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8)
고려.
창양.
창천궁.
날이 갈수록, 창천궁의 성형요새(황성) 외곽은 사실상 별처럼 생긴 거대한 공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통행이 허락된 해자 너머 넓게 펼쳐진 곳에는 시민들이 휴양할 수 있는 공원이.
해자에는 온갖 정수식물들을 심어 깨끗하게 관리되는 물이.
해자를 넘어 보안상의 이유로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에 오면, 보루와 보루 외곽의 평지에 심어진 잔디와 꽃들이 보였다.
창천궁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 일반적인 성형요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원의 면적이 넓었다.
이제는 사실상 고려의 수도에 대한 위협이 거의 없다시피하고, 설령 위협이 있더라도 성형식 요새가 이전처럼 대단한 방어시설로 평가받지는 않았기에, 황실의 사람들과 제도의 시민들은 요새의 변화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몹시 좋아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이런 대규모의 근린시설은 휴양, 관광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석탄으로 매캐해지는 공기에 한 줄기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하였고, 거대화되면서 갈수록 삭막해져 갈 수밖에 없는 도심에도 큰 미적 만족감을 선사해주었으니까.
물론, 제도와 경기에는 황실과 시민들을 위해 일정 이상의 석탄을 소모하는 시설을 금지하는 법안이 있긴 했다.
상민은 런던을 매캐한 스모그 안에 집어넣었던 대영제국이 되기는 싫었다.
땅이야 충분히 넓은데.
따라서 저기, 인구수가 적고 땅이 황량한 데다 아직도 제국에서 가장 큰 제철소로 군림하고 있는 포항 근처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생성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테다.
어차피 경포선은 잘 깔려 있겠다, 집적 경제를 위해선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 가지 약간 사소한 단점이 있다면, 황실의 경호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여러 불만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성 외곽은 아직도 넓었지만 총기의 발달로 불순분자들이 내부를 위협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으니까.
고려는 사사로운 총기 소유를 금지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교육과 평가과정을 거쳐 일정한 자격을 획득한다면, 경관들이나 군인들 말고도 사냥꾼이나 탐험가들, 심지어 개척자들도 인증된 총기를 휴대하는 것을 허락했다.
가뜩이나 오지에는 사람들의 수도 적은데, 그 수가 불어나고 있는 북려범(외래종인)이나 회색곰, 늑대 등의 유해 동물이 마을을 들쑤실 때 코만 후비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사실상 일부 해안가의 도시를 제외한 내륙의 지방들은 아직도 자연과 인간의 공공연한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허나 자격제를 실시한다고 해도, 그 총기가 범죄조직에 들어가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근위여단이나 군부에서 쓰는 최첨단의 총기는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거의 이삼백 년 전에 쓰인 노후화된 전장식 소총은 여러 지역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거나, 어둠의 경로로도 구할 수 있었다.
근위군은 총 정도도 아니라 활과 새총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집단.
하지만 해찬은 황실이 시민들과 괴리되지 말아야 한다고 누누이 주장하고 있었기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늦은 오후와 야간시간대의 공원 통행을 금지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 짹짹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감미로웠다.
상민은 다소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예전 이 공원을 만들었던 황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지만, 그들이 만든 아름다움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문득,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나아가는 발걸음이 올바른 방향인지.
비단 이 나라의 입장에서 말고도, 종합적으로 먼 미래까지 내다본다면 말이지.
‘순리. 어차피 일어나야 했다는 일인가.’
처음, 그의 분노와는 별개로 사실상 이 추심전쟁이라는 것은 응당 고려의 적법한 권리를 찾은 것이었다.
허나 막상 이리 무력을 행사한 뒤를 보니, 그 파급력은 예상보다도 더욱 컸다.
그 일이, 막연한 먼 훗날에서나 일어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며, 그게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오고 있었다.
기술발전과 사회발전은 이미 몇 세기를 앞으로 끌어당겼으며 지금의 세상은 그가 알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상민의 고뇌를 눈치챘는지 고려의 황제 중 가장 후덕한 몸을 자랑하고 있는 해찬이 정자의 안락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다 문득 은은하게 웃었다.
얼굴은 참 자애롭게 보이는데.
가끔씩 상민에게만 얄미운 소리를 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군주란 고독하지만, 고려의 군주는 적어도 상민이 있으면 대체로 이렇게 풀어지곤 했다.
“따지고 보면, 할아버님께서 저들을 저리 궁지에 몰아넣으신 것이 아닌지요.”
“…….”
