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외교전(4)
총성과 포성만 울리지 않았을 뿐, 지금 이 자리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군복은 고려풍 드레스, 그리고 그 안에 받쳐 입은 코르셋.
무기는 티아라와 접부채.
매난국죽이 그려져 있는 문사들의 대용품은 이제 어느덧 여인들의 장신구로도 기능하고 있으니, 평범한 사람이면 그 뒤에서 어떤 칼날과 같은 말들이 오가는지 알 수조차 없을 것이다.
“아, 크리스티나!”
“루이제!”
바사와 호엔촐레른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듯, 루이제는 스웨덴 왕녀와 포옹을 나누었다.
비록 지금은 경쟁자이지만, 둘 중 하나가 승리를 쟁취한다고 하더라도 양국은 협력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었다.
“…….”
반면 마리아 안나는 카스티야의 왕녀 이사벨, 베네치아 도제의 딸 스테파니아, 웨일즈 공녀 캐롤라인에게 다가가 친근한 척 굴었다.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지내셨죠?”
“저는 잘 지냈습니다. 전하.”
그녀의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와 많은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스테파니아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루이제의 눈치를 슬쩍 보고 대답했다.
물론 루이제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과 대화하면서도 경쟁자를 신경 쓰는 상황에 미간을 찡그릴 법도 했지만, 마리아 안나는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으며 다른 공주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주님의 은총으로 네덜란드의 왕, 룩셈부르크와 안트베르펜의 공작, 뷰렌과 브뤼셀과 브뤼허, 브레다의 후작, 메헬렌과 쿨렘뷔르흐, 레르담, 디에츠, 카체넬른보겐과 슈피겔베르크, 비앙뎅 백작….”
수식어가 참으로 길다.
“…그리고 파푸아와 파푸아인들의 수호자이신 헨드릭 2세 폐하 내외와 네덜란드 왕세자이며 브라반트 대공 빌럼 전하 내외, 고려의 태자 전하가 드십니다.”
하객들은 모두 앞쪽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었다.
네덜란드의 주인과 황후, 그의 아들 부부.
그리고 특별한 관계를 암시하듯, 고려의 태자도 그 옆에 서 있었다.
헨드릭 2세가 앞으로 나섰다.
복장은 의외로 수수했다.
참가자들의 번쩍이는 의복들을 볼 때, 이 자리를 격식이 없다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의 입장에선 제아무리 수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와 수도가 시끌벅적하더라도 명목상으로는 그저 아들 생일날 손님들이 와서 즐기는 것에 불과한 상황.
부러 과하게 대응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 자리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했을 수도.
“암스테르담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이 자리를 빌려 내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먼 거리에서 오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니 내빈들께서는 모쪼록 좋은 시간을 보내시구려.”
그는 그 말을 마치고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인 뒤, 몇몇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곧바로 퇴장할 준비를 했다.
젊은이들의 파티는 젊은이들이 즐겨야지, 그와 같은 자들은 오래 있어 봐야 무릎이 쑤시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귀족들과 의원들도 헨드릭 2세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자식들과 헤어진 뒤 국왕의 뒤를 따랐다.
이곳보다 좀 덜 시끄럽고 북적이는 다른 홀에서 커피를 마시며 따로 담소를 나눌 것이 분명했다.
“태자, 운명의 짝을 찾으시구려.”
해원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왕세자 부부는 아버지로부터 능숙하게 바톤을 넘겨받고는 연회를 주도했다.
중앙홀 왼쪽의 중정에는 음식들이 차려졌다.
음악가들도 한층 더 열을 올려 연주하니, 파티가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떠들썩하고 활기 넘치는 웃음소리도 모두 다 좋은데….
“이런.”
그동안 멀뚱히 빌럼의 옆에 서 있던 해원은 여섯 쌍,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눈동자들이 파티가 아닌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왜, 문제가 있나?”
보라, 이게 암스테르담인지, 창양인지.
여인들의 복장이 그녀들의 의도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에 그는 오히려 부담이 생겼다.
해원은 공식 석상이기에 격식 있는 말로 자신의 불편을 전달했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았나, 이래서 내가….”
