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 대비하는 자세들(2)
미주 대지진으로 고려가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서해안의 대도시 하나가 박살이 났으며, 나머지 둘도 큰 피해를 입었다.
하와이에도 지진해일이 할퀴고 지나갔으며, 정박한 배들이 침몰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거대 증기 군함도 침몰한 사례가 있었다.
차라리 수심이 깊은 먼바다에 있었으면 그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진의 시간대가 오후 아홉 시, 한밤중이라는 것이었을까.
가정집을 제외한 3층 이상의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피해는 막대하나, 인명사고의 크기는 절망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여진과 지표 액상화 등의 문제는 거대지진이 끝난 뒤에도 계속 도시들을 괴롭혔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 참혹한 비극의 현장 속에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천만다행스럽게도, 그때 상민은 중려대륙의 정치적 문제로 퓨레페차에 있었다.
그리고 퓨레페차와 미주는 전신선이 막 연결된 참이었고.
아마 그가 창양이나 청해에 있었다면, 제아무리 전신을 이용했더라도 이 소식은 훨씬 늦게 도착했을 것이었다.
다시 명령을 내려도 그만큼 늦게 하달되었을 것이고.
그럼 초동 조치가 완전히 물 건너갔겠지.
어쨌든 상민은 임시로 조정의 명을 대리하여 지진피해에서 멀쩡한 지역에 있는 해군(미원의 해군은 큰 피해를 입어 당분간 움직일 수 없어 보였다.)에게 재빨리 배에 구호물자를 실어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고, 지진으로 단선된 주요 철도와 전신을 복구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가면시중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는 황실과 시중의 이름으로 ‘백지명령권’을 내릴 수 있었으니 명령을 받는 입장에서도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
위도 반대편에 있는 조정치고는 놀랄 정도로 신속한 명령이라는 생각은 들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후아이나푸티나 화산 폭발 이후, 재난에 대한 여러 가지 표준절차가 생겨났고, 각 지자체들 간의 유기적인 상호협력이 가능했다.
미주와 가까운 곳, 피마족이 많이 살고 있는 경주는 배에 주방위군과 물자를 실어 보냈고. 사막을 두고 떨어져 있는 앙주와 택주에서도 용오름(토네이도) 피해를 위해 구축했던 물자를 철로에 실어 보냈다.
미주도 이전까지 다른 주의 재난에 많은 물자를 주던 지역이었으니, 몇몇 시민들은 자원봉사를 자청하기도 했다.
그 후에 이제 막 연방에 가입하여 신이 잔뜩 난 중려대륙의 신규 가입주들도 발 벗고 나섰으며, 지진이라면 남 일이 아닌 남려의 서해안에서도 구호기금이 전달되었다.
본토와 다른 지역에서도 성금이 쏟아지니, 좁아터진 니카라오 운하가 필요 물자를 실은 배로 가득 차 한동안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자마자 곧바로 배를 타고 직접 현장에 도착한 상민은 전쟁이라도 난 듯 참혹하게 변한 미주의 도시들을 둘러보며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정도의 거대지진은 인간이 어떠한 대비를 한다고 해도 무의미했다.
오히려 마천루나 고층빌딩이 더 많았다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겠지.
‘하지만 너는 미리미리 생각을 해 놨어야 했다. 네가 평온하게 밥을 먹고 잠을 잘 동안 네 신민은 이렇게 죽어가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은 대비를 했어야 했다.
대체 미래 지식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한발 늦게 떠올릴 것이었으면.
상민은 자신의 모자람에 탄식했다.
물론, 그는 제국교도나 쿠쿨칸교도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한낱 오래 사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니 화산이나 지진, 태풍들을 미리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그것들이 역사서에 잘 기록되지도 않았더라면 더욱더.
세상에 어떤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큰 지진이 일어났는지 달달 외우고 있겠는가.
직접 경험해본다면 모를까, 21세기의 대한민국도 이웃 나라의 지진조차 연도만 대략 알 뿐 구체적으로 언제 발생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발 앞서 알아차리는 것도 지금은 불가능했다.
화산 폭발 이후 지구과학에 대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천재지변을 예측하는 예보는 불가능했다.
이런 것을 제대로 예보하기 위해선 인공위성과 슈퍼컴퓨터 같은 첨단 과학 장비들이 필요했으니.
‘다만 지진과 지진해일의 징후와 대처법 등은 공교육을 통해서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지진에 대피하지 못했을 때는 가구를 이용해 몸을 숨기고, 가능하다면 공터로 나가라는 규칙.
