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56화 (356/653)

기업의 시대(7)

사실 지금까지 상민이 둘러본 수많은 발명과 발견들 중 대다수는 일반적인 신민들에게는 그렇게까지 피부에 와 닿는 것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해석기관? 뉴턴의 해석역학과 유체역학? 발전기?

그것들은 주로 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탄성을 내지르는 것이지 일반 사람들은 이것들이 그네들의 삶에 어찌 유용한지 갈피도 못 잡았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별로 없었다.

이런 복합적인 연구와 발명은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만 그 진가가 발휘되기 마련이다.

반면, 등장하자마자 관심을 받은 것도 있었다.

물론 이 ‘전구’의 발명 전에는 발전기의 발명이 있어야 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누가 신경 쓸까.

그저 어두운 밤에서도 환하게 불을 밝히는 이 도구야말로 전기의 효용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첫 사례였으니, 전구를 발명한 발명가 유승엽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다.

비록 기술에 대한 특허권은 일반전기회사가 가져갔지만, 그는 곧바로 임원의 자리에 올랐을 정도였다.

사실상 전구의 원리는 간단했다.

마치 유럽 배처럼 생긴 유리 내부에 등사(필라멘트)를 넣고 나머지 부분에 불활성기체{질소, 안소(아르곤)} 등을 채우고 봉하면 완성되었다.

유승엽 이전에도 이러한 생각을 가져 발명에 착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복사(radiation)가 이루어지는 등사의 구성성분이었으니.

밝은 빛을 내기 위해 저항이 높으면서도 내구성이 높아 오래 지속되는 물건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법이 아니었다.

위대한 발명에는 요령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승엽은 수천 번의 실험 끝에 마침내 특수하게 처리된 탄화된 대나무 섬유로 기존의 탄화아마와 탄화면, 탄화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전구들을 제치고 세 자릿수, 심지어 기록된 최대시간은 1,179시간까지 버틴 전구를 발명해내자, 이제 시장에 본격적으로 참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맨 땅에 시장이 개척되어 있진 않았다.

‘기존 시장이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고 경쟁자가 많으니 이를 어찌한다.’

기존까지 고려를 밝히고 있던 것들은 등불이었다.

지금껏 주요하게 쓰던 전통적인 등불은 심지로는 노끈이나 면을 꼬아 만든 것을 사용했고, 기름의 재료는 동물성 기름과 식물성 기름을 사용했다.

과거, 동물성 기름은 주로 이 시대 가장 많이 기름을 가지고 있는 동물(고래)의 지방에서 추출해 냈었다.

그 외에도 소나 돼지, 양 같은 가축에서 뽑아내기도 했으며 수렵한 멧돼지나 사슴에게서도 구하기도 했다.

동물들 중 기름 추출 효율성은 고래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괜스레 유럽인들도 눈에 불을 켜고 고래를 사냥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지.

하지만 고려는 달랐다.

성정이 온순한 데다가, 사해용왕의 가장 큰 종복이자, 자기네 당파의 명칭이 유래한 신수를 함부로 잡으면 좋지 않다는 어찌 영 이해되지 않는 논리로 경당이 고래 사냥을 반대하자 그 후부터는 동물성 기름의 수요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해찬의 치세에 들어와 자연보호법을 제정한 이후에는 더 그랬고.

대신 기존까지 동물성 기름과 같이 쓰이던 식물성 기름이 등불 기름의 핵심 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전 왕씨 고려 시대에는 참기름과 들기름 등의 기름도 썼다고 하는데, 지금의 해씨 고려에서는 다른 기름들이 훨씬 더 많이 생산되고 가격도 저렴하다 보니 두 기름은 식용 이외에는 잘 쓰지 않았다.

참기름과 들기름의 빈자리를 차지한 기름들은 가장 대표적으로 콩기름(대두유와 땅콩기름을 포함한다)과 면실유(목화 씨앗 기름), 유채꽃과 수유나무 그리고 기름야자 등이 있었다.

이중 지금까지 가장 많이 생산되는 것은 면실유와 콩기름이었다.

고려의 목화밭 크기를 본다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리라.

땅콩이야 지력을 위해 기르는 작물 중 하나였으니 지금도 광대한 고려의 농토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물이었고.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들여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기름야자(Elaeis guineensis)의 성장세는 실로 독보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원산지는 아프리카, 지금은 각국의 열강들에 의해 누산타라 일대의 열대기후에 자생하는 이 야자는 엄청난 효율의 기름을 생산해내는, 실로 기름을 위해 태어난 작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기름야자에서 추출된 팜유(Palm Oil)는 식물성 기름 중에서도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지 않던가.

단위면적당 기름 생산량은 동 면적의 유채꽃(2등), 해바라기(3등), 코코넛(4등)과 대두(5등)를 전부 합친 것보다 높았으니.

