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42화 (342/653)

형제여

카자크 대반란으로 시작되어 후대에 대홍수라 불릴 지난 몇십 년간의 국가적 쇠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폴리투)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입혔다.

폴리투는 많은 할양지를 외부에 넘겨주어야 했다.

러시아에게, 스웨덴에게, 프로이센에게.

그래도 아직 그들의 조국은 넓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몇 년간의 쇠락으로 신민들의 살림살이는 끔찍하게 악화되었고 조국의 국고는 텅텅 빈 상황.

허나 이런 상황에도 마그나트(Magnate, 대귀족)나 슐라흐타(Szlachta, 폴란드 일반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했지, 바르샤바에 앉아 있는 선출직 왕에게 무언가를 해 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폴란드의 대(大)헤트만 얀 소비에스키가 왕의 자리에 선출될 때도, 바야흐로 폴란드 귀족정의 모순은 극에 달해 있었다.

얀 소비에스키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받든 것도, 자신들이 싸 놓은 흉물들을 치우라는 의미에서였겠지.

그래, 지금 폴란드는 똥이 산적해 있는 마구간과 같았다.

한때는 많은 명마가 꽉꽉 들어차 있었던.

“좋을 때는 모두가 영광을 같이 누리려 했겠지.”

하지만 이렇게 고난의 시기가 다가오자, 나라를 지켜야 할 귀족들은 마구간에서 말을 빼 각자도생을 꾀하며 사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소비에스키는 그것이 너무 한심했다.

고난은 폴란드 인민들을 하나로 뭉쳤지만, 귀족들은 그러한 인민들보다도 못한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니.

고귀함은 필히 혈통에 근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신하에게 물었다.

“답장은 아직인가?”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노르웨이에서는 거부의 답장이 왔습니다.”

“역시.”

짤막한 감흥을 내뱉은 그가 다시금 전방을 보았다.

― 와아아아!

야트막한 구릉 위에서 바르샤바의 수성군들을 위협하는 듯한 러시아군의 거대한 외침이 들렸다.

“프로이센과 스웨덴은?”

소비에스키는 연방의 구적들에게 서신을 보내었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넘겨야 했다.

그는 연방에 다시금 거대한 위기를 주지 않으려면 외교적으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미련한 연방 사람들이 그들의 영광에 심취할 동안, 폴란드는 고립되었고, 결국 수많은 나라들에게 두들겨 맞는 신세가 되었으니.

신하가 대답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궁정에서 엄청난 토론이 벌어지고 있으니, 마냥 부정적인 현상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이 시작되며 중부 유럽도 혼돈에 빠져들었다곤 알고 있었다.

또한 소비에스키는 고려와의 외교에 실패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교감하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이를 넌지시 알려주기도 했었지.

논쟁을 하느라 두 국가의 답신이 늦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가냘픈 희망일지도 몰랐다.

― 으득

소비에스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라고 왜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스웨덴은 폴란드의 유구한 적이었으며,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반항적인 봉신국이었다.

심지어 얀 소비에스키는 스웨덴에 맞서 싸운 당사자 중 한 명이었다.

비록 그의 상관이자 더러운 변절자인 오팔린스키는 스웨덴에 항복하고 스웨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소비에스키는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끝까지 폴란드를 위해 싸운 충성파 중 충성파였으니.

소비에스키라고 예전의 원수들에게 화해의 손짓을 내밀 때, 악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쇠락할 때 저들은 제국이 되었고, 고려의 부마가 되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저들의 도움 없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게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옛 원수들에게 가지는 일말의 희망.

그러나 그 희망이 도착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아마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선, 폴란드는 그의 피를 요구할지도 몰랐다.

그리해 주지.

‘조국이 이 늙은이의 피를 원한다면 마땅히 흘리리라.’

얀 소비에스키는 검의 자루에 손을 얹고, 지평선 멀리 서 있는 그의 대적자를 노려보았다.

* * *

― 삐이이

수리 한 마리가 창공을 날고 있었다.

그 밑, 거대하게 펼쳐진 평야, 살짝 융기한 구릉의 능선에 말 두 필이 서 있었다.

“보아라, 마침내 도착했도다.”

강건한 젊은 청년은 거대한 흑마 위에서 불타는 야망이 가득한 눈동자로 바르샤바를 바라보며 고했다.

말을 할 때마다 위 뺨에 나 있는 큰 흉터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는 추하거나 보기 흉하다는 감상 대신, 오히려 청년 특유의 공포스러운 위엄을 더욱 느끼게 해 주었다.

