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상민은 근래에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 많았다.
믿었던 조직의 실패도 그중 한 원인이 분명했다.
“정보총국도 실수할 때가 있군.”
“…송구하옵니다.”
“대외국이 송구해야지 그대들이 왜 송구한가?”
태종 해진의 명령 이후, 여의국, 정확히 말하면 정보총국 제4국은 겉으로는 정보총국 소속이지만 자신의 명령만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대내국과 대외국조차도 제4국의 존재를 제대로 몰라 외계인 고문 구역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고 있을까.
“행여 그대들은 임무에 실패했더라도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무리수를 두지는 말기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상민은 황제와 자신에게만 올라오는 극비 보고서를 보고 침음성을 삼켰다.
[계획 실패, 요원 둘 자결.]
어떠한 기관도 완전할 수 없다.
특히나, 자국 내의 첩보가 아닌, 외국을 대상으로 하는 첩보면 너무나도 많은 시대적 한계들이 존재했다.
무선통신도, 헬기도 없다.
대중교통 또한 전반적으로 지역 곳곳마다 발달한 시기가 아니었으니, 임무 수행과 탈출 과정에서 위험한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이는 경찰기구와 군대 등 아군 측의 보호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작전들인 대내방첩 분야에서는 몰라도 그럴 수 없는 대외첩보 분야에서는 꽤 심각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 첩보의 대상이 일국의 군주였다면.
‘정보국’의 개념을 고려가 먼저 제시하고 그것들을 써먹은 이후, 다른 나라들도 멍하니 바라보고 있진 않았다.
서서히 주먹구구식으로나마 방첩기구를 운용하고 있었으니, 이탈리아의 말레볼제 같은 기구는 유럽에서도 유명해지고 있었다.
고려의 훈련 방법이나 기타 여러 가지 노하우로 인한 격차는 단번에 따라잡지 못하겠지만,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지 않는가.
이는 러시아도 그랬다.
‘아깝게 되었다.’
러시아는 고려와 평화를 모색했었다.
예전, 황후들끼리 편지를 보냈던 일도 있었고.
그 이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류리크 왕조는 테르샤 로마에도 찾아왔을 만큼 고려에 대한 동경 비슷한 것이 있었다.
선대 차르 이반 7세는 류리크의 왕조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군주였다.
매번 겨울 때마다 따뜻한 크림반도의 별장으로 내려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지.
그래도 그는 대단한 아들들을 두었는데, 장남 드미트리와 삼남 블라디미르는 곰과 호랑이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릴 적에 요절한 자식들과 사생아들을 제외한다면, 러시아의 다음 차르는 둘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거의 웬만해서는 드미트리가 되는 것이 맞았고.
실제로 고려는 드미트리의 섭정 시절부터 드미트리와 꽤나 잘 지냈다.
드미트리는 고려를 본받아 토지개혁과 농노 철폐를 시도했었지.
그런 영특한 이가, 나이 차가 꽤 많이 나는 아우에 의해 살해당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혹은, 블라디미르 또한 다른 방면으로 상당한 자질이 있다는 것이겠지.
드미트리가 왕도를 추구했다면, 블라디미르는 패도를 추구했다.
아마 그는 온갖 모략과 술수에도 거부감이 없거나, 혹은 선천적인 자질을 타고 태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정복 군주인 줄만 알았는데, 타고난 모략가이기까지 하다니.’
게다가 그의 신하는, 원역사대로 로마노프 왕조가 열렸다면 위대한 러시아의 기틀을 잡았을 것이 분명한 ‘표트르 로마노프’였으니.
비록 류리크의 일족이 번성한 이 세상에선 감히 위대한 넵스키는커녕 로마의 피도 잇지 못한 로마노프 따위가 차르의 제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그 능력이 없어지긴 힘들 것이다.
고려는 제2국 대외국을 통해 주요국에 검은 요원들을 파견하여 여러 가지 대외첩보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을 통해 드미트리에게 그 아우, 블라디미르의 위험성을 경고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충성스러운 자들을 모아, 비밀경찰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어 이미 모스크바를 음지에서 장악해버린 것은 몰랐다.
죽은 요원들이 마지막으로 보낸 보고서에 그 실체의 일부가 드러나긴 했었다.
그 이름은 공안질서수호국(Отделение по Охранению Обще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и Порядка).
줄여서 오흐라나(Охрана)라 한다고 했다.
정보총국은 창설된 이래 처음으로 작전의 완벽한 대실패를 맛보았다.
물론, 고려의 정보국 기조는 ‘드넓은 우리 땅이나 잘 관리하자’가 일단 첫 번째 목표였기 때문에 범죄조직이나 외국의 기술 스파이 색출, 대내 중요요인 안보 등을 최우선적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껏 파리나 경사(남경), 마드리드 등을 제집마냥 돌아다녔던 것을 생각해보면 수치스러운 일일 터다.
