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47화 (347/653)

재난에 대비하는 자세들

[장하다, 조선!]

개천력 423년(CE1698) 9월, 창양 제국신문의 머리기사였다.

본래라면 을병대기근이라고 할 만큼, 조선사에서 경신대기근에 비할 정도로 끔찍한 아사자가 속출했었을 시기는 꽤나 유연하게 넘어갔다.

높게 평가할 만한 일이었다.

만민공동회의 개최 이후, 조선은 빠르고 완연하게 입헌군주국으로 바뀌었다.

이왕가는 해황가 정도의 엄청난 경제적 능력과 상당한 정치적 조언을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조선은 지금도 유교의 물이 다 빠지지 않았으니 국왕이 직접 권력을 국민에게 이양한 이후부터는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욱 큰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비록 경신대기근이라는 불운을 겪으며 엄청난 정치적 위기를 겪었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혁명을 허락했으니 일부 사람들은 이욱을 이성계나 이방원, 병인몽란에서 끝까지 항전하며 국체를 보존한 이금, 조명전쟁에서 승리한 이휼과 같은 조선사 최고의 명군들과 비교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임금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도 명예혁명 후였다.

감히 선대왕들의 업적을 품평하는 자리가 가능할쏘냐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지금 만동묘를 지은 조선의 사대부들은 경신대기근 이후에는 조선이 과연 조종(祖宗)의 묘호를 쓰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정도였다.

정작 고려는 조선이 외왕내제를 하든 말든, 묘호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서, 이욱은 후대에 의해 ‘고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이욱이 허가한 만민공동회는 총 9차례 개최되었다.

매 회차마다 구성원의 폭이 넓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양반과 사대부들, 일부 부상들과 중인들이 참가했었지만, 중간부터는 양인들, 소상들과 서얼들이 참가했으며, 마지막에는 천민들까지 자리했을 정도였다.

만민공동회에서 대두되는 선거권 문제는 신분해방운동에불을 당겼다.

조정에서는 만민공동회 이후 설립될 의회의 구성원들을 상국과 같이 지방선거로 뽑기로 결정했다.

의원들 몇 명은 고려 황실처럼 이왕가가 뽑을 것이지만, 그 비중은 낮았다.

하지만 초기 만민공동회에서 도출된 선거권의 범위는 너무나 지엽적이었다.

조선의 기득권들은 투표에 대한 제약을 강하게 걸길 원했고, 그 의중이 고스란히 반영된 초창기 선거권은 오직 일정한 나이를 둔 양인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사회적 신분과 가정 유무, 재산 등의 이유로 분할하여 투표권을 달리 주자는 차등선거를 주장하니 참관하던 개성 총독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던 것이다.

이에 단단히 뿔이 난 하층민들과 천민들은 이번 기회에 신분해방운동을 벌였다.

천민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비는 물론이고 다른 팔천(八賤)들도 상국의 제국헌장과 헌법을 들며 그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조정은 우리의 족쇄를 풀어라! 우리 또한 주상의 자녀이며 또한 이 나라의 국민이다!”

서얼들도 신분해방운동에 참가했다.

천민들만큼이나 사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서얼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합류는 신분해방운동에 이념적 확신을 불어넣었다.

“상국 또한 악폐습을 버린 지가 어언 몇 세기인데, 어찌 그 빛을 좇으려는 자들이 구습을 따라 하는 것인가!”

“상국의 학자 김 아무개가 말하기를….”

먹물 좀 먹었다 하는 이들은 개성에서 여러 인물들과 교류하고 상국의 책들을 들여와 광장에서 떠들어대었다.

신분해방운동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과격한 진압으로 피도 흘렀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이제 명백히 구시대적 신분제를 철폐하고 있는 수순으로 나아가니, 맹목적인 수구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지 10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인 개천력 405년(CE1680).

조선은 드디어 노비제를 폐지하고 서얼 및 천민 차별을 금지했다.

그들에게도 ‘살기 좋은 시대’가 온 것이다.

투표권의 확립 이후 만민공동회는 폐회되었다.

대신 그 결과물인 중추원이 설립(엄밀히 따지자면 개편)되어 입법부가 되었고 향촌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중추원에 올라와 자리를 채웠다.

만민공동회의 우여곡절만큼, 이 중추원의 의원들이란 작자들도 국민적 의견수렴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조선이 고려를 모방한다고 하긴 하는데, 고려는 초창기 오현제로 대변되는 전제군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면시중시대, 민선시중시대를 거치며 수십, 수백 년 동안 하향식과 상향식 양면으로 모두 쌓아 올린 의회적 전통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적당히 주물럭거려 큰 갈등을 해소한 존재도 있었고.

그러니 조선인들은 고려를 따라 하다 아마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광화문 앞에 위치한 조선의 중추원에서는 종이와 먹, 붓은 물론이고 신발들과 갓들이 허공을 날았다.