해안가에서 수 시간에 걸쳐 간조와 만조가 바뀌는 것이 아닌 몇 분 내로 갑자기 물이 빠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달려 고지대로 향하라는 기초 상식들.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 때 해변에 있던 작은 소녀가 초등학교에서 배운 지식들로 부모를 설득시켰고, 부모의 말을 들은 사람들도 대피하여 수백 명을 살린 일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밖에도 평상시 재난에 대비해 통조림 같은 식량과 의료품을 싸 놓도록 한다든지.
일본이 그 활발한 지진 속에서도 피해를 그렇게 많이 받지 않는 이유는 철저한 교육 덕분이라지.
그 밖에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눈썹을 한 번 꿈틀거린 상민은 팔을 걷어붙이고 미원의 도심에 다가갔다.
진도 자체는 치누크보다 떨어지겠지만, 미원은 가장 많은 고층 건물(고려의 현행법상 6층 이상의 건물)들이 있었기에
“―――――!”
근처에 있는 두 건물은 굳건히 버티고 있었지만, 유난히 한 건물이 폭싹 주저앉아 있었다.
무너진 건물에서 비명 소리인지 신음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이런저런 소음 속에서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은 상민은 망설임 없이 건물더미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 다른 구조물이 무너질까, 그를 호위하던 여의국 요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제지하려 했으나 어찌나 발걸음이 빠르던지, 상민은 이미 돌 더미를 옮기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에 서린 힘줄과 핏줄이 도드라지자, 이윽고 사람 하나 크기만큼 거대한 돌이 서서히 움직였다.
괴물 같은 힘이었다.
― 오오오
오가던 사람들이 혼란한 와중에도 놀라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구경났소? 그대들도 빨리 할 일을 하시오!”
여의국 요원들이 손을 저으며 물리는 소리도 들렸다.
건물 붕괴 현장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과감하게 강회 구조물들을 치워나간 상민은 마침내 잔해 아래에 엎드려 있는 중년의 남자와, 그 아래에 있는 작은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상민의 고함에 여의국 요원들이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천천히 경비원 복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 아래에서 소녀를 꺼내었고, 들것에 눕혔다.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해 거의 빈사 상태에 빠진 소녀는, 힘이 없는 와중에도 들것에서 자꾸만 팔을 뻗어 뭐라 중얼거렸다.
“아빠, 아ㅃ….”
“괜찮을 게다.”
소녀가 구호소로 운반된 이후, 상민은 소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경비원과 그가 등으로 버티고 있는 거대한 돌을 바라보았다.
작은 책상인지 탁자인지가 옆에 같이 있었지만, 진작 나무다리가 박살 나 있었다.
상민조차도 들 수 있을까 의심이 될 만큼 거대한 돌을 홀로 버텨내던 시신은 화장하기 직전까지도 경직을 유지했다.
* * *
청해의 한 고급스러운 주택, 중년인은 창가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건설사! 철퇴를 맞다!]
신문들도 날이 갈수록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머리기사들과 문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신문가판대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을 것이긴 했다.
이러다 어쩌면 나중에는 사진이라도 실릴지도 모르겠다.
그는 본문 내용을 훑어보았다.
[건축 특별법, 중서성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다.
소방방재법에 내진 설비에 대한 조항 추가 검토 예정…. 지질학자들은 지진 빈번한 곳에선 건물 층수를 제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다행이다.
이번 일이 표면으로 올라와 언급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른 본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중년인은 신문을 접었다.
내려놓은 신문에는 몇 가지 기사들이 덤으로 적혀 있었다.
[건물과 항만, 철도와 전신 등의 기반시설에 대한 안전 평가 실시….]
[황상께선 힘든 시기일수록 신민이 단결하여….
또한 재난구호기금 창설을 주장하셨으며….]
안도를 하긴 했는데, 중년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 달그락
찻잔에 담긴 커피가 사방으로 튀니,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내가 눈을 찌푸렸다.
“당신, 좀 대범해져요. 뭐 그리 불안해서 손까지 벌벌 떨어요?”
남편은 손만 떨어대지도 않았다.
그는 신문을 내려놓은 이후부터 계속 창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몰라서 그래. 이상한 소문이 있다고!”
그는 일단 지금 당장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좀 잠잠해진다면 어디 한적한 곳으로 떠나든가, 혹은 회사를 매각해버리자고 결심했다.
가기 전에 자료 파쇄는 꼼꼼히 하고.
손발까지 벌벌 떨어대는 꼴을 바라보던 그의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무슨 일로 저렇게 불안해하는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바람을 넣기도 했었으니까.
“어차피 이렇게 큰 지진은 당신 회사 잘못이 아니잖아요. 천재지변 몰라요?”
유종건설은 고려 굴지의 건설사였다.