열대기후가 아니면 자생하지 못하지만, 열대기후가 된다면 몹시 잘 성장하니 가뜩이나 열대우림이 넘쳐나는 고려에겐 축복과도 같았다.

팜유는 상온에서도 고체라 비누를 만들기에도 좋았고 등불에도 쓰기에 좋았다.

비록 기름야자를 수확하고 남은 나무들은 불태우는 대신 벌목하여 재사용하라는 행정명령이 내려와 그 단가는 상당히 상승했으나 그 정도는 괜찮았다.

이렇게 등불 기름의 가격이 저렴하니, 기초적인 전기 설비를 요구하는 전구는 대중들에겐 외면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구를 홍보할 곳이 필요하다.”

개천력 430년(CE 1705), 11월 5일 성탄절.

고려의 명절과 공휴일은 전부 정일력을 썼다.

첫 번째 명절은 단연코 설날이었다.

음력은 예전에는 어찌 따져보기도 했던 적이 있었으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거의 무의미했고 따져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1월 1일’이 설날로 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일 터다.

게다가 사실상 태조 해민이 나라를 선포한 개천절 또한 1월의 초하루였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했다.

두 번째 명절, 즉 한가위는 특이했다.

창양 고려의 가을은 3월이며, 겨울은 6월 즈음이었다.

물론 남북려를 모두 석권한 지금, 북려대륙은 정반대겠지만 일국의 법제가 제도(帝都)의 기준을 따르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와는 달리 해씨 고려는 3월에 한가위를 지냈으며 나중에 정확히 확정된 이후에는 ‘3월의 첫 번째 보름달이 뜰 때’를 기준으로 하였다.

반대로, 세 번째 명절, 추수감사절은 뜬금없는 봄날에 추석을 지내야 하는 북려 주민들을 위해 초창기 정북행성 시절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명절이었다.

당시 정북행성을 관리하던 상민이 왜 우리에겐 좋은 휴일이 없냐며 투덜거리던 이민자 출신들을 위해 제정했던 것.

행정상 편의로 변동 없이 정일력 기준 ‘10월 1일’에 만들어진 추수감사절은 북려인들에겐 한 해 농사를 잘 지은 것을 주님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감사드리는 날이 되었다.

남려에서는 초창기 추수감사절에는 쉬지 않았다가 나중에 연방의 통합(혹은 더 많은 휴일)을 주장하는 많은 노동자들에 의해 온전히 쉬는 날로 바뀌었다.

네 번째 명절, 태조 해민의 탄신일인 성탄절(聖誕節)은 정일력 기준 ‘11월 5일’이었다.

성탄절의 유래는 정말로 전생의 상민이 귀가 빠진 날.

그렇기에 이곳에 온 뒤 계절이 반대가 되어도 별 변동 없이 계속 행해져 왔었다.

사실 예전에는 일반적인 명절 중 하나였다.

창양에서 대대적으로 보여주는 불꽃놀이가 좀 유명한 것 빼고는 특이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제국교와 쿠쿨칸교의 위세가 드높아진 이후에는 그 교도들에 의한 의도적인 격상이 이루어져 지금은 나머지 세 명절에 버금가는 휴일(한 주를 온전히 쉬는 대휴일)이 되었다.

다른 신민들도 휴일이 커지면 좋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환영했고.

여담으로, 석가탄신일과 기독탄신일 등은 그 종교를 믿는 교도들에게나 휴일적 의미를 가졌지, 조정에서 인정하는 공휴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사측에 자기의 종교 휴일을 미리 말을 해 놓아야 그날을 쉴 수 있었다.

다섯 번째 공휴일, 만수절은 완전히 그 성격이 달랐다.

현 황제의 생신을 기리는 이 휴일은 해마다 지켜 즐기는 명절이라기엔 즉위하고 있는 황제마다 달라졌던 것.

일반적인 신민들은 한 주를 통째로 쉬는 3대 명절과는 달리 황제의 생신 하루만을 쉬었고 연휴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하루만 쉬다 보니 만수절이 토요일에 걸리는 끔찍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고, 이에 황제가 직접 금요일이나 화요일에 대체휴일을 지정함으로써 신민들의 행복을 챙겨주는 훈훈한 광경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반적인 신민들과는 별개로, 외국에겐 이날이 상당히 중요했다.

설날, 추석, 추수감사절은 고려에 있는 대사들만 참석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만수절에는 특별히 사신(조천사)을 보내야 했던 것.

특히 번국과 북왜 등은 고려의 만수절을 위해 파견할 조천사 준비에 적어도 몇 달은 신경을 써야만 했다.

이러니 만수절 당일 창천궁은 외국 특사들로 바글바글했다.

창양 시민들이라면 도심에 경관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담으로 여섯 번째 공휴일, 현충일은 명절이 아닌 국가기념일이었다.

제국과 연방의 존속과 발전에 이바지한 모든 이들의 충정을 기념하는 이 날은, 숭고한 목숨을 조국을 위해 바친 군인과 경관, 소방관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주로 질병), 발명가들(주로 화약과 군사 무기)을 기리는 날이었다.

