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과 조약, 협상과 동맹(5)
이번 일은 이 밀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 뒤, 세 명의 특사와 한 명의 보좌관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튀니스에서의 밀약’을 각국의 군주들에게 다시 한번 허락을 받고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개인의 표정이야 어쨌든, 국가적 이해관계는 어느 한쪽으로 수렴한 것이다.
일이 끝나고 헤어지기 전. 러시아 특사가 프랑스 특사를 보고는 은근한 제안을 해 왔다.
“그런데, 그대의 통령께 말씀을 드려보시구려.”
“뭘 말입니까?”
“칭호를 프랑스 공화국의 통령이 아니라, 프랑스 제국의 황제로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고.”
“…….”
공화국의 정서상 반동스러운 말이라, 프랑스 특사는 러시아 특사를 노려보았다.
꼭 끝나고 이렇게 초를 치는 게 과연 무식한 슬라브인답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러시아 특사는 꿋꿋하게 강조했다.
나름대로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지, 직접 발음까지 강조해가며.
“프랑스의 황제(Empereur de France)가 아니라,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가 되는 것은 어떻냐, 이 말이오.”
그렇게 된다면, 다른 두 나라의 근심도 살짝은 덜어질 수 있을 거라고.
“삼국동맹이 아니라, 삼제동맹이 조금 더 격식이 있지 않겠소?”
“첫째로, 귀국과 아국은 밀약을 맺었을 뿐 동맹이 아니오. 둘째로, 제정 같은 쓰레… 철 지난 말로 우리 프랑스를 모욕하지 마시오.”
“알았소, 사과하지.”
능글능글함을 되찾았는지, 러시아 특사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한 발짝 과장스럽게 물러나는 행동을 취했다.
프랑스 특사는 그를 한 번 노려보고 지나갔다.
“좋은 시도였습니다만, 저 치들에겐 들어먹긴 힘든 말이지 않겠습니까?”
그의 옆으로 다가온 오스트리아 특사의 말에, 러시아 특사가 피식 웃었다.
“권력을 쥐면, 사람은 바뀌기 마련이지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바뀔 수 있다.
그 동기가 개인의 욕망일지, 혹은 다른 요인일지.
심지어 혼란한 사회가 그 동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왕관은 신비롭고 신성한 것이라, 프랑스의 신민들도 지속된 사회의 혼란에 언젠가는 옛날 시절을 그리워할지 모른단 이야깁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지도자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외젠일지, 다른 사람이 될지는 몰랐지만.
그때가 된다면, 세 황제의 동맹은 진지하게 논의해 볼 수 있으리라.
* * *
파리에서 도망쳐 나온 클로드는 서쪽으로 도주했다.
그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판단을 내린 덕에, 파리에서 빠져나온 이들의 숫자는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데파르트망 기준으로 방데(Vendée) 지역으로 도주했다.
이곳에는 외젠 파벌의 영향력이 약했으며, 가톨릭 세력들도 많아 1공화국의 입김이 적은 곳이었다.
클로드의 탄탄한 지휘 덕택에 이곳에서의 저항은 조직적이었고 체계적이었다.
한때는 루아르아틀랑티크나 샤랑트, 지롱드나 모르비앙 등 인근의 다른 데파르트망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어 심지어 정말로 내전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세력을 일궜던 적도 있었다.
권위와 땅, 재산이 몰수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 가톨릭이나 왕당파, 온건파, 그리고 혁명군에게 밉보인 부르주아들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싶지 않다면 계속 저항해야 했으니 그 사기도 드높았다.
그러나 1710년, 그 저항도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
프랑스는 일찍부터 중앙집권화된 덕에 유난히 파리 집중적인 면모가 강했고, 제아무리 저항이 조직적이라도 파리를 손에 쥐지 못한다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과 같았다.
결국 1공화국은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더라도 서부를 진압해내었고, 저항군은 마침내 방데에서 최후를 맞이할 순간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수평선에 배가 오고 있습니다!”
클로드는 그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공화국 해군인가?”
어차피 죽기로 작정했다지만 앞뒤로 포위당하는 것은 사기를 심각하게 떨어뜨릴 테니,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우다 죽지도 못하는 것이다.
“당수!”
하지만 망원경을 건네는 부하의 표정이 잔뜩 밝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망원경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던 클로드 또한 터져 나오는 환희의 탄성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카스티야의 깃발!’
