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남려.
청해.
“국민의 개념을 정의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분필이 칠판을 오갔다.
머리는 흰 백발, 볼은 앙상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한 늙은 잉글랜드계 교수는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연단에서 열정적으로 가르침을 쏟아내고 있었다.
청해대학교의 학생들은 바쁘게 필기를 하면서도 그의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지금 이 시대, 개천력 5세기 초반(서력 17세기 후반)의 대학의 모습을 살펴보자면, 그것은 21세기의 대학 정경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의 전반적인 나이가 많은 편이라 머리가 희끗희끗한 만학도들도 꽤나 자주 보인다는 점도 그랬고.
솔직한 말로 21세기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연장선이 되어버린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면학 분위기도 그러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일찍부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수험생활을 하는 자들이 아니면 대학 생활은 청춘을 즐기는 순간이 되기 십상이었다.
갈수록 취업난이 심해지며 그 풍경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래도 동아리니 뭐니 하며 대학에서의 추억들을 쌓기 마련이었으니.
하지만 적어도 지금 시대에서는 그런 것을 볼 수가 없었다.
학벌과 취업용 스펙 쌓기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 시대.
정말로 해당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열의가 있는 자들만이 대학에 오니, 이곳은 학업에 불성실하여 강의 시간에 다른 짓을 하는 자들은 거의 존재치 않았고 교수와의 질문 시간에는 거의 모두가 손을 들어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려 들었다.
상민은 고풍스러운 원목 책상들이 인상적인 강의실 맨 뒤에 앉아 노교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갈수록 표면의 높이가 낮아지는 계단형 강의실의 구조는 앞의 행동이 잘 보이게 해주었다.
그래도 상민은 신경 쓸 게 많았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꺼렸기에 차라리 돈을 들여 교수를 초빙해 단둘의 과외를 받는 것이 속 편했다.
허나, 저 노교수는 자신의 강의가 전달되는 장소가 연단이어야 한다는 고집을 잘 꺾지 않았다.
동료 학자와의 토론이 아닌, 사적인 과외는 사절이라는 고집에, 상민은 직접 자신 소유의 대학에 와서 강의를 들어야 하는 불편함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그의 통령 관저에서 청해대학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긴 했다.
‘대학 교정이 좁아서 이전하고 싶기는 한데….’
그것조차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청해는 고려의 뉴욕이다.
날이 갈수록 번화했고, 앞으로도 번화할 곳이 분명했다.
기후도 좋고, 태풍과 같은 재난도 없었으며 바다와 가까워 접근성도 빼어나면서 파도를 가릴 항구도 만들기 편했다.
덕분에 이 좁아터진 섬은 이미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했고, 심지어 그 맞은편의 제포마저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니 상민은 청해시를 더 크게 늘려, 아예 제포를 완전히 흡수하여 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대학교 교정도 그쪽으로 옮길까 생각 중이었고.
‘지금은 수업에나 집중하자.’
“국민을 혈통과 언어, 문화,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정의하는 것이 첫째, 국민을 같은 믿음과 가치관, 신념 등을 가진 집단으로 정의하는 것이 둘째이지요.
학생들께서는 아마 전자의 경우에 더욱 익숙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이 동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맥한적 민족주의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은 꽤나 그럴싸해 보이지 않습니까?”
노교수, 존 로크는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제국은 강력한 동화정책을 이룬 덕분에 건국 후 4세기가 지난 지금에서는 외형적으로도 상당히 흡사해졌다.
진주인과 앙주인마저도, 누가 봐도 혼혈계들이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민 1세대인 로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고려의 어디를 가더라도 딱히 이질감 있는 눈빛을 받진 않았다.
“또한, 현시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싸우는 도이칠란트 문제도 결국에는 도이칠란트 민족주의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지요. 러시아의 폴란드 침공도 슬라브 민족주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존 로크는 ‘혈통주의’라는 말을 칠판에 적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정부와 제국헌장, 제국헌법은 우리의 민족을 규정할 때, 후자로 규정합니다.”