사방에서 이놈이니 저놈이니 하는 고함 소리가 요란했고 서로 멱살잡이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를 따져보면 이것이 마냥 미개하고 나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유럽의 의회에서도 결투장과 장갑이 날아다녔으니까.

의회가 없는 나라들은 더더욱 많았고.

어쨌든 조선의 의원들이라고 해서 완전히 다 밥버러지들은 아닌 까닭에, 그들은 싸우는 와중에도 몇 가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전국에 철도망을 까는 일.

환곡제를 정비하여 고려처럼 곡창(그 정도의 거대한 규모는 어림도 없지만)을 만드는 일.

주변국과의 긴밀한 외교.

이외에도 자잘한 일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을병대기근은 조선이 정상적인 근대화의 궤도에 오르자 의외로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지는 못했다.

조선 조정은 흉년이 닥친 4~5년간의 아사자들 규모를 대략적으로 9~11만 명 정도로 추정했다.

비록 고려에선 5년 동안 10만여 명이나 굶어 죽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아직 조선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선방한 수치였다.

동시대 다른 나라들과도 비교해보자면 이 정도는 상당히 작은 재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리 상국에 부탁해 곡식과 보존식을 좀 사놓은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의 다른 노력도 돋보였다.

철도를 통한 유통의 안정과 곡식 저온보관기술의 도입, 주작물 및 구황작물의 다변화와 외국 종자들 도입 및 개량, 활발한 심요 및 루손섬 개척 등의 노력들은 조선의 역량이 25년 전보다 훨씬 더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고려의 대규모 지원이 없어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큰 피해 없이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 * *

그래서, 이제는 상국이 재난에 모범을 보일 차례.

후아이나푸티나 분화 이후, 100여 년 만에 또 고려는 거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고려―메뚜기 전쟁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곤충과의 전쟁은 하루아침에 승리하지 못한다.

적어도 몇 년, 몇십 년은 진득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조정에서도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될 때까진 적어도 반세기쯤 걸리리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넓은 땅은 또 다른 재앙에 대한 대비를 촉구했다.

“대체 왜 고려는 이렇게 많은 재난을 겪는단 말입니까?”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난 해찬에 이어 즉위한 해원은 자신의 임기 초년에 발생한 대재앙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상민은 그 물음 자체가 좀 양심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황상, 아국이 점유한 땅의 크기를 생각해 보시오.”

세상의 사분의 일을 지배했다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위대한 대영제국의 전성기 면적은 대략 35,500,000제곱킬로미터였다 들었다.

아마 맞을 것이다. 전생의 과학 시간에 육지 면적이 1.5억 제곱킬로미터 정도라 들은 기억이 나니까.

지금의 학자들도 대략적으로 그렇게 추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도 지지 않으면서, 지구를 남북으로 이어버리는 유일무이한 국가인 고려제국이 영유권을 소유한 곳의 총면적은 그보다도 더 큰 40,400,000제곱킬로미터라 추정되었다.

거의 세계 표면적의 3할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크고 작은 재난이 끊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물론, 개천력 425년(CE 1700), 미주를 강타한 미주대지진은 절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미주의 주도는 미원이다.

처음에는 수난이 잦았지만, 운하가 파이고 철도가 깔린 이후에는 빠르게 성장해 다른 연방의 주도들과도 비교해 봐도 전혀 꿇리지 않을 정도의 위치가 되었다.

날씨가 좋고 살기도 좋다.

물산은 적당히 풍요롭고 안락하다.

근처에는 금광도 많아, 금을 캐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는다면 얄짤 없이 자원보호법 위반이다.

미원을 제외하고 미주의 대도시를 꼽아보자면, 아마 2개의 도시를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남쪽의 추마시(Chumash)는 미원처럼 항구가 들어서기에 좋은 내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보다 남쪽이라 위치 접근성이 좋고 기후도 온화해서 빠르게 번성했다.

특이한 점은, 조선계 이주민의 숫자가 무척이나 많았다는 것.

도시의 이름은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 추마시족에게서 따 왔는데, 지금 인구 규모로 보자면 그들은 꾸준히 조선계 고려인들에게 밀리고 있는 추세였다.

북쪽의 치누크(Chinook)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치누크족이 살아가던 이 땅은 한주와 미주의 경계선에 자리 잡았지만 이내 미주 제3의 도시가 되었다.