그리고 카스티야의 깃발 밑에는,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푸른 바탕, 그리고 백합.
프랑스 왕실의 깃발이 달려 있는 이유는 저항군에게 이쪽이 아군이라고 표시하는 것과 같겠지.
클로드를 포함한 모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가 보낸 수송함대는 목재 수송선과 구형 기범선이 대다수였지만, 그 수는 무려 30여 척에 달했다.
그리고 그 수송함대를 호위하는 군함만 다섯 척이었고.
‘카스티야도 이 정도의 최신형 철갑함을 만들 수 있었던가?’
클로드는 그 군함을 바라보고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금방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들도 해양전통이 있는 나라니, 노력만 한다면 금방 해낼 수 있겠지.
지금은 도와주러 온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반대편 수평선에도 또 다른 함대가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1공화국의 함대가 아닐까 하여 서둘러 그곳을 바라본 클로드는, 이번에도 프랑스 삼색기가 아닌 다른 국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성 조지의 십자에, X형으로 기울어진 스코틀랜드의 흰색 성 앤드루 십자, 대각선과 중앙의 원에는 녹색과 주황의 에이레 십자, 마지막으로 중앙의 원에 조그맣게 그려진 용까지.
복잡하기 그지없지만 그 덕에 인식하기 쉬운 알비온 연합의 깃발.
주변국들이 지금 1공화국을 어떻게 여기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어쩌려고 그랬나, 외젠.’
* * *
저항군을 태운 카스티야 수송선단은 남쪽으로 향했다.
클로드는 처음에 이들이 카스티야 본토로 향하는 줄 알았지만, 방향이 계속 정남쪽이라 의아해했다.
이내 마지막 도착지를 보았을 때는, 예상외의 판단에 다소 놀랐을 정도.
그곳엔 나바르 왕국으로 대표되는 바스크 지방이 있었다.
나바르 왕국은 지금도 엄연히 프랑스 왕의 땅.
그리고 이곳에서 사는 바스크인들은 딱히 프랑스인들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위그노들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으니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후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카스티야나 아라곤은 이곳을 탐내 금방 집어삼킬 줄 알았는데…?’
혁명정부가 나바르 수호에 대한 별 의욕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된 순간, 카스티야는 이곳을 점령하고 입을 씻은 뒤 모른 척해도 되었을 것이다.
‘혹은, 한 번 외젠에게 호되게 데였으니 이들은 어쩌면 1공화국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함대가 마침내 나바르 왕국의 항구인 라부르(Labourd)에 클로드와 저항군을 내려놓자, 클로드는 마땅한 감사를 건넸다.
“우리를 구명해준 귀국의 행동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카스티야 수송함대를 이끌던 제독은 어쩐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클로드는 그 얼굴에서 카스티야의 움직임이 백 퍼센트 완전히 그들의 본의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호위함대장도 같이 만나보셔야 하겠군요.”
클로드가 카스티야 제독의 말에 등 뒤를 바라보자, 어느새 항구에 도착한 호위함대는 깃발을 바꿔 끼고 있었다.
카스티야의 해군기가 있던 자리에는 고려의 해군기인 푸른 드래곤, 아니 동아시아의 용이 그려진 깃발이 달렸다.
‘그러면 그렇지.’
클로드는 해군의 일에는 문외한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저 함선들이 무언가 고려의 함선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던 참이다.
이윽고 남자가 봐도 중후하게 잘생긴 고려 군인이 클로드에게 다가와 경례를 올렸다.
보통 군인예법이 확정된 이후, 고려군은 일반적인 외국인에게는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클로드는 세력을 많이 잃었더라도 엄연히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영향력이 높은 정치인이자 군인이었고 고려는 그를 도와주는 입장이니 예를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고려 대동양함대 1전단 2전대장 백지섭이라 합니다.”
꽤나 프랑스어가 유창했다.
고려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그는 내심 다행이라는 속내를 감추고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아국은 프랑스의 정식 정부를 군사반란 이전의 국민의회라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려는 마냥 예전의 앙시엥 레짐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추심전쟁만 해도 고려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으니까.
또한 결정적으로 국민의회는 루이 13세의 처형에 반대한 것이 컸다.
국민의회에는 엄연히 입헌주의 파벌과 평원파 등이 있었으니 고려는 프랑스가 최대한 온건적인 입헌군주국, 혹은 공화정이 되더라도 부르주아적 공화정이 되길 원했다.
