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54화 (354/653)

기업의 시대(5)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인류의 지성을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

이 시점 비고려인 3대 지성이 라이프니츠(지금은 아니었지만), 하위언스, 보일이라면, 아이작 뉴턴은 지금 고려의 10대 지성 중 한 명으로 당당히 꼽혔다.

그리고 지난 삶에서도 아르키메데스, 가우스와 함께 인류 3대 수학자 중 하나로 여겨졌고.

말해서 무엇하랴.

임광재와 해인규 등을 전부 다 본 상민은 뉴턴 또한 그들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천재라 인정했다.

뉴턴이 상민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고작 열 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 2세대인 그는, 사실 상민이 노리던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인재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에 빨대를 꽂고 헤드헌팅을 하고 있던 상민의 감시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니까.

다만, 상민은 그가 활약한 시기만 알았을 뿐, 정확한 생몰년월은 몰랐다.

그러다 보니 최중요 인재 명단을 완수해야 할 여의국 요원들은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대책을 만들어내었다.

어차피 잉글랜드인이니 전부 다 데려오자.

지리적으로 가깝고, 정치적으로도 혼란하고, 애국심도 적고,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인클로저 현상이 나쁜 쪽으로 심해지며 농가와 사회의 경제 불균형이 극도에 달해지는 나라니 사실상 그렇게 데려오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이런 해결책 덕분에 고려로 이민 온(잡아 온) ‘아이작 뉴턴’들이 사실상 핏줄도 공유하지 않았건만 집성촌마냥 제포 남쪽에서 차츰차츰 단체로 기거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 웃긴 일이었다.

뉴턴(Newton)은 뉴 타운(New town)에서 유래한 흔한 앵글로색슨계 성씨였고 아이작이라는 이름도 상당히 흔한 이름이다 보니 이민 온 가족들의 숫자는 백 명도 넘었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제포 뉴턴씨’ 안에 진짜 아이작 뉴턴의 부모가 있었던 모양.

* * *

자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이민 1세대가 되어버린 울프조스의 평범한 농부 아이작 뉴턴은 졸지에 고려에 살게 되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당황했다.

본래 그는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괜찮게 사는 자영농(요먼)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땅이 사라져버린 것.

밀 농장과 양을 기르는 축사도 전부 다.

물론, 그 괴한들도 인정은 있었는지 도리어 잉글랜드에서보다 더욱 넓은 토지를 주고 일정한 기간까지 버틸 수 있는 식량과 자금을 주었다지만 하루아침에 자신이 알고 있는 토양에 따른 농업적 지식들이 전부 무쓸모가 되는 것도 몹시 뼈아팠다.

하지만 한창때의 젊은 나이에 먹여 살려야 할 아내와 아이가 있는 그는 적응해 나가야 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이제 대지주들이 사사건건 내 토지를 노리는 일은 없겠지.’

젊고 야심만만한 뉴턴은 근처의 농협과 축협의 교육지원을 받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금 농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려던 그는, 어느 날 가족을 이끌고 잉글랜드 해변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따사로운 해변을 구경하기 위해 청해에 놀러 가다 어떤 광경을 보고 문득 떠올렸다.

토요일, 휴일의 해변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겨냥한 노점들도 상당히 많았다.

간단히 먹고 다시 놀 수 있는 그런 음식점들도.

― 삐익!

하지만, 고려의 경관들은 이런 노점 잡기에 혈안이었다.

다른 난전이야 지금은 완전히 불법이 되었지만 음식 노점은 아직도 살아있었던 것.

어떻게 조리했는지, 어떤 음식을 파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위생 규칙도 적용하기 어려우며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 자들이니 조정의 입장에선 상당히 골치 아픈 존재였다.

“네 이놈들! 다시 오면 봐주지 않겠다 했지? 법도 개정되었으니 잘되었다!”

“아이고, 나리! 제가 집에 오길 기다리는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아이들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쇤네를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천하의 몹쓸 놈을 봤나! 네놈이 조세를 불법적으로 회피하여 나랏돈으로 기초소득을 받으면서도 개인 마차를 끌고 다닐 만큼 부유한 놈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데 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여봐라! 이 탈세자를 꽁꽁 묶어라!”

풍경 좋은 해변에서 일어난 난리에 사람들이 이목이 잠시 옮겨졌다가 이내 흩어졌다.

동정 어린 시선은 별로 없었다.

저들은 제대로 된 조리시설에서 음식을 파는 선량한 상인들에게 여러 가지 해악을 끼치기도 하니.

게다가 청해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노점들이 많기로 소문난 해문에서 단체로 식중독이 돈 이후, 조정은 강경 단속으로 일관하기로 작정했다.