“어허, 그 말은 엊그제 이미 끝났네. 그리고 나는 저 여인들 말고도 달리 인사해야 할 귀빈들이 많고. 전혀 신경 쓸 것이 아니야.”
“그래요, 전하. 부담 가지지 마세요.”
빌럼의 아내이자 브라반트 대공 부인, 에이레의 오브라이언 왕가 출신의 클로다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그 뒤에도 머뭇거리던 해원은 결국은 이 일이 영원토록 회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이윽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암사자들의 무리 속으로 걸어갔다.
빌럼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는 연회장을 오가는 시종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게, 여기 버터 강냉이와 파라 콜라를 한 잔, 아니 여기 아름다우신 공작 부인 것까지 두 잔을 가지고 오게.”
“예, 전하.”
시종이 떠나자, 클로다가 빌럼의 허리를 슬쩍 찔렀다.
“당신, 너무 즐거워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 원 앞에서는 조심해야겠군.”
그래도 부부라고 쿵짝이 잘 맞는지, 클로다는 빌럼에게 가극 관람용 작은 쌍안경을 슬그머니 건네주었다.
“여기, 명하신 것들입니다.”
시종이 음료와 간식을 가져왔다.
“고맙군.”
버터 강냉이가 참 고소했다.
* * *
주네덜란드 고려 대사가 해원을 수행했다.
“전하, 이분은 베네치아 도제의 영애, 스테파니아 아가씨입니다.”
스테파니아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치맛자락을 굽히고 인사를 해 왔다.
고려의 일반인들, 유럽의 왕족, 귀족들에게도 이제는 결혼 전 사진들을 교환하는 관례가 생기고 있었지만, 고려 종통의 사진은 보안상의 이유로 함부로 밖에 나돌아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잘생겼다, 키가 훤칠하다는 소문은 계속 있었지만, 어디까지가 과장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직접 대면하기 전까진 확인할 수 없었다.
해원도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선남선녀가 인사를 나눌 때, 공교롭게도 음악이 바뀌었다.
“미뉴에트군요.”
유럽은 춤의 세기가 들어선 이후,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프랑스에서 퍼져나온 스위트 형식이 각국에 퍼져 나가 마침내 알르망드(도이칠란트)―쿠랑트(프랑스)―사라방드(카스티야)―지그(잉글랜드)로 정형화된 스위트를 만들었을 정도로.
마침내 루이 13세의 궁정 시기에 도달해 프랑스뿐만 아니라 수만 곳으로 퍼져나가 크게 번성하고 있는 미뉴에트(minuet)는 스위트의 고전 모음곡에 속하진 않았지만, 결국 스위트의 맥락을 가진 춤곡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젠장,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군….’
스테파니아는 기대가 잔뜩 서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면전에 대고 나 춤 출 줄 모르오, 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비록 고려식 전통 연회는 대체로 앉아서 무희나 가극, 연극 등을 관람하거나 식사하는 좌식의 문화였기도 했지만 그것이 고려인들이 춤을 못 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남자들은 가끔 전통으로 내려오는 검무를 추기도 했고, 지체 높은 여자들도 외부의 시선이 없을 때면 무용을 추기도 했다.
게다가, 오직 고려의 문화만 유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반대로 유럽의 문화도 고려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 무도회라는 것은 외래문화지만 적어도 반세기 이전부터 고려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해원은 불과 다섯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려의 숭무감 육군부의 생도였다.
그 생도라는 인간들의 일과는 다양했다.
고급 장교로서의 군무와 행정 같은 책상에서 진행하는 교육과정도 있었지만, 몸으로 하는 훈련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유럽식 입식 연회고 나발이고 아예 이런 자리 자체가 아직까지도 좀 몸에 맞지 않는 것이다.
춤 자체는 알고 있지만, 어릴 적의 기억을 꺼내오는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순 없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네!”
고약하게도, 이 유럽의 문화라는 것은 오직 남성에게만 춤의 신청권을 주었다.
여성은 춤을 추자는 요청을 거부할 수는 있었지만 남성에게 직접 요청하지는 못했던 것.
그러나 그 신청권마저 자유로우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태자 정도 되는 사람이면, 더더욱.
