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 대비하는 자세들(3)
― 쓰나미다!
― 모두 도망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북왜는 태평양 저편에서 다가온 파체나 섭입대 지진의 여파를 온몸으로 받았다.
거대한 거리를 이동해온 만큼 이 지진해일은 진원지 근처를 휩쓸었던 거대한 높이보다야 훨씬 낮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바다와 인접한 촌락들을 휩쓸어버리기엔 충분했다.
파고의 높이가 비슷하더라도, 해안 구조에 따라 그 높이가 뻥튀기될 수 있었으니.
게다가 북왜의 인구밀도는 고려보다 훨씬 높았고 해안가에도 꽤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기에 피해자가 적지 않게 생겼다.
인과관계가 판명된 후,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고려는 북왜에 있는 대사를 통해 그들의 미안함을 아주 살짝 내보였다.
“그렇게 됐습니다.”
“…예.”
외교적 수식어로 사과는커녕, 유감이라는 말도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물론, 고려도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자연재해가 인간의 뜻이던가? 지구의 뜻이지.
그리고 지금 당장은 북왜가 피해를 받았을지 몰라도, 만약 북왜에서 비슷한 지진이 일어난다면 그 해일의 여파는 고려도 받을 것이 뻔했다.
이번 일도 미주 대지진을 연구하던 고려의 학자들이 아니었다면 묻혔을 일이었을 것이다.
원인을 모르면 북왜인들에겐 그냥 다 같은 지진해일일 테니까.
하지만 고려는 먼저 상황을 알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 어찌나 도덕적인 국가인가.
매번 이 예맥한계 사람들에게 쥐어 터지기만 했던 북왜인들이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었지만, 주왜고려대사는 자화자찬했다.
“이번 기회에, 양국이 민간협력을 통해 지진이나 해일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하지요.”
고려의 지진 및 지진해일 연구자들은 지구상의 두 가지 땅을 주목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진과 지진해일을 겪는 나라는 단연코 북왜와 백제였다.
지진해일로만 한정해 본다면 태평양의 한가운데에 있어 매번 이리저리 치이는 하와이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지만, 왜열도는 지진 자체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으니.
학자들에겐 왜라는 나라는 지진의 성지였던 셈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문명이 들어섰던 관계로 꽤나 자세한 사료들이 존재했으니, 이 옛날 사료들을 연구할 가치는 차고 넘쳤다.
물론, 민간협력을 운운하긴 했지만 사실상 고려의 일방적인 연구가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북왜에 지금 뭐가 있는가?
어설픈 대학도, 연구기관도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과학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방법론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학자조차도 거의 없었다.
이런 면에선, 개성이라는 자국의 일부를 고려에 떼어 준 조선이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북왜는 선선히 고려의 학자들에게 사료들을 내주기로 했다.
사실 이런 학문의 발전은 그들로서도 나쁜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대사를 접견하던 북왜 내대신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이왕 대사가 이곳까지 온 김에 한 가지 요청을 하려는 모양.
“대국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북왜는 고려에 입조한 상태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덕천이 집권한 후의 북왜가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하더라도, 전 왜왕가를 박살 낸 자들을 하루아침에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요토미가 고려와 연계되어 왜왕을 살해했다는 미신이 떠돌며, 덕천이 그것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집권한 이상 더더욱.
수도를 불태운 탓에 여전히 국민적 감정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북왜는 상당히 실리적으로 바뀌었고 치욕을 겪은 이후부터는 오히려 고려를 원나라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일무이한 패권국이라 인식하고 있었으니, 내대신의 어조는 지극히 공손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저 무례한 백제인들이 휴전선에서 자꾸 시비를 겁니다. 이는 분명히 휴전조약에 위배되는 일일 터, 대국의 중재를 부탁드립니다.”
아와지섬과 고베를 사이에 두고, 백제와 왜는 고려의 중재 아래 휴전조약을 맺었다.
주코쿠 및 아와지시마 이북의 간사이 일부까지는 백제의 영토였고 고베부터는 북왜의 영토였다.
북왜왕가(자칭 천황가)가 폭사하자 북왜는 한동안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 고려에 망명 갔던 덕천신강(도쿠가와 노부야스)이 복귀한 도쿠가와는 북왜왕가와 도요토미가의 공백을 이용해 빠르게 정권을 쥐었고, 권력쟁탈전에서 승리해 내 마침내 새로운 북왜의 쇼군이 되었다.