식중독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콜레라라도 터지면 도시 하나가 박살 난다.

강제로 철거당한 뒤 우르르 끌려가는 노점상들을 바라보던 뉴턴이 생각했다.

‘아예 도시민들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간단히 먹거나 포장할 수 있는 음식점을 차리는 것이 어떨까.’

물론 농가와 도시가 완전히 분리된 지금, 도시 내의 근로자와 상인들,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점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바쁜 아침에 여는 음식점은 아직까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게다가 점심시간을 노리는 대부분의 음식점들도 주문을 받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뉴턴은 성격 급하기로 소문난 고려인들이 어째서 그 시간을 견디는지는 잘 몰랐지만 대충 미식가적 기질이 있어서 그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뉴턴은 간단하게 포장해 나가거나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열기로 했다.

물론 제대로 된 매장과 조리시설을 갖추고.

그런 음식의 대명사는 이미 고려에도 존재하는 겹빵일 터.

‘당연히 일반적인 겹빵과는 달라야 한다.’

이 당시, 겹빵은 일부 제과점이나 빵집에서 덤으로 파는 음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겹빵이라는 것은 사실상 빵보다는 그 안의 고기와 야채, 소스 등이 더욱 중요하기 마련.

뉴턴은 아예 겹빵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음식점을 내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개천력 375년(CE 1650), 뉴턴은 청해에 ‘아이작 토스트 겹빵’이라는 음식점을 만들게 되었다.

‘빠른 음식’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주름잡게 되는 회사의 시작이었다.

* * *

아이작 토스트 겹빵 회사의 주인, 아이작 뉴턴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이름을 가졌다.

유럽인들에겐 흔한 문화였다.

주변 사람들은 이 소년을 아이작 뉴턴 주니어라, 아버지를 시니어라 불렀다.

사실 아이작 뉴턴 집성촌이 있다 보니 그들끼리 스스로를 구별하여 부르는 다른 이름도 있긴 했지만.

예컨대, 겹빵 아이작이니, 천재 아이작이니.

천재 아이작, 아이작 뉴턴 주니어는 어릴 적부터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제포 근교의 초등학교에서 모국어인 고려어는 물론이고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및 자신의 아버지가 쓰는 잉글랜드어 등 주요한 언어들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분야보다도 수학과 과학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두각을 보인 인재들이 가는 중등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에 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서야 상민은 그가 데려온 수많은 아이작 뉴턴 중 제대로 된 인물을 발견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때 상민은 아이작 뉴턴을 마침내 손에 넣었다는 쾌감보다도, 다른 것에 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학교폭력?’

당시 아이작 뉴턴이 다니고 있었던 중등학교에서 심각할 정도의 학교폭력이 이루어진 것.

물론 학교폭력이란 것이 온전히 21세기와 현대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공권력도, 증거도 뭐도 없었으니 더욱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을 수도.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좌시해서는 안 되겠지.’

특히나 고려는 박상기 시중 때부터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초등교육만큼은 의무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지금 고려에선 5세~7세부터 6년간 초등의무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글자와 숫자를 이용한 사칙연산을 못 하는 문맹은 현저하게 적었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지난 개천 4세기 중반부터는 중등교육도 차츰 말이 나왔고, 농촌이 아닌 일부 도시에서는 시범적으로 시민들에게 중학교를 세워 중등교육(초등교육으로부터 5년)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머리가 굵을 대로 굵은 중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때였던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은 의외로 학교폭력의 사건 수가 적었다.

애들도 순진하고 어렸으며 몸도 연약했고 가족을 떠나 단체생활도 처음 하는 경우도 잦았으니.

물론, 21세기의 조숙한 대한민국에서는 아니겠지만 지금 고려는 그랬다.

하지만 중학생들은 신체적으로도 괄목할 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나이.

게다가 이제는 단체생활에도 적응을 충분히 했을 것이다.

중학생들 중 학업에 관심을 쏟는 자는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 수는 당연히 다수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공부를 알아서 했으면, 부모들의 근심거리 열 개 중 아홉 개는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입시경쟁이 아직 나올 시기가 아니었고, 대학 진학이나 개편된 과거제를 노리는 아이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민은 뉴턴의 존재를 알게 된 후, 그가 다니는 제포중앙중학교에 가서 그를 직접 보기로 결정한 날, 희대의 천재 말고도 희대의 천재를 괴롭히는 무리들까지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야, 잉구!”

“뭐 하냐? 뭘 그렇게 적는데.”

“너 아까 니네 집에서 하는 토스트 겹빵 열 개 사 오라고 하지 않았냐? 지금 니네 집 잘산다고 내 말 무시하는 거야? 니네가 졸부라고 뭐 달라져?”

