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67화 (367/653)

패권 전쟁, 갈망의 도시(2)

공상과학 소설가 허균이 말했듯, 고도로 발전된 과학은 마법 혹은 주술과도 같았다.

중세시대, 실존하지 않았던 마녀와 악마들을 찾아다녔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고 이성의 시대가 밝아오며 그 옛날의 행위들을 부정하고 흑역사로 취급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떠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을까.

아흐메트 3세가 느꼈듯, 블라디미르도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전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차르조차 얼이 빠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병사들이야 오죽할까.

불가해한, 이성의 바깥에 있는 물체는 사기를 참담히 하락시켰고 어떠한 대응에도 나설 수 없게 만들었다.

하늘을 나는 괴물과 어찌 상대한다는 것인가.

일반적인 용사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와 페르세우스가 아니었다.

전설의 말 페가수스도 없었으며 전설의 신병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만한 용맹도 있지 않았다.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외통수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고려군이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은, 이전과는 다른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낡아빠진 오스만 수석식 소총에서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화기를 지닌 고려 군사들로.

저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지만 프로이센, 스웨덴과의 전투에서 다혈포와 포병 지원사격으로 잘 구축된 전선에 돌격을 행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는 사실을 이미 배운 블라디미르로서는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깃발만 바꾸어 꼈을 뿐, 오스만의 군사들도 저 성벽 안에서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다.

저 갈망의 도시를 눈앞에 두고, 차르가 먼저 꽁무니를 빼자고 제안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것은 지극한 불명예였다.

게다가 이미 대북방전쟁 때 한 번 꽁지를 말았던 것도 있었다.

‘빌어먹을 사촌이여, 또다시 우리를 가로막는가?’

그는 이빨을 뿌득 갈아댈 뿐 뾰족한 수를 떠올리지 못한 채, 진지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차르의 진퇴양난을 읽은 표트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블라디미르가 이번 일로 불명예를 홀로 온전히 짊어진다면, 러시아의 성과와 개혁은 좌초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독단적으로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패배는 자신의 허물이 될 것이고, 차르는 그를 호되게 징벌하여 다시금 권위를 세울 수 있으리라.

작게는 채찍질과 태형, 그리고 좌천부터 크게는 징역이나 시베리아로의 유배까지.

대신 그것은 표트르 자신에게는 더없는 허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한 친우이자 주군을 위해, 표트르는 그 정도 오명을 감내할 수 있었다.

“전군, 공격하라!”

표트르가 이끄는 정예총병대가 총을 꼬나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일부라 하나, 러시아군이 하도 많았기에 표트르 휘하의 군대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사기는 높지 않았지만, 그동안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공격을 실시했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포병대와 제사총대도 그때서야 부랴부랴 앞으로 나섰다.

이번 공격은 차르도 예상하지 못할 공격이었으니, 고려와 오스만으로서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공격이었을 것이다.

넓은 전장은 한눈에 볼 수 없다.

표트르의 노림수는 간단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의 무장은 아주 간단한 무장이었다.

약간의 총알과 화약이 있는 화약낭이 전부.

그러나 그렇게 가벼우니 빠르게 적의 성벽까지 도달한다.

말만 쉬워 보이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 함대는 혹시나 해안가의 여러 위협들이 있을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르마라해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에 러시아가 가장 왼쪽 측면을 노린다면 포의 사거리가 닿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니 포대를 왼쪽 측면에 집중시켜 밀집된 화력을 구성한다.

금각만의 오스만 함대는 완전히 배제한다. 설령 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식 함포와 포격전을 벌이면 벌였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을 셈이었다.

또한 러시아군도 이곳에 온 뒤 마냥 놀고 있지는 않았기에 항복 편지를 보내는 동안 요새를 공략하는 아주 정석적인 방법, 즉 공성용 참호를 성 근처까지 닿게끔 길게 뚫어놓은 참이었다.

그러니 이 참호를 통해 최대한 가까이 돌입한 후, 가장 용맹한 척탄병들과 총병들을 앞세워 아주 전형적인 공성전을 실시하면 어쩌면 허를 찌를 수도 있었다.

성벽이 상하겠지만, 이제는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순간이 아니었다.

“와아아!”

러시아의 기습적인 공격에 당황한 듯, 성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설령 표트르만큼의 명장이라도 자신이 생각하고 예상한 것 안에서나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 어떤 명장도 자신의 상상 이상의 기물들, 경험해 보지 못한 존재를 상대할 순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비행선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지상에 발을 붙인 이들의 시야가 대체로 선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하늘에서는 이 모든 상황을 면 전부로 관찰하고 있었다.

오스만이 넘겨준 콘스탄티노플의 지도를 토대로 하늘 위에 떠 있는 비행선에 있는 관측자들은 성능 좋은 대형 망원경을 통해 후방의 포대에 좌표를 불렀다.

