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과 조약, 협상과 동맹(3)
마침내 루이 13세, 루이 카페의 판결에 대한 법정이 세워졌다.
역시나 혼란스러운 국민의회의 법정은 시끌벅적했다.
그래도 이제는 루이 카페가 죄를 저질렀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다.
“지난 전쟁 때, 루이 카페가 자칭 ‘복벽파’들을 선동하여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하여금 프랑스의 남부를 공격하도록 지시한 증거가 여기 있소이다!”
외젠의 파벌로 여겨지는 한 사내가 열심히 서류를 흔들어대었다.
“루이 카페는 민족의 반역자요, 국민의 배신자입니다! 그가 우리의 거짓된 왕이었던 시절에 행한 일들은 또 어떻구요!”
― 옳소!
국민의회에서는 우선 루이 카페의 유죄판결에 대한 투표를 먼저 실시하기로 했다.
그가 죄를 저질렀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첫 번째 투표는 압도적인 표 차이를 보였다.
“총 701표 중 682명이 찬성을, 18명이 반대를 하였으므로 이에 시민 루이 카페의 죄목에 대해 유죄를 선언하는 바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모두가 박수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욱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루이의 죄에 대한 형벌은 어떻게 내릴 것인가?
외젠의 파벌들이 다시금 주장했다.
“루이 카페를 죽입시다! 목을 매답시다!”
“그를 살려두는 한, 복벽 시도를 비롯한 반동은 계속 일어날 것이오!”
“우리는 혁명정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어떠한 요소도 단호하게 척결해야 합니다!”
산악파의 과격한 주장에 다른 파벌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정숙, 정숙하시오! 다른 의견도 들어보도록 하겠소.”
다행스럽게 지금 법정의 주 재판관은 중도로 분류되는 인물.
그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클로드 파벌의 인사 하나가 나섰다.
클로드라고 해서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진 않았다.
그도 파리 시내의 수많은 카페들을 찾아가, 그곳의 명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당파는 정국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산악파의 득세를 불안해하는 온건파와 부르주아들은 충분히 많았다.
외젠이 국민의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클로드는 루이 카페의 사형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또한 루이 카페를 법정에 세우는 것에 반대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결백을 주장하기에는 루이가 저지른 일들이 너무 많았다.
왕정에서 저지른 탐학도 그랬고.
특히나 최근 카스티야로 도망치려던 사건은 프랑스와 파리의 시민들은 물론이고 왕당파와 클로드에게도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선사해 주었었다.
그러나 루이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클로드의 대변인이 열심히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사형 집행이라니요. 이것이 불러올 외교적 파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유럽의 왕통들이 혈연으로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것을 생각해보면, 루이의 목을 매다는 것은 온 사방 왕들의 얼굴에 똥물을 투척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 조국 프랑스는 위태롭습니다. 우리의 조국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다시금 받길 원하십니까?”
프랑스 혁명은 상당히 묘한 시기에 일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옆 동네의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관망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알자스―로렌을 다시금 수복하려고 시도했을 터.
그러나 프랑스가 루이 13세를 법정에 세운 시기는 기가 막히게도 두 나라, 그리고 그보다 북동쪽에 있는 나라들이 한바탕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폴란드의 평원과 도나우강, 발트해가 핏빛으로 물들고 있는 이 마당에 프랑스와 다시금 싸워 굳이 벌집을 들쑤시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카스티야를 박살 낸 외젠과 혁명군의 명성은 이웃 나라에도 널리 널리 퍼지고 있었으니.
또한 다른 나라들, 예를 들면 네덜란드와 알비온의 경우에도 ‘아직까진’ 국민의회의 일을 구경하고 있을 뿐 심각하게 적대하진 않았다.
둘 다 의회정이었으니, 국민의 참정권이 일정 부분은 해소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혁명 과정에서 보이는 사회적 혼란은 서민들도 딱히 원하지 않는 요소였기도 했다.
만약 프랑스에 악감정이 있는 잉글랜드가 알비온 연합을 주도했으면 어찌 시비를 걸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에이레는 그러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 지금 혁명 프랑스는 유럽의 골칫거리라는 것엔 이견이 없었지만, 유럽의 ‘공적’이라고 보기엔 다소 미묘했다.
사실 공적이란 표현은 일부 국가들에겐 저기 미치광이 전쟁광 군주가 있는 러시아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니.
앞으로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지 않는다면, 프랑스는 이 혁명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다.
근데, 루이 카페에 대한 사형은 이 구경꾼들을 단숨에 적대자들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 정도의 명분이라면 잉글랜드와 프로이센, 카스티야가 합심하여 프랑스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지금 비겁하게 혁명정신을 내려놓고 폭군과 압제자들에게 꼬리를 흔들자는 게요?”