철근강회기법이 대세가 되자, 고층 건물들을 만드는 회사들도 많이 성장했다.
유종건설도 고려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로 가파르게 사세를 확장해온 대표적인 기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난스럽게 유종건설의 성장세는 돋보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그것이 유종건설의 사장인 중년인, 조유종의 능력에서만 기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아마 업계에서는 눈치채고 있지 않았을까.
부실공사, 날림공사의 선두주자.
본래 100의 자원이 들어가야 할 건축물은, 정말로 아끼고 아낀다면 80의 자원으로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종은 20만큼의 사내 자금을 횡령할 수 있었고.
‘그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원가를 절감하는 것이 기업가의 미덕이다!’
단기간에 매출을 2할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원가를 2할 줄이는 것은 할 만한 일이었다.
이 얼마나 효과적인 이윤 창출 방법인가?
물론, 그의 원가관리는 정상적인 범주 내―즉 경영과 기타 관리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전성이 의심되는 값싼 자재 쓰기.
숙련공의 숫자를 줄이고 비숙련공의 숫자를 늘리기
공사 기간을 억지로 앞당기고 안전 점검 빼먹기.
다른 건설사들이 하는 것을 생략하거나 날림으로 하니, 큰 이윤을 통해 압도적으로 빠르게 성장했던 것이다.
평상시라면 유종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건물이라는 것이 의외로 날림공사를 한 후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미주 대지진 때, 미원과 추마시에서 유종건설이 주도로 건설한 건물들이 유난히 많이, 참혹하게 박살이 난 것은 그도 눈치가 좀 보였다.
근처에 있던 비슷한 고층 건물들, 업계 1, 2위라는 중산건설과 시대건설이 지은 건물들은 깨지고 금이 갔을지언정 버틴 것을 봐서 더 그랬다.
‘차라리, 미원과 추마시도 아예 화끈하게 치누크처럼 무너져 내렸으면 또 몰라….’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생각도 자연스럽게 떠오를 지경이 된 그는, 어린 애처럼 잘근잘근 손톱을 씹었다.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직은 안전한가 보다.
건축 특별법도 과거에 지은 것들에 대해선 소급 적용하지는 않겠지.
다행이다, 다행이야.
별 해괴망측한 소리긴 했지만, 고려의 기업가들에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양심에 거스르는 짓을 하지 말라.
영원한 그림자가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
머지않아 네 죄업이 너를 죽음으로 이끌리라.]
‘뭔 병신 같은 소린지.’
어린 애새끼들도 아니고.
“앗!”
중년인은 손톱을 뜯는 것을 멈추었다.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지하실에는 어슴푸레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이 작은 유리구슬 안에는 놀랍게도 불꽃이 들어있지도 않은데 밝게 빛나는 가느다란 선이 존재했다.
내구성이 너무 약해 자주 끊어지긴 했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곳에서는 등불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았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던 요원이, 자신의 상관이 다가오자 벌떡 일어나 예를 취한 뒤 말했다.
“아, 그 처리대상 명부 말이야. 어디에 있었지?”
요원이 기록을 뒤적였다.
처리대상이 한두 명이어야지.
“처리대상 명부라 하시면 구체적으로….”
정치인, 기업인, 사상가, 첩자.
심지어 황족까지 따로 구분되어 있었으니, 범위는 너무 광대했다.
처리 강도에 대한 것도 구분이 달랐다.
단순히 관찰대상이나 가택연금으로 끝난 자들도 있었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자들도 있었고.
사도는 요원에게 알아듣기 편하게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 보였다.
“거 돌솜 멍청이 같은 서류 있지 않나.”
“아, 그것들이라면 33―나에 있을 겁니다.”
요원은 단번에 이해한 듯 바로 대답했다.
기업인, 죄질 나쁨. 처리 강도 높음.
요원은 아주 약간의 호기심이 들었다.
새로운 기록물들이 들어오는 모양인데.
설마, 돌솜집에서 살다 불과 일 년 반 만에 끔찍한 불치병을 얻고 죽은 뒤에도 의학적 목적으로 시신이 기증당한 불쌍한 충환의 전례를 밟을 것인가.
가끔가다 모시는 분의 잔혹성이 터져 나올 때면, 그러한 운명에 처해질 자들이 생겨나긴 했었지.
“고맙다.”
말한 대로의 선반으로 가 한참 서류 더미를 뒤적이던 사도가 찾던 서류를 가지고 와 만년필을 꺼내 서류 불출 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선반이 꽉 차 있던데 미리 정리해 놓는 것이 좋을 거야.”
아마 다른 서류들도 좀 들어올 것 같거든.
뒷말은 나가지 않았으나, 비밀보관소를 관리하던 요원은 대충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