“할아버님을 따라 한답시고, 아무런 쓸데없는 철갑함 수 척을 만든 저들입니다. 게다가, 저들의 포도주 산업을 박살 낸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아국이지요.”
“그것은… 아니, 황상께선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어찌 변명을 해 보려는 상민의 시도는 가로막혔다.
“소손이 전후 사정과 할아버님의 성정을 다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고얀 녀석.”
상민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후손 황제들 중, 가장 독특한 성격을 자랑하는 해찬은 넉넉한 풍채만큼이나 넉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몹시 너그러웠으며 감수성이 풍부했고 또한 도덕적이었으며 자애로웠다.
제아무리 강력하고 풍요로운 국가도 빈민계층은 생겨날 수밖에 없고, 나라님도 거지는 못 구한다지만, 당금 황제 해찬은 그 와중에도 어찌 구해보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빈민구제와 고아원 사업, 노동복지와 신민 식생활 개선에 지극히 열심이었다,
정치적 실수나 기타 여러 가지 행정에서 비롯되는 욕은 모두 시중이나 상서령이 듣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보기 좋은 일만 골라 하는 해찬은 역대 황제들 중 신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황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예당에 나가 공연을 관람할 때, 신민들에게 손 한 번 흔들어 줄 때마다, 신민들이 자지러지는 환호성을 질러대었을 정도.
또한 그 인기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적용되었다.
해찬이 묵은 곡물을 한 아름 번국에 투척할 때도, 국내 신민들은 거의 아무런 적대적 여론을 만들지 않았으며, 곡물을 받은 번국의 신민들은 지금은 아예 사당을 짓고 그를 기리고 있다.
오랜만의 전쟁에 들뜬 군부가 강경하게 나가는 것을 다독여 진정시킨 것도 그였다.
그것이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 짐은 억조창생을 모두 보살펴야 하는 중대한 책무를 지니고 있도다. 신민이 아니고 한낱 미물들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것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찬은 동식물들에 대한 보호법을 입법하도록 설득하기도 했고 고려 내에서 멸종할 뻔한 바다소(매너티, 듀공을 포함함)와 옥저 북부와 표빙해 근처의 표빙바다소(스텔러해우)를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환경보존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황제 덕에 고려는 5차 상서성 개편 때 기존의 13부에서 15부 체제로 전환하며 환경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를 걱정하지 않아요.”
사실상, 일반적인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점진적인 국가개혁도 그에 의해 계속 이루어졌었다.
게다가 지금 황제가 해찬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민은 지금 시대의 여파가 고려에는 크게 와닿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저들의 혁명이라는 것도 계속 과격한 개혁과 반동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아니던가.
다만 나폴레옹 같은 이가 나오지 않기를 계속 감시해야겠지.
그래,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 * *
합법적인 도둑들이 전리품을 다 싸 들고 무사히 센강을 빠져나간 후의 파리.
도시는 그야말로 펄펄 끓고 있었다.
사방의 술집과 광장에는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국왕 직할지의 치안을 유지하는 헌병기병대들이 지나갈 때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 빼고는, 불만 세력들의 목소리는 몹시 시끄러웠다.
술에 취해 불콰해진 하층민들이 주먹을 쥐고 흔들며 골목길에서 걸쭉한 욕설을 내뱉기도 했고.
삼각모(Tricorne, 트리코른) 대신 이제 유행하기 시작한 이각모(Bicorne, 바이콘)을 쓰고 고급스러운 술집에 모인 부르주아들도 위스키와 브랜디를 마시며 루이 13세를 비판했다.
그야말로, 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욕을 하고 있었다.
국가적 자존심이 제대로 짓밟혔다.
루이 13세는 제대로 저항조차 해 보지 않고 백기를 들었다.
제아무리 고려가 강성하다 하더라도, 3년 만에 백기를 드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백년전쟁을 보라,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항거했는지.
오스트리아 전쟁을 보라.
거의 30년이 넘도록, 휴전 기간을 고려하면 50년에 달할 동안 싸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의 왕은 제아무리 나쁜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엄연히 ‘프랑스 신민’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굴복하는 것을 택했다.
이번에도 왕실은 나서서 저 노동자들과 타협하는 시도를 하지도 않았다.
왕정은 프랑스의 이권보다는 그들 자체의 존속을 우선시한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
물론 군주정 중 그러지 않은 곳이 많겠냐마는.
파리 시민들도 바이에른 빨갱이들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저 베르사유의 주인은 그보다 적어도 열 배는 나빴다.
시민들의 동요는 계속 커졌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물었다.