말이 통해서 서로 무역을 할 수 있는.
지금처럼 과격파와 상퀼로트의 입김이 강한 프랑스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불안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전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루이 카페가 왜 처형되었는가.
국난을 해결하고자 외세의 힘을 빌리는 군주는 그 어떠한 군주보다도 못난 사람이었으니.
클로드는 그 실수를 다시금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들을 구명해 준 것은 좋으나, 프랑스의 일은 프랑스인이 해야 합니다. 혁명의 결과가 어떤 것이 되었건, 우리는 그것을 뒤집기 위해 외부의 힘을 빌리지는 않을 겁니다.”
비록 바스크 지방에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클로드는 선을 넘지는 않았다.
백지섭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마 이 정도로 끝내야 하겠지.
하지만 클로드는 외젠이 쿠데타를 일으킨 마당에 마냥 정석적으로, 아니 꼴통스럽게 정도만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가 앞으로 자신이 내뱉을 말에 자괴감을 느끼는지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돈이 풍부한 고려라 말을 드리는 것인데.”
이윽고 그는 부하 몇 명을 시켜 궤짝 하나를 들고 오게 했다.
뭔가 들어 있을 텐데, 그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금화나 은화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면, 옮기는 사람들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을 테니까.
마침내 자신의 발 앞에 놓인 궤짝을 연 백지섭이 그 내용물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게 다 뭡니까?”
토지 안에는 종이들이 뭉텅이로 들어 있었다.
국민의회의 명의로 발급된 토지채권, 아시냐(Assignat)였다.
부르주아들에게 억지로 세금을 걷기에는 그들의 또 다른 저항이 우려되었던 국민의회는 이들에게 명목상 토지채권을 발행해 강매했다.
채권자는 원천적으로 국토를 구매할 수 있었고, 사지 않는다면 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액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회가 얻을 수 있는 토지의 한계는 정해져 있었다.
맨 처음,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압류하여 채권을 발행한 국민의회는 압류한 교회의 재산보다 채권이 훨씬 더 막대하게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권 발행을 멈추기도 어려웠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 프랑스는 또다시 끔찍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 테니까.
그리고 지금 통령 외젠은 숙청한 사람들의 재산으로 이를 돌려막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나 외젠이나 다른 국민의회의 사람들이나 아시냐의 한계가 금방 찾아올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 한계가 온다면, 외젠의 통령정부는 이 채권을 유통 금지하고 신용회복 불가능을 선언하며 한낱 종이쪼가리로 만들어버리겠지.
그러나, 클로드는 그동안 아시냐가 저항군에게는 상당히 쓸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이를 철저히 모으도록 지시했었다.
방데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할 때도, 이 아시냐들은 계속 클로드가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외세의 개입이 어디까지나 채권의 회수에 한정된다면, 우리의 명분이 크게 손상될 일도 없다.’
그리고 때마침, 고려가 그들을 구원했다.
아시냐를 계속 매만지며 이것을 사용해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클로드는 이제 어떠한 운명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려어는 모르지만, 고려에서 쓰는 속담은 몇 개 아는 것이 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지.
고려의 의사가 없다면, 아시냐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채권, 구입하시겠습니까?”
그제서야 백지섭은 그 의미를 깨닫고 말문이 막힌 듯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의 규모를 넘은 듯합니다. 본국에 연락을 취해보지요.”
그러나 답신은 긍정적일 겁니다.
완벽한 명분이니까요.
덧붙여진 말에 클로드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흘렸다.
물론 고려는 주변국들과는 달리 프랑스의 영토에는 이해관계가 없고 단지 돈을 지불받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이 지난 추심전쟁으로 증명되었었지.
그러니 그도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의가 서린 채로 다시금 눈을 뜬 클로드는 외젠이 있는 북동쪽을 노려보았다.
‘외젠, 네놈은 그 비뚤어진 생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며 그것이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겠지.’
조금의 소란은 있을지언정, 적법한 대의명분과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얻어지는 정당성을 버리고 종신 통령에 오른 순간부터 혁명의 기치는 이미 훼손되었던 것이다.
클로드도 결심했다.
‘그러니, 나 또한 너에게 2차 추심전쟁을 선물해 준다고 해서 아니 될 것이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