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46화 (346/653)

두 대륙의 전쟁(2)

고려―메뚜기 전쟁.

고려는 제11회 메뚜기방제대책회의에서 정립된 개념을 토대로 곤충에 대항하는 인간의 진군을 시작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려메전쟁이라고 불리는 희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고려는 작전계획을 세워 농지들을 계획적이고 맹렬하게 늘려나갔다.

이전과는 달리 명확한 목표가 세워지자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평원 범람원의 자연제방은 물론이고 드넓은 배후습지조차 인간의 열의에 굴복해야만 했다.

북려 대개척시대라 불릴 만큼, 과거의 지지부진했던 개척속도를 국가 주도로 빠르게 밀고 올라가기 시작한 것.

심지어 군부대도 동원되었고, 작전을 지속하기 위한 철도도 증설되었다.

정말로 전쟁과 다름없는 열의였다.

심지어 이 전쟁을 위해 제국헌법도 수정되었다.

그 신성한 경자유전의 조항도 살짝은 개정되기 시작한 것.

무려 태조 해민이 못 박아 둔 경자유전이다.

사실 당사자 상민도 이전부터 경자유전의 한계를 약간씩 느끼고 있었다.

사실 언젠가부터 저걸 개정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자신의 과거의 권위가 하도 대단해서 애를 먹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 많은 제국의 시민들이 이 경자유전의 세부 조항들이 때로는 너무 구시대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고려의 유명한 농경제학자인 고성수가 말했듯, 인간의 소유는 모래마저도 유리로 만들었다.

경자유전은 농지 소유자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때 가장 큰 효율을 뽑아낼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예전만큼 농사가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았다.

물론, 고려의 국내총생산의 비중은 여전히 농업 생산량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했다.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농업은 다른 산업에게 그 지위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시대가 발전하며 개별 농사주체들의 생산력이 증대되고, 따라서 곡물의 가격이 떨어지는 이 순간, 전통적인 자영농들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서서히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엄격한 경자유전을 걸어놓고 상속토지 강제 기간 내 처분 및 임대차 금지, 이농 시 토지유지 금지 등의 엄청난 제약을 걸어놓았던 고려다.

하지만 이것이 토지제의 모순을 아예 없앴다고 보기 힘들었다.

경기권의 도시들은 이미 수십만을 훌쩍 넘었으며 창양은 백만을 넘어갔다.

과거와는 달리, 도시 근교의 토지들의 가격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말만 농장이라고 걸어놓고 더 이상 힘들게 농사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농지를 다른 용도로 쓰기 시작하는 곳이 생겨났다.

농지전용(農地轉用)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 시대가 바뀌었으면, 법도 바뀌어야 하는 법입니다. 경자유전은 고려의 기틀이자 이상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꿈을 꾸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우여곡절 끝에 개헌으로 경자유전의 원칙은 많이 완화시켰고 그 대신 농지농용(農地農用)의 원칙을 재정립했다.

경자, 즉 농업주체의 개념에 농민 말고도 단체가 들어갈 수 있다고 개정한 것.

이에 처음으로 기업의 체계를 가진 농업조직들이 탄생했으니, 이를 기업농이라 불렀다.

이들 기업농은 효율성을 담보로 하면서도 거대한 농토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었고 심지어 자체적으로 연구개발에 힘써 농업현대화를 성취하고 그러므로 생산경쟁력을 더욱 원활하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정말로 기업농에 걸맞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아마 기계들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하겠지.

그래도 상민은 지갑을 열어 몇 가지 기업농들을 주워 담았다.

일단 고려 정부의 기업농 육성 방안은 수천만이 훌쩍 넘는 자영농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남려보다는 대메뚜기전(戰)에 대규모 자본과 투자가 필요한 북려에 먼저 실행되었다.

기업농들은 려메전쟁에서 전차처럼 메뚜기들을 밀고 지나갈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만약 고려가 이대로 승리한 뒤에는 어떨까.

이 기업농들은 조정이 약속한 대로 그들의 점령지에서 열심히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끝난다면 기업농들이 휘두르는 자본의 폭력에 자영농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질 수도 있었을 터.

상민은 남려에도 경쟁력있는 자영농 기반의 농업시스템이 구축되길 원했다.

“황상, 태자, 내탕금은 이럴 때 쓰라는 거요. 시중이 자영농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을 때, 우리 황실은 이렇게 인기를 관리하는 게지.”

“…….”

수백 년 묵은 선조의 황실인기관리 노하우를 받은 해찬 해원 부자의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어쨌든 황실은 상민의 조언대로 그들의 내탕금을 풀어 남려의 자영농들에게 북려의 기업농들에 대항하여 조합을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사람들은 이를 농업협동조합, 즉 농협이라 불렀다.

물론 전쟁 초창기의 두 집단의 체급차는 절망적이었다.

메뚜기 군집은 적으면 수백억, 많으면 수조에 달했다.

단일한 메뚜기 개체가 저렇게 많이 불어난 것은, 인류 역사상 아마 최초라 쓰일 것이다.