널찍한 교정, 사람들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한가롭게 공책에 필기하고 있던 아이작 뉴턴 주니어를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덩치 큰 중학생들이 보였다.

뉴턴과 마주한다는 마음에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미소 짓고 있던 상민의 얼굴은 천천히 굳어갔다.

‘잉구(剩寇)….’

왜구를 비롯하여 신라구, 명구, 여진구 등 비루한 해적 집단을 일컫는 도적 구(寇) 자는 대표적인 잉글랜드 귀화계 고려인들을 모욕하는 말이었다.

그래, 이 또한 인종주의와 결부되어 있었다.

고려는 급격히 번지는 우생학과 인종주의를 서벌이라는 희대의 정책으로 결국 이겨냈지만, 인종주의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인종주의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정말로 신의 힘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아니.

예수가 다시 재림하거나 무함마드가 계시를 내리거나, 석가 사후의 미륵불이 마침내 등장하거나, 심지어 상민이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지독한 진면목. 그 깊숙한 곳에 있는 추악한 결정체 중 하나였으니까.

[자신들과 다르면 차별한다.]

학교 폭력은 분명한 죄악이다.

그리고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범죄 행위였다.

가해자는 금방 망각할지라도, 피해자는 어릴 적 그 기억들을 영영 잊지 못하니까.

그 피해자들이 또 다른 인종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었고, 복수 범죄를 일으킬 수 있었으며, 인간혐오에 걸릴 수도 있었다.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명백한 암세포.

지금 그 상처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과소평가할 부분이 아니었다.

‘…….’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상민조차도 이전 삶의 보육원 시절에 당했던 일화들을 전생과 현생을 합쳐 오백 년이나 살아온 지금까지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할 정도였으니.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엄벌주의가 고려 법체계의 근간이라지만, 소년 시절부터 그것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아마 학교는 입학하자마자 학급의 사분의 일이 사라질 터.

성악설을 믿는 사람들은 악덕을 교화하는 것이 훈육자의 책무라 주장하고 있기도 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소리기도 했다.

제대로 된 시점에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 정신을 차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혼자 끙끙거린다고 할 문제는 아니니, 교육자들과 학자들, 법관들을 불러놓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해야 하겠다.’

자신의 성질대로 한다면, 저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 탄광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겠지.

참자, 어쩌면 네 책임일 수 있다. 신민들의 고충을 먼저 헤아리지 않았던 네가 이 모든 것을 방조하….

― 퍽

주먹을 맞은 뉴턴이 나뒹굴고 그 노트가 멀리 던져지자, 상민은 모든 생각을 중지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건 얄짤없는 현행범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소년법과 형사미성년자의 개념은 고려에서도 아직은 자리 잡지 못했다.

범죄소년과 촉법소년이라는 말 자체가 없으니 이 삭막한 세상은 열두 살 소년이라도 교수형을 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상민도 교수형을 시키는 것은 너무 과도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이 범죄 소년들에게 새롭게 계도될 길을 열어주긴 해야겠지.

하지만 그가 생각건대, 깨달음은 편한 집구석이 아닌, 고행을 통해 나오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니 곡괭이질과 같은 궂은일 또한 어쩌면 그들의 훈육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으면, 그만한 일을 하는 것이 사회에 더욱 기여하는 일일 테다.

적어도 선량한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보다는.

‘어디서 오랫동안 써먹어야 하는 내 신하를…!’

저 집어 던져진 노트 안에 어떤 귀중한 공식과 수식이 있을 줄 알고!

짐승과도 같은 포악한 살기가 내뿜어졌다.

이상스럽게 서늘한 감각에 불량학생들이 얼어붙은 채로 천천히 고개만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턱이, 마치 흉악한 맹수를 눈치챈 것과 같았다.

상민을 말리기 위해 사도 한 명이 애써 나섰으나, 그는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말로 먼저 사도에게 명령했다.

“북려 탄광에 일손이 부족하다 하지? 젊고 싱싱한 아이들 몇 보낼 테니 걱정 말라 하게.”

탄광뿐이랴?

조선소, 하수도 청소, 토목 공사 잡부.

말만 하거라. 젊고 건장한 인력을 요구하는 곳은 너무나도 많으니.

[작가의 말]

실제로 아이작 뉴턴(주니어)의 아버지는 아이작 뉴턴 시니어입니다.

아이작 뉴턴 시니어는 본래라면 병으로 아들이 세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일찍 단명한(당시 전염병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인물이지만, 고려에 납치된 이후에는 건강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원래의 아이작 뉴턴 주니어도 영국에서 킹스 스쿨에 다닐 때, 상당히 심한 학교폭력을 당했다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