문화적 이유로 바로 북왜왕이 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덕천신강은 일단 어디서 듣도 보도 못 한 왜왕의 방계를 억지로 끌고 와 왜왕위에 앉혔다.
안 그래도 실권 없는 자리에 그 출신에 대한 의심까지 제기되는 허수아비를 올려놓은 셈.
그 후, 덕천신강은 천천히 북왜왕의 혈통들을 암중으로 제거해 나갔고, 마침내 그의 손자 대에서 비로소 북왜왕으로 선양(禪讓)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높은 계급은 아니었지만 한 번 고려 해군에 발을 담가 보았던 덕천신강은 즉위하자마자 우물 안의 개구리인 북왜의 사람들을 질책하고 백제와의 휴전에 나섰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들이, 사면이 바다인 나라를 어찌 무서워하겠는가? 대국은 크고 우리는 나약하다.
고려가 아국을 살려두고 있는 것은 번국들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이지, 우리가 그들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다!
태풍(신풍)은 우리를 위하여 불지 않는다! 대원대몽골국이 아국을 유린했던 역사를 되새겨라. 대고려국은 육지에서도 공포스럽지만 바다에서는 대원대몽골국의 열 배가 달려들어도 절대 이길 수 없을 존재이다.]
덕천신강은 고려의 속내를 얼추 짐작해냈다.
육지에서 백제가 올라오고 바다에서 고려가 들이친다면 북왜는 항거할 수 없었다.
도쿄 대포격은 받는 입장에서야 대포격이었지, 고려 해군의 입장에선 표적에 착탄하는 연습에 불과했었으니까.
그러니 고려가 그 정도로 멈춘 이유는 오직 단 하나였다.
그들은 번국들조차도 일정 이상으로 크길 원하지 않았다.
통일 열도의 국력은 조선―옥저 연합보다는 약할 테지만, 조선과 옥저 개별의 국가보다는 더 강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섬이라는 지형은 방어에 유리하니 더더욱.
덕천신강의 그런 외교관은 덕천가에 계속 계승되어 왔기에 아마 현왕 덕천중광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북왜 내대신의 말에 고려 대사가 찻잔을 내려놓고 빙긋 웃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북왜 또한 아이누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잊지 마세요.”
“…….”
* * *
북왜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외교적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명은 하루하루 썩어들어가다 못해 문드러지고 있었다.
섬서성의 이자성과 대리의 양응룡이 거병한 뒤로 내내 쇠락을 금치 못했던 명은 이제 이게 국가인지 의문이 들 만큼 막장 행정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만의 주나라는 완전히 독자적인 행보를 걷고 있었으며, 사신조차 파견하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오히려 고려의 대사가 들어섰다 한다.
아예 중원질서에서 이탈하여 자체적인 외교를 하고 있는 모양.
물론 명은 그들을 징치할 함대를 꾸리지도 못했다.
안에선 사방에서 군벌과 도적 떼가 날뛰고 있었다.
지방의 세수는 잘 걷히지도 않았고, 올라오지도 않았다.
밖에선 양동이(양이와 동이를 합쳐 부른다)들이 대명의 천하를 자신의 집 앞마당인 듯 거닐고 있었다.
대명의 해안가를 침탈하는 베네치아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포르투갈인 따위의 양이들은 걸핏하면 지네들끼리 싸워대었지만 그 와중에도 대명을 괴롭히는 일에는 신기하게도 잘 협력했다.
동이들도 마찬가지.
조선과 옥저, 백제 등의 나라들은 명인들을 핍박하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기근이 들었을 때는 노략질을 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밑바닥이었을 줄 알았던 곳에는 지하실이 있기 마련이다.
명의 상황은 더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을 덮친 대기근이나 고려를 덮친 황충과 지진이 천재지변이라면, 명의 재앙은 명실공히 인재였다.
시작은 17세기 초반의 포르투갈의 상인들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고려에게 크게 혼이 난 뒤였고, 이류는커녕 삼류 열강으로 빠르게 후퇴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유하고 있던 아프리카의 식민지는 희망곶을 제외하고는 죄다 프랑스에게 빼앗긴 처지였다.