성경에 나온 황충의 재앙도 지금 태륭고원메뚜기떼보다도 숫자가 적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세계 최대의 평원, 압도적인 너비를 가진 북려대평원의 위엄이라고 말할 수밖에.

지금까지 가장 많이 집계된 황충의 숫자는 개천 415년의 10조 마리였다.

비록 추정치였지만, 그 압도적인 숫자는 모두에게 큰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허나,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에 있는 이유는 도구의 사용 덕이 아니던가?

* * *

지금까지 고려의 농업계획은 인간이 가능한 집약적인 경작지를 일구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번 방제계획은 단숨에 경작지를 늘려야 하니 사람과 가축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 광대한 땅을 어찌 인간과 소, 말이 다 경작하겠는가.

고려는 대자연에 맞서기 위해선 도구, 즉 기계화 농부사단이 필요했다.

이제 내연기관이 표면 위로 부상할 때가 되었던 것.

외연기관이 그 본질적인 한계로 일정 이상 소형화와 경량화가 불가능한 덕에, 외연기관으로 농기계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

연료 선택의 자유로움과 기계 구조의 단순함을 장점으로 삼는 외연기관, 증기기관은 필연적으로 덩치가 컸다.

이는 기차 정도의 크기에서는 거의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논밭에 기차를 끌고 갈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증기기관은 한 번 운용을 하기 위해선, 예열작업에만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으며 열효율이 너무 낮아 많은 부피와 질량의 연료를 처먹어야 했다.

그러니, 농기계를 제대로 개발하기 위해선 내연기관이 필수였다.

분명히 증기기관에 비해 내연기관의 테크는 한 단계 위로 여겨졌다.

하지만, 상민과 기술선도국, 그리고 제국학림원에서 이 한 단계 높은 기술적 개념을 발명 이전에도 몰랐냐 하면 그건 확실히 아니라 단언할 수 있었다.

사실, 내연기관의 역사는 보기보다 꽤나 오래되었으니까.

심지어 아득히 먼 옛날, 삼별초 이전에도 이미 이슬람 세계에서 알 자자리가 2행정 내연기관을 고안했었다.

고려의 시대를 따지고 보면, 장성재가 충배를 이용해 구동부 및 변동기(크랭크), 압원통(실린더) 등으로 회전운동을 직선왕복 운동으로, 혹은 그 반대도 성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개념을 정립했으며, 고려 최초의 내연기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성재 사후 이탈리아에서도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가 일생 동안 장성재와 마주하지 못했고 그의 연구 결과를 보지도 못했음에도 독자적으로 내연기관을 고안했다.

이들 모두 그들의 삶에서 실용적인 내연기관은 보지 못했지만, 선지자들이 세운 개념은 몇십 년이 흐른 뒤,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려는 후배들에게는 큰 영감을 주었다.

개천력 4세기 말, 5세기 초부터 내연기관에 대한 특허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과도기니만큼 제대로 된 내연기관이라기보단 신기한 내연기관이 많았다.

심지어 화약으로 동력을 움직이자는 발상을 한 인간도 있었으니.

하지만 전태준이라는 학자가 열역학 법칙에 따라 이상적인 내연기관에는 압축행정이 필요함을 증명해낸 이후에는 내연기관들은 일정한 방식의 구조를 서서히 갖추기 시작했다.

개천력 412년에 기술선도국은 청해대학 소속으로 위장한 소속 연구진 3명(박효성, 최요한, 사무엘 몰랜드)의 이름으로 최초의 압원통 충배(실린더―피스톤) 왕복행정의 특허를 따놓았다.

* * *

중려.

틀락스칼라.

사람들이 전보소를 들여다보며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 따닥 딱 딱

전보소 안에는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밝은 귀와 좋은 기억력, 민첩한 손을 가진 젊은이가 전보기에 꽂힌 종이에 유먹이 잘 기록되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반면 그 옆, 젊은이에게서 일정한 길이의 종이를 건네받은 깐깐하게 생긴 노인네는 종이에 기록된 사항을 신중히 옮겨 적었다.

“정말, 느릿해가지고…….”

마지막 한 사람은 군중에게 조금 진정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정확한 게 중요하지 않겠소? 조금 진정하시고 물러나 있으시오.”

관리의 말에 그들이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노인이 모든 전보를 해석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관리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관리가 전보소 밖으로 나갔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는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시선들에게서 눈을 돌린 뒤 천천히 전보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틀락스칼라 조정에서 내린 교지였다.

앞으로는 보기 힘들 수도 있겠다.

“개천력 421년, 틀락스칼라 왕국은 고려 제국연방과 통일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 밑에는 세부적인 내용이 많았다.

주의 명칭은 틀락스칼라 그대로 갈 것이라는 소식.

왕가의 존속을 보장하나 그들은 군왕들처럼 명예직에 불과할 것이고 곧 주지사를 투표해야 할 시기가 올 거라는 소식.

또한 주지사만큼이나 중요한 중서성 의원들에 대해 투표를 해야 한다는 소식.

하지만 대중들은 이미 앞의 말만 듣고도 환성을 질렀다.

아무렴 어떠냐.