해원의 춤은 객관적으로 볼 때 형편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스테파니아는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열다섯.
젊은 해원보다도 많이 어렸다.
나이가 배려심의 기본 조건은 아니라지만, 스테파니아는 분명히 파트너의 곤경을 감싸줄 수 있는 실력자는 아닌 듯했다.
“아, 미안합니다.”
“괘… 괜찮아요.”
여인의 발을 밟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당연히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니 해원은 곧바로 그의 결례에 사과했지만, 애초에 다른 파트너 또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만들면 안 되는 책무가 있었다.
해원은 다소 민망해짐을 느꼈다.
스테파니아 역시 춤을 추면서도 발이 밟혔다는 아픔 탓인지, 혹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눈치챈 탓인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해원은 잠시 뒤 건장한 남성이 연약한 소녀의 발을 밟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되었다.
“끄으으윽!”
“어머나! 죄송해요, 죄송해요, 전하!”
사실, 남성이 여성의 발을 밟을 경우, 군홧발을 신거나 고의가 아니었다면 대체로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해원은 운동신경이 뛰어난 터라, 발의 감촉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몇 번 실례를 저지른 뒤에는 그녀의 얼굴보다는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키 차이가 컸기에 티는 나지 않았지만.
하지만 무도회장에서 여성의 신발은 흉기와 같았다.
하이힐은 본래 페르시아에서 유래했지만, 프랑스 살롱 문화에서 완전히 재조명받았다.
남자들이 신던 신발에서 남녀 모두가 신는 신발로 진화한 것.
그 이후 남자의 하이힐과 다르게 여성의 하이힐은 아름다운 곡선과 몸매의 보정 효과로 날이 갈수록 굽이 높아졌다.
산업혁명 이후, 사회 전반의 기술력이 상승함에 따라 가늘어지기까지 했으니 지금에 와서는 굽이 위태로워 보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실로 단순한 물리학적 원리, 즉 압력은 힘을 받는 면적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에 따라 해원의 발등을 찍은 가녀린 소녀의 하이힐 굽은 이 강건한 사내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고야 말았다.
겨울에는 태동산맥에서 혹한기 훈련을, 여름에는 택주 근처의 사막에서 혹서기 훈련을 했던 사람조차 밀려오는 격통에 곧바로 벽으로 다가가 한동안 끙끙대었다.
스테파니아는 이제 아예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후우, 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조금 찍힌 거라 크게 다치진 않았을 겁니다. 하하….”
그래도 해원은 잠시 벽을 짚고는 숨을 돌리기로 했다.
서둘러 그를 뒤쫓아온 스테파니아는 계속 사과하다 해원이 정말 자신이 화도 나지 않았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을 꺼내자, 그제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과 속삭임에 갑자기 자괴감의 해일이 몰려오는지 해원에게 울먹이며 작별 인사를 건네고는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어린 소녀.
그런 모습을 어찌 책망할 수 있겠는가.
해원은 분노는커녕 안쓰러운 기분만 들었다.
‘…도제가 화를 내겠군. 가뜩이나 이탈리아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데.’
그의 옆자리가 비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른 여인들이 다가왔다.
‘암사자인지, 하이에나인지 도무지 모를 지경이구나.’
하지만 그녀들 중에서도 정말로 암사자임이 명백한 백금발의 여인이 당당하고 우아하게 다른 여인들의 흐름을 끊었다.
해원의 눈에도 이번 경쟁에서 패퇴한 자들의 얼굴에 힘줄이 돋는 것이 보였다.
대사가 서둘러 그녀를 소개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리아 안나 전하십니다.”
“발은 좀 괜찮으신지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직 얼얼하지만, 뭐 유럽 남자들도 발등에 힐이 찍히는 것이 한두 번이었겠는가?
사내 된 자로서 엄살을 계속 피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그가 무도회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결국은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분명히 그가 신경 써야 할 나라였다.
아득히 먼 직계 조상에 의해 내려온 명령.
적어도 오늘 참석한 여섯 명에서 고르라 하셨었지.