추마시처럼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한 이곳은 미원보다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내해를 끼고 있어 외부 바다의 파랑으로부터 보호받는 항구도시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위도에 있는 세 도시를 중심으로, 미주는 나름대로 지역을 균일하게 발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고려는 한창 견회와 강회, 그리고 강회를 철근으로 보강한 철근강회 공법으로 건물을 짓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고층 건물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과거 벽돌로 지은 건물은 조적조(組積造) 구조의 한계로 일정 이상(대략 5층 정도)의 건물을 올리기 힘들었지만 이제 그 한계가 극복 가능해졌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창양과 청해와 같은 대도시엔 세계 최초의 마천루, 늘벗보험 건물을 포함한 고층 건물들이 서서히 지어지고 있었다.

미주에도 철근강회 건물들이 늘어나고 있던 것은 당연지사.

자연스럽게 이전보다 인구집적도도 높아졌으니 이는 도시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개천력 425년 1월 26일,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고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지진이 북려 서해안을 강타한 것이다.

지진이야 남북려 서해안의 사람들에겐 의외로 익숙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규모와 진도가 낮은 지진들이었다.

지금 이 정도의 대규모, 아니 거대규모의 지진은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

― 우르르릉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후에 원주민의 언어를 따서 파체나 섭입대라 불릴 거대한 지각층은 수백 년 동안 쌓아온 거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열하며 엄청난 진동을 지표면으로 분출했다.

그 힘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치누크에 살던 사람들은 악몽적인 대지진에 집과 건물들이 전부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엄청난 수의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조적조니 철근강회니 하는 건축방식은 무의미했다.

대자연의 분노에 이 건물들은 모두 공평하게 무너졌다.

건물 안의 사람들을 구하려 근처의 무사한 사람들이 달려들었지만, 도시는 단 한 순간에 너무나 큰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기에 구출 노력은 대부분 좌절되었다.

하지만, 치누크시의 시민들은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야 했을 것이다.

치누크는 치누크만과 말발굽반도(올림픽반도)를 끼고 있는 내륙 도시였으니, 2차적인 지진해일의 충격은 반도가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반면 해안가에 살던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지진이 한 번 할퀴고 지나간 자리, 시간차를 두고 무려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지진해일이 찾아왔다.

이 물의 마천루는 상당한 깊이의 내륙까지 단번에 휩쓸어버렸고 그 근처에 사는 소규모 농장을 이끄는 사람들이나 해안가에 살던 원주민 집성촌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남쪽이라고 이 충격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파체나 섭입대의 파열은 미주 단층이라 불리는 거대한 판의 경계선에도 충격을 주었고 결함전달(Aseismic creep)의 원리에 남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주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했으며, 추마시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많은 인명피해를 받았다.

지질학자들은 ‘불의 고리’, 즉 환태평양 조산대 또한 고려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었다.

[작가의 말]

오늘날의 지도로 보시면

미원은 샌프란시스코,

추마시는 로스앤젤레스,

치누크는 시애틀입니다.

의외로, 현대적 고층빌딩들이 대성당들의 첨탑 높이를 추월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1908년에 들어서야 미국 필라델피아 시청이 기존의 울름 대성당의 높이를 추월했다 하네요.

아래는 지금 이 시대 기준 최고 높이의 건축물들입니다.

화재나 기타 사고로 소실된 것은 제외했습니다.

건축물의 기준은 동상이나 기념비, 피라미드, 석탑 등을 제외하고 인간이 주거하거나 사업(종교 포함)을 할 수 있는 구조(CTBUH 기준)에서의 기준입니다.

1위 : 링컨 대성당(잉글랜드 링컨), 160미터

2위 : 성 메리 교회(도이칠란트 슈트랄준트) 151미터

3위 : 청해 성공회 대성당(고려 청해) 145미터

4위 : 올드 세인트 폴 대성당(잉글랜드 런던) 140미터

고층 건물 순위.

1. 늘벗보험 건물(청해) : 51미터

2. 전려교육보험(교보) 건물(창양) : 40미터

파체나 섭입대는 캐스캐디아 섭입대입니다.

미주 단층은 산 안드레아스 단층입니다.

1700년의 캐스캐디아 대지진(1700 Cascadia earthquake)은 메가트러스트 지진으로, 초거대지진으로 분류됩니다.

모멘트 규모로 따지면 최대 9.2의 지진이라 하네요.

로그함수상 모멘트 규모가 1씩 증가하면 방출되는 에너지는 약 루트 천, 즉 31배 정도만큼 커지게 됩니다.

그러니 9.2의 지진은 규모 5.0의 지진보다 백만 배, 7.0의 지진보다 천 배 강한 셈이죠.

하지만 지금 고려와는 다르게 원역사의 1700년에는 미 서부에 사람들이 그리 많이 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요한 기록들은 원주민들의 증언이나, 나무들의 나이테, 지층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네요.

물론, 캐스캐디아 대지진 며칠 뒤에 무려 태평양 반대편에 있던 일본에 16피트(5미터)짜리의 뜬금없는 쓰나미가 들이닥친 겐로쿠 시대 기록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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