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34화 (334/653)

프랑스 혁명(9)

대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1684년 봄.

혁명의 불길이 파리와 파리 근교의 모든 지역에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

국민군은 베르사유로 향했다.

베르사유 근왕총병대가 완강히 저항했지만, 니콜라스 카티나의 항복을 얻고 바스티유의 무기고를 약탈한 지금은 국민군도 화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숙련도는 현저히 떨어지나, 사람의 수와 사기는 국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에 베르사유는 금방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

어차피, 그 전부터 사실상 포위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될 운명이었긴 했다.

루이 13세 곁을 지키던 최후의 충신, 베르사유 근왕총병대의 수장 샤를 드 달타냥(Charles de d'Artagnan)은 목에 총알이 관통되어 장렬히 전사했다.

하지만 노신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못한 채, 루이 13세는 반쯤 혁명군에 의해 끌려 나와야만 했다.

“순순히 따라오시지 않으면, 험한 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만, 짐이 짐의 발로 갈 것이다. 더 이상! 더 이상 겁박지 말라.”

눈물을 쏟는 와중에도, 루이 13세는 주변에 호통을 치며 팔을 뿌리쳤다.

위엄을 부리려는 발악이겠지만, 정작 이곳에 온 자들은 구름 위에 살던 왕조차 별게 아니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대체 무엇이 신이 내린 왕권이라는지.”

루이 13세 내외는 결국 국민의회의 뜻에 따라 죄악의 궁인 베르사유에서 나와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향해야만 했다.

루이 13세는 아직까진 프랑스 국왕으로의 대우를 받긴 했다.

하지만 앞으로 국민의회의 국가정책을 인정한다는 칙서를 강제로 내릴 수밖에 없었으니, 루이 13세는 그야말로 분노한 파리 시민들에게 쥐어진 인질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마침내 튀렌 자작이 이끄는 부대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알자스 로렌 노동자의 난을 거의 진압하고 심지어 그 우두머리 중 하나인 마크 폰텐을 잡아서 처형하기도 했을 정도로 노동자군을 궁지로 몰아넣던 튀렌 자작은, 그 상황을 듣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파리로 가기 위해 준비했다.

파리의 소식을 들은 지방 사람들이 열차의 궤도를 사보타주했지만, 파리와 메스, 낭시의 열차 노선은 파리―마르세유 노선만큼 중요한 노선이었던 터라, 가면서 빠르게 수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시련이 국민군에게 찾아왔다.

“그는 불후의 명장입니다.”

모두 대오스트리아전쟁에서 활약한 명장들이었지만 데 콩데가 고려에게 패하며 자존심을 구긴 이후, 반대급부로 튀렌 자작의 이름값은 더욱 올라갔다.

콩데가 과감하고 저돌적인 전술로 찬란히 빛나는 장군이었다면, 튀렌은 신중하며 꼼꼼하고 몹시 정밀하여 수려히 빛나는 장군이었다.

게다가 시대가 흐르고 병참과 보급의 기술이 뛰어나지자, 튀렌은 신중함뿐만 아니라 때로는 과감한 결단력도 겸비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실로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혁명 초창기, 모두의 열의가 활화산과 같아 아무도 패배를 입에 담고 있지 않았지만, 반대로 모두의 머릿속에는 큰 불안감이 잔존했다.

“어찌 회유해 볼 수 있지 않겠소?”

지금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하나 튀렌은 예전에 위그노였던 터라, 위그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르주아들은 그를 어찌 회유하여 국민의회의 편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해 보았다.

허나, 튀렌의 충정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루이 13세가 실책이 많아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왕을 따르고 있었다.

1, 2차 프롱드의 난 때는 반역 모의를 했다 의심받은 적도 있었으나 그는 콩데처럼 주군에게 대항하기보다는 단순히 지방으로 도망가 은거했으니 그는 프랑스의 왕에 대한 충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터였다.

국민의회는 답답했다.

저 벽을 넘지 못하면, 혁명의 불길은 다시 꺼질 것이다.

허나 저 벽은 지금 당장 도저히 넘을 수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튀렌, 끔찍할 정도로 높은 벽.

누가 예정된 죽음에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우겠는가?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던 장교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피했다.

“내가 대적하겠소.”

하지만 마침내 죽음으로의 전장에 국민군을 이끌고 있던 장교 중 한 명이 자원했다.

클로드 드 빌라르(Claude de Villars).

막 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무렵, 무려 1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 때부터 데 콩데와 뤽상부르 공작, 그리고 튀렌의 휘하에서 몇 번 공을 세운 바 있는 기병 장교.

빌라르는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미하긴 하나 엄연히 귀족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제3신분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은 그들의 특성상 완전히 귀족을 배제할 순 없었다.

