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41화 (341/653)

도이칠란트 문제

개천 5세기 초반, 그리고 서기 17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암스테르담의 무도회는 후대에 수많은 시인과 극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중요성은 역사가들과 외교관들에겐 훨씬 더 강조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국혼을 성사시킨 프로이센은 고립에서 벗어나 고려를 비롯한 외부와 좋은 외교 노선을 수립할 기회를 얻었다.

한자동맹 시절부터 이 북도이칠란트인들은 북유럽회사의 상업적 파트너였지만, 이제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상호이익의 영속적인 미래를 논의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고려는 황태자 부부의 결혼 축하금으로 상당한 양의 순은을 프로이센에게 선물하여 주었다.

공교롭게도 그 가치가 프랑스가 구매했으나 고려가 차압했던 ‘푸른 희망’ 금강석의 가격과 비슷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 은을 녹여 약간의 재정적자를 해소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던 프로이센의 자체적인 통화제도, 즉 라이히스탈러(Reichsthaler)를 실시할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라이히스탈러는 그동안 예전 신성로마제국에서 폭넓게 쓰던 굴덴그로셴을 차츰 대체해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후스 혁명 이후 보헤미아라는 거대한 은 생산지를 잃어버린 오스트리아는 통화의 주도권마저도 프로이센에게 빼앗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녕 좋은 외교로구나.”

비록 처음엔 자신이 강권했다 하더라도, 막상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고려 사위 놈에게 넘겨주게 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한동안 남들 몰래 잠들 때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불과 몇 달 뒤에 완벽하게 달라진 대외관계를 체감했다.

프로이센의 동맹이라고 해 보았자, 지금까지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시절부터 반가톨릭 연맹으로 묶여 같이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던 포데브라트 왕조의 보헤미아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자신 치세에 와서 바사 왕조의 스웨덴과 가까워졌고 일부 왕족끼리의 교류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이 동맹은 그리 건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결혼으로 프로이센은 북해, 즉 그토록 갈망하던 바다에 대한 진출권을 얻었다.

북해는 사실상 네덜란드와 에이레의 앞마당이었고 대동양은 고려의 천연 해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은 이제 이런 해상 강국들과 불가침조약 등을 맺고 활발히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프로이센과 스웨덴을 견제하던 덴마크―노르웨이마저도 위축시키면서 그 숨통이 크게 트인 것이다.

* * *

반면 해원의 선택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다른 독일계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는 고려의 외교 노선에서 배제되었다.

두 나라는 분명히 같은 말을 쓰고, 같은 게르만 민족(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지배계층)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국가는 절대 양립할 수 없었다.

하나와 외교를 한다면, 다른 하나와는 자동적으로 거의 원수지간이 되는 것이다.

분명히 친프로이센 외교 노선은 반오스트리아 외교 노선을 의미했다.

고려 태자 해원이 반대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에게 매료되어 그녀를 자신의 배우자로 선택했으면 고려의 외교 노선은 친오스트리아 반프로이센이 되었겠지만.

그런 전개는 소수의 역사 애호가들에 의해서나 상상되는 가정이 되어버린 셈이다.

두 도이칠란트계 국가의 전면적인 대립은 바이에른에서 일어났다.

고려 태자와 프로이센 공주 간의 결혼식이 있기도 전, 아니 그보다도 전에 프랑스 혁명군의 외젠과 프랑스 왕당군의 튀렌이 싸울 즈음에 바이에른은 이미 거의 몰락하여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흘러 마침내 프로이센이 고려와 이어지며 외교를 안정화하자 북에서 거대한 군주정의 군대가 내려왔다.

이에 질세라, 남쪽에서도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대군이 올라오니, 혁명공화국은 앞뒤로 강대한 적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바이에른 혁명공화국의 인민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국가의 생산력에서 이 국가는 이미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따로 상대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국가들.

공화국의 인민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드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너무 심하게 강했다.

오스트리아도 오스트리아였지만, 프로이센은 도무지 공화국으로서는 전면전에선 항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규율과 군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다시 실패한단 말인가?”

바이에른 공화국의 수도, 뉘른베르크와 그 서쪽의 슈투트가르트는 프로이센에게 점령당하고, 남쪽의 레겐스부르크와 뮌헨은 오스트리아에게 점령당했다.

공화국의 마지막 고위층들은 울름에 모여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으나 이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자는 것과 같았다.

