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50화 (350/653)

기업의 시대

“구태여 나쁜 일을 하여 돈을 벌 이유가 무엇이냐.”

예전 삶에서는 채 상상도 못 할 발언이겠지만, 이제 그저 자리에 앉아 만년필 몇 번 끄적이는 걸로 세상 누구보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는 상민은 별 감흥 없이 지나가듯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돈이란 것은 참으로 쉽게 벌 수 있는데.”

눈앞의 사도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상민이 서명한 서류 옆에 또 다른 서류를 내려놓았다.

언제고 휘릭 떠날지 모르는 그의 상관에게 결재서류를 받는 것도 사도의 덕목 중 하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이 일에 상당히 능력이 있었다.

‘이번에 떠나신다면 정말 빙주(氷州, 그린란드)로 가실지도 몰라.’

가뜩이나 건방진 덴마크―노르웨이가 바이킹의 후손임을 들며 빙주가 자신들의 적법한 땅이라고 주장하는 상황.

주군은 언제라도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파쇄하기 위해 빙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

“이 서류는 중려에 새롭게 부설할 철도 노선 최종안입니다.”

― 사각사각

종이에 만년필이 오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건 중려 전신선에 관해 고려통신에서 올린 서류입니다. 하명하신대로 남파주열대습지에 부설하는 예상 비용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건 내가 천천히 읽어보지. 다음.”

“…….”

“…….”

상민은 문득 눈을 문질렀다.

그의 몸 상태를 미루어볼 때, 안구건조증 같은 하찮은 증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어렵다.

기본적으로 꼭 해야 하는 황실 보살피기와 기술선도국의 문제 이외에도 상민이 처리해야 할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시중 자리에서 내려온 지 오래였지만 벌여놓은 일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광산, 무역, 은행, 금융, 철도, 객원, 통신, 농업, 종묘업, 건설, 의류, 방산, 식품까지.

이쯤 되면 문어발식 확장 정도가 아니라 크라켄식 확장이 아닌가.

이제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회사들은 경영권을 넘겨준 뒤 최대주주로서 지켜보고 정말 꼭 필요할 때만 간섭할 생각이었지만 아직도 많은 회사들은 그의 통제가 필요했다.

‘젠장, 콘스탄티나. 당신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늙어서까지 부려먹은 것도 모자라, 마침내 안식을 얻은 사람에게까지 일을 시키고 싶어 하던 악랄한 사람은 업무를 대충 마무리 짓고는 명령을 내렸다.

“전주로 가지.”

“…알겠습니다.”

다소 의외의 말에 사도가 눈을 깜박였지만, 이내 전성관에 대고 목적지를 하달했다.

새벽호는 미주의 군항을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물자도, 군병력도, 자원봉사자도 왔으니 주지사가 어련히 잘할 것이다.

상민 자신이 인간기중기의 역할을 할 수 있더라도, 진짜 기중기가 온 지금은 빠져주는 것이 옳았다.

“니카라오 운하가 아직도 지원물자 수송선들로 꽉 차 있을 거랍니다.”

먼 옛날에 건설한 운하는 시대가 지날수록 점차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일단 운하를 파는 것이 최고의 과제였기 때문에 운하의 너비를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술적인 문제로, 욕심을 부리다가는 모든 일이 망쳐질 수 있었기도 했었고.

그래서 지금 운하는 너무 좁았다.

파나맥스라는 용어처럼, 현 고려는 니카라오 운하 최대 크기의 선박을 니카라오급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실험급 최신 선박들은 이제 니카라오급의 설계를 따르기에는 너무 덩치가 커져 버렸으니, 운하조차 통과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혹자는 증축을 하면 되느냐 하지만, 이미 개통된 운하, 그것도 완공된 지 벌써 두 세기는 지나 틈틈이 개보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하를 증축하는 것은 그냥 새로 파는 것만 못했다.

‘정말로 새로 파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군.’

“알겠다. 도착한 다음 우선통행을 요구하거라.”

* * *

번개의 땅, 전주(電州).

일 년에 삼백 일, 한 시간에 삼백 번의 번개가 친다는 흉악하지만 매력적인 장소, 뇌호(마라카이보호)는 전주의 자랑거리였다.

물론 번개는 피뢰침의 발명 후에도 여전히 장난은 아니라서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긴 했지만.

적어도 과학자들은 이곳을 상당히 좋아했다.

전주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고려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뛰어났던 탐험가, 배어길이었다.

어찌보면 고려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위인일지도 몰랐다.

무려 키닌의 발견자였으니까.

전주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거대한 공덕비가 있었으니 고려의 역사에서 배어길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전주의 마지막 자랑거리는, 독특하고 신비로운 내륙의 자연지형이었다.

원주민어로 테푸이(Tepui)라 불리는 지형은 상당히 이국적인 경치를 자아냈다.

고려의 10대 비경 중 하나로 거의 무조건 꼽히기도 했으니까.

정상부가 평평한 탁상지(메사 지형)는 말로만 듣던 신선의 세계가 있을 법도 해 보였다.