“그대들도 이번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한층 더 성장하길 바란다.”
모두가 힘찬 대답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상민은 그의 앞에 도열한 열한 명의 여의국 요원들을 둘러보았다.
객관적인 평가로, 여의국은 고려 정보총국의 다른 국(제1국 대내국, 제2국 대외국, 제3국 마약단속국)들 보다도 한 단계는 위의 능력을 자랑했다.
이들의 외형은 각양각색이었다.
흑발 흑안이 다수이나, 눈이 파란 사람도 있었고, 머리가 금발인 사람도 있었으며, 여자도 있었고 나이 든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는 대체로 두 종교 중 하나일 것이다.
믿는 종교가 아예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상민은 처음에 몹시 꺼림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제국교와 쿠쿨칸 신자들의 충성심 하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극복할 수 없는 한 단계의 격차는, 확고부동한 충성심에서 기원하겠지.
보통의 사람들은 생각이 많다.
아무리 혹독하게 키워낸 자들이라도, 배신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이 시대에서 고려를 버리고 어딜 가서 안락을 찾겠느냐마는.
그래도 의외로 변절자들은 생겨나곤 했다.
첩보의 세계는 잔혹한 법. 제아무리 자국민에겐 자애로운 상민이라도 그런 변절자들은 끝까지 추격해서 편안한 안식을 맞이하게 두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일어나곤 했다.
그러던 중에 상민은 여의국에 그가 껄끄러워하는 종교인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끔찍한 스토커들이 이제는 첩보 기구까지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그는 이들을 내쳤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며 거대하게 절망한 뒤 마침내 자결하는 일이 일어났다.
상민은 그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둘도 없이 멍청한 놈들이지만, 버려졌다고 자살이라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래서 그는 맹세를 시킨 뒤 몇 명을 받아들였지.
신에게 한 서약이니, 목숨보다도 더욱 소중히 할 것이 분명했다.
[나의 정체를 발설하지 말라.]
[너희는 어둠 속에서 나아가되, 끝은 빛을 지향하라.]
그들이 상민에게 한 약속은 이 말고도 더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이후 상민은 여의국에 쿠쿨칸 교도들을 들였다.
이후, 제국교가 생겨나면서 제국교도들도 들였고.
참고로 두 번째 서약은 정보총국 전체의 국훈(局訓, 모토)이 되었다.
여의국 내의 국훈은 그들이 말끝마다 붙이는 소리였다.
상민이 들으면 닭살이 돋겠지만, 여의국의 요원들은 그들의 신념을 말하면서 무한한 충성심과 경외심에 빠져든다 했다.
[불멸의 용을 위하여]
옛날, 여의국 요원이었던 이창언은 이렇게 말했다.
살갗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지져지고 내장과 손발에 가해지는 충격으로 피를 토하고 흘려대는 고문에서조차, 마음속으로 저 문장을 되뇐다면 고통 속에서 찰나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그는 심지어 쿠쿨칸 교도도 아니었고, 제국교(그 사후에 설립되었다)도도 아니었다.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정보부의 역할을 맡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인재들이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존재는 첩보의 분야에 있어서 사기적인 존재들과 같았다.
신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자들.
그들의 충성심은 가시로 된 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해도 묵묵히 따를 정도였고, 활활 타고 있는 유황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 해도 주저 없이 몸을 던질 정도로 강했으니.
이 중에서도 정말로 특출난 충성심과 능력을 자랑하는 최고위급 요원 열한 명은 그들 스스로를 11사도라 불렀다.
이들의 숫자가 열한 명이라는 사실은 상민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으나, 지금 보니 조금 짓궂은 농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열한 명의 부하들은 이렇게 말했지.
― 저희들에겐 유다 이스카리옷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러놓고 정보총국의 실패 사례를 들며 여의국에게도 한바탕 훈계를 하여 기강을 잡은 상민이 본래 목적을 깨닫고는 한 사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쿠쿨칸 총대주교는 어디에 있는가?”
쿠쿨칸교도 성직 구조를 개편하며 많은 부분을 가톨릭과 성공회 등에서 따왔으니 이들의 최고위 사제는 고려성공회와 고려정교회처럼 총대주교라 불렸다.
마야인들에게는 그들의 신성왕, 카롬테와 쌍벽을 이루는 신성지도자였다.
물론 그 권위는, 상민의 앞에 간다면 휙 꺼져버릴 촛불과 같았지만.
사도 하나가 곧바로 대답했다.
“칵틀 루임에 있다 들었습니다.”