“비록 우리들은 양(Yang) 지도자 동지의 사후 못 볼 꼴을 저질렀으나, 최후만큼은 앞선 혁명가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맞이합시다.”

대동계 1계들은 울름에서 최후를 맞이할 각오를 했다.

하지만, 일부 젊은 혁명가들은 이에 반대했다.

장엄한 최후도 좋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늙은이들은 자신들이 토마스 뮌처의 선례를 따라 이념의 순교자가 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이는 정말로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동지, 헛된 죽음을 피하지요!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혁명을 전 유럽에, 아니 전 세계에 퍼트리는 것에 있소!”

대동계 3계는 최후의 항전을 할 구시대의 유물, 1계의 사람들을 뒤로 남기고 외부로 나아가 영원한 혁명의 기틀을 다지기로 결의했다.

처음 이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가는 스위스로 가는 경로를 생각했다.

아주 예전에 스위스 또한 종교로 한바탕 내전을 했으나, 스위스를 구성하는 칸톤들은 주변 강대국들의 동향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끼리 결과적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갈등을 봉합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슈투트가르트를 점령한 것도 모자라 빠른 속도로 라인강을 따라 남하하여 프라이부르크까지 점령해버렸다.

마치 이때를 틈타 적법한 도이칠란트인들의 강역을 침범할 수 있는 외국의 시도를 차단하려는 것마냥.

대동계 3계는 몰랐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이미 다 죽어가는 혁명공화국의 잔당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가뜩이나 내부적으로 흔들리던 찰나에 두 나라가 전심전력을 다해 공격한다면 어차피 멸망할 나라였으니까.

오히려, 이제 양국은 혁명공화국이 있던 땅에서 도나우강(다뉴브)을 경계로 한창 긴장되는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땅따먹기 경쟁에서, 프로이센은 어차피 포위하여 고사시킬 수 있지만 당장은 그 저항이 완강할 울란을 두들기는 대신에, 고토 수복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러니 3계가 외부로 망명할 경로를 찾기 힘들어진 것은 당연했다.

사실 프로이센의 걱정거리였던 외국들은 정작 그럴 여력이 없었다.

프랑스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스위스는 애초에 그럴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는 오직 대동계 3계들에게는 단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거대한 시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덜커덩

프로이센군은 징집된 어중이떠중이 공화국군들은 대충 구금한 뒤 불온한 사상을 회개하고 호엔촐레른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는 다시금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공화국에서 일정한 직책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은 예외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기다란 교수대의 바닥이 꺼지자, 두건이 씌워진 죄인들 스무 명 이상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시간이 흐르고 시신이 똥오줌을 흩뿌리는 것을 멈추자, 다음 집행 예정자들이 자신의 교수대 뒤로 벌벌 떨며 다가왔다.

“형 집행을 좀 더 빨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 사형집행인들의 짤막한 투덜거림은 프로이센인들의 바이에른 빨갱이에 대한 인식을 함축하고 있었다.

무고한 피해자?

이 시기에 그런 것을 신경 쓰는 나라가 유럽에 어디 있겠는가?

악질 잔당들은 모두 죽이는 것이 현명하다.

이는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으니. 제3계는 한동안 남도이칠란트에서 그들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포위망을 무기력하게 느껴야만 했다.

“동지들,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러다 우리 다 죽소!”

하지만 대체 뭘 어찌하란 말인가.

제3계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그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남은 곳은 오로지 하나.

남쪽이다.

그러나 남쪽에는 유럽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존재, 알프스산맥이 버티고 있었다.

물론 제아무리 알프스산맥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오가는 고갯길과 통로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 통로들 역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였기에 자칫하면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고 들어가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길이 아닌 정말로 험준한 산악지대를 돌파한다면 대자연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과연 이탈리아의 인물들이 그들을 환대할 것인가?

절대로 아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계 3계는 알프스를 넘는 선택을 내렸다.

확실한 죽음과, 덜 확실한 죽음 사이에서 덜 확실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짐을 꾸리고 있을 때, 대동계 제3계의 목덜미에 드리워진 칼날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바로 엊그제, 울름이 함락되고 제1계의 인물들이 죄다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만 해도 모두 산을 넘다 죽을 운명인 줄 알았는데.

이제 대동계 3계를 겨누었던 두 국가의 칼날은 서로를 향해 겨누어지게 되었다.

울름에서 전투가 벌어졌단다.

시작은 소소했다지.

아마, 사상자는 양측 합쳐서 오백 명도 되지 않았다 하니까.