“와아아!”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어찌 축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에 통일절이라 불릴 이 날의 축제는, 환한 대낮부터 시작하여 며칠간 지속되었다.

아주 소수의 노인들, 즉 틀락스칼라의 전통을 고수하고 살아오던 자들은 미미한 부정의 기운을 얼굴에서 드러내고 있었지만 청년층을 위시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했다.

“이제 우리도 열차 타고 연방의 대도시들에 갈 수 있는 거야?”

“올해와 내년에는 신분증 재정비기간이라니 안 되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가능하겠지.”

이미 중려는 고려의 경제권에 압도적으로 잠식되어 있는 상태였다.

국가체급은 비교할 수 없었다.

남려는 애초에 비교할 존재가 아니었고, 연방 구성원 중 가장 부유한 세 주, 앙주와 진주, 미주 중 하나를 꼽아봐도 중려대륙 전체의 국가총생산을 능가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제아무리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라 하더라도 명백하게 타국이었기 때문에 규제와 이런저런 불이익이 참 많이 있었다.

택주가 세워질 때부터 노골적으로 남하해온 것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관세와 여러 조항들까지.

비록 지리적 이점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경제권에 가까이 편입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들이 누리는 혜택은 타대륙의 국가들이 부러움에 몸부림칠 만큼 많았지만정작 중려대륙의 사람들은 윗동네 택주의 사람들을 은근히 부러워했다.

택주에도 톨텍계, 치치멕계 계열의 사람들은 몹시 많았다.

과반수 이상이겠지.

하지만 정말 단순히 북쪽에 살았던 것 하나로 그들은 당당한 연방의 시민으로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지 않는가?

이제는 그걸 보며 배 아파할 필요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비단 틀락스칼라와 중려 5개국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칵틀 루임과 마야 본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의 숙원이 이루어지자 윗동네 못지않게 날뛰었다.

자연스럽게 식민지정부였던 루밀 키치파닐은 마야에서 독립했다.

루밀 키치파닐의 사람들도 딱히 반응이 없었다.

― 뭐 그쪽 동네 사람들이 어련히 잘 투표 했겠지.

이들의 반응이 무덤덤한 이유는 단순했다.

고려는 중려 병합을 하면서 현존하는 마야 국적자들 전부에게 연방의 시민권을 주었다.

그러니, 현재 루밀 키치파닐의 사람들은 사실상의 복수국적자와 다름없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세대에 한해서였지만, 선택권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거의 어떠한 불만도 가지지 않았다.

카롬테도 독실한 신도였기에 교단과 총대주교의 선택을 존중했다.

니카라오인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아즈텍의 후예로서 살아온 지가 몇 년이었던가?”

“마침내 우리는 선조들의 악업을 씻고, 자랑스러운 연방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운하를 파낸 세대만 개고생을 했지, 그 후손들은 운하와 운하에 파생되는 일자리들로 중려대륙의 사람들보다도 더 잘 먹고 잘 살았다.

하지만 중려 5개국(아즈텍 피해자모임)과 마야로부터 이들은 매번 안쓰러운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식인종 후예라느니, 뭐니.

‘니들도 다 했잖아!’

아마 그들도 비슷한 악업을 해 왔기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지른 아즈텍계 국가에게 불편한 과거를 떠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하지만, 이제 아즈텍의 역사마저도 고려의 역사가 되었기에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이어질 것이다.

또한, 교류가 활발해지면 차별이 잦아들 터.

까놓고 말해서, 그들 스스로도 퓨레페차인과 니카라오인, 틀락스칼라인들을 구별할 수 없었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니카라오 자치령은 숙원을 달성한 것이다.

* * *

조선.

한양.

[중려 대통일!

퓨레페차, 틀락스칼라 왕국, 칼리스코, 요피진코, 투투테펙 공국, 마야 본토령, 니카라오, 미쉬키트 자치령이 마침내 연방과 통합하다.

본지의 기자는 중려의 생생한…….]

“에이 시팔… 왜 조선반도는 아시아 끝자락에 있어서…….”

노천식당에서 밥을 먹던 장년의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한성신보를 접었다.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쇼, 형님. 상국도 이 반도에서 시작했수다. 불평하시려면 우리 선조들이 삼별초도 아니었고, 해방선에도 못 탔고, 이민도 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쇼.”

“지금이라도 갈까?”

“맨날 이민 간다 이민 간다 한 적이 대체 몇 번이오? 어차피 형님이나 나나 뿌리가 깊어서 조선 땅 못 벗어나니까 흰소리 마시고 식사나 마저 합시다.”

형님이라 불린 사내는 투덜거리면서도 밥을 입에 집어넣었다.

묵은쌀로 지은 밥은 솔직히 맛없었지만, 작년(을해년)부터 영 작황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수햄이 들어간 부대찌개는 맛있어서 다행이다.

[작가의 말]

작중 나오는 표현, ‘인간의 소유는 모래마저도 유리로 만든다’의 원래 문구(The magic of property turns sand to gold.)는 영국의 농학자인 아서 영(Arthur Young)이 주장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