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2)
하지만 공로가 제일이라고 대접이 제일일까.
작위도, 돈도 없는 프랑스의 인민들은 으레 그렇듯, 짐승만도 못한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었다.
이는 알자스 로렌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껑땅(Quentin)은 스무 살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정든 자신의 고향, 즉 오세르 근처의 작은 농촌 마을을 등지고 거리가 적지 않은 메스로 떠나 공장에 일거리를 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가족이 삼남인 그마저 먹여살릴 여력이 없었으니까.
당시 유럽은 농업기술이 거의 한계까지 진전되어 있었다.
저지대에서 자체적으로 보리와 클로버, 밀과 순무를 이용하여 밭을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농산물을 생산해냈던 4윤작법이 비로소 서유럽에 널리 퍼진 것.
보리와 밀, 순무는 사람이 먹었고, 클로버마저도 동물의 사료로 훌륭하게 쓰였기에 지금의 토지는 예전의 토지보다 적어도 두 배 이상은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농법은 프랑스를 비롯하여 주변의 많은 국가들에게 퍼져나갔고, 17세기의 끝자락엔 서유럽 대부분의 농가들에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허나 농토의 생산성이 온전히 좋은 결과만을 장담하지는 않았다.
부농과 빈농의 격차는 빠르게 벌려졌고, 지주계급이 순식간에 치고 올라왔으며 한 번 부를 움켜쥔 자들은 다른 이들의 토지를 구매하여 소작을 놓았다.
껑땅의 가족 또한 그렇게 하여 소작농이 되었던 것이다.
껑땅은 처음 가족에게서 반쯤 떠밀려 쫓겨날 때, 자신의 거취를 몹시 고민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 저 소작농들의 나라라는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는 무려 집단농장이라는 정책을 한다지.
듣기로는 모두가 같이 잘살 수 있는 이상의 나라라 했다.
하지만, 이미 국경지대는 삼엄히 감시되고 있었고, 넘어가는 자들은 걸리면 곧바로 총살당하거나 교수대에 걸렸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게다가 들려오는 또 다른 소문으로는, 바이에른은 사방에서 무역로가 막혀 반쯤 고사상태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철이 부족한 나머지 인민들의 집으로 가 철제기구를 공출하여 그들의 총병에게 쥐여 줄 무기를 만든다니, 그 절박함이 극에 달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혁명의 기수’이자 영원히 존경받을 아드리안 양이 암살당하여 죽은 이후에는 그 지도체계가 순식간에 분화되어 그들 내부적으로 여러 파벌들이 생기는 등 큰 혼란이 일어났다 한다.
지금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더 이상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국들은 폭탄돌리기를 하는 것마냥, 앞장서서 그들을 토벌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이제 그 처지도 위태로워질 것 같기도 하고.
당대의 일반적인 농민치고는 꽤나 눈치가 좋고 명석한 껑땅은 그렇게 메스로 떠났다.
그러나 껑땅이 먹고살기 위해 공장에 일자리를 구한 이후, 그는 예전과 같은 건강함을 서서히 잃어버렸다.
일터―공장―은 끔찍했다.
매캐한 석탄 연기는 익숙하다.
하지만 석탄매연과 그 기체가 흘러들어오는 공장과 작업장은 환기장치가 형편없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모두가 기침을 하고 심지어 먹은 것이 없는데도 구토를 하고는 했다.
공장에는 이동할 수 있게 마련된 공간 또한 비좁았고, 자연광이 들어오는 창문과 인공광을 선사하는 램프와 같은 조명은 부족하여 어두컴컴한 환경 속에서 매번 어디 날카로운 부분에 다리에 상처가 나거나 피멍이 들었다.
게다가 증기기관으로 돌아가는 기계의 안전성은 너무나도 허술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매 순간이 위험천만한 환경이었으며, 노동자들은 언제고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사라지는 끔찍한 악몽을 꿔야만 했다.
껑땅은 버티고 버텨, 아직 사지가 멀쩡하지만 그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자신조차 몰랐다.
그리고 그 또한 잘 때마다 악몽을 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악몽.
노동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친구였다.
자는 여건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악몽이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자들은 숙소의 숙박비를 지불할 능력이 되지 않아 반쯤은 관과 같은 나무상자에 들어가 잠을 자야 했고 그 나무상자마저도 비싸다 여기는 자들은 대충 줄을 걸어 놓은 곳에 빨래처럼 널려 휴식을 취해야 했다.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이들은 두 눈이 퀭한 상태로 다시금 작업장에 출근해야 했고, 졸음 가득한 정신은 가뜩이나 위험한 환경에서의 사고 확률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그렇게,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자들은 생산력이 감소되었다는 이유로 거리로 쫓겨나게 되었고, 이리저리 거지와 부랑자가 되어 굶어 죽거나 도적떼가 되거나, 혹은 자살이 금기시되는 기독교 사회에서조차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을 선택했다.