― 탁 타닥.
그는 이번에는 ‘출생지주의’라는 단어를 적었다.
물론 고려는 절대적 출생지주의라기보다는 부분적 출생지주의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큰 틀은 동일했다.
“따라서 후자, 시민국민주의라 볼 수 있는 범고려주의는 혈통민족주의인 예맥한주의와는 다르지요. 실제로도 지금 고려의 유전적 조상들을 살펴본다면, 겉보기와는 달리 예맥한주의의 실체가 과장되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의문점이 많습니다.”
로크는 시민국민주의를 옹호했다.
“혹자는 서벌을 통해 북원을 정복한 이후에 고려의 예맥한적 민족주의가 공고해졌다 하나, 혈통적 부분에서 이는 여전히 올바르지 못한 표현입니다. 고려의 정부 또한 더 이상 핏줄에 의한 동화에 집착하지 않고 있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교수님,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시민국민주의가 아닌 혈통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동화를 시행한 것이죠?”
누군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존 로크는 보통 연단에 설 때엔 자신의 강의가 방해받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아 차라리 수업 후반부에 질문 시간을 가지는 것을 선호했지만, 지금의 질문에는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국가를 구성할 때,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돌아가진 않았을 테니까요. 예컨대, 사공이 너무 이질적인 배는 제대로 된 길을 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로크는 익숙한 고사를 변형하여 말을 했으나, 의미 자체는 전달이 되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사공이 쓰는 용어를 통일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지요. 고려는 단기적으로는 언어와 문화, 전통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했으며, 장기적으로는 선천적 혈통마저도 이질적인 문화권들의 통혼을 통해 하나로 섞었습니다.”
“또한, 시대적 배경 역시 이해해야 합니다. 시민국민주의적 통합은 요구 조건이 많습니다. 국가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철학적 이념의 토대가 먼저 완성되어야 하지요. 과거의 계급적 왕정들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국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고려는 가면시중들의 치세가 끝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국민국가에 진입했다 평할 수 있겠습니다.”
로크의 말에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기의 천재들은 역사가 비틀려도 대체로 그 위대한 지성을 유지했다.
그의 과거 정책들은, 지금 시대의 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해부되어 연구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학자들은 정책 연구를 통해서 상민의 노골적인 의도를 읽어내곤 했다.
예맥한적 민족 특성을 공유하는 고려인들이 과반수 이상, 거의 7할에 달할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게 했던 정책.
동시에 난민을 받아들일 때도, 그들을 차츰 동화시켜 본래의 기원이 희미해지게 만든다.
자신들의 민족 특성이 다른 고려인들과 동일하다고 스스로 여기거나, 혹은 아예 인지할 수 없게끔.
로크는 말투와 어조로 볼 때, 이 국가 단위의 체계적인 동화 정책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정치철학은 손우경의 사회계약론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살짝 달랐다.
우경의 논리가 권력을 다소 옹호하는 어조, 군주주권을 필연적이라 생각했다면 로크는 그것보다는 더욱 국민주권론을 옹호했다.
공동선을 위해 국민들에게서부터 권력을 양도받은 존재인 정부가, 그 자신의 존속을 위해 국민들을 주물럭거려 통치에 적합하게끔 빚어낸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있다면 조금 위화감이 들긴 하겠지.
물론 당사자인 상민은 별다른 죄책감이나 그런 감정들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번의 거대한 계획에 대한 불협화음의 논리적 근거를 알아보고 싶을 뿐이었다.
정책에 반대하는 불협화음 역시 큰 틀에서 보면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의견이니.
반대자들의 사상을 알아야, 그에 알맞게 정책을 수정하지 않겠는가.
* * *
얼떨결에 질문을 한 학생 덕에 한동안 질문 시간이 이어졌고, 마침내 로크는 질문 세례를 받다가 수업 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뵙도록 하지요.”
