이 옮겨갈 뿐.

이번엔 페르시아가 그 무대가 될 것이다.

마침 고려도 진작부터 그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리도 들렸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러시아가 고려의 모략을 막을 때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후원을 받는 목동 출신의 젊은 아프샤르족 군벌, 나디르 콜리(Nader Qoli)는 그곳에 혼란을 가져올 적임자였다.

“너를 한동안 유배를 구실로 사마르칸트에 보낼 테니, 너는 그곳에서 현지의 상황을 관리하라.”

“명을 받듭니다, 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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