“그럼, 지금 뒤 없이 싸우자는 이야깁니까? 파리의 물가가 폭등하고 배급제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마당에?”
“…그것은 왕당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충분하오!”
“꼭 바이에른파 같은 주장을 하십니다? 명심하세요. 아시냐(Assignat)의 무분별한 발행을 강행한 것은 산악팝니다. 가격상한제를 도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보셨습니까?”
아시냐는 국민의회가 발행한 토지채권으로, 프랑스 혁명기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이 과도하게 발급된 이유는 분명히 산악파의 주장 때문이었다.
물론 외교적 문제에 대한 설득뿐만 아니라 정치적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클로드 또한 알고 있었다.
외교 같은 고차원적 문제로 부르주아들을 설득할 수는 있을지언정 국민적 감정을 해소하기엔 부족하다.
그러니 그는 해야 할 일을 했다.
클로드파가 선동하기 시작했다.
“루이 13세가 저지른 죄 중 몇 개의 일은, 저 사악한 여인이 탐욕을 벌여 일으킨 일입니다!”
그와 동시에 저택에 감금되어있던 몽테스팡 후작 부인이 끌려 나왔다.
작심한 듯 그녀에게 독설을 쏟아내는 왕당파의 인물들은 이 여인이 어찌나 추잡한 짓거리들을 했는지 고해바쳤고, 심지어 루이 13세의 여러 일화 중 몇 개를 그녀가 한 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저 마녀가 국왕 폐하, 아니 루이 카페의 총기를 흐리게 하고 우를 범하게 했으니 루이는 못된 군주였으나 불쌍한 남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스페렌자 블루 이후 몽테스팡 후작 부인은 사악한 마녀와 다름없을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은 루이 13세가 그녀에 의해 현혹된 것이 아니냐는 동정 섞인 의문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전에 계획된 클로드의 작전이었다.
마녀사냥으로 치부하기엔, 몽테스팡 후작 부인이 부린 탐욕과 사치의 죗값이 컸으니,
루이 13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그녀에게 주어지는 동정의 시선은 없었다.
* * *
정치적 난전 끝에 시작된 투표는 하루가 지나도 완료되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은 72시간, 총 사흘이었다.
투표가 진행되면서 클로드는 클로드대로, 외젠은 외젠대로 얼굴을 굳혔다.
도무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클로드는 카르카손의 전투 이후 전 국민적 지지를 받는 외젠의 영향력이 이토록 큰지 다시금 체감하고 있었다.
바이에른파의 몰락 이후, 좌익들은 다시금 뭉쳤다.
메스와 낭시 노동자들이 아닌, 프랑스 하류층을 중심으로 모인 상퀼로트(Sans―culotte)는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바이에른파와는 성질이 달랐지만, 여전히 하류층 특유의 부의 재분배와 정치적 평등성에 대한 주장이 강했다.
게다가 프랑스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있었으니, 그들은 왕당파와 보수파에 반대하는 외젠을 크게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외젠은 탁월한 전술적 능력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러 술책과 협잡질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클로드에게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가 몽테스팡 후작 부인을 구원할 순 없었다.
사적인 약속을 했었더라도, 그것은 정치적으로 모험이며 적절하지 않은 판단이었다.
― 루… 루이가 도망친 경로를 알려주면 저는 사… 살려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럴 리가.
그녀도 결국 버림패인데.
차라리 일찍 처리해 버렸다면 대세에 지장은 없었을 터,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마침내 사흘째가 되어 투표가 종료되었을 때 나온 결과는 이 혼란스러운 정국을 확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루이 카페의 죄에 대한 처분 투표의 결과는 다음과 같소. 총 701표 중 즉결 사형 350표, 사형 판결이지만 집행유예로 대체 49표, 종신 금고형 284표, 기권 18표.”
루이 13세의 처형은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산악파에겐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 무슨! 사형에 동의하는 자들이 399명인데!”
반면 평원파와 왕당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중 마흔아홉 명은 집행유예를 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유예를 하는 것과 사형을 즉시 집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지금의 프랑스 법상, 사형수라 하더라도 집행유예를 받으면 시간이 지난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집행유예에 대한 법리상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과반수 이상이라는 351명이 루이 카페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소! 재투표를 실시합시다!”
“…….”
하지만 외젠은 재투표를 실시한다면, 그 결과는 도리어 이전보다도 더욱 보수화될 것이라 예상했다.
지금 산악파는 피를 보길 갈망하는 미치광이나 다름없다는 선전 문구가 나돌아다니고 있었으니.