노교수가 그렇게 말하자, 학생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뒤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상민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모습이 범상치가 않았기에, 연단에 있었던 로크만큼은 맨 뒤의 구석 자리에서 이목을 피하고 있었던 상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 출석부에 없는 학생이시군요.”
존 로크가 짐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학문에 대한 열의는 기특하나, 도강은 학교에서 썩 좋아하질 않을 겁니다.”
상민은 피식 미소 지었다.
가끔은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재밌기도 했다.
“청강권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로크는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교수들의 연구실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와 같이 나이 지긋한 교수들은 걷기 불편할 듯싶었다.
상민이 물었다.
“자전거라도 타시지 않구요.”
로크가 끌끌 웃었다.
“의사가 꾸준히 걸어야 한다고 했지요. 이 나이쯤 되면 자전거도 힘듭니다.”
상민은 교정 내에도 간단한 궤도라도 깔아 노면전차(트램)라도 운용할 생각을 해 보았다.
이미 청해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다른 대도시들도 청해를 보면서 말똥이 굴러다니는 기존의 마차철도를 대체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증기기관이 조금 더 소형화되면 참 좋을 텐데.
혹은….
“그래서, 질문이 있어서 이 노인네와 동행을 하는 겁니까?”
상민은 교수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중려대륙 국가 합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크는 한동안 말이 없다, 족히 서른 걸음을 걷고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고려와 연방에 권력을 양도하고 싶다면, 어떠한 문제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들에게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그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지요.”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또한 고려 조정은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중려대륙의 국가들에게 위임된 권력을 이양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시민의 마땅한 권리인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겠지요.”
상민은 골치가 아파 오는 그 단어를 듣자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상민의 지난 삶에서 ‘민족자결주의’는 28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 의해 주창되었다고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아주 명확한 이름만 붙여지지 않았을 뿐, 민족적 자유에 대한 열망은 계속 존재하여 왔다.
“저항이 적어지기 위해선 중앙정부는 어찌해야 합니까?”
더 이상의 강제적인 통혼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상민은 중려대륙을 한 번에 집어삼키지 않은 것을 아주 가끔 후회하곤 했다.
물론, 그때 당시 고려의 자그마한 인구로 삼켜버렸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분열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좋은 미래를 약속해야지요. 저항의 의지조차 사라질 만큼.”
민족적 자결권을 억누르기 위해선 그만큼의 경제적 혜택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속하는 게 이득이 되면 떠나려 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곳은 물산도 적고, 기후도 썩 좋지 않고 농업마저도 거대한 두 평원에 한참 밀리는 곳이었다.
‘골치가 아프군.’
존 로크는 학자였고, 거국적인 시야에서 문제점을 제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가 내놓을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것이 원론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민은 정치인이기에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질문이 없다면, 다음에 봅시다.”
로크와 헤어진 상민은 한동안 교정을 거닐었다.
그리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어도, 그리고 그 와중에 틈틈이 배우는 자세를 유지해 왔어도 상민에게 여전히 정치는 어려웠다.
절대 쉬워지지 않을 주제였지만.
중려대륙 5개국에 대한 합병논의는, 아마 한 세기 전부터 계속 말이 나왔던 것 같았다.
그들의 국민적 여론도 이미 과반수 이상이나 동의한다고 했으니, 그 세력이 심심치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상민도 언젠가는 중려대륙을 고려에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퓨레페차, 틀락스칼라, 요피진코와 투투테펙, 칼리스코는 분명히 걸림돌이었다.
남북려가 진정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선, 상민의 비전인 범고려철도가 놓여야만 했다.
사실 고려 조정은 5개국과 예전에 철도에 대해 합의를 끝마친 지 오래였다.
하지만 5개국 정부들은 철도노선을 까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 온갖 협잡질을 하고 있으니, 그 피곤함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급한 것은 고려니, 오히려 번국이 기세가 등등해진 것이다.
차라리 자치령이었다면 핌피성 지역이기주의를 정부 권한으로 찍어눌렀을 텐데.