조선인, 혹은 옥저인이 본다면 옛 고씨 고려의 오녀산성의 모습이 절로 떠오를 정도랬다.

이곳엔 가장 큰 테푸이로 유명한 로라이마 테푸이 말고도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우얀 테푸이에서 발원하는 세계 최고 높이의 폭포, 하늘폭포(앙헬 폭포)는 실로 까마득한 높이(979m)에서 떨어지는 절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주는 그 외에는 정말 자랑할 것이 거의 없는 곳이다.

일 년 내내 더운 건 자랑거리가 아니다.

농사도 썩 잘되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부터 식량을 사들이는 처지였다.

그나마 목축과 광업이 제 일을 해주고 있었지만, 광업은 잠채(潛採)가 아닌 이상에야 여전히 조정의 깐깐한 허락을 받아야 했고 애초에 사람 수 자체가 그리 많지가 않았기에 목축의 규모또한 썩 신통치가 않았다.

전주 청년 두 명은 바다가 잘 보이는 목장의 울타리에 걸터 앉아 푸념을 내뱉었다.

“우리 고향엔 대체 언제 빛이 들까?”

“더워 죽겠는데 무슨 빛은…….”

“햇빛 말고.”

전주에도 이미 남려의 외곽을 한 번 감싸는 긴 철도 노선이 부설되긴 했다.

태수 하류의 노선은 거대한 강으로 인해 끊긴 지역이 있어 증기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데 반해, 전주에서는 태동산맥 쪽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면 그런 거 없이 나름대로 편안하게 상경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절대적인 거리는 여전히 끔찍하게 멀었지만.

“여긴 그냥 계속 변방일 운명이야.”

“위치는 좋잖아?”

고향의 입지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전주는 엄연히 남북려대륙의 가운데 위치해 있었고 지금도 칼리나해 앞바다에는 배들이 자주 오가고 있으니까.

가끔 배들이 정박을 위해 이곳에 기항하는 일도 드물진 않았다.

“위치가 좋으면 뭐 해, 할 일이 신통치 않은걸.”

청년이 친구에게 물었다.

“너 그러면 정말로 고향을 떠날 거야?”

“그래, 여긴 미래가 없어. 목장은 형이 물려받을 거고 난 제도나 청해, 혹은 앙주, 진주 같은 곳으로 가서 일자리를 구할 거야. 난리가 났다지만 미주도 지금 가면 기회의 땅이겠지.”

노동자들은 가끔 귀농을 꿈꾼다.

실제로 땅은 충분했기에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때려치우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야심있는 젊은이들 또한 이 작고 초라한 농촌에 살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농부보다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이들도 이제 많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곡물가는 앞으로도 계속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고향을 떠난다던 친구가 청년을 설득했다.

“이러지 말고 너도 같이 떠나자.”

그러나 청년은 서글픈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내 고향인데 어디로 떠나겠어.”

* * *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왔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다른 곳으로 떠나는 걸 안타깝게 바라보던 청년은, 여느 때와 같이 어선의 낚싯대와 그물 등을 손질하다가 저 멀리 전주의 항구에 기항하기 위해 다가오는 독특한 함선을 발견했다.

‘누군데 저렇게 화려한 배를 타고 다닐까.’

전주는 행정구역상 남려 본토였고 군왕 같은 사람은 없었다.

물론 주지사는 있었다.

하지만 몇 번 본 전주의 주지사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물산이 비옥한 땅도 아니고, 그 사람이 저런 배를 타고 다닐 수 있겠는가.

또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대동하고 다닐 수 있겠는가.

표범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전주의 행정관청에서 주지사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는 몰랐지만, 주지사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 것은 잘 보였다.

그날 이후부터, 전주의 항구에 무언가를 실은 배들이 계속 다가왔다.

거대한 공사를 하는 것마냥 대규모의 자재들이 항구에서 철도로 운반되는 광경이 신기했다.

“저것들이 다 뭐래요?”

“몰라, 검은 물을 채취한다나 뭐라나?”

어느날 밤, 청년은 술집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없었다.

“근데 한 가지 소문은 돌더라고.”

마침내 들은 흥미로운 소리에 청년이 옆자리에 앉았다.

“주모, 여기 당밀주 두 잔 좀.”

알싸한 술을 입에 털어 넣은 청년이 무언으로 재촉하자, 술을 대접받은 이웃이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평소 좀 가벼운 성격이었지만 정보력 하나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제 우리 고향이 돈더미에 앉을 날만 남았다더군. 일손도 장난 아니게 필요할 테니 관심 있으면 계속 주시하고 있어.”

며칠 뒤, 전주의 도심 이곳저곳에 방이 붙었다.

전단지도 잔뜩 배부되었다.

청년은 재빨리 땅에 떨어진 전단지 하나를 집어 들고 유심히 그 내용을 살폈다.

정말로 이웃 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인력 급구.

모집분야명 : 시추꾼, 채취꾼. 00명.

자격요건

남성.

신체 건강한 자.

기숙사에서 숙식할 수 있는 자.

…….]

내용 자체는 전형적인 구인 광고였지만, 그 회사의 이름이 예사로 볼 일이 아니었다.