하지만, 이는 ‘도이칠란트 문제’라 일컬어지는 양국의 화약을 제대로 건드리고야 말았다.

어마어마한 군세, 오만의 프로이센군과 칠만의 오스트리아군이 도나우강을 끼고 격돌했다.

― 비천하고 비열한 프로이센 놈들을 죽여라! 카이저 만세!

― 가톨릭 압제자! 쓰레기 같은 오스트리아 놈들에게서 우리의 강역을 구원하라! 도이칠란트 만세!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개막에, 삽시간에 바이에른 지역은 또 한 번 거대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두 나라는 그들이 말하는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중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한동안 싸워댈 것이 분명했다.

프로이센은 소독일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바이에른 공화국을 멸망시키며, 도이칠란트인들이 사는 대부분의 강역들은 이제 프로이센에게 넘어왔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을 감히 참칭하지도 못하는 상황.

저들은 도이칠란트인들의 적법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 하나의 왕! 호엔촐레른 만세!”

괜히 프로이센이 땅따먹기에 열중했겠는가.

이들의 대의는 이미 충분히 부풀어있었다.

그렇다고 합스부르크도 대독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포기한다는 말인즉슨, 합스부르크는 그들이 주장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적통 명분을 잃어버리는 셈이니. 다시 말해, 발칸반도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하나의 깃발로 통합할 수 있는 근본적인 논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스부르크는 뭐가 되는가.

합스부르크는 물려받은 헝가리의 왕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당연히 크로아티아의 지배자도 될 수도 없었으며, 알바니아의 지도자도 될 수 없었고, 세르비아의 왕도 될 수 없었다.

로마의 제관이 없다면, 그들은 한낱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에 불과하다.

등 뒤에 물러설 수 없는 절벽이 있다는 것은 양국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프로이센은 지금 싸우는 오만 명 이외에도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긁어모으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도 이에 질세라 일리리움과 헝가리, 발칸에서 엄청난 병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국가 간의 대전, 즉 국민개병제를 도입시킨 이들은 이전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군세를 일으킬 수 있는 역량을 소유하고 있었다.

양국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니, 이 전투는 고려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리라.

이렇게 되면, 한쪽을 지원해주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 더 알맞은 선택이겠지.

* * *

먼 옛날 옛적, 차르바트스카라는 나라에 세 형제가 있었단다.

이들은 자랑스러운 슬라브 혈통의 형제로 각기 레흐(Lech)와 체흐(Czech), 그리고 루스(Rus)라 불렸다.

하지만 어느 날 이 세 형제는 사냥에 나서 너무 열심히 사냥감을 뒤쫓는 바람에 다른 형제들과 뿔뿔이 헤어지고야 말았지.

이후, 레흐는 이곳 폴란드에 도착했다.

형제들과 헤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하얀 독수리의 상징은 필히 길한 것이 틀림없어 그는 이곳에 둥지를 틀기로 마음먹었다.

반면 체흐는 레흐보다는 조금 더 남쪽에 정착했단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에서, 체흐는 그의 이름을 본떠 체히(체코, 보헤미아)를 세웠다 한다.

마지막으로 루스는 가장 먼 곳까지 갔다 한다.

춥고 척박한 곳에서, 그 또한 나라를 세웠지.

위대한 슬라브인의 나라를.

루스(Rus)인들의 나라, 러시아(Russia)를.

하지만, 너희 루스의 아들들아.

왜 이리 형제를 핍박하느냐.

얀 소비에스키는 연방의 수도, 바르샤바의 성 위에서 동쪽에서 몰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러시아 제국 특유의 녹색 군복.

거대한 후사르와 총병의 파도 앞에는, 경외제 이반 4세와 정복제 이반 5세 이후 러시아가 배출한 가장 강력한 정복군주가 있을 것이다.

허나 슬라브인들의 피가 서로 이 대지를 적실 순간에, 연방의 귀족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셰임은 어디로 갔는가?

[작가의 말]

본래는 이 작품의 방향성에 따라, 대부분은 원문 그대로 써야 하겠죠.

독일이니, 영국이니 오스트리아 대신 도이칠란트와 잉글랜드(브리튼이 없으므로), 외스터라이히처럼요.

근데 그러면 너무 여러분들의 가독성을 배려하지 않는 듯해서, 검색 가능한 일부 용어에 대해서는 원역사의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나온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처럼요.

슬라브 3형제 전설은 폴란드식을 가져왔습니다.

나라마다 다들 믿는 내용이 다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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