도착한 순간부터 작전지역에 대해 군사좌표를 만들어 놓았던 고려군은 공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적의 위치와 예상공격로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비행선에는 두 가지 정보전달체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보선도 연결되어 있었고, 전보선이 끊어질 때와 바다에 떠 있는 함선에게 연락하기 위해 미리 전등과 반사용 오목거울을 이용한 신호기까지 있었다.

이를 통해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를 받아든 포대의 관측병들이 포구를 조절했다.

처음 입대할 때는 수학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던 관측병들은 엄청난 집중교육으로 인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사격제원을 읊어대고 다시 잠들었으니, 이미 손때가 많이 묻어 몇 글자는 지워진 계산자를 들고도 엄청나게 빠르게 사격 준비를 마쳤다.

바다에 떠 있는 함선들도 마찬가지였다.

“좌표 확인했나!”

“예!”

함선들은 조금 더 구체적인 정보를 받았다.

성안에 있는 소구경의 야포들과는 달리, 함선의 대포는 그 크기가 차원이 달랐다.

강인하고 압도적이다.

운반과 기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기술이 발달한 지금에도 육지에서 쓰는 야포는 호리호리한 어린아이의 팔뚝과도 같았다면, 함선의 함포는 시대가 지날수록 계속 커졌으며, 위엄급 전함 세 척에 달린 250미리 함포는 건장한 남정네가 몇 년 동안 하루 종일 쇠질에 매달려 만들어낸 역작과도 같았다.

운반할 포 무게는 조상님이 아니라, 바다가 들어주는 것이니만큼 육지와는 다르게 커질 수 있었으니까.

제철과 제강이 계속 발달하고, 강선과 기타 여러 가지 부품들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칠 공작기술 등이 증가하며 차츰차츰 거대해진 강철의 함포는, 표트르가 예상한 사거리와 정확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함포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발포했다.

― 콰아앙

포좌에 있던 사람들이 귀를 막고 웅크렸다.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배가 우르르 떨고, 바닷물이 출렁였다.

해군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퇴복좌기가 없었으면 아마 거포를 동시에 발사할 때마다 배가 뒤집혔을지도 모르겠다며 웃음을 흘렸다.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이 끝나고, 비행선에 설치된 신호기가 빠르게 함선에게 빛을 반사했다.

점과 직선, 점과 점, 직선, 직선.

함대의 정보장교는 한 손으로 망원경을 통해 번쩍거리는 거울을 바라보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신호를 옮겨적었다.

바로 옆에서 서신을 받은 포병장교가 곧바로 포병들에게 다가갔다.

“수정사격!”

장교들이 정밀하게 계산해 나온 좌표를 토대로, 병사들이 각도를 다시금 수정했다.

“발포!”

정말이지 먼 거리에서 함포를 쏘아대는 입장에선, 가끔 울리는 진동과 굉음, 그리고 매캐한 화약 연기가 거슬릴 뿐, 전투의 현장이 살갗으로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함포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전투의 현장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유탄의 발명 이후, 포는 사람을 최대한 많이 살상하기 위해 발전하기 시작했다.

쾅 터져 사방에 파편을 튀기도록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이전과 달리 포탄이 떨어지면 병사들은 머리를 숙이고 땅바닥에 엎드리지 않는 이상 시신이 되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함포는 단순히 시신으로도 남을 수 있는 자비를 허락하지 않았다.

엄청난 장약을 통해 엄청난 사거리에서 발사하는 포탄은 그 내부에도 무시무시할 정도의 작약이 들어있어 목표물에 명중하는 순간 근처에 있는 불쌍한 사람을 다진 고기 조각, 혹은 고기 조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땅에 거대한 구멍을 파게 만들었다.

두 번의 수정사격에 이어 마침내 효력사가 떨어진 지역은 바로 러시아의 포병대가 진지를 구축한 자리였다.

그들도 나름대로 빠르게 포탄을 발사하기 위해 서둘렀지만, 이미 그들이 초탄을 발사할 때는 고려의 두 번째 탄이 근처에서 폭발한 후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심에 손과 온몸을 덜덜 떨며 포탄을 발사한 러시아 포병대의 포탄은 계획했던 성문과 성곽이 아닌 영 엉뚱한 곳에 떨어져 민간인 사상자만 내었다.

반면 떠 있는 바다, 그것도 아주 먼 거리에서 발사한 고려의 세 번째 함포는 완벽히 그들을 정타했다.

폭발하는 함포탄의 소리는 발사한 인원들이 들었던 소리보다도 훨씬 더 컸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블라디미르조차 망원경을 떨어뜨렸을 만큼 끔찍했다.

단 한 번의 효력사에 포대가 침묵했다.

생존자는 없어 보였다.

“끄으어….”

저 구덩이 외곽에서 러시안 그린이 붉게 물든 군복을 입고 하반신을 반쯤 잃은 채 장기를 내어놓고 기어 다니는 사람들을 생존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한 발의 효력사로도 모자라, 고려의 다음 사격이 당도했다.

아예 그 지역에 구덩이를 몇 개 더 파버리겠다는 속셈인지, 함포는 같은 좌표로 두 번 더 발포했다.