아직 인도와 싱가포라, 중국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희망곶을 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해봐도, 번번이 무타파에게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이 흑인들은 서아프리카의 흑인부락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타파인들은 악랄한 고려의 지원을 받아 제대로 된 수석식 소총을 쏘고 다녔다.
심지어 전쟁을 지속할 능력도 상당했다.
그들이 믿는 만종의 무장항전교리―호국불교―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땅을 침략한 백인들을 징벌하기 위해선 목숨마저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다(소신연비) 가르쳤으니 이들의 저항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 여기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인도와 중국에서 부를 가져와야 한다.
시장의 규모는 작은데 저항은 거세니, 포르투갈은 무타파인들에게 학을 떼고는 인도와 중국에 집중했다.
이 대규모의 시장에서 여러 가지 활로를 모색하던 포르투갈인들은 마침내 유럽인들에게는 상당히 익숙하면서도 효과가 좋은 상품을 개발해냈다.
오피움(Opium), 즉 음역하여 아편(阿片)이라는 물건이었다.
* * *
예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편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서아시아와 지중해에 살던 인류는 먼 옛날부터 양귀비를 재배하고 이용하고 있었다.
양귀비는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다.
중세에 들어서면 서유럽에서도 동서를 막론하고 일반 가정집들이 양귀비를 재배하여 그 씨앗 등을 빵에 넣어 먹는 광경을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알 비루니(Al―Biruni)라는 저명한 학자는 이미 11세기부터 민간의 유흥용 아편 섭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글들을 남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편의 기세가 본격적으로 타오른 것은 화학과 농업이 발전했을 때부터였다.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토지의 생산량이 증가되니 곡물뿐만 아니라 양귀비도 더 많이 재배되었으며, 화학기술의 발달로 기존의 씨앗과 생아편 정도만 사용했던 자들이 아편말(아편 가루) 아편 팅크(아편―에탄올 혼합물) 등으로 정제하여 쓰게 된 것.
17세기의 유럽과 중동에선 이미 아편이 널리 퍼져 있었다.
효과는 더없이 뛰어나 보여서, 온갖 증상에 만능 특효약이라고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위험성 자체는 꽤 예전부터 알려진 상태였다.
역시나 고려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 중에 상당히 특이한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는 고려인들은 남들이 다 좋아하는 아편을 유난히도 혐오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인들도 처음부터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아편이 대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일부 고려의 상인들은 자연적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수입해 본국으로 돌아갔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들도 상인이니 유럽에서 잘나간다는 의약품, 기호품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국에서 잘 팔리면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신제품 확보도 상인의 자질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듬해 유럽의 상인들이 그 고려인 상인들을 마주했을 땐 그들은 일 년 전과는 아예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 되어 있었다.
비쩍 마른 몰골은 기본이요, 아편의 아 자를 듣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것은 덤이었다.
― 다… 당신, 더… 더 이상 고려인에게 아편을 팔지 마시오…! 지금은 그… 금지령이 내려왔으니 만약 다… 당신이 밀매를 하려 하면 당신에게도 큰 화가 미칠 게요! 한 달 동안 코… 코로만 물을 마시게 될 수 있소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수입을 해왔기에 망정이지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 영영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고려의 아편 혐오는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
듣기로는 소량의 아편 추출물은 의약품과 연구용으로 쓴다던데, 그것도 엄격히 관리하는 내부 부지에 재배하지 외부에서 수입하면 얄짤없이 큰 처벌을 받았다.
고려의 아편 금지법 이후, 카나리 등의 주요 무역지에는 수상스럽게 눈매가 매서운 고려인들이 돌아다녔다.
밀반입을 하려는 상인들이 있다면, 아마 좋은 최후를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려의 영향을 받아, 고려의 번국들에서도 일찍이 마약류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약단속국 소속 요원들이 조선과 옥저, 백제 등의 경무청과 협력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상쩍은 약물들을 검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번국은 고려인들과 외모 자체가 비슷했기에 단번에 외지인이라 알아보기도 힘들었고, 일단 이민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 번국이 뚫리면 고려도 위험했다.
그 이후, 유럽에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마약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고려가 싫어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고려를 따라 해서 나쁜 일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