껑땅과 같이 악착같이 버틴 자들에게는 보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보상이 그만큼의 노동과 같은 가치를 지니냐 물어본다면, 동전을 받아든 이들은 하나같이 질문자를 노려볼 테다.
대체로 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하루의 임금으로 4수(sou) 정도를 받았다.
하루에 무려 14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의 대가는 이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비숙련공 혹은 어린 노동자나, 여성 노동자는 2수 6드니에 정도로 평균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정말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의 숙련공이나 10수에서 20수(1리브르) 정도를 받았으니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하루하루의 삶은 투쟁의 연속과도 같았다.
4수로 하루의 식비와 주거비, 의복비 등을 계산하고 남는 돈이 대체 얼마가 있을까.
딱딱하여 씹기도 힘든 곰팡이 빵과 감자, 순무 등으로 끼니를 때우고 끔찍한 환경 속에서 잠을 자면 다음 날 새벽 일어나기가 무섭게 몸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껑땅은 하루의 무게에 짓눌려 삶의 희망이라는 것을 반쯤 포기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합당합니까?”
“…모르겠습니다.”
“형제여, 바다 건너편의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이런 대우를 받고 있지 않아요. 우리의 삶이 이렇게 힘든 이유는,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이용하여 호의호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장 근처의 허름한 술집.
주머니가 더없이 가벼운 자들을 노리는지 비싼 술 대신 싸구려 럼과 진이 가득한 이 술집은 퀘퀘한 모습만큼이나 퀘퀘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평소라면 껑땅은 낮에 온갖 소음에 시달린 탓에 저녁만큼은 혼자 고요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귀찮은 말동무가 생겼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과 비슷한 프랑스 노동자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껑땅은 그가 저 옆동네―바이에른―에서 넘어온 자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딱히 숨기려고도 않는 것 같기도 했고.
로테르담 체제는 몰라도, 껑땅은 이 남독일인들이 주변국들에게 혁명을 확대시키기 위해 온갖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 예전 같았으면 그는 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자에게 경계심부터 크게 드러내었을 것이다.
이 대동주의 빨갱이라고.
빨간색은 본래부터 염료 자체가 귀해 귀족의 색이었다.
로마시절부터 붉은색은 제국의 상징이었고, 그 이후에는 귀족과 추기경의 색깔이 되었다.
동양 또한 붉은색을 고관대작―당상관―의 의복색으로 정하기도 하였고.
남려 코치닐 산업 이후에는 고려 적포군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드리안 양은 이 붉은색을 토마스 뮌쳐부터 시작된 농민들의 저항과 희생을 의미하는 피의 색으로 규정했고, 아무런 무늬가 없거나 낫과 곡괭이가 그려진 붉은 깃발을 이리저리 휘둘러대며 사방 전제왕정들의 군대를 막아내었으니 그 이후부터 왕정들은 이놈의 빨간색을 어딘가 좀 짜증 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다른 나라들은 너무나 앞서가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노동환경과 농업환경을 만든 고려를 ‘원조 빨갱이’라 여기고 있었으니 적절하기도 했고.
고려가 아니었다면, 아마 바이에른 공화국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을 것이었으니 유럽국가들의 억하심정은 공감가는 바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를 숭상하고 심지어 공화정을 주장하는 대동계에겐 주적과 다름없는 황실까지 존재하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오해였지만.
허나 이미 이 년간의 공장 생활은 껑땅을 많이 바꾸어 놓은 모양.
이 빨갱이가 내뱉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공감이 갔다.
“형제여, 파리의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
“왕이 자신의 정부에게 무려 백만 리브르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다더군요.”
아득한 숫자였다.
오백만 명의 하루 임금.
기껏 보석 장신구 하나로 그 정도의 돈을 쓰다니.
베르사유에 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꺼냈던 첫 마디처럼, 껑땅 또한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쳤군.”
“그래요, 미쳤습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요.”
그러나 그 사내는 거기서 더 나아가진 않았다.
망치를 들고 무언가를 깨부수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그런 불만 가득한 소리들을 나열했을 뿐.
선택은 마치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처럼.
* * *
껑땅은 그와 꽤 잘 어울렸던 것 같았다.
주변인들에게 그를 소개시키기도 했으며, 같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위생증을 제시하라!”
14세기,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흑사병(페스트)은 거의 삼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악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전염기전이라는 것이 많이 알려져 예방정책이 어느 정도 효력을 가지게 되었고, 고려발 선진적인 의학의 전래로 인해 유럽인들조차도 개인 위생을 과거보다는 조금 더 신경 쓰게 되어 흑사병은 예전과 같은 엄청난 악명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흑사병은 흑사병이었다.
게다가 유럽의 국왕들은 항상 인구통제를 염원하고 있었다.
고려를 만나기 전부터, 그리고 만난 후부터 모두.
따라서 고려의 신원부제도는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정책을 합리화하는 명분과, 명확한 수단을 제시해주는 이정표와 같았다.