“그의 성품이 어떠하지? 입이 무거운가?”
“당신을 섬기는 자들은 대체로 그러하나이다.”
경찰이나 국가권력이 다가가 협박해도, 고해성사를 주관하는 신부들은 고해성사의 내용을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비록 쿠쿨칸교에서는 고해성사의 관습이 명시되지 않았을지언정, 그들의 사제 또한 입이 무거운 것은 당연했다.
“그를 봐야 하겠다.”
사도들 몇 명이 당황하여 서로 눈치를 보았다.
비밀을 발설하지 말라는 서약을 했었기에 더욱더.
대사제는 여의국의 소속이 아니었다.
“확대해석하지 말라. 대중들에게 나를 밝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분을 위조하오리까?”
“아니, 그에게만 사실을 말하고 나에게 데려와라.”
* * *
사도들은 신속하게 총대주교를 데려왔다.
저항은 없었다 한다.
“…오오오!”
백색의 의복을 입은 늙은 마야인 대사제가 탄성을 내뱉더니 그의 발치에 엎드려 기어 왔다.
고개를 땅에 닿을 듯 숙였기에 그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상민은 그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작 상민은 당사자보다도 저 순백의 주교복이 쓸데없이 더러워지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그래, 비로소 나를 본 소감이 어떠하냐?”
솔직한 말로, 쿠쿨칸의 총대주교급이 되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거다.
이들의 스토커 짓은 상민이 치첸이트사를 멸망시키고 칵틀 루임을 세운 뒤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으니, 거의 삼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뤄진 셈.
두 세기쯤 전부터는 상민도 아예 반쯤 포기했으니, 열심히 경전의 내용을 갱신하고 있겠지.
물론 상민은 그전에 한번 이들에게 황제의 이름을 빌려 헛된 유언비어를 대중들에게 퍼트리지 말고 자중하라는 칙령을 보낸 적이 있었다.
상민의 행적, 특히 가면시중 시대의 일이 낱낱이 파헤쳐져 설교의 형태로 교도들에게 전달된다면 그가 물러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칙령이 전달된 이후, 쿠쿨칸 사제들은 비교적 최근의 일들을 언급하진 않았다.
대신 첫 번째 청해 통령 이전의 일들과 중려대륙 과거의 일들을 꺼내어 설교할 뿐.
그러나 교도들은 오히려 칙령이 내려온 순간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여의국에 많은 교도들이 자원했었지. 그러니 분명하다.’
강한 부정은 긍정과도 같다 했던가.
그래서 이 노인네의 얼굴에는 놀라움 대신 경외와 환희의 표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제아무리 총대주교라도, 직접 모시는 사도가 되지 않는 이상에야 그의 얼굴 구경을 하지 못했으니까.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그대의 종교가 섬기는 이, 전지전능하며 자애로운 존재를 실로 마주한 순간을.
노인은 경전으로 읽었다.
선대의 총대주교에게 들었다.
벽화와 상징물로 보았다.
그러나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는 거대한 환희에 울음을 터트렸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 으하하하! 끄으윽, 흐흑!
이 광경을 바라보던 냉철한 사도들도 갑자기 눈물을 지었다.
미친놈들.
상민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노인네의 기분을 배려해 줄 때가 아니었다.
“그대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얼굴이 엉망이 된 노인이 절박한 어조로 말했다.
“뱀신이시여, 사해의 용이시여. 부탁이라는 말씀은 미욱한 천것이 감히 감당키 어렵나이다. 부디 명령을 내려주소서!”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해주니 오히려 싫어하는 인간은 처음 보네.
“중려대륙 병합에 있어, 너희들이 해주어야 할 것이 있다.”
“…….”
“…….”
상민은 한동안 설명했다.
종교계가 5개국의 주민들을 설득해주어야 했지만, 적정한 선을 지키길 원했다.
찬성 투표 안 한다고 불을 질러버리거나, 사람을 마녀사냥 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이해했나?”
“명하신 대로 반드시 따르겠습니다.”
노인은 계속 엎드려 있었다.
상민은 축객령을 내리려 했으나, 먼저 그가 입을 열었다.
“쿠쿨칸이시여, 마야의 땅도 포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좀 많이 놀랐다.
상민은 총대주교를 만나는 자리 내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하마터면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마야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일단 퓨레페차와 틀락스칼라처럼 라이벌 현상이 없었고 국가 자체도 순종적이라 핌피현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마야는 고려의 충실한 봉신국이라, 뭘 하자고 하면 곧이곧대로 행하는 유일무이한 국가였다.
심지어 경신대기근 이후 완전히 순종적이게 된 조선조차 마야와의 관계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마야까지 연방에 속하게 하겠다는 소리인가?