육군사관학교에 하루하루 밭을 일구기 바쁜 무지렁이들이 입학하겠는가.

당대의 지식인들과 장교 층은 먹고사는 것을 해결한 귀족과 부르주아들이었으니 혁명은 역시나 사회의 가장 아래층이 아니라, 중간층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옆 나라에서 먼저 일어났던 바이에른 공화국의 혁명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러했었다.

바이에른 혁명의 지도자 아드리안 양도 궁정백의 후손이었으며, 공화국의 사상가 톰마소 캄파넬라는 성직자였으니.

바이에른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아드리안 양이 이끄는 대동계 제1계와 분리되어 나온 대동계 제2계는 주변의 나라들에 퍼져나갔다.

바이에른 대동계는 애시당초 대동계의 설립자인 정여립의 뜻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바이에른 토착 선각자인 뮌처의 사상과 결부되어 공동농장과 재산권 공동화를 주장했었지.

하지만 그들과 결별한 대동계 제2계는 다만 본래 정여립이 주장했던 공화주의의 이념으로만 회귀하여 다른 곳들의 부르주아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니, 공산주의가 아닌 시민적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는 부르주아들은 물론이고, 일부 소외된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도 매력적이었다.

빌라르처럼 한미한 귀족들은 혁명을 의외로 나쁘지 않게, 즉 내심 출세할 수 있는 기회로 보기까지 했다.

지금 프랑스의 혁명은 어디까지나 농민과 노동자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 중 하나인 부르주아들에 의해 주도되니, 아직 여론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시점에서 공을 세운다면 앞으로의 전도가 유망해질 것이다.

왕이 권력을 내려놓았다.

그 권력은 국민의회가 가질 테고.

따라서 국민의회에서 좋은 자리를 꿰찬다면 그것이 프랑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전까지 그는 루이 13세 치하의 실세인 루부아 후작의 눈 밖에 나서 군부에서 더 이상 승진을 하고 있지 못했기에 권력에 대한 갈망은 과감한 선택을 내리게 했다.

―오오, 빌라르 대령!

국민의회의 사람들은 서른한 살의 젊은 빌라르 대령에게 이각모를 벗어 예의를 갖추었다.

* * *

빌라르는 국민군 주력을 모두 통솔하여 튀렌과 맞붙기 위해 메스까지의 철도 노선이 오가는 파리 외곽, 모(Meaux)로 나아갔다.

튀렌은 아마 지금쯤이면 랭스를 통해 파리로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국민의회에서는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사실 빌라르는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했다.

튀렌.

한때는 그의 상관이기도 했었다.

그런 만큼 빌라르는 그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던 것이다.

‘모르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네가 날 잘 도와주어야 한다.”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빌라르는 자신의 옆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먼 친척 동생에게 말을 꺼냈다.

외견상은 실로 볼품이 없어 보이는 스물한 살의 청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애하는 벗이자, 형인 그가 속내를 숨기며 흘러가듯 말을 했다.

하지만 청년은 빌라르의 긴장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청년은 빌라르와 달리 몹시 태연자약했다.

내뱉는 말조차 확신이 서려 있었다.

“튀렌의 시대는 지나갔어. 우리의 시대가 올 거야.”

청년은 빌라르와 마찬가지로 몰락한 귀족의 후예였다.

본래는 그의 가문 사보이아는 유럽의 상당한 명문가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북서부,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해 있던 사보이아 공국은 그 윗동네인 스위스보다 더욱 환경과 기후, 해양 접근성 등이 좋아 상당히 부유한 공국이었다.

펠릭스 5세라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끔찍한 짓을 저지른 교황을 배출해내는 악업을 행하기도 했지만, 교황을 배출할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드높았던 적이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청년 또한 좋은 환경에서 자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대통일 이후, 사보이아는 서서히 그 지위가 위협당했다.

통일 이탈리아 왕조는 사보이아 공국이 점유한 이탈리아의 영토가 진정한 통일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고, 밀라노 서쪽의 영토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유였던 니스(Nice)에 대한 야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에게 의탁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도 딱히 사보이아 공국을 내버려 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프랑스―이탈리아 두 강국 사이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이 순식간에 와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로테르담 체제로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선이 확약되기도 전, 사보이아 가문은 거듭하여 추락해서 유럽의 명문 대귀족에서 프랑스 변방의 한미한 귀족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청년이 파리로 상경하여 몰락한 가문을 부흥시켜보려고 시도했던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나 청년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대면한 루이 13세에게 처참히 퇴짜를 맞았다.

그 후로는 그의 군대에 다시 들어가지도 못했다.

단지 못생기고 볼품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당최 말이나 되는가.

찬란히 빛나는 절대왕정과 그 국왕에 대해 동경하던 청년은 그 일이 일어난 뒤에는 부르봉에 대한 거대한 적의를 품게 되었다.