그래, 외세의 채무를 모두 변제했다지.
그러면 우리들의 빚은 어찌할 텐가?
추심전쟁에서 패배하여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한 것과 별개로 채무불이행은 번복되지 않았다.
국가가 진 나머지 3억 리브르 이상은 거의 대부분이 프랑스 민간에서 꾼 돈이었다.
루이 13세는 그것을 갚겠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토록 불만이 커져가는 와중에, 루이 13세는 알자스 로렌 진압군 등 군대 운용에 들어가는 돈과, 당장 와해된 식민지 군대와 함선들을 다시금 재건하는 것에 급전이 또다시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향료제도는 고려에게, 알제는 베네치아령 튀니스에게, 파푸아는 네덜란드에게 할양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와 상아해안, 인도, 그리고 홍콩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의 자금은 정당한 곳에 쓰일 정당한 돈이 맞았다.
그리고 루이 13세도 눈치란 것이 생겼는지 이번엔 제3신분에게 손을 벌리진 않았다.
제일 만만한 자들을 탄압했던 것.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가 미워하는 유대인들이 가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다.
하지만 이는 부르주아 계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위그노 개신교도들의 트라우마를 심각하게 건드렸다.
― 제2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벌어질지 모른다!
앙리 3세가 왕위에 올라 낭트칙령을 선포하기 전, 발루아 왕조에 의해 자행되었던 이 학살의 기억이 다시금 수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사실 충분히 세속화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너무도 많이 위그노들에게 의존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이 재발하지는 않겠지만, 루이 13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위그노들은 낙관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일이 발생했다.
프랑스 주력군이 알자스 로렌에 있고, 남부와 서부의 군대는 그 유지비 때문에 해산되어 본래의 근거지로 돌아가거나 낙향하는 시기.
그 공백에, 파리의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부르봉 왕권에 대한 여러 번의 도전, 즉 프롱드의 난은 1차와 2차 모두 귀족 세력에 의해 자행되었지.
하지만 이 3차 프롱드의 난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훗날,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이라 불릴 것이니.
단순히 지방 봉기(바이에른 공화국) 수준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엄청난 대변혁을 겪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던 것이다.
* * *
처음, 성난 군중들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 몰려다녔다.
파리의 근위대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최근 뭐 차압할 것이 있나 하며 파리와 루브르, 베르사유 이곳저곳 쏘다니던 고려의 추심원들을 감시하느라 한동안 크게 고생을 해서 상당히 피곤해진 상태였다.
즉, 피로로 군이 기강이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던 것.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의 군중들이 몰려오자, 이들은 몇 번 총을 발사하며 막아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총성을 들은 군중들은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눈이 더 시뻘게져 달려들었다.
“왕정이 우리를 학살한다!”
“성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Aux armes, citoyens!)
― 대열을 갖추라!(Formez vos bataillons!)
― 전진하라, 전진하라!(Marchez, marchez!)
이들은 한 줌 근위대를 수로 눌러버리고, 다른 진압군이 증원되기 전에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이만 명가량의 시민들이 바스티유로 몰려갔다.
이제 소식을 들었는지, 바스티유에서는 대포와 총을 든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바스티유를 수비하라는 명령을 받은 가드르 프랑세즈(Gardes françaises, 프랑스 정예수비대)의 장군 니콜라스 카티나(Nicolas Catinat)는 차마 파리의 시민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20문의 대포 안에는 포도탄이 가득 있었으며, 제사총 또한 장전되어 있었다.
방어하는 총병들은 삼백 명이 넘었고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총을 내려라. 우리의 총과 대포로 파리 시민들의 피를 볼 수는 없지 않겠나?”
반역자! 분명히 보고를 들은 루이 13세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훗날엔 그가 무슨 평가를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끄는 정예수비대의 무기를 거의 피해 없이 얻은 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국민군을 결성하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해준 카티나는 성난 시민들에게조차 몹시 정중한 대우를 받긴 했지만 일단은 국민군하의 바스티유에 수감되었다.
대신 바스티유에 수감되었던 제3신분의 대표자들, 즉 가극 극장의 서약자들이 풀려났고, 이들에 의해 제헌국민의회가 결성되었고, 피에르 베일(Pierre Bayle)과 니콜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등이 프랑스 인권선언을 작성하니, 이들은 성난 군중에 불과했던 무리들에게 이념적 확신을 불어넣었다.
혁명의 불꽃은 이제 단순한 불꽃이 아니라, 거대한 불길로 나아갈 연료를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