자주권을 이렇게 쉽게 넘겨준다고?
카롬테와 총대주교는 마야의 두 지도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야의 일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세속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의 차이도 있었기에 둘 모두 동의를 해야만 일 처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도 의회와 같은 원로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민적 합의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총대주교는 계속 말했다.
“이미 마야에는 한 차례 민족 대이동이 있었습니다. 남은 이들은 칵틀 루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거나, 독실한 쿠쿨칸교 신자라 성지를 떠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옵니다.”
그토록 더운 멕시코보다도 더 남쪽.
심지어 마야는 습기조차 끔찍하게 높아 사시사철 찜통더위에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천연 우물, 츠누트(세노테) 물도 석회수라 몸에 좋지도 않았다.
고려의 영향으로 최근에는 열대기후성 상업작물이 활발히 재배되곤 있었으나 증가 폭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후발주자였던 중려대륙 5개국의 상업작물 생산량이 마야를 뛰어넘었을 정도로 석회 지대의 땅은 썩 좋지 못했다.
물론 마야는 최고의 옥 광산에, 대리석과 석회암, 그리고 파생 산업인 견회와 강회의 생산지긴 했지만 살기 뭐 같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예 마야의 카롬테가 칵틀 루임에서 저 먼 루밀 키치파닐(뉴질랜드)로 이어한 것은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터.
한 세기도 전부터 마야 본국은 총대주교가, 루밀 키치파닐은 카롬테가 다스리는 전통이 지속되고 있었다.
마야의 백성들도 사민을 많이 갔다.
그들도 몇 년에 한 번꼴로 거대한 태풍이 들이닥치는 땅을 기회만 된다면 벗어나고 싶었겠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쿠쿨칸이 거니신 땅을 버릴 수 없다는 독실한 신도들이 아닌 이상에야 죄다 시원하며 온화한 기후가 공존하는 루밀 키치파닐로 갔을 터다.
총대주교의 말은 그런 의미를 시사했다.
“…….”
상민은 혹했다.
제아무리 마야가 충성스럽다 해도, 상민의 어두운 욕망 속에서는 그들조차도 연방에 속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국민투표를 해 보도록 하지.”
국민투표는 국가병합의 알파이자 오메가.
거스를 수 없는 정당성을 불어넣을 것이다.
조선이나 백제, 옥저와 같은 다른 봉신국들은 좀 긴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다 건너에 있는 입장은 좀 다르기도 할 거고.
뭐, 입헌왕정과 의회가 국민들에게 버림받기 무서워하는 것도 그곳의 백성들에겐 나쁜 처사가 아닐 터.
“부정투표는 철저하게 하지 말도록 하라. 내가 직접 투표지와 투표소를 불시에 점검할 것이다.”
총대주교는 다시 한번 조아렸다.
허나 명령의 전달이 끝났음에도 그는 물러가지 않았다.
― 이 정도까지 해주는데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언으로도 의사가 전달되는 냉혹한 정치의 세계.
독실한 신도들조차도 신에게 청하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아, 어찌 이렇게 불경스러울꼬.
상민은 스토커들이 다시 미워졌으나, 이윽고 고개를 흔들었다.
충성심만으로 부려 먹는 것은 그의 성미가 아니었으니.
“그래, 적당한 청을 해 보아라. 합당하다면 들어주겠다.”
마침내 나온 상민의 말에 늙은 총대주교가 갑자기 소맷자락으로 굵은 눈물을 흘렸다.
“소인은 여한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뜻하신 대로 하나의 소원을 고할까 합니다.”
“무엇인고?”
늙은이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입을 열었다.
“혹여, 혹여, 나중에 교도들이 당신의 노여움을 샀을 때, 단 한 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 너희들이 지을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고!”
“고려의 만백성, 또한 전 인류에 좋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당신의 손으로 직접 우리를 단죄하여 주소서!”
노여움을 드러낸 상민의 앞에서 그가 간곡하게 울부짖었다.
그 말을 들은 상민은 팔짱을 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 스토커 새끼들, 대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게냐.’
상민은 껄끄러운 와중에도 팔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것이 내게 해가 되는 일인가?”
“당신의 성체(聖體)에 절대 위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내 성심(聖心)은 어찌하고?
물론 니들과 마주 보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심히 피로하지만.
뭐 노여움을 샀다는 것은 나에게 화를 일으켰다는 말이니 성심에 해를 끼치긴 했겠지.
상민은 총대주교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만약 악심이 있다면, 그는 절대 사백 년 묵은 용의 시선에서 음흉한 속내를 숨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민은 노인의 눈에서 사막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세의 열정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꼈을지언정, 어떠한 악심은 찾아낼 수 없었다.
“허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