구체적인 날짜는 ‘6월 6일’이었으며, 이날은 국기 대신 조기가 올려졌고 황제와 시중, 대소신료들마저도 흰 조복을 입고 현충원이나 충혼탑 등지에 참배를 했다.

어쨌든, 올해도 11월 5일이 되자 창양은 화려하게 빛났다.

언제부터 유행했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수염이 잔뜩 달린 사나운 용(저게 자신이란다.)처럼 생긴 연을 이리저리 날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여전히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수놓기도 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이렇게 생일 축하를 많이, 거대한 규모로 받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탄신 축하드립니다.””

특히 황성에 도착해 구중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변을 다 물리고 황제와 황후 부부에게서 공손한 예를 받을 땐 기분이 제일 좋았다.

아마 그 감정은 자신이 만든 제국이 올해에도 올바르게 잘 나가고 있구나 하는 성취감과 뿌듯함이 제일 크겠지.

처음, 상민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엄청나게 경악했던 루이제는 이제 사실을 받아들였는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그래, 너희들도 건강하거라.”

상민은 흰 봉투에 수표 한 장씩을 넣어 황제 부부에게 건넸다.

대체 이 나라 황제에게 뭐 하는 짓이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수표를 받아든 황제 부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면 안에 적힌 재화의 규모는 실로 범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할 것이다.

상민은 설날이나 한가위엔 황성에 잘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탄절에는 부모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올 수 있으면 꼭 오곤 했다.

“창천궁은 이제 전부 전선이 깔렸나 보오?”

“예. 미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궁정 전부에 깔았습니다.”

“잘하셨소.”

전구와 전기라고 해서 화재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기름과 심지에 불을 붙이는 등불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그 상징성도 있다 보니, 지금 창천궁은 인조적인 불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덜 위험하고 냄새도 나지 않으며 아름답기까지 하니 이제는 밤이 기다려질 정도입니다.”

갑자기 해원의 말을 들은 루이제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상민의 찡그려진 얼굴을 눈치챘는지 화제를 바꾸었다.

“야간에 불빛가리기(등화관제)를 할 때 참으로 좋겠어요.”

불빛가리기는 대포가 발전하고 있는 지금, 주요 건물이나 시설의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명을 제한하는 용어로도 아주 가끔 쓰였다.

물론 여전히 불을 켜는 것이 더 좋을 때가 많았다.

본격적으로 등화관제라는 용어가 부각된 것은 항공기가 나타나는 1차대전 시기라 볼 수 있겠지.

그러니 지금 이 말이 나왔다는 것은 황후 또한 그럴 만한 군사적 무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될 터.

물론 저 말이 일국의 황후가 할 말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오, 생각해보니 그렇구려. 이 전선들이 모두 회로로 연결되어 있다 하니, 개폐기(스위치)를 조작하면 일일이 등불을 꺼야 하는 것과는 달리 한 번에 끌 수 있겠구려. 신속하게 은폐할 수 있으니 그 방호력이 적잖을 겁니다.”

황제의 맞장구에 상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황상, 제발 신하들과 내빈들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마시오. 그저 이 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실로 문명의 빛이라든지 그런 소리를 해 달란 말이오.”

“예…….”

다행스럽게도 해원과 루이제는 성탄절에 궁정에 온 여러 신료들, 그리고 대사들과 기타 내빈들에게 지극히 일반적인 문구로 전구를 널리 널리 홍보했다.

거듭된 찬탄으로 확실하게 영업당한 사람들은 궁정을 떠나서도, 집에 가서도, 사적인 모임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이 전구라는 것의 아름다움을 떠들어대었다.

― 기름에 불을 붙이는 등불이 과거의 산물이었다면, 전기를 통해 전구에 빛을 내는 것은 미래의 모습이다!

어떤 귀부인은 망언 아닌 망언을 내뱉기도 했더랬다.

― 전구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들이 너무 불쌍해요.

문화를 주도하는 부유층을 겨냥하는 전략은 대체로 효과적이었다.

상류층이 쓰니, 중류층도 쓰게 마련.

전술적 불빛가리기를 언급한 황제와 황후의 의도와는 완전히 별개로, 창양 시청 또한 가로등 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불빛이란 범죄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컸으며, 이에 전구는 수도를 개선할 주요한 방책으로 대두된 것이다.

이성과 계몽, 근대와 합리의 온갖 수식어가 붙은 전구가 마침내 거대한 수요를 찾게 되자, 일반전기회사는 빠르게 전기시장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전구는 사실상 일반전기회사를 먹여 살린다 봐야 할 정도의 거대한 발명품이 되었고, 발전기 또한 국가적 단위에서의 수요가 생겼다.

지금은 기껏 전구일 뿐이지만, 전기의 시대는 확실히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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