그 틀(프레임)이 더욱 강화된다면 도리어 루이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수단을 쓸 때가 된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혁명을 지속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을.
“…가끔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설득을 해야 하는 법이지.”
이전에도 외젠은 혁명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클로드와 양분하고 있었지.
하지만 카르카손 전투 이후, 외젠은 파리의 혁명군은 물론이고 사방에서 몰려든 의용병들의 지지까지 완전히 독점하고 있었다.
카스티야가 프랑스를 침입했을 때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궐기한 동남부 마르세유의 의용병들과 같은 자들.
외젠은 이 사실을 잊지 않았다.
* * *
혁명력(Republican Calendar)으로 날짜를 세기 시작한 이후 맞이한 첫 가을.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유럽의 지식인들이 처음으로 쿠데타(coup d'État)라는 용어를 쓰게 된 브뤼메르 쿠데타가 일어났다.
투표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와아아!
사방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왕당파와 평원파를 지지하는 군인들이 항전해 보았지만, 병력의 열세를 인정한 클로드가 마침내 파리를 버리고 서쪽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파리는 산악파의 손아귀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외젠은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국민의회를 완전히 손에 쥐고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파리를 탈출하지 못한 왕당파들은 체포되었으며, 평원파들은 저택에 감금되었다.
외젠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프랑스 통령(Consulat)의 위치에 올랐고, 제1공화국을 선포했다.
급진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외젠은 혁명 발발 이후 몇 년 동안이나 무질서한 혼란에 빠져든 혁명프랑스를 재정비했다.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공포 또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외젠은 정국을 수습한 이듬해 루이 카페와 왕당파 반역자들에 대한 재판을 다시금 열었다.
사형에는 찬성하나 집행유예를 주장했던 이들은 ‘진지한 설득’ 끝에 외젠의 뜻에 교감했으니 루이 카페의 사형에 대한 재투표는 압도적인 동의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 혁명광장에는 새로운 기구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고려와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시신을 그나마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교형을 참형보다는 명예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반대로 유럽에서는 참형을 교형보다는 더 명예로운 죽음이라 생각했다.
귀족들과 기사들은 검으로 목이 잘리길 원했지, 교수대 위에서 춤추고 싶어 하진 않았다.
이러한 인식으로, 루이 13세와 몽테스팡 후작 부인, 기타 반역을 저지른 왕당파 귀족들을 처형하는 것은 당연히 참수형으로 하는 것이 맞았다.
외젠은 앞으로 집행될 수많은 이들의 참수형을 위해 고통은 조금 덜어주고 사형집행인의 피로는 낮추어주는 기구를 도입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만큼, 나중에는 힘이 달린 사형집행인이 목을 자를 때 실수해서 반만 자를 수도 있었으니까.
혁명광장에 설치된 도구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틀 안에 사선으로 되어 있는 무겁고 날카로운 칼날이 매달려 있는 구조였다.
그 밑, 둥그런 구멍에 목을 가져다 댄다면, 칼날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깔끔하게 참수형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외젠은 루이 13세를 누구보다 죽이고 싶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광경이 추악하게만 기록되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단두대에 의한 처형은 몹시 규율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의로우니, 또한 그렇기에 공포적인 1공화국의 치세를 상징할 것이다.
단두대 앞에 선 루이 13세는 의외로 의연했다.
“루이 카페.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일평생 야망을 품고 있던 사내는 그 능력이 모자라고 주변의 충언을 자꾸만 무시하는 큰 결점이 있을지언정, 그토록 행동해왔던 대로 자신의 최후에서는 꿋꿋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온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담담히 유언을 남겼다.
“짐은 하느님의 영광 아래,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해 탄생한 프랑스의 적법한 군주이다. 허나 짐의 잘못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프랑스의 신민들이 눈물을 흘리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실로 크게 통감하는 바이다. 바라건대 짐의 피가 그대 파리의 시민들과 프랑스의 신민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에 와서 루이는 진한 후회를 표했다.
허나 어쩌겠느냐. 여기까지 와 버렸는데.
죄수의 몸을 묶는 곳에 스스로 누운 뒤, 날씨가 좋지 않냐며 끝까지 농담 따먹기를 한 루이 13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목이 담길 바구니를 바라보고는 쓰게 웃었다.
― 덜컹
중력에 의해 칼날이 낙하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시민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와아아!”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두 눈을 돌리거나 감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입술을 깨무는 사람들도 있었고 눈물을 감추는 자도 있었다.
훗날 이 단두대를 프랑스 국민들은 이것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 루이 13세의 이름을 붙여, 루이제트(Louisette)라 불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