심지어 프랑스의 적국인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려는 생각도 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라는 희대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는 자신을 모욕하고 버린 철 지난 구체제(Ancien Régime, 앙시엥 레짐)를 자신의 손에서 끝장내기로 다짐했다.

“그래. 우리의 시대가 올 거야.”

혁명 초, 의욕적으로 군대에 투신한 파리 청년들 덕에 국민군의 숫자는 많았다.

하지만 군율과 기강은 왕당군에 비하면 형편이 없었으니.

이제 지평선 너머에 불후의 명장 튀렌이 이끄는 정병들이 다가올 때가 되자 군의 사기조차 차츰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젊은 청년 외젠 드 사보아카리냥(Eugène de Savoie―Carignan)은 갑자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움츠려 있는 친우와 지휘관들을 고무시키고자, 그리고 병사들에게 확신을 불러일으키고자.

“혁명 만세(Vive la révolution).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 * *

좋은 외교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체로 그것은 좋은 이웃을 사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좋은 이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체로 그것은 강력하면서도 온화하고, 욕심이 많지 않으며, 내뱉는 말에 신의가 있는 나라였다.

강력하지만 난폭하고 욕심 많은 데다가, 내뱉는 말에 신의가 없었던 프랑스의 반대편에는, 고려가 존재했다.

아, 고려.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를 때면, 몹시 놀라며 경외하는 마음을 품곤 했다.

그 면적은 아직까진 정확하게 측정된 바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나라, 가장 자유로운 나라.

번영하고 번성한 나라.

심지어 거대한 화산의 폭발조차 그 앞길을 막지 못한 나라.

수상할 정도로 정치체제가 안정된 나라.

허나 그토록 강대하고 강력하면서도 약속을 지키고 현지인들을 존중하며 번국들의 존경을 받는 나라.

약간 돈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은 흠결이 아니었다.

예전,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한창 성장하고 있던 그들과 조우했을 때 좋지 않은 선택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 후, 한창 잠재력이 뿜어져 나오던 카스티야는 순식간에 그 저력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렸고 아라곤이나 포르투갈과의 통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그 뒤, 고려와 내통하던 포르투갈이 다시금 세계적 열강으로 치고 올라왔으나, 그들 또한 잘못된 선택을 내린 덕에 황금기가 무색하게 삼류 열강으로 지위가 떨어져 내렸다.

반면, 당시에는 비겁하다 욕을 먹었지만, 이성적인 선택을 내린 베네치아와 이탈리아는 어떠한가.

이탈리아는 그들의 숙원, 통일을 달성했으며,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손에 넣었고 한 번에 패권국으로 발돋움했다.

베네치아는 일개 도시국가에서 사실상 북아프리카의 지배자로 거듭났다.

본 거점과 식민지의 역량 차이가 뒤집힌 지 오래였으니 이제는 베네치아령 튀니스의 이름을 바꾸려는 여론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어떠한가.

그 강력한 열강,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독립을 이룬 것은 온전히 바다 건너에서 온 여왕의 남편 덕이었다.

영토는 작지만, 북해의 상권을 네덜란드와 양분하고 있는 에이레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프랑스의 유럽주의는 많은 유럽국가들에게 영감을 주긴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장서 나아가 저 거대한 곰과 맹수의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심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그 생각이 더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므로 좋은 외교라 함은, 곧 고려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번국에 행한 것들을 보라.

명장 이윤신의 나라라고 널리 알려진 조선은 무려 10만 명 이상의 전열보병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

그러므로 그 인구수와 국가의 역량은 유럽의 기준으로 볼 때 충분히 강대국에 속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그렇게 많은 인구는 더없이 심각한 기근으로 고통받았다 한다.

기근이야, 피할 수 없다.

묵시록의 네 기사는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들이 내리는 벌은 신벌로 여겨 엎드려 주님의 은총을 빌어야만 했다.

하지만 고려는 대신 조선에게 황상의 은혜를 베풀었다 한다.

쌀이 채워진, 실로 끝도 없는 함대를 보내 그들을 구원했다 한다.

그리고 기근의 흑기사, 검은 말의 기수는 그 광경에 진저리를 치며 말머리를 돌렸다 하고.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그것이 가능한가?

몹시 도덕적인 교리를 가진 종교를 믿고 있지만 서로의 등 뒤에 칼날을 찔러넣는 것이 일상인 나라들.

암살과 모략이 판치는 나라들.

그게 유럽이고, 유럽인들의 상식이었다.

후덕한 인의와 덕은 그들의 생각에는 도저히 상상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증언들과 실제적인 기록들은 정말로, 인세에 도래한 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두 도이칠란트계 국가가 좋은 외교를 하기 위해 선택할 길은 오직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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