― 콰아앙

잔혹하고 잔혹했다.

전쟁의 본질은 이 이외의 단어로는 수식할 수 없다.

끝끝내 연기가 가셔진 피탄지가 마침내 블라디미르의 시야에 잡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포병대 하나가 전멸했다.

비싼 강철로 만든 러시아의 대포들도 형편없이 구겨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강철보다 나약한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마냥 사라졌다.

“후… 후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 번에 러시아군 전체는 전의를 잃었다.

표트르의 의도대로, 러시아군은 차르가 빠르게 후퇴 명령을 내리길 바랐다.

단 한 번의 포격으로.

“폐하, 지휘부도 위험합니다! 후방으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장교들이 고함을 질렀다.

애초부터, 고려의 함대는 러시아 지휘부까지 사정거리에 넣고 있었을지도.

* * *

표트르는 자신의 군대가 모조리 녹아내리는 광경을 눈 뜨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포병대가 박살이 난 이후, 어딘가 공허해진 그는 다소 안전하다고 생각한 언덕에서 망원경으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군, 도망치셔야 합니다. 이곳은 포병대보다도 앞쪽입니다!”

“저들을 두고 내가 도망가랴? 저들을 사지에 밀어 넣고 내가?”

이미 그의 군대 대부분은 참호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죽을 것이다.

공성용 참호는 시간상의 이유로 그렇게 깊게 파지 못했고, 총알을 피하기 위해선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참호는 결국 성벽 근처에서 끝이 나기 마련.

거기서부터는 아무런 엄폐물이 없는 평지에 불과하다.

― 타타타타

기다렸다는 듯 성에서 수많은 다혈포가 발포되었다.

성으로 돌진하던 병사들은 허우적대며 사지를 흔든 다음 바닥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몰랐지만, 압도적인 정보전달속도로 이미 성벽의 한적한 곳에 균일하게 배치 있던 다혈포는 적의 공세가 시작되자마자 참호가 끝나는 지점으로 빠르게 이동했고 참호의 끝에서 재정비한 뒤 나와서 돌격하려는 러시아군들에게 무자비한 탄환을 선물해 주었다.

그들의 제사총은 참호 어딘가에서 병목현상을 겪고 있겠지.

참호에서 머리를 들거나, 혹은 나가는 즉시 운명을 달리한다는 것을 깨닫자, 제아무리 용감한 러시아 척탄병들과 보병대라도 온몸을 웅크리고는 흙 속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참호에 엉덩이를 붙인 채 눈물 콧물을 흘리던 사람들은 멍청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등장은 심히 충격적이었으나, 오래도록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잠자코 성벽 너머에서 둥둥 떠 있을 것만 같았던 저 괴물.

비행선이 마침내 계류를 위해 지상의 첨탑에 묶어놓았던 줄을 풀고 앞으로 전진했다.

* * *

정식 명칭은 비행선이지만 함교라 불리는 지휘실에 있던 비행전단장이 직접 포탄 투하실로 내려와 전투를 준비하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인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고려조차 단 한 번도 이런 공격을 감행해보지 못했기에, 지금의 경험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까처럼 아군 대포와 군함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비행선에 폭탄을 싣는 것도, 지금 그 폭탄을 적에게 유효하게 투하하려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해왔던 수많은 훈련은 훈련이고, 실전은 엄연히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는 실패를 의식하지 않았다.

이 이후로, 인류 문명은 마침내 하늘이라는 새로운 전쟁터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공군’은 육군과 해군에 뒤이어 새로운 미래의 전략병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에게 인망이 좋은 비행전단장은, 출격 전에 질펀하게 술판을 벌여 이미 친근해진 병사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그들을 북돋웠다.

“고도가 높아 정확도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되도록 성벽에 최대한 해가 되지 않게 참호만을 노려보도록!”

병사들도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우렁차게 외쳤다.

시끄러운 증기기관과 바람 소리에도 그들의 외침은 기낭을 진동시킬 만큼 쩌렁쩌렁했다.

“알겠습니다!”

비행선의 본체 후면 바닥이 열렸다.

기차보다는 느긋하지만 그래도 꾸준한 속력으로 추진한 비행선은 추진력을 받은 뒤부턴 보병보다는 훨씬 빨랐기에 이미 참호의 머리 위에서 러시아군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득한 밑에서 누군가 무심결에 그 괴물에 저항하고자 총을 들어 올려 발사하는 것이 보였다.

슬라브인들 특유의 저항정신에, 하나둘씩 그의 행동을 따라 해보려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머리 위로 발사한 그들의 총탄은 터무니없이 짧았기에 비행선에는 도달하지도 못했다.

전단장이 망원경을 내려놓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뭐 노력은 가상하지만 사거리가 턱도 없을 텐데.”

“총에서 발사되는 흑색화약 연기로 엄폐해 보려는 것이 아닐까요?”

“차라리 그 효과가 더 있겠구나. 자! 제군들, 투하하라!”

“투하!”

비행선에서 공대지 폭탄이 마침내 그들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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