총알과 화살조차도 그들의 차르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깃발들이 맹렬히 휘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평원에 끝도 없이 울려 퍼지는 바람에, 산 메아리라 착각했을 법한 바람 소리.

그 뒤, 행진북과 발맞춤 소리, 말들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먼저 달려 나갔던 두 명의 말을 따라잡는 데 성공한 어마어마한 수의 녹색 군대는 제자리에 천천히 멈추었다.

강력한 규율 속, 한마디 잡담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전열을 휩싸고 돌았다.

불과 스무 살 후반, 서른 살 초반 남짓의 청년일 뿐인데, 그의 온몸에 서린 위엄은 러시아의 콧대 높은 보야르들, 거친 카자크들, 그리고 일자무식이던 평범한 병사들까지 완벽하게 휘어잡고 있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년은 그의 형제를 죽이고 열다섯 살에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서 제관을 썼다.

그 이후, 그는 열아홉 살 남짓한 시점에서 직접 군대를 휘몰고 나아가 몽골의 마지막 잔당, 준가르를 정벌했으며, 카자흐를 병합했다.

그가 이십 대 중반이 되었을 때, 트란스옥시아나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경외제 이반 4세, 정복제 이반 5세의 재림.

정말로 위대한 벨리키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자.

정작 그는 자신이 선조들보다도 대단한 존재라 생각했기에 그런 소리를 썩 내켜하진 않았지만, 이미 루스의 사람들은 류리크와 그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차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류리크(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Рю́рик)는 신민들의 기대에 마땅히 부응해야 할 것이다.

블라디미르는 자신과 나란히 서 있던,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자기보다 더욱 강한 전사가 눈앞에 있다면,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고르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총명한 눈동자와 잘 가꾼 수염을 지닌 신하가 블라디미르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두려워 도망가거나, 혹은 그 전사에게 조아리거나.”

블라디미르의 형,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류리크는 분명히 고려에 조아리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 겁쟁이 같은 태도를 블라디미르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드미트리가 차라리 확실히 어린 동생의 심장에 먼저 검을 박아넣었다면, 오히려 블라디미르는 눈물을 흘리는 형의 앞에서 웃음 지으며 죽어갈 수 있었다.

형의 선택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을 거라고.

허나, 반대로 말해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런 꼴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짐이 그리 행동해야 하는가?”

짐이 맹수가 포효한다고, 다른 자들처럼 꽁무니를 말고 도망가야 하는가?

신하는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폐하.”

“세계 패권의 질서가 오직 고려에 의해 쓰이고 있다고 해서, 우리 러시아마저도 으레 겁을 먹고 굴종해야 한다는 말이냐?”

“절대로 아닙니다.”

고려는 팍스 코리아나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들이 유럽과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거의 두 세기는 넘는 세월 동안.

어쩌면, 고려가 가진 체제의 안정성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전성기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평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고려 제국은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수십, 수백 년간 번성할 동안 잠재적인 그들의 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거나 거세하여 나갈 것이다.

당연한 소리였다.

과거 바다를 누볐던, 누비려 했던 열강들은 이미 힘을 잃었다.

포르투갈은 이제 웃음거리였으며, 잉글랜드는 본래 그들의 먹잇감이었던 이웃에게 견제받는 꼴이 되었다.

광대한 영토의 주인들 역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북원의 대칸은 목이 잘려 제사상에 올라갔고, 명의 황제는 중화의 의미와 옥새 전부를 잃었다.

특이한 문화를 가졌지만, 외지의 적에게 단결하여 대항했다던 왜라는 나라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고려의 충실한 개가 되어 그 밑의 백제와 함께 그 앞에서 아양을 떨고 있었다.

그다음이 대체 누구의 차례더냐.

블라디미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고려가 옥저를 키워, 먼 극동에서 위대한 러시아의 동진을 막아내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외면하는 병신도 아니었고.

러시아 또한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해 왔었다.

러시아인들 스스로가 타타르의 멍에를 썼던 적이 있었고, 당대의 패권국인 고려의 기원지이기도 했으며, 지금도 여러 강대국들이 자리 잡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그들로서는 유럽사만큼이나 마땅히 배워야 할 중요한 과거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러시아인들은 옥저라는 나라가 이자윤이라는 걸출한 영웅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지금의 크기로 성장한 것은 오로지 고려 덕분이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고려의 황후는 옥저의 왕가인 양산 이씨였으니.

그리고 그 옥저인들은, 사사건건 러시아를 귀찮게 굴었다.

누가 먼저 분쟁을 시작한 건지는 몰랐다.