“황립 석유 회사?”

* * *

인간은 꽤 오래전부터 석유를 써 왔다.

상민은 그리스의 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감히 확언할 수 있었다.

비단 동로마만 썼겠는가.

어디서 들은 적도 있었다.

중국에서 위진남북조 시절에 대나무로 석유 구멍을 뚫어 유정을 채취했다고.

중국인들의 과장성을 고려해 볼 때, 뻥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마냥 허황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중동에서는 심지어 9세기에 유전을 개발한 것은 물론이고 석유의 증류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고려가 이 검은 물을 찾아 나서는 것은 오히려 약간 늦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근대적 석유 산업은 화학의 발달 없이는 무의미하다.’

지금까지의 유전이라는 것은 애들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상민은 이제부터는 정말로 온갖 공정을 이용해 대규모의 유전을 본격적으로 개발할 계획이었다.

제철과 토목 등의 기술이 발전된 이상 이제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었다.

한동안 머리가 좀 깨지겠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도 나름대로 석유의 유용함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상민이 생각하는 석유의 유용함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압도적이었다.

석유,

검은 금.

말해서 무엇하랴.

증기기관이 대세인 이 시점에는 석탄을 대체할 주목받는 연료의 종류에 불과했지만, 머지않아 정말로 석유가 석탄의 자리를 밀어내고 최고의 에너지원으로 등극하리라 호언장담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비단 연료로서의 가치뿐일까.

다른 사람들은 짐작도 하지 못하겠지만, 석유의 가치는 연료 이외의 분야에서는 대체할 수조차 없었다.

원유를 정제하며 얻는 부가적 물질들로 실로 엄청난 종류의 화학제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플라스틱, 합성섬유, 파라핀, 계면활성제, 의약품, 심지어 식품까지.

머지않아 이것들은 인간 문명을 더없이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그래서 상민은 마침내 석유 회사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진작부터 적절한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마침내 내연기관이 차츰차츰 발전하기 시작하니, 이제 개발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 시점이 다가왔다.

개천 426년(CE1701), 상민은 드디어 정유업계 최우량 기업(슈퍼메이저)로 군림할 세 개의 회사를 세웠다.

석유 기반의 에너지패권은 극도로 중요하니, 세 회사 모두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전주에는 황립 석유 회사가 들어섰다.

이는 말 그대로 황실이 일정 지분을 소유한 회사로 반쯤은 공기업과 같은 위치에 놓일 것이었다.

전주, 즉 원역사에서 베네수엘라는 세계 제1위의 압도적인 석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그 규모는 중동의 나라들보다도 더 컸다.

비록 황과 같은 불순물이 많아 석유의 질이 썩 좋지 않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압도적인 매장량에 비하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틀락스칼라와 택주 남부 등의 중려대륙에는 토필친 석유 회사가 지배권을 행사할 예정이었다.

마야만, 이전 삶에서 멕시코만으로 불리는 이 바다는 석유의 바다로 불릴 만큼 거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 중려 통합 때 중려의 주민에게 약속한 이권이 바로 석유 산업에 관련한 이권이었지.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를 그쪽에 설립하면 지역주가 연방에 계속 남아있을테니 마침내 연방과 제대로 동화될 수 있는 큰 요인이 될 것이었다.

택주 북부와 미주, 그리고 북려대륙에는 고려석유가 자리 잡을 것이다.

텍사스 원유, 캘리포니아 원유.

미국의 패권을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

사실 이 규모는 어쩌면 다른 두 회사들보다도 더욱 클지도 몰랐다.

북려라는 땅은 신의 온갖 은총은 다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땅이었으니.

전통적 의미의 석유 말고도 다른 자원도 풍부했다.

퍼먹다 고갈 나면 ‘셰일 가스’도 나오지 않던가.

‘만족스럽군.’

지도에 선을 그어 차기 에너지 패권을 결정짓는 순간은 그토록 오래 살아온 상민에게도 꽤나 자극적인 희열을 선사했다.

쉐브론, 로열더치쉘, BP, 엑슨모빌 그리고 그 외의 슈퍼메이저들은 지난 삶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주요한 경제집단 중 하나였다.

정유업계 7공주, 즉 세븐 시스터즈라 불리기도 했었으니.

물론 이제 이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자신의 회사들이 채우겠지.

물론 상민도 아주 잠시간은 석유왕 록펠러마냥 하나의 회사로 모든 것을 통제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보기에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상민의 계획 속에도 반독점법에 대한 생각은 있었으니, 이왕 처음 만들 때부터 쪼개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노괴의 탐욕은 그칠 줄 몰랐다.

고려대륙을 훑어내리던 그의 시선이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하다 마침내 다른 곳에 닿았다.

고려가 그동안 몹시 소홀히 했던 곳, 인도양에.

[작가의 말]

황립 석유 회사는 Imperial Korean Petroleum이라고 쓰일 것 같습니다.

로열더치쉘의 전신인 Royal Dutch Petroleum이 생각나신다면 맞습니다.

고려석유는 줄여서 KP라고 부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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