상민은 화가 났다.
봉신국도 엄연히 남의 나라.
다른 나라에 퍼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상민은 아예 합병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의 나라가 아니게 되면 투자의 정당성도 생겼다.
‘고려의 인구는 이제 중려대륙 주민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과거와는 다르니 통합은 수월할 것이다.’
미국이 대영제국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계를 중심으로 나라를 통합했듯, 고려도 예맥한계를 중심으로 민족을 통합하고 있었다.
로크의 말대로, 이제 민족의 개념이 혈통주의에서 시민국민주의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상민은 중심을 잡아줄 인종이 우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도 장애물은 여전했다.
민간 회사를 통해 여론조사를 해 보니, 국가 합병에 관한 가장 낮은 지지율을 가진 두 나라, 퓨레페차와 틀락스칼라는 합병을 찬성하는 비율이 각각 7할 2푼 5리, 7할 1푼 9리로 집계되었다.
달리 말하면 해당 국가에서 거의 3할의 인구는 합병을 반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론조사를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 반대파일 수 있다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비율은 더욱 커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합병의 기회는 날아갈 것이다.’
유럽에서는 한창 민족 문제로 서로 총질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식민지들에서도 피지배인들이 민족자결주의를 기치로 삼고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현대시민사회가 되기 전, 상민은 이 나라들을 집어삼키고 싶었다.
“후….”
로크의 말대로, 이들에게 이권을 주어야 했다.
어차피 상민이 곧 만들 거대한 신규 산업 프로젝트에서 이 멕시카 지역은 빼놓지 못할 곳이었으니 일자리 등의 경제적 이권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걸린다.
즉 나중에 경제적으로 연방에 예속시켜 버릴 순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찬성표에는 썩 영향을 줄 수 없는 공허한 공약일 뿐이었던 것.
물론 바로 쓸 수 있는 만능의 해결책은 존재했다.
아마, 이 지구상에서 이렇게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진 자는 오직 그만이 유일할 것이었다.
하지만 상민은 환희와 안도보다는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먼저 느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제국교, 그리고 쿠쿨칸교의 교단에 연락을 하여 협조를 구한다면, 그들은 엄청난 여론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찬성의 비율을 크게 끌어올릴 수도 있겠지.
사회 분위기 자체를 확실히 뒤바꿀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중려 5개국의 주요 종교는 쿠쿨칸교였다.
성공회도, 제국교도 포교를 시도했으나, 비슷하게 생긴 마야 사제들의 동질성 및 익숙한 설화에 기반한 교리와 경쟁할 수는 없었다.
해민은 이미 세 아카틀 토필친 케찰코아틀(Cē Ācatl Topiltzin Quetzalcoatl)의 현신이었으니.
비록 그 교리의 엄중함이나 신실함이 마야의 교단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신앙의 힘은 엄청났기에 합병 문제를 수월하게 풀 수 있게끔 해줄 것이었다.
‘대인기피증이 더욱 심해지겠군.’
그 끔찍한 두 교단이 세력을 확장할수록 상민은 이렇게 밖으로 제대로 나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겠지.
가뜩이나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부터 상민은 심란해했다.
사진 기술이 더욱 발전한다면, 그는 아마 완전히 음지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펑 하고 섬광이 터지고 바로 찍히는 사진기만 도래해도, 상민은 마치 얼굴이 찍히면 소멸하는 귀신이 된 것마냥 주의해서 돌아다녀야 했다.
먼 훗날, 스마트폰의 시대에는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종교, 그리고 문명의 발전.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두 방면에서 시시각각 뻗어오는 마수를 알면서도, 상민은 어쩔 수 없이 교단에 서신을 보내기로 했다.
빌어먹을 고려와 연방의 구조(판도)를 위해서.
[작가의 말]
갑작스러운 두통과 발열, 복통으로 어제 휴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바이러스성 장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회복하는 중입니다.
걱정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