사실, 네덜란드를 꼬드기고 이 여인들의 왕실에 초청장을 보낸 것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표면상으로는 해원의 아버지인 해찬으로 알려졌겠지만, 사실은 해찬조차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은 조선과 옥저, 백제와 마야의 왕녀들이었지만.
옛날의 황제와 태자들도 마라케시나 동로마의 왕비들을 맞이했다는 것을 보면 아마 그들보다도 한참 전부터 행해져 온 관례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분께선 적어도 그와 그의 아버지에게 약간의 자유라도 주었지 않은가?
― 비록 정략결혼은 운명이라지만 나는 너에게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고를 선택권을 주겠다.
좁은 범위지만 자신이 직접 예비 신부 후보들을 마주하고, 그녀들의 성품과 외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국익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생에서도 적절할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것으로 사내들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해찬은 해원의 어머니이자 옥저의 공주였던 황후와 금슬이 좋아 무려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을 터다.
― 허나 명심하거라, 네 선택에 세상의 운명이 바뀔 것이다.
‘후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아 안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전하?”
“당연히, 그리고 부디 저를 마리안나라 불러주세요.”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마주 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피부 감촉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슨 고급 향수를 쓰는지 그녀의 몸과 머리카락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피어올랐다.
일평생 궁정의 무도를 배워온 덕인지 움직임은 평온하면서도 배려심이 넘쳤다.
해원은 방금 전까지 그의 발을 괴롭혔던 대조군 덕분인지, 그녀의 이끎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해원의 몸이 살짝은 풀린 것도 있지만, 마리아 안나의 리드는 파트너의 흠결을 완전히 덮을 수 있을 만큼 출중했기에, 비로소 두 선남선녀의 아름다운 춤이 사방을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귀부인들, 춤을 추는 커플들, 벽의 꽃들이 그들을 흘깃거리며 바라보았다.
사방에선 오로지 칭찬과 감탄의 소리만 들렸다.
본디 귀족들이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사람의 험담을 은근하게 내뱉는 족속들이 많았다.
하지만, 저 둘은 비난하기에는 격이 심하게 높았고 도리어 비난하는 자의 처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으니.
게다가 눈구멍이 닫힌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저 아름다운 광경을 헐뜯을 수 있겠는가?
“실로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대단히 역사적인 일이로군요. 카이저의 딸과, 포르피로예니티의 후손의 결합이라니.”
물론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둘이 상당히 어울린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 결합 안 했는데요!’
루이제 아말리에는 울컥했으나, 크리스티나의 다독임에 한숨을 내쉬며 입을 풀었다.
크리스티나가 속삭였다.
“이다음에는 네가 가.”
“지금 가서 비교당하느니 차라리 마지막에 갈 거야. 너는?”
사실 크리스티나는 이곳에 자리한 여섯 명의 사람들 중 가장 구혼에 대한 열의가 없어 보였다.
루이제는 그 사실을 어렴풋하게 눈치챘다.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버지의 강권에 이곳에 오긴 했지만, 난 아직도 그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은 적이 없어.”
“…응.”
그간 서로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기에 주어가 생략되었더라도 루이제는 대상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저분은 나랑, 그리고 저 자칭 카이저의 건방진 계집애보다도 너에게 더 어울려.”
루이제는 푸흡 하며 웃고는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고마워.”
“아, 한 가지. 내가 듣기로 태자께서는….”
크리스티나가 속삭였다.
“…….”
루이제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소리를 예전 안내인한테 들은 적이 있었지. 정말이야? 도리어 너무 건방지다고 싫어하시지 않을까?”
“글쎄…? 하지만 저 계집애의 모략을 이기기 위해선 그 정도 도박은 어쩔 수 없지 않겠어?”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춤이 끝났는지 마리아 안나와 해원이 서로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광경이 보였다.
해원의 눈에 깃든 웃음기는 그의 눈앞에 있는 이성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 것을 방증하는 듯했다.
여러 이유로, 남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임이 틀림없다는 것은 인정하긴 하지만….
이사벨과 캐롤라인이 서둘러 다가가다 어깨를 부딪치는 광경을 바라보던 루이제가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작가의 말]
이번 에피소드는 내일 마무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