무기를 들고 정착지를 지키기 위해 항거하는 남자들을 죽이고 여인들은 납치하여 겁간했던 일들이 어디서, 누구로부터 기원했는지 확실치 않았다.

땅은 너무나 광대하며 겨울의 날씨는 지극히 혹독했다.

증거는 조작되기 쉬우며, 증인 또한 추격하여 사살할 수 있었다.

어쩌면 러시아의 카자크일지도 모른다.

카자크의 야만성은 차르도 인지하고 있었다.

온갖 끔찍한 짓거리를 자행하고 다니는 덕분에, 옥저인들에게는 그들이 걸어 다니는 역병이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옥저의 팔기가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조선인 다음으로 고려인과 혈통적으로 가깝다 평가받는 옥저인들은 고려인만큼 배워먹어 남의 눈치를 보거나 잰 체하지 않았다.

그들도 척박한 땅에서 견디기 위해 충분히 거칠었으며, 충분히 야만적이었다.

그들의 다른 선조들, 여진인들의 특성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옥저인들도 금화와 은화, 그리고 탐나는 모피들, 심지어 엉덩이 크고 피부가 허여멀건 백면 여인들(슬라브 여인들)을 빼앗기 위해 레나강을 넘는 일이 없었다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몽골인 잔당이나 마적들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두 국가의 접경지는 비록 해당 국가의 영토가 확실했지만, 너무나 가혹해서 아주 드물게 지어진 군사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에는 사람이 살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기생충 같은 것들이 사방을 돌아다녔지.

옥저와 러시아 모두 그들을 근절할 역량은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들이 했던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르로서 이르쿠츠크가 옥저인들에게 공격당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옥저의 상국, 고려와 계속 화친하기 위해 이르쿠츠크의 일을 적당히 덮고 마무리해야 한다는 드미트리의 주장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영역과 신민을 지킬 수 없는 군주는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

“영광스러운 로마 제국의 후계자, 진정한 천명의 소유자, 거짓된 몽골족들의 복수자. 우리의 친애하는 사촌.”

블라디미르는 그 말 하나하나를 뱉을 때, 정말이지 경탄과 경외의 감정을 담았다.

허나, 그만큼 그의 눈동자는 더욱 활활 타올랐으며,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맥동했다.

보통 사람들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그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 전 러시아의 차르이며, 그들의 사촌과 같이 진정한 로마의 또 다른 황제이니, 어찌 범인(凡人)이 되겠는가!

블라디미르는 러시아가 고려의 영광을 누리길 원했다.

그들이 실로 거대한 곰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나, 그들 또한 이제는 그만큼 강건한 곰이었기에.

진정한 수컷을 가리기 위해선, 두 제국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마주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 피가 모두 땅에 스며들고 내 장기가 저며질 때까지 싸울지언정. 사촌이여, 로마의 형제여, 내 어찌 너에게 굴종하겠느냐!”

― 짐은 천하를 양분하여 지배할 것이다!

블라디미르는 거대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흉포함에, 차르의 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자가 태반이었으나, 러시아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따라 고함질렀다.

“네가 그리 말했다. 네가 짐의 치세에 러시아를 고려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 말했다. 류리크 또한 해(Hae)에 버금가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 짐에게 그리 고했다!”

신하는 실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거구의 신하는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신이 어찌 거짓을 고하리까! 차르.”

“그럼 증명하라!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네가 네 차르에게 약속한 것을!”

블라디미르의 외침에 표트르가 울부짖으며 화답했다.

“나의 차르, 나의 임페라토르여, 마땅히 따르겠나이다!”

거인은 말머리를 돌려 등 뒤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러시아의 사내들이여! 검을 뽑고 총을 들어라!”

마침내 이 순간이 왔다.

이번 정복으로, 러시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대한 제국에 도달할 것이다.

“아버지 차르와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 싸우라!”

― 우라(Уpа)!

거대한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표트르의 명령에 총병들, 후사르, 포병들마저 검을 빼어 들고 목청을 높였다.

“공격하라! 오늘 폴란드는 멸망할 것이니, 슬라브의 영토는 슬라브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께 돌아갈 것이다!”

[작가의 말]

류리크 왕조만 해도 사실 가문 이름(성)을 별도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름) (…의 아들/딸) (가문/성씨)’로 이루어지는 러시아의 이름에서, 뒤에 가문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죠.

하지만 로마노프 왕조가 된 다음부터는 뒤에 붙였다 합니다.

지금 류리크는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까닭에 일부러 가문 이름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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