비록 고려의 신원부조차도 전근대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어 전보가 많이 깔리기 전까지 위조니 분실이니, 기록 누락이니 하는 사건이 꽤나 많이 발생했다지만 이와 같은 체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행정적인 분야에서 차원이 달랐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카스티야, 포르투갈 같은 주요한 나라들은 비록 시간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페스트 감염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위생증을 신분증 대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페스트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것은 당연했고.
그래서, 그 빨갱이 사내의 위생증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날카로운 눈을 한 프랑스군 장교 하나가 술집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위생증 검사를 하다, 그의 위생증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더니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분명히 그 사내는 잘 대답했던 것 같은데, 프랑스 장교는 잔인하게 웃으며 그를 끌어내었지.
“네놈은 도이칠란트 놈, 그것도 바이에른 놈이다. 내 장담할 수 있지.”
프랑스 민족주의의 태동은 잉글랜드와의 백년 전쟁부터라지만 철도가 깔리고 국민개병제가 논의되며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비롯한 표준어 작업이 시작된 지금은 널리,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대외적으로 자신들을 독일인들과 그리고 이탈리아인들, 아라곤인들과 카스티야인들, 그리고 가장 비슷하다는 네덜란드인들과도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다.
저 장교가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억양이나 말투, 말버릇으로 한눈에 바이에른 출신을 알아볼 수 있는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같은 날, 같은 테이블에 있었고 평소에도 그와 가깝게 지냈다던 껑땅마저도 그 사건에 휘말릴 뻔했지만 껑땅은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공장에서 숙련공의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 그를 고용한 자본가―사장―의 비호를 받아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사장은 그의 일급을 기존의 16수에서 10수로 고정해버렸지만.
뭐 목숨을 건진 값으로는 싸지 않겠는가.
어쨌든, 껑땅은 엊그제만 하더라도 같이 진을 마시던 사내가 교수대에 걸려 비참하게 오줌을 뿌려대며 죽는 광경을 바라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어차피 잊어버릴 것이 분명한데.
혁명은 그의 사소한 죽음과는 연관이 없었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바이에른의 경우는 특별했다.
먼저 뿌려졌던 선각자의 피.
주변국들의 무관심.
혜성처럼 등장한 지도자.
프랑스의 실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라도 없었으면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국가였으니.
이미 한 번 크게 놀란 왕정들은 이제 이 잠재적 불순분자들을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으니 그 대단한 혁명이라는 것이 프랑스까지 불태울 수 있을까.
* * *
하지만 프랑스의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지는 자들은 비단 사회의 밑바닥 노동자들만은 아니었다.
속칭 ‘성안 사람(부르주아)’의 시민 계급은 발달된 농업기술과 작은 공장 등의 소유로 명예는 없지만 재력은 있는 계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자들은 계급을 구매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 또한 혈통귀족과 법복귀족, 대검귀족에 속하진 않았다.
삼부회의 제3신분을 차지하는 이들은 평민 중에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자들.
하나하나는 별 볼 일 없지만, 자유민의 숫자가 원체 많았던 터라 그 수가 모이면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위그노들을 인정한 뒤에는 그 숫자는 더욱 불어났고.
물론 전통적인 고정관념은 아직 존재하지만, 이들 또한 고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아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저 나라는 신분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가 있는 것이야!”
건국초부터 지금까지 일부 연방주에 파견된 군왕을 제외한다면 고려는 세습제 신분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나라였다.
건국초엔 결단력과 냉정함도 다소 부족했던데다가 오랜 인연으로 동고동락해왔던 공신세력을 모질게 대하지 못했던 태조 해민과 달리, 그 아들 태종 해진은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을 그대로 적용하여 공신들을 두들겨 패 아예 세습제 작위를 박살내었다.
그 덕에 지금까지도 세습 귀족이니, 뭐니 하는 특권세력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분명히 그 자리를 정치명문가들과 상업자본가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능력에 따라 성취하는 법복지배층과 상업지배층이라니, 실로 꿈과 같은 나라가 아닌가?”
고귀한 푸른 피가 지배하며 다스리지 않더라도, 그들의 통치는 훌륭했고 나라에는 금은보화가 끊이지 않았다.
고려가 그네들의 땅에 다소 자원이 부족한지 남의 나라의 금은광에 환장을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지금 고려의 성세는 온전히 외국에서 금은을 가져오는 중상주의적 세력들이 대활약에 기원하는 것이 틀림없지 않겠나.
프랑스의 부르주아들 또한 그런 대접을 받길 원했다.
아직까지 시대를 모르고 으스대기만 하는 철 지난 혈통귀족들을 버리고, 프롱드의 난으로 두 번이나 칼을 들이댄 법복귀족들과 대검귀족들을 버리고, 우리를 중용하라고.
이런 상황에서 때마침, 루이 13세가 삼부회를 소집했던 것이다.
[작가의 말]
1리브르 = 20수